기억하지 않으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또 당한다
중국이 자기 국민 27명이 원인 미상의 폐렴에 걸렸다고 WHO에 보고한 게 작년 12월 31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검역 단계에서 한 사람의 확진자를 발견하게 된 게 올해 1월 20일이었습니다. 그런데 2월 18일 소위 31번 확진자가 생기면서 사태는 긴박하게 흘러갔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이나 되는 확진자들이 속출하면서 우리나라에는 공포감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3월 12일에 비로소 WHO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Pandemic(전 세계 유행병)으로 선포했지요.
이런 와중에 너무나도 감사한 일은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인 유행병이 창궐하는 중에 선방했다는 점입니다. 그야말로 일사불란하게 광범위하게 감염 의심자들을 검사하고, 확진자들의 동선을 파악하여 그들과 접촉한 사람들을 죄다 검사함으로써 추가 확진자를 가려내어 격리 수용해서 치료하는 과정이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습니다. 날마다 이 사태의 진전 상황을 질병관리본부에서 발표하고 대국민 방역 지침을 전달하면 국민들이 함께 더불어 그 지침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더 이상의 확산을 막는 데 협조했습니다. 긴급한 사항이 아니라면 외출을 자제하고 외출 시 마스크 착용은 기본이며 외출했다 귀가하면 손 씻기를 일상화하면서 자기 격리를 실천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통합되어 현재의 진정 상태를 마련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런 덕일까요? 전 세계 선진국이라는 나라 여러 곳이 자국민들을 자기 집에서만 지내도록 감금('lockdown'의 의미)하는 마당에, 우리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격리하면서도 필요한 용무를 자유롭게 보는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31번 확진자로 인해 큰 홍역을 겪은 대구 지역을 봉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도, 정부는 애초에 확립했던 기조를 따라 의심 환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사와 철저한 동선 추적, 확진자 격리 및 치료, 투명한 방역 정보 공개에 초점을 맞추면서 전국민적인 동참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아직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의 끝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전국적인 방역이 큰 효과를 보아 날로 확진자 수는 줄고 완치자 수는 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날에 확진자가 생긴 미국과는 천양지차가 나는 상황입니다. 4월 13일 현재 미국(한국)의 확진자 수는 560,433명(한국=10,537명), 전날 대비 증가된 확진자 수는 25,939명(한국: 25명)이었고 사망자 수는 22,115명(한국=217명)입니다. 지난 9일에 온라인 개학을 한 것이나 내일(15일)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는 것도 전 세계 다른 나라 국민들의 눈에는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시범적으로 개학을 한 국가는 있지만 일정이 정해진 선거나 국민투표를 예정대로 실시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진전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전 세계 많은 나라에게 지침이 되고 영감을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광범위한 진단과 추적과 격리가 신속하게 진행되는 것도 놀라워하지만, 기본적으로 정확도가 95%나 되는 진단키트를 어떻게 개발해서 대규모로 빠르게 세팅해서 활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도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지요. 더구나 이번 사태에서 우리나라가 무엇보다 평가받아야 할 부분은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한 방역 성공”이라고 언급한 정의길 기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강제적인 봉쇄나 이동의 제한 없이 감염자를 조사하고, 추적하며 통제하는 과정을 국민들의 합의를 통해 진행해왔기 때문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진행 중인 생필품 사재기도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차분하게 생활해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깨닫지 못한 새에 전 세계가 주목할 만큼 이번 전염병 사태를 탁월하게 극복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전국민의료보험을 비롯한 선진화된 의료체계를 갖추고, 과거의 선례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새로운 긴급 사태를 지혜롭고도 차분하게 대비한 덕이 아닐까 합니다. 먼저 보편적인 국민의료보험제도가 없었다면 어떠한 방역정책도 명실상부한 효력을 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의료보험제도가 전 국민에게 확대되기까지 각 단계별로 여러 가지 사회적 진통이 있었던 것을 우리 모두 기억합니다. 결정적으로 건강보험 적용 범위를 전 국민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된 것을 들자면, 1987년 6월 항쟁과 7-9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1989년에 이루어진 불완전한 전국민의료보험 제도 실행 이후 이어진 10년 동안 ‘의료보험 연대회의’가 주도한 시민운동이었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 2000년이 되자 온전한 형태의 전 국민 건강보험이 성사되었지요.
전 국민을 포괄하는 건강보험이라는 게 사회보장제도에서 얼마나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인지는, 현재 이번 사태로 고전 중인 미국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의료보험제도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나라입니다. 전 국민의 8.5%나 되는 2,800만 명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번 사태의 희생자가 될 공산이 큽니다. 얼마 전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미국에서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한 여자 환자의 경우, 검사비용이 907달러(=110만 원)였고 총 진료비가 34,727달러(=4,280만 원)였으므로, 무려 4,400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 치료비를 지불하려면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그녀가 한탄했다지요. 반면에 우리나라 환자 한 사람은 인제대학교 해운대백병원에서 19일간 입원했는데 치료비 총액이 970만 원이었으나, 그가 실제로 지불한 금액은 44,150원에 불과했습니다.
전국민의료보험 다음으로 이번 사태 극복에 크게 기여한 것은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운 교훈이라고 봅니다. 가깝게는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에서 범한 실수를 복기하면서 정부의 지원 체계와 의료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김우재 씨가 언급한 대로입니다.
“메르스 사태 직후 질병관리본부는 큰 변화를 겪는다. 질병관리본부장은 차관급으로 승격됐고, 검역체계가 정비되고 민관의 협업 창구가 마련됐다. 코로나 19에서 민간기관이 진단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는, 질본이 감염병분석센터를 신설하고 진단시약에 대한 긴급사용승인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그 난리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내과 전문의를 질병관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는 정은경 본부장을 발탁한다. 메르스 사태에서 징계를 받았지만 감염병에 대한 전문성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 선택의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과거의 사태를 통해 교훈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상기하면서 이번 선거를 바라봅니다. 조금도 변함없이 온갖 막말과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면서 유세하는 지난 20대 국회의원들과 그 아류인 새로운 입후보자들은, 아마도 국민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실의에 빠져 있어 아무 생각도 없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교언영색으로 치장한 그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몰염치의 한계는 과연 어디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각 당과 각 후보자의 과거를 살펴보지 않으면 우리는 또 4년간 속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과거를 현재화시켜 반추해보지 않고, 현재 그들의 실상을 분석해보지 않고, 그들의 미래를 현재화시켜 성찰해보지 않은 결과, 20대 국회와 같은 '식물 국회'(부지런한 식물이 무슨 죄인가요?), '무능 국회'를 맛보아야 했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이 옳습니다.
“미래나 과거가 존재한다, 혹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가지 시간이 있다는 말은 합당하지 않다. 단, 세 가지 시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 영혼의 3화음 (...) 회상 (...) 관찰 (...) 기대.” (“고백록”)
과거나 미래는 죄다 현재와 맥이 닿아 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의 일들은 회상하면서 현재와의 연관성을 궁구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미래의 일들도 기대감과 소망을 통해 현재의 삶에 동력을 제공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살아날 것입니다. 2016년부터 시작된 20대 국회가, 그 2년 전인 2014년의 그 참혹한 세월호 사태를 겪으면서도 우리나라 국민들이 제대로 회상하지 않고 관찰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은 채 자신들의 대표를 뽑은 결과였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2014년 세월호 사태 당시 무능과 몰염치의 진면목을 보여준 당시 정부는 그 이듬해 발생한 메르스 사태 당시에도 골든 타임을 허비하면서 환자의 동선을 놓치고 그 정보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늘 하던 대로 사실을 은폐하고 허위 사실 유포한 자를 엄벌한다며 국민들을 겁박하며 메르스 발병 병원명(삼성서울병원)도 밝히지 않음으로써 국민들을 당혹하게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컨트롤 타워가 부재하고 감염병 위기가 만나면 어떤 파국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였지요. 그 이듬해에 실시된 선거에서 우리 국민들이 뽑은 국회의원들이 바로 20대 국회였습니다.
물론 거대 양당이 국회의원 의석 대부분을 나누어가지는 선거 제도가 작동되는 상황 속에서 최선의, 양질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게 한계가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상, 관찰, 기대”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화두에 근거해 보면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국회에는 깨끗한 부자들이라고 확인된 바도 없는데(도리어 그 반대인 경우가 왕왕 있었음) 왜 그렇게 부자인 국회의원들이 많을까요? 꼰대를 싫어한다면서도 왜 나이 많은 꼰대 국회의원들이 그토록 많을까요? 남녀평등을 강조하면서도 왜 남자 국회의원들이 그토록 많을까요? 법조계가 썩었다고 말하면서도 왜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들이 그토록 많을까요? 누가 부자를, 나이 많은 꼰대를, 남자를, 법조인을 뽑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왜 가난한 사람들이, 젊은이들이, 여자들이, 비법조인들이 그런 수준 미달의 인물들을 선출해놓고 매번 후회하는 걸까요? 해외에서 지낸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국회의원 선거를 해 볼 기회가 없던 제가 늘 품고 있던 가장 큰 의문 중 한 가지입니다. 모쪼록 이번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청빈하고 유능한 국회의원, 젊고 창의적인 국회의원, 진취적인 여성 국회의원, 다양한 사회 계층과 직능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대거 진출하는 미증유의 역사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직도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 사태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선거일 이튿날 그 비극적인 사태 발생 6주년을 맞이하게 되지만, 누가 지적한 대로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달라져야 합니다. 운명을 달리한 304명, 특히 그중 250명의 단원고 학생들의 희생이 그 이후의 세대에 지속적인 안전과 평화를 안겨주는 장대한 열매로 맺혀야 합니다. 꽃 봉오리 한 번 피워보지도 못한 채 산화한 그 학생들은 기성세대들이 저지른 무책임한 선택의 피해자였습니다. 국민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는 무능하지만 갖가지 이익을 챙기는 데는 부지런한 부패한 정치인들을 리더로 선출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 그들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나 우리 자녀 세대도 언젠가는 또 당할 것입니다. "저주 시편" 기자의 심정으로, “그만하면 됐다!”라는 취지를 띤 막말로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가슴에 못 박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판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세월호 막말로 유명한 어느 정치인의 입에서 “오, 하나님!”이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비명에 간 자녀를 가슴에 묻은 그 가족들을 향해 “이제는 됐다”라며 입에 담기 힘든 막말을 안길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이가 과연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그 끝 모를 아픔에 동참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동감할 수도 없고 동감하기조차 거부하는 이들을 어떻게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 희생자 부모의 자리에 자기를 대입해 보면 명백한 일인데도 그분들의 태도가 과하다니요. “불구대천”(不俱戴天)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가슴에 깊이 다가오는 때가 또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도리어 저를 “비인간”으로 여긴다면 달게 그 비인간의 자리에 서겠습니다. 동시에 그 어린 생명들이 자기들의 몸을 드려 제게 일러 준 값비싼 교훈을 잊지 않겠습니다.
“역병이나 자연재해로 인간은 생활이나 목숨을 빼앗기지만, 실은 인간은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익이나 권력에 홀린 인간들에 의해. 그리고 사고 정지 상태로 그 사태를 방관하는 인간들에 의해.”(서경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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