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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인문학이 만나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12. 10.

(선교소식지인 "선교대구"에 게재된 제 글 한 편을 소개합니다.)

선교와 인문학이 만나다

-들어가는 말-

선교 활동에 있어 인문학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존 스토트가 지적한 성경의 “이중 저작”(double authorship) 상황만 돌아보아도 이 점이 명백해진다. 즉 성경은 우선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사야 1:20)인 동시에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내용이다(사도행전 3:18, 21). 이런 성경에 접근하는 우리의 자세도 이중적(a double approach)이어야 한다. 유일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경외하는 자세와 겸손한 태도로 대해야 하고, 지성을 활용하여 생각하면서 그 말씀의 인문학적 특성에 주목하면서 읽어야 한다. 이런 이중적 접근 방식은 불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필수적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기 계시의 도구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신 점도 주목 거리다. 이 점을 고려해 본다면, 비록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는 점에서 모든 다른 책들과 다르긴 하지만, “인간의 말”(the words of men)이라는 점에서 모든 다른 책들과 다르지 않다. 즉 성경의 목적이 과학적(scientific)이거나 문학적(literary)이거나 철학적(philosophical)인 것은 아니지만, 성경은 문학(literature)인 것이다(릴랜드 라이컨). 그러므로 성경이 성령의 영감(inspiration)을 통해서 기록된 것이기에 공부할 때는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을 겸허하게 구해야 하지만, 다른 문학을 연구하듯이 성경 본문의 어휘, 문법 및 구문의 특성뿐 아니라 문학적 의미 해석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결국 성경을 심각하게 연구하려는 사람에게는 언어적인 지식과 문학적인 소양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이 점을 심각하게 깨달은 이들 중에 바로 미국 하버드대학교를 설립한 청교도들이 있다(김도인 목사). 1636년에 설립된 이 대학교는 원래 1620년부터 미국에 도착한 그들이 목회자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그들의 수가 만 명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대학교를 세워 목회자를 배출하려고 한 것은, “현재의 목사들이 죽고 나면 누가 교회 설교를 할 것인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대학의 학위 취득 과정이 어떠했을까? 첫째 단계가 교양학 학사, 둘째 단계는 교양학 석사이었고, 비로소 셋째 단계에 가서야 신학 학사 과정이 시작되어 넷째 단계인 신학 박사 순서로 이어졌다. 비록 교양학 석사 과정이 목회자가 되기 위한 필수 단계는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그 석사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모리모토 안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하는 이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당시의 청교도들은 깊이 깨달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성경 이해와 그 적용에 필수적인 인문학이 왜 기독교계 혹은 선교계에서 홀대받아 왔는가를 먼저 살펴본 후에 선교에 인문학을 접목하는 과정과 연관된 실제적인 제안 사항들을 짚어 보고자 한다.

 

-인문학이 천대받거나 적대시된 이유-

단적인 이유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을 ‘인본주의’(humanism)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오해인지 한번 살펴보자. “Merriam-Webster 사전”은 인문학(humanities)을 이렇게 정의한다. “자연적인 과정(물리학이나 화학에서와 같이)과 사회적인 관계들(인류학이나 경제학에서와 같이)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본질과 관심사(human constructs and concerns)를 조사하는 학문 분야(철학, 예술 및 언어학).” 즉 인문학은 자연적 과정을 다루는 순수과학과 사회적 관계를 연구하는 사회과학과는 대조적으로, 사변적이고 비판적이며 역사적인 성격을 띤 방식으로 인간의 본질과 관심사에 천착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에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Of all things man is the measure.)라는 ‘인본주의’적인 개념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결국 문제는 인문학이라는 단어에 있는 게 아니라 ‘인본주의’라는 용어에 있는 것이다.

 

인본주의로 많이 번역되는 ‘휴머니즘’(humanism)이란 단어는 철학과 문학에서 사용되는 의미가 각각 다르다. 철학 사조상으로 휴머니즘이란 “교회의 권위와 대비하여 자율적인 인간 이성을 강조하는 입장”으로서, “인간의 능력이나 가치보다 더 우월한 어떠한 능력이나 도덕 가치도 부인”한다("The Free Dictionary"). 이 단어 앞에 주로 ‘세속적’(secular)이란 단어와 ‘과학적’ (scientific)이란 단어가 따라붙는 이유다. 18세기 계몽주의(the eighteenth century Enlightenment) 시대에 들어 와서 과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종교의 권위와 자율적 인간성에 기반을 둔 세속성 사이에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대로부터 근대(modern times)가 시작되어 이런 의미의 휴머니즘, 즉 ‘인본주의’가 철학 사조를 장악하게 되었다(로널드 웰즈). 한편 문학사조상으로 ‘휴머니즘’(Humanism-주로 대문자 사용)이란 고전 연구에 근거한 르네상스 문화 운동으로서, ‘인본주의’라기보다는 ‘인문주의’로 번역하는 게 타당하다, “탁월성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적인 잠재력을 중시하고 고전적인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학, 예술 및 문명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를 장려한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적이고도 지적인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휴머니즘 앞에 주로 ‘고전적’(classical)이라는 단어가 붙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고전주의의 부활’(rebirth of classicism)을 가리켰으므로, 그 시대에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연구하여 모방하거나 개인을 자유롭게 해방하려는 분위기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시대 이전의 중세에는 기독교와 인문학 사이에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사실상 당시에도 이 둘 사이는 이미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스 시대 문헌들이 중세 시대에도 이미 전수되어, 라틴어로 번역되고, 필사되고, 토의되던 중에, ‘12세기의 르네상스’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위대한 번역 운동의 시기로서, 특히 라틴 기독교인들이 회교 세계로부터 온 아랍어 문헌들을 만난 스페인에서 그 운동이 활짝 꽃을 피워 ‘중세 전성기’ (1050-1300년경)를 견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실상을 왜곡하여 중세를 암흑기로, 르네상스 시대를 이성과 빛으로 가득 찬 시대로 선전한 것이 바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장 베르동 교수). 이런 역사에 주목해 본다면, 한병수 교수가 언급한 것이 충분히 납득이 된다. “실제로 기독교는 인문학을 중요하게 여기며, 인문학은 기독교와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조화된다. 기독교와 인문학의 조화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로 소급된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과 ‘인본주의’(humanism)는 양립할 수 없지만, 기독교 신앙과 ‘인문주의’(Humanism) 혹은 인문학은 얼마든지 양립할 뿐 아니라 상호보완 해 줄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선교에 인문학을 접목하기: 실제적인 제안 사항들-

(1) 인문학과의 대화를 통해 선교가 성숙되기를 기대하자. 우선 인문학을 통해 이웃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인문학은 세상 사람들의 사고와 세계관을 읽을 수 있는 최적화된 자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로 교정해 주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피조 세계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면모들을 열어 밝히는 자원이다.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이웃 사랑의 두 가지 장애물이 무지와 이기심이라는 점에 주목하라(수잔 갤러거와 로저 런딘). 프란츠 카프카의 말을 활용하자면, 인문학은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무지와 이기심을 깨뜨려버리는 도끼’다. 인문학을 통해 배양되는, 진정성 어린 섬세함을 결여한 안목과 언어로는 자신도, 타인도, 사회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다음으로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도 베뢰아 사람들처럼 트인 마음으로 읽는 게(사도행전 17:11) 긴요하다. 성경을 읽을 때 베뢰아 사람들처럼 신사적인 마음으로 읽자는 말은, 열린 마음으로 성경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순종하자는 의미다. 그 과정 중에 자신의 변화의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태도가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도 적용되어야 한다. 레슬리 뉴비긴에게서 한 수 배우자. “우리가 (종교 간의) 대화에 참여할 때는 성령께서 대화에 임하는 양방을 모두 예수님께 회심시킴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주권적으로 이 대화를 이용하실 것을 믿고 기대하며 그렇게 한다.” 즉 우리가 타종교인과 대화할 때 성령께서 그것을 이용하여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도록 회심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기대하듯이, 그 결과로 우리 안에도 심오한 변화를 일으키실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날 때 일어난 변화가 바로 그 실례가 된다고 지적한다. 이방인 군인인 고넬료만 변화된 게 아니라, 사도인 베드로에게도 근본적인 회심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타종교인과의 대화의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런 변혁이 인문학과의 대화의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기대할 수 있다.

 

사실상 기독교 역사는 기독교와 각 시대적 사상이나 문화가 서로 만나 기독교의 시대적 해석이 적실성이 있는지를 늘 질문하고 지속적으로 재고해 온 과정이었다. 기독교의 기반을 다진 교부들이나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을 보라. 그들이 신약성경을 정경화하고 교회제도를 확립하며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정립한 것은 ‘플라톤’주의를 수용한 결과였다. 중세 가톨릭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도 마찬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인 결과였던 것이다.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과 직면하게 되었을 때, 기독교는 그것에 위압당하지도 않았지만 그것을 물리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것을 기독교와 통합하여 새로운 신학을 창조해 내었던 것이다. ‘오직 성서로’(sola scriptura)를 외친 칼뱅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당대의 문화와 사정에 걸맞은 방식으로 허락되는 것이기에,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17세기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교인들보다 먼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용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게 바로 칼뱅의 이런 가르침이었다(김용규 작가).

 

(2) 성경을 해석할 때 인문학적 독해 방식을 활용하자. 서두에서 밝힌 대로 성경의 ‘이중 저작’ 상황은 성경에 대한 ‘이중적 접근’의 필요성을 전제한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서면서도, 인문학적인 방식을 활용하여 말씀에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문학적 독해의 기본으로서 장르 특성 이해와 문맥 이해라는 측면에 주목하는 게 중요하다(제임스 사이어).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잠 26:4-5)라는 말씀이 정경에 포함된 것은, 잠언이라는 장르의 성격상 두 잠언 모두 그 의도에 따라 이해되는 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2)라는 말씀 속에서, 문맥상 ‘’가 디모데라는 전도자(4:5-신약에 세 번만 등장하는 희귀 단어)이자 목회자라는 점을 무시할 때 빚어지는 복음전도 행태의 혼란상은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정독 시 활용되는, 행간 읽기, 가정과 전제의 재구성 및 비판적 독해 방식을 활용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김영민 교수).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가 세리장이요 부자인데도 키가 작아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려고 시도하는 장면에서 그가 그 지역민들에게 왕따당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는 게 행간 읽기의 실례다(한성열 교수). 무려 42장이나 되는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이 한 말을 권면이나 권계의 말로 인용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42:7에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전제 때문이다. “너와 너의 두 친구를 생각하면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 없구나. 너희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공동번역) 그리고 마태복음 28:16-20을 ‘대위임령’이 아닌 ‘지상명령’으로 번역하여 지금까지 사용하는 것은 비판받아야 하고, 그 내용이 복음전도, 제자 훈련 및 교회 개척이라고만 해석하려는 수구적 경향도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복음전도와 가르침’이라는 요소들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긍휼 사역과 정의 구현’이라는 측면과 ‘생태학적 관심과 행동’까지도 아우르는 게 현 시대에 적실한 대위임령 해석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크리스토퍼 라이트) 성경상의 하늘과 땅에 대한 편협한 해석도 비판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인문학상의 용어인 ‘평행 세계’(parallel world)를 활용한다면, 하늘과 땅이란 개념은 서로 다른 종류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 두 공간이 각각 뚜렷하게 구분되는 정체성과 역할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맞물려 있고(interlock) 교차한다(intersect).”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톰 라이트).

 

(3) 섬세한 인식이나 섬세한 구별을 시도하자. 김영민 교수에 의하면, 공부를 계속하면 ‘섬세한 인식’이나 ‘섬세한 구별’이 생긴다고 한다. 개인적인 삶의 의미를 포착하는 일과 타인을 깊이 이해하는 일에 활용될 수 있는 ‘섬세한 언어’와 구별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즉 섬세한 언어를 잘 활용한다면, 우리 자신이 체험하는 우주가 확장될 수 있다. 선교 활동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섬세한 접근이 요구되는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개종시키기’(proselytism)와 ‘복음전도’(evangelism) 간에 섬세한 구별이 절실하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복음전도하는 것이 개종시키는 것과 무슨 차이가 날까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난 세월 동안 진행된 여러 선교 대회에서 이 두 가지는 섬세하게 구분되었다. 존 스토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개종시키기’에 해당된다. “우리의 동기(motives)가 비열할 때(즉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우리의 영광에 있을 때), 우리의 방식(methods)이 부적절할 때(즉 우리가 어떤 종류의 신체적인 강압이나 도덕적인 제한이나 심리적인 압박에 의존할 때) 및 우리의 메시지(message)가 바람직하지 않을 때(즉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의도적으로 부정확하게 말할 때)”이다(“Common Witness and Proselytism"). 반면에 ‘복음전도’는 “공개적이고 정직하게 복음을 선언하여 듣는 이들이 그것에 대해 전적으로 자유롭게 결심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민감하고자 하고 그들에게 개심을 강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한다.”(“Manila Manifesto”)

 

타종교에 대한 접근 방식 간에 섬세한 구분 또한 중차대한 문제다. 보편주의나 배타주의라는 양자의 구도에서 선택하는 대신에 중도의 길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주의는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이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배타주의는 오직 확실하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고백하는 자들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중도적 입장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지만, 이것이 단지 이 세상에서 사람이 복음을 명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보편주의가 역사적인 기독교 내지는 복음주의 내에서 자리 잡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배타주의 지지자가 중도적 입장 지지자를 보편주의로 모는 것은 섬세한 인식을 결여한 태도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구세주이시고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근거에 의해서만, 그리고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임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자비를 부르짖고 구원을 받기 위해 정확히 얼마만큼 복음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필요한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존 스토트, C. S. 루이스, 마이클 그린, 알리스터 맥그래스)

 

-나가는 말-

김형석 교수는 “인문학, 즉 휴머니즘과 기독교 정신은 하나의 강물에 흐르는 두 물줄기”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한편으로 김용규 작가는 인문학이 신학에 부단히 피를 공급해 왔다고 역설한다. 연면한 인류 역사를 통해 기독교와 인문학은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 왔을 뿐 아니라, 기독교가 인문학에 빚진 바가 크다는 것이다. 인문학의 수혈을 거부하는 기독교는 창백한 종교에 불과하다. 쳐다보기에도 민망하고 활기도 없고 수행력도 결여되어 있다. 종교의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메시지를 들으려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들어도 감동받는 이가 없을 것이다. 카피라이터 정철이 “사람 사전”에서 ‘설교’를 정의한 대로다. “남을 설득하는 가장 흔한 방법. 그러나 설득에 실패하는 가장 좋은 방법.” 남을 설득하는 게 설교이자 선교의 본질 중 핵심이라면, 왜 그 설득 작업에서 매번 실패하게 되는 걸까? 아마도 그 설득 과정이 이성적으로 충분히 납득될 만큼 논증적이지도 않고, 감성적으로 심금을 울릴 만큼 감동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스콜라 철학의 창시자인 안셀무스는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면서, 이 두 가지 태도를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고 명명했다.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한편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하지만, 감성적으로 자신의 참혹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 이성과 감성의 자원을 공급해 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인문학의 수혈을 받는 기독교가 바로 ‘이성과 감성을 통합하는 신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모쪼록 이 신앙의 모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 널리 확장되는 선교의 역사가 힘 있게 진척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