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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我)-나를 알라

벌레와 같은 현대 직장인 가장의 실존을 열어 밝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2)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7. 31.

벌레와 같은 현대 직장인 가장의 실존을 열어 밝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2)

-가족이란 무엇인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한 가족 구성원들입니다. 그레고르와 그의 부모와 여동생 그레타입니다. 그 외에 회사 지배인이나 하녀나 파출부 할멈이나 하숙인 3명도 더 등장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즉 이 이야기는 한 가족의 현실과 일상을 묘사하는 기록입니다. 이 가족 구성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레고르는 고된 출장 영업을 통해 옷감을 판매하는 회사 직원이고, 아버지는 사업이 망한 뒤 은퇴한 노인이고, 어머니는 가사를 돌보는 주부이며, 여동생은 17세 청소년입니다. 현재는 그레고르가 5년째 가정의 생계를 책임 맡고 있는 가족 부양자(breadwinner)입니다. 당장 아들이 돈을 상당히 벌고 있기 때문에, 현재 일할 수 있는 건강이 되는 아버지도 여유롭게 노년을 즐기고 있는 처지입니다. 어머니는 일할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많이 든 것은 아니지만,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동생도 돈 걱정하지 않고 안정된 가운데 생활하면서, 자기의 특장인 바이올린 연주 기량을 갈고닦는 데 시간을 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레고르가 아직 가족들에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동생을 음악 학교에 보낼 계획까지도 짜 둔 상태였습니다. 여동생이 17세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20대 결혼 적령기에 이미 도달했을 그레고르는 자기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직장 업무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여동생이 멋진 집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 때문이라는 자부심을 그레고르가 품고 있었다는 게 전혀 무리가 없지요.

 

이런 그레고르의 희생과 기여에 대해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두 문장이 그 답을 줍니다. “식구들은 그레고르가 벌어다 준 돈을 받으며 고마워했고 그는 그 돈을 흔쾌히 내놓았지만, 서로 간에 이렇다 할 따스한 정 같은 것은 더 이상 오가지 않았다. 그래도 여동생만은 그레고르와 가깝게 지냈다.” 즉 그레고르는 고군분투해서 번 돈을 기쁘게 가족들을 위해 썼고 가족들은 그것에 대해 고마워했지만, 여동생과 자기와의 관계를 제외하면 가족들 간의 정서적 교감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동생과 부모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그레고르가 변신한 후 여동생이 그에게 먹이를 주고 돈 버는 역할을 감당하기 전까지, 그 부모는 그녀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딸아이에 불과”하다고 여겨 툭하면 야단하기 일쑤였습니다. 사실상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으로 따지자면, 부모도 할 말이 없었을 텐데 딸을 무시하고 야단하는 식으로 자기들의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도 지난 5년째 놀고먹는 데 도가 텄습니다. 아침 식사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다양한 요리에다 신문 읽기도 곁들여 몇 시간에 걸쳐 식사를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몸이 비둔해질 수밖에요. 그 어머니는 천식을 앓고 있어서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무척 힘들어해서 창문을 열어젖힌 채 소파에 누워 지내기 일쑤였습니다. 정리해 보자면, 그레고르의 가족은 돈 벌어다 주는 그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 외에는 가족 간에 정서적 교감이 없는 가정이었던 셈이지요.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김용규 작가는 이 작품(“변신”)을 다루면서 가정에 대한 마르셀의 철학을 소개합니다. 그는 모든 인간다움은 가정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의미를 띠고 ‘우리’(le nous)라고 부를 수 있는 최초의 ‘공동체’가 바로 가정이라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그는 가정을 ‘시원적 우리’(un nous primitif) 혹은 ‘원형적 우리’(un nous archtype)라고 불렀고, 이 공동체 안에서만 ‘나’라는 가족 구성원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무릇 존재라는 것은 오로지 ‘공동존재’(le co-esse)를 통해서만 자기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호적 관계의 개념이 주관적 개념보다 항상 앞선다고 보지요. 가족이 존재하기에 내가 있다는 말은, 가족이 ‘나의 존재적 확장’이 된다는 개념과도 통합니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구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나 기쁜 일이 생기면, 내가 고통스럽게 되거나 기뻐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마르셀은 이런 관계를 가족 외의 타인들에게까지 확장하여 우리 사회를 ‘가족적’으로 형성해 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길’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그의 ‘어떠어떠함’으로 재단하지 않고 그의 ‘있음’ 자체로 존중하는 자세, 그의 고통과 행복을 나의 고통과 행복으로 인식하는 게 모든 도덕과 윤리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참조.)

 

과연 그레고르의 가정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가족 구성원들에게 임하는 고통과 기쁨을 자기들의 것들로 안고 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정서적 유대감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족 구성원 각자의 ‘어떠어떠함’ 대신 ‘있음’ 자체만으로 서로 존중해 주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돈 벌어다 주는 그레고르에게는 온 가족이 감사했지만, 그레테에게는 부모가 모멸감을 안겨 줄 뿐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17세가 될 때까지 그레테가 취한 생활방식을 보면 그럴 만하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깔끔하게 옷 입는 데 신경 쓰고, 실컷 잠자고, 하녀도 있는 상태에서 집안일 좀 거들고, 무도회에 간혹 참석하는 데다가, 바이올린을 켜는 게 전부였으니까요. 다른 한편으로 그 부모의 처사는 부모의 권위만 내세운 부당한 처사에 불과했습니다. 자기들도 놀고먹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그레고르가 갑충으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자신을 몰아가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그가 진 빚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간 뼈 빠지게 일하다가 갑충으로 변신한 아들에게 위협과 폭력을 가했을 뿐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아버지의 행태는 용서받기 힘듭니다. 부모도 챙겨주지 않는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며 가족들의 생계 해결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오빠를 배신하고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며 내쫓아야 한다면서 그를 방에 매몰차게 가둔 여동생도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가족 구성원들에게 가족 관계를 확장하여 우리 사회를 ‘가족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은 언감생심입니다.

 

이 작품을 독해하면서, 고미숙 작가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핵가족의 붕괴에 대한 유쾌한 묵시록’으로 분석한 것에 공감이 갔습니다. 외연상으로는 현격한 대조를 이루는 세 유형의 가정이 실제적인 삶의 실상 면에서는 대동소이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을 제시한 게 인상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 세 가정이 각각 대저택, 반지하, 지하실에서 살고 있지만, 가족 구성원들의 관심은 오로지 ‘성욕과 식욕, 그리고 사유재산’에만 몰입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가정 속에 가족 구성원들 간의 정서적 교감이 있을 리가 없고, 세상과 사회의 변화를 바라보고 꿈꾸는 윤리적 비전이 실종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런 면모를 띤 핵가족을 자아와 삶의 기반으로 삼다가는 자기 파멸과 사회 붕괴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논의를 중심으로 고 작가는 이제는 집에서 길로 이동하는 시대라면서, 코로나19 사태가 이런 사조를 더욱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집안에만 박혀 있어 보면서, 산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집을 나서야 한다는 것, 즉 사람이란 집을 나와서 네트워킹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생충”을 보고 나서 전 세계인들이 다들 “우리 나라 이야기 같다”라는 반응을 내놓았다고 하지요.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문제인 사회 양극화 현상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도리어 이 반응은 각자의 식욕을 채우고 핵가족인 자기들의 생존과 안녕만을 지상 과제로 안고 살아가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마저 순전히 경제적인 차원에서 득실만을 따지게 된 전 세계인들의 자탄이 섞여 나온 고백이 아니었을까요? 영화 속에서 명시된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에게 기생하는 것만큼,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생하는 삶의 행태를 보여 주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변신”은 “기생충”에서도 견고했던 핵가족 내의 끈끈한 관계마저 절단내 버리는 참혹한 인간 본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핵가족 대 핵가족의 기생 관계가 핵가족 내 구성원 대 다른 구성원 간의 기생 관계로 퇴행해 버린 참담함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신”은 작가 자신이 말한 대로,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the axe for the frozen sea within us)와 같은 작품입니다. 핵가족의 붕괴에 직면한 현 시대에 또다시 질문하고 그 가족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입니까?

 

-그레고르의 변신의 의미와 그 과정-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이 소설의 제목(“Die Verwandlung”, The Metamorphosis)을 가리키는 소설 속 첫 문장입니다.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갑충’(ungeheures Ungeziefer)은 무엇일까요? 이 표현을 영어로 번역하면 ‘a monstrous vermin’ 혹은 ‘a horrible vermin'이 됩니다. ‘Ungeziefer’는 중세 고지 독일어(Middle High German)에서는 ‘제물로 적합하지 않은 부정한 동물’이라는 의미였고, 구어체로는 벌레, 곤충, 딱정벌레 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bug)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영어 번역가들은 이 단어를 ‘vermin'으로 바꾸었습니다. 주로 해충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파리, 이, 벼룩뿐 아니라 바퀴벌레나 쥐와 같이 파괴적이고 질병을 옮기는 벌레나 조그만 동물들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밝혀주는 한 가지 단서는, 그레고르 집을 드나드는 파출부 할멈이 아침저녁으로 늘 그의 방문을 열고 그를 다정하게 부를 때 드러납니다. “이리 와 보렴, 우리 말똥구리!” 혹은 “우리 말똥구리 좀 봐요!” 여기서 사용된 말똥구리'는 독일어로 ‘Mistkäfer’로서 영어의 ‘dung beetle’에 해당합니다. 결국 그레고르가 변신한 것은 ‘소름 끼치는 거대한 말똥구리’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레고르가 어떻게 이 벌레로 변하게 되었을까요? 먼저 살펴볼 것은 그의 직장 환경입니다. 치열한 직장 내 분위기가 이미 그를 벌레와 같이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입 사원 때 성실하게 직무에 임하여 출장 영업 사원으로 승진했습니다. 많은 사원들의 시기를 샀을 대목입니다.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떼돈을 벌며 떵떵거리며 살아간다는 소문이 자자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가 지배인 앞에서 자기변명을 하는 도중에 이런 고백을 하지요. 출장 업무에 전념하는 자기에 대해 사람들이 온갖 험담과 비방을 해대는데, 이런 것들에 대해 제대로 방어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자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당사자가 변호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갖가지 사실무근의 비방과 험담을 뿜어대는 게, 바로 사람을 벌레 취급하는 게 아닐까요? 벌레라는 존재가 품고 있는 함의 한 가지가 바로 무력함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파리, 모기, 벼룩들이 어느 정도 잠재적인 파괴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작고 무력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반항하거나 반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이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존재에 불과하지요.

 

자기를 벌레처럼 취급하는 회사원들의 비우호적인 태도는 서서히 그레고르에게 내재화됨을 볼 수 있습니다. 출장의 여독으로 인해 녹초가 되어 회사로 출근해서 보면, 자기를 향한 비방과 험담들에 의해 불거진 “좋지 않은 결과를 피부로 생생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지요.” 그렇다고 회사 내에 퍼진 팽팽한 긴장 상태를 벌레처럼 무력하게 감내해야 하는 생활을 당장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기 사장에게 진 빚을 다 청산하려면, 앞으로도 무려 5-6년 정도는 더 지속해야 했으니까요. 피부로 생생하게 느끼지만 어찌할 수 없는 전적인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레고르는 차라리 그런 모멸감을 느끼지 않는 갑충이 되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갑충의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온몸이 단단한 껍데기로 싸여 있는 것이니까요. 생생하게 느낄 피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곤충의 특징입니다.

 

다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상담할 대상이 없다는 것도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자기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부모나 어린 여동생에게 이런 심각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면, 당장은 후련했을지는 몰라도 도리어 자기 마음이 더 편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사환”이나 다른 회사에서 온 두세 명의 친구들과 상의하기도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에 직접 찾아온 지배인도 그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자기를 사업가로 소개하는 그는 사장과 한 배를 타고 있는 수완 좋은 사원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르가 지배인에게 던진 앞의 그 고백이,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 아니라 그저 괴성으로 들릴 뿐이었다는 지적 그대로입니다. 그는 일반 직원들의 고충을 청취할 자세를 갖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몸이 아파도 툭툭 털고 출근해서 업무에 임해야 한다는 주의를 고수하는 사업가에 불과했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레고르가 처음 하는 몇 마디 말을 듣더니 몸을 홱 돌려 버렸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 맡은 가장으로서 그레고르는 지난 5년 동안 치열하게 회사 생활을 해왔습니다. 평소에 5시 기차를 타고 출근할 뿐 아니라, 자나 깨나 회사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말단직에서 승진하여 출장 영업 사원으로 승진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위에서 질시의 눈초리를 던져대고 입방아를 찧어대기 시작합니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말 못하고 있다가도 그가 없는 데서 온갖 험담과 비방을 쏟아 놓습니다. 그가 출장 갔다 회사로 복귀하면 그 썰렁한 분위기가 피부에 와닿습니다. 그렇다고 자기변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일을 상의하고 상담할 수 있는 동료나 상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지금까지 5년간 개근한 그가 7시에 출근하지 않자 지배인이 바로 집으로 쳐들어와, 그의 건강 상태를 문의하기는커녕 도리어 수금 문제로 인해 직무 태만한 경우라고 의심하는 직장이지요. 게다가 최근 그의 영업 실적이 형편없다는 사실무근의 주장을 해대면서, 그의 일자리가 철밥통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 주는 직장 상사가 있는 곳이지요. 이런 직장을 앞으로도 무려 5년이나 더 다녀야 하는 그레고르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습니다. 그레고르는 “가족을 저버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입으로는 ‘내가 가장이다, 부모를 편안히 모셔야 한다, 여동생을 음악 학교에 보내야 한다.’라고 외치고 있었으나, 그의 몸은, 특히 그의 ‘피부’는 그러한 당연한 언명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5년간 겪은 이런 긴장된 직장 생활을 앞으로 그 동일한 기간만큼 더 체험해야 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레고르가 갑충으로 변신한 것은 이렇듯 ‘몸과 피부가 거부할 정도로 극심한 직장 내 왕따나 갑질이 야기하는 고통’에 대한 은유일 것입니다. 그레고르의 이런 변신은 특이한 상황에 처한 그만의 몫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력한 자들을 괴롭히는 데서 만족을 느끼고 그들에게 자기 권력을 과시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인간들의 행렬은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그래서이겠지요. “그레고르는 오늘 자신한테 일어난 것과 비슷한 일이 언젠가는 지배인한테도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보려고 했다. 사실 그럴 가능성을 아주 부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책이 출간된(1915년) 지 무려 100여 년이 흘렀어도, 갑충으로 변신하는 직장인들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직업이란 무엇인가?-

그레고르에게 직업은 우선 생계의 수단입니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부모와 여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임 때문에 고달픈 출장 영업직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여행을 다니는 것이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것보다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게 되지만, 수입은 사무직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한 결과로 승진해서 얻은 업무였습니다. 지난 5년 동안 병가를 내 본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출장 중이라고 해서 다른 영업 사원들처럼 농땡이를 치지도 않고 오전 일찍부터 움직이면서 영업을 개시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레고르의 머릿속에 회사 일 외에는 다른 게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출장 가지 않고 회사로 출퇴근하는 경우에도, 저녁마다 집안에만 틀어박힌 채로 책상에서 신문을 읽거나 기차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기분을 푸는 유일한 취미가 있다면 그것은 실톱으로 목공일에 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기대를 거는 일생일대의 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 빚을 다 갚은 후에 사표를 던지고 가슴에 묻어 두었던 생각을 사장에게 죄다 털어놓는 일이었습니다. 5-6년 후의 미래상이지요.

 

그레고르의 이야기를 읽으며 지난 세월 동안 제가 근무했던 회사나 고교나 대학 생각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그레고르처럼 이러한 곳에서 일한 덕에 저희 가족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출장 다니며 강의도 해보았기 때문에 그의 경험이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중에는 병가 한 번 내 본 적이 없는 것도 그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치열한 직장 생활을 영위한 징표였겠지요. 그렇지만 6개월 간 근무한 회사에서는 언젠가 심하게 배탈이 나서 반나절 동안 병원에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기숙사를 나서서 밤에 별을 보며 다시 귀가할 때까지, 제대로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이나 산책할 수 있는 장소가 없는 근무 환경은 그야말로 살인적이었습니다. 그레고르와 같이 제게도 기분 풀어 주는 취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사표 낼 기회가 없었지만, 제게는 사표를 던질 수 있는 기회가 세 번이나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고교로 옮길 때와 교사직을 놓고 유학을 떠날 때와 교수직을 그만두고 귀국할 때였습니다.

 

사표를 던지는 이 과정들을 통해 저는 직업이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띠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처음 근무한 회사에서는 저만의 ‘보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대기업 중 한 곳이기도 했고 다양한 부서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곳 생활을 통해 나름대로의 보람을 누린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회사 생활은 제가 추측하고 기대한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곳에서 계속 근무했다면, 저도 그레고르처럼 변신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고뇌의 시기에 고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해 보라는 제안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원래 제가 꿈꾸었던 교수 활동, 즉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성숙을 돕는 보람을 만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어, 조금도 갈등하지 않고 사표를 냈습니다. 그곳에서 4년 반을 지낸 후에 유학의 길을 떠날 때 두 번째 사표를 던진 것은 앞 경우와 약간 차이가 납니다. 이미 ‘보람’은 누리고 있었지만, 그때에는 해외에 있는 대학생들의 학문적, 영적 필요를 섬기는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적어도 그 길이 당시 하나님께서 저와 제 가정을 향해 초대해 주신 길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27년간 그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며 젊은이들과 함께 하던 중, 2017년 말에 근무하던 대학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해외 활동을 마감하고 귀국할 때가 되었다는 단서가 여럿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저희 부부가 감당해야 할 일감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노동 혹은 일(work)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을 다각도로 살펴본 후에 일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노동이란 타인을 섬기는 일에 에너지(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혹은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를 소모하는 과정으로서, 노동자에게는 만족을, 공동체에게는 유익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안겨다 준다.”(Work is the expenditure of energy [manual or mental or both] in the service of others, which brings fulfilment to the worker, benefit to the community and glory to God.) ("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 참조.)

 

스토트는 이 정의에서 만족과 유익과 예배(혹은 하나님의 목적에 협력하는 것)라는 차원들이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예컨대 자기 직업에 만족을 얻는다는 것이 주로 공정한 임금, 좋은 근무 조건, 안정성 및 회사 이익을 받아 누리는 분량이라는 요소들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 만족은 그 일 자체로부터, 특히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요소인 ‘보람’(significance)이라는 요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우리 직업과 연관하여 누리는 보람의 주된 내용이란 것도 심지어 기술과 노력과 성취가 결합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도리어 그 보람의 핵심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공동체에 봉사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각이라는 것입니다.

 

도로시 세이어즈가 한 말이 있습니다. “일이란 원래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행해야 하는 것이다.”(Work is not primarily a thing one does to live, but the thing one lives to do.) 즉 노동이 생계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삶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정한 재능과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것들로 단순히 생계를 영위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의미 있는 일을 성취하면서 보람을 느끼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자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의 현실은 그레고르의 경험에 가깝습니다. 갈굼이나 ‘태움’을 당하는 게 다반사인 직장 환경 가운데서, 이웃을 위해 봉사한다는 차원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차원은 망각되기 일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협력자로 두고 동역해 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주’(the Creator)가 되신다면, 인간은 ‘경작자’(cultivator)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간의 협력이라는 개념”(This concept of divine-human collaboration)은 모든 영광스러운 일에 다 적용이 됩니다. “현대 외과 의학의 창시자”였던 16세기 프랑스 외과의사인 앙브루아즈 파레(Ambroise Paré)가 언급한 말 그대로입니다. “나는 환자의 붕대를 감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낫게 해 주셨다.”(I dressed the wound; God healed him.)

 

-가족들의 변신의 의미와 그 과정-

이미 소개한 이 작품의 첫 문장도 극적이지만, 마지막 문장은 그에 못지않은, 아니 더 충격적인 구절입니다. “소풍의 목적지에 이르러 딸이 맨 먼저 일어나 젊은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켜자 그들에게는 그 모습이 그들의 새로운 꿈들과 멋진 계획들을 확인해 주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 가족 소풍을 간 날이 언제일까요? 그레고르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빼빼 말라, 그 몸이 납작하게 말라붙어 죽은 날이었습니다. 갑충으로 변신한 그가 죽자 그의 아버지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어머니와 여동생도 함께 성호를 긋지요. 삼가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안장하는 일에 신경을 쓰기는커녕, 파출부 할멈이 그 시신을  빗자루로 한참동안 밀쳐 보는 것”도 제지하지 않고 그녀가 그 “물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러면서도 온 가족이 결근계를 내고 하루를 쉬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에게는 이처럼 일을 그만두고 휴식을 취할 자격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쉬는 게 꼭 필요했다.”라고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는 자기들에게 갑질 하던 하숙인 세 명도 다 내보냈을 뿐 아니라, 무례하게 구는 파출부 할멈도 내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아내와 딸을 향해 또 한 마디 보탭니다. “자, 이리들 오라고. 지난 일들은 다 잊어버려. 그리고 내 생각도 좀 해줘야지.” 그 말을 들은 그 두 여자는 “급히 그에게 쪼르르 달려와서 그를 어루만지고는 서둘러 그들의 편지를 끝마쳤습니다.” 도시의 근교로 소풍 가기 위해 전차를 타고 가면서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해보니 자기들의 일자리가 “특히 전도유망”하다고 인식되었습니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사 가기로 하자는 것과 같은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잠자 씨 부부는, “딸의 얼굴에 점점 생기가 도는 것을 거의 동시에 느끼게 되었습니다.” 속으로 이젠 “딸에게 착실한 신랑감을 구해 줄 때가 된 것 같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것이 바로 마지막 문장입니다.

 

이 3장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 저는 그레고르와 잠자 씨의 가족 관계가 의심스러웠습니다. ‘혹시 그레고르가 길에서 주어온 자식이었던가, 아니면 서자였던가?’라는 의문이 든 것이지요. 어떻게 자기 아들이 비참한 일생을 마감하고 죽은 날, 이토록 득의만면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가족 소풍을 떠나면서 전도유망한 미래를 화제로 올리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가 있습니까? 이런 기괴한 행태의 배후에는 잠자 씨가 말한 대로, ‘지난 일들을 다 잊어버린’ 망각증과 ‘내 생각’만 하는 데 급급한 극도의 이기주의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와 잠자 부인과 그레타는 그레고르가 자기들을 부양하기 위해 감수한, 직장 내의 갈굼과 태움의 고통에 대해 아직 문외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 일자리[은행 수위, 침모, 가게 점원 자리]가 전도유망하다는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지요. 게다가 변신하는 것으로 그 도피처를 찾아야 했던 그레고르의 고통의 깊이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일한 그들에게도 꼭 필요한 휴식과 휴식을 누릴 자격이, 5년간 개근한 그레고르에게는 더욱 절실했을 것이라는 데는 도무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에 덧붙여 이제 겨우 17세 난 딸에게 좋은 신랑감을 구해줄 때가 되었다는 데는 생각이 미쳤지만, 결혼 적령기에 들었으면서도 자기들을 위해서만 온전히 헌신한 아들에게 착실한 며느리감을 구해 줄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보자면, 사실상 그레고르는 직장에서 벌레와 같이 취급받기 전에, 이미 자기 가정에서 벌레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지요.

 

영어 단어 중에 ‘backstab'이란 게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는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불공정하고 거짓된 방식으로 그를 배신하고 모함한다는 뜻입니다. 주로 말로 하는 비겁하고 거짓된 행태를 일컫는 것이지만, 등 뒤에서 칼로 찌른다는 원래의 의미에서 확장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속에는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backstab'하는 데 도가 튼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미 잠자 씨의 경우를 살펴보았지만, 그의 ‘backstabbing'을 초월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그레고르의 여동생 그레타입니다. 아버지가 어떠한 성품의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그레고르도 이미 익히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자기 사업 실패와 빚더미의 짐을 아들에게 전가하고는, 유유자적하고 여유 있게 노후를 즐기는 그 무책임한 아버지의 면모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집안에서는 권위를 내세우면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딸을 홀대하는 그 아버지에게서, 그레고르가 무력한 벌레로 변신한 자기에게 대한 동정이나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폭력을 재차 당한 것이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긴 했지만, 심리적으로는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벌레로 변신한 이후에 그레고르는 아버지의 위협을 피하다가 자기 방문 입구에서 자기 옆구리가 쏠려 심한 상처를 입게 되기도 하고, 문에 꽉 낀 자기 몸을 아버지가 힘껏 걷어차는 바람에 피를 철철 흘리며 방 안으로 깊숙이 날아가 버리는 일도 있었지요. 급기야 아버지의 사과 세례를 받던 중 사과 하나가 그의 등에 바로 박혀 그 자리에 뻗어 버리는 사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동생 그레타는 달랐습니다. 자기와 정서적 유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를 위해서는 아버지도 생각하지 못한 계획을 품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녀를 학비가 비싼 음악 학교에 보낼 계획을 크리스마스에 발표할 작정이었으니까요. 그레고르가 변신한 이후에 그녀는 그의 식사를 챙겨 주었습니다. 벌레가 좋아함 직한 소소한 음식들을 신문지 위에 올려 두었다가 나중에 남은 것을 빗자루로 쓸어버리는 정도의 섬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도 돈을 벌기 위해 가게에 일하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런 역할이 부담이 되기도 하고, 막막한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고뇌 거리들이 마음속에 쌓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상황 중 어느 한순간에도 지금까지 가족 부양을 위해 노심초사한 오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나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기 시작해서 그가 먹는 것에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그의 모습을 보고 기절한 어머니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그를 향해 주먹을 치켜들고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소리치기도 하지요. 자기가 깨뜨린 병 조각에 그가 얼굴을 다쳐도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그가 하숙인들 앞에 나타나 그들이 나가겠다고 엄포를 놓는 순간에 그녀는 그를 내쫓아야 한다고 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저게 어떻게 오빠일 수 있겠어요? 저게 오빠라면 인간이 자기 같은 짐승과 같이 살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진작 제 발로 나갔을 거예요. 그랬다면 우리 곁에 오빠는 없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계속 오빠에 대한 추억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런데 저 짐승은 우리를 쫓아다니며 못살게 굴고 하숙인들을 쫓아내면서, 이 집을 온통 독차지하고 들어앉아 우리를 길거리에 나앉게 하려는 게 분명해요.”

 

즉 이제는 오빠를 오빠로 인정하지 않고 짐승으로 인식하겠다는 자기의 뜻을 밝힌 것입니다. 더구나 변신한 이후에도 가족에 대한 책임을 절감하고 있는 그레고르에 대해서, 그가 자기들을 못살게 굴고 하숙인들을 몰아내어 자기 집을 독차지한 채 자기들을 길거리로 쫓아낼 의도를 품고 있다며 모함합니다. 그때 그레고르가 자기 방으로 가려고 몸을 돌린 동작도 자기를 공격하는 것으로 곡해하면서 비명을 지릅니다. 그가 허겁지겁 방 안에 들어섰을 즈음에 그녀가 방문을 재빨리 닫는 통에, 그의 가느다란 다리들이 구부러지고 꺾이기도 했습니다. 빗장을 걸고 완전히 잠근 통에, 그는 어두운 방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르는 가족들에 대해 원망하기는커녕 “가족을 돌이켜 생각해 보며 감동과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자기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여동생보다 아마 자신이 더욱 단호할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숨을 거두게 되지요. 이런 동생이 그가 죽은 후에 부모와 함께 더불어 취한 태도를 보세요. 급기야 자기 얼굴에 점점 생기가 돌기까지 하더니, 최근에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두 뺨이 창백하게 변했던 그녀는 아름답고 탐스러운 처녀로 활짝 피어나게 되지요.” 잠자 씨 부부가 이젠 시집 보내도 되겠다고 확신할 만큼요. “변신”은 핵가족 가장 그레고르의 비극적 변신에 대한 은유이자, 핵가족 구성원들의 참혹한 변신에 대한 섬뜩한 묵시록(apocalypse)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중국 관련 기사에서 소개된 슬로건 한 구절이 이런 묵시록적 현실을 열어 밝히고 있습니다. 한 기자가 어떤 의류 회사를 방문했을 때 그곳 직원들의 재봉틀 위에서 발견한 의욕 고취용 슬로건이었습니다. “여기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세요, 가족들에게 미움받지 마세요.”(Work hard here to make money, don’t be disliked by your family)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가족 중 아버지든, 어머니든, 자녀이든, 돈을 벌지 못하면 가족들의 미움을 살 각오를 하라는 것이 직장 내의 생산력 증진을 위한 표어라니요! 돈에 걸신들린 사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면,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단지 ‘벌레’가 되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그를 멸시하고 박해했을까요? 만일 그가 벌레가 아니라, ‘벌레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비록 벌레로 변신하지는 않았더라도, 무익하고(돈 못 벌고), 무력하고(자기 방어도 못하고), 더럽고(자기 방도 정돈할 줄 모르고), 혐오감을 주는(다양한 이유로 싫어하도록 만드는) 존재가 되었다면 말입니다. 결국엔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한 게 문제가 아니라, 벌레와 같은 존재로 전락한 게 문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은유와 직유의 한 끗 차이에 불과했지요. ‘벌레와 같은 현대 직장인 가장의 실존을 열어 밝힌’ “변신”은 인간 실존의 의미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