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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아(我)-나를 알라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2)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6. 3.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2)

-고유한 나 자신되기-

‘성장 소설’의 경전이라는 별명답게 이 작품 속에는 주인공 싱클레어가 내적 성숙의 길로 나아가는 다양한 면모들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래 집단 속에 속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가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자기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친구 혹은 안내자를 만나기도 하고, 방탕한 길에 빠지기도 하며, 다시 회복되어 자기만의 길을 탐색하는 여정에 오르기도 합니다. 프란츠 크로머와의 불행한 만남으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영혼의 올무가 되는지 경험합니다. 데미안의 개입으로 크로머와는 결별하게 되지만, 데미안의 사상과 시각이 싱클레어의 마음을 흔들어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통합하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개안(開眼)이 그의 삶을 즉각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혼동의 시기를 견디지 못한 채 곁길로 잠시 빠졌다가 다시 돌아와 자기를 탐색하면서 자기만의 길로 나아가는 여정에 오릅니다.

 

작품 전체가 바로 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싱클레어에게 있어서 그 시발점은 프란츠 크로머로 인해 갈등하던 중에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어느 날 집에 도착해서 방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가 크로머와 연관된 일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의 젖은 신발을 나무랐습니다. 바로 그때 아버지가 자기 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게 싱클레어에게는 경멸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는 그것이 “아버지의 존엄성을 가른 최초의 균열”이었고,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면 이렇게 어린 시절을 떠받치던 기둥들을 파괴시킴과 동시에 집 밖의 낯선 곳에 자기의 뿌리를 내리고 자양분을 받아야 한다고 믿게 됩니다. 이것이 그가 생전 처음으로 맛본 씁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와 에바 부인이라는 안내자들을 만나 자기 스스로에게 이르기 위해 삶의 발걸음들을 내딛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앞으로 내몰고 멀리 이끌어 간 일들은 죄다 “다른 세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것들은 항상 그가 누리고 있던 평화를 위협하는 혁명적인 것들로서, 언제나 두려움과 강요나 양심의 가책을 몰고 왔습니다. 특히 그 ‘다른 세계’의 사자 격인 데미안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죄악”이라고까지 언급하면서. “거북이처럼 완전히 자기 자신 속으로 기어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라고 역설합니다. 크로머에게 벗어났을 때 데미안에게로 가서 진정한 독립인으로 서는 길을 탐색해야 했지만,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자기를 자극하고 경고하면서 부모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자기에게 바랐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대신 안락한 부모님의 품 안에 머물기를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데미안이나 피스토리우스나 에바 부인이 한결같이 지적한 것처럼, 자기 자신만으로 태어나는 것은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우듯이,” 언제나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즉 누구나 가려고 하는 이 길이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거부감을 느끼는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이러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젊은이들은 당장은 유쾌한 쾌락에 몸을 맡기고, 늙은이들은 “본연의 책임을 지라는 독촉을 받고 본연의 길을 가라는 채근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들은 어디서나 ‘자유’와 ‘행복’을 등 뒤 어딘가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누구든 자신만의 길과 꿈을 찾아내야 하고, 그것들이 자신의 운명인 이상 그것들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지요.

 

자신만의 길을 결연한 자세로 탐색해 가는 싱클레어의 경우가 이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헤세는 이것이 모든 인간의 문제라는 점을 이 작품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 길에 대한 암시이다. 일찍이 그 누구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이야기는 중요하고 숭고하며 영원하면서도 매우 특별한 대상입니다. 우리 각자가 삶의 여정을 통해 자연의 의지를 실현하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마땅히 주목해야 할 경이로운 일이라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이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구세주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라고 역설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고귀한 인간을 무기로 대량 학살하는 역사적 현장을 규탄했던 것입니다.

 

싱클레어가 모든 젊은이들도 새로 태어나는 것을 갈구한다는 사실을 전장에서 목격했다는 점이 경이롭습니다. 전장으로 향하는 그 젊은이들의 얼굴에서 자기나 데미안과 같은 무리가 품고 있는 ‘카인의 표식’과는 차원이 다른 “사랑과 죽음을 뜻하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표식”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그도 입대하여 전장에서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사람들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을 절감하게 됩니다. “장엄하게 운명의 의지에 다가가는 모습”을 현시한 이들 속에서 “새로운 인간성 같은 것”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들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알이라는 세계를 산산이 부서뜨리면서 중생(重生) 하기 위해 힘겹게 투쟁하고 있는 거대한 새와 같은 존재라는 점을 발견하면서, 그들을 향해 심오한 동지애를 느끼게 됩니다.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이 자기의 운명이라고 고백하고 투쟁하는 길은, 데미안을 통해 접하게 된 사상의 세계에 입단한 이들만이 비의적(祕儀的)으로 누리는 특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열린 길이었습니다.

 

이 사실과 연관하여 성경이 밝히 열어 보이는 측면도 이런 시각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만드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로 빚으셨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아시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지금까지 존재한 수백 혹은 수천 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각각 고유한 특성과 외모와 자질을 갖춘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시편 139:13-18과 본 블로그의 “자아상: 내 됨됨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없다?” 참조). 사정이 이러한데도 우리 개인의 유일성이라는 측면이 기독교계 내에서 중시되지 못한 것은 안타깝습니다. 예배나 교회 봉사 같은 특정 활동들은 한껏 강조했지만,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고유한 자질과 독특한 면모를 인정하고 개발하여 활용하도록 돕는 데는 미흡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헤세도 언급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실 만큼 우리 각자를 사랑하신 것이 명백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예컨대 갈라디아서 2:20), 그 개인적인 사랑에 주목하고 그 사랑을 누리는 일을 갈구하는 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도 딱한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up for me.)

 

이 고백을 한 이는 사도 바울로서 유대교 랍비 출신으로 처음에는 초대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열심을 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뵙고 난 후 그 삶이 변혁되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바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해주셔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몸을 십자가상에서 드린 것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의 요한복음을 집필한 사도 요한은 독특하게도 자기를 가리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요한복음 13:23, 19:26-27, 20:1-2, 21:20)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의 고백이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말고 자기만을 사랑해 주셨다는 의미를 띤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의 기록 중에 예수님께서 그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에 한번 주목해 보세요.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A new commandment I give to you, that you love one another, even as I have loved you, that you also love one another.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have love for one another.)

 

예수님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그 사랑의 전범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 모두를 사랑하신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일대일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고백은, 당신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내재화하여 누렸다는 말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가슴에 품어 주심으로써 그가 품은 이런 확신을 인정해 주셨지요(요한복음 13:23). 다른 사도들이 자기들 각각을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로 불렀더라도, 사도 요한은 조금도 동요하거나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아마도 왜 그들이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을까 의아해했을지도 모르지요. 사도 요한이 자기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로 부른 것과 같이, 당신께서 우리 각자를 고유한 존재로 빚어주시고 그렇게 대우해 주신다는 원리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데미안”의 주제는, 신앙적으로 우리 각자가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당신의 사랑을 고유하고 친밀한 방식으로 누리는 경험으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카인의 표식”과 “아브락사스” 논평하기-

데미안을 읽은 이들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내용 중에 “카인의 표식”과 “아브락사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전자는 종교 수업 시간에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대한 설명을 듣고,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그 이야기를 재해석하면서 거론한 것입니다. 형제간의 결속을 파괴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그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카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 제물은 받지 않으셨지만, 아벨과 아벨의 제물을 반기신 것에 대해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카인은 죄에 대해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설득당하지 않은 채, 사악의 끝장판을 보여주는 형제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 이후에도 그는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고 농담을 읊조립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Then the LORD said to Cain, "Where is Abel your brother?" And he said, "I do not know. Am I my brother's keeper?[창세기 4:9]) 하나님께서는 그런 태도를 취하는 카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도록 하셨고 온 땅 위에서 떠돌아다니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표식’을 찍어주셨습니다. ‘카인의 표식’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죄를 상기시키고, 둘째는 원수들에게서 그를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는 의미였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크낙한 사랑이 드러나 있습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이 항의조로 내뱉은 고백(4:13-14)조차도 무시하지 않고 귀 기울여 주셔서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데미안은 이런 의미를 계시해 주는 성경 이야기를 비틀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카인의 표식’이 먼저 있었고 그 표식을 근거로 이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즉 특정한 표식이 찍혀 있는 카인이란 강자가 아벨이란 약자를 때려죽이자, 다른 약자들이 두려워하며 신세를 한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위에 있던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왜 그 카인을 죽이지 않느냐고 묻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그들은 자기들이 그 카인을 겁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답변하는 대신, 카인에겐 하나님께서 표식을 찍어 주셨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고 응답했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엎은 얼토당토않은 소리였지만, 싱클레어의 심령이 크게 요동치는 돌멩이 하나로 작용했지요. 그들뿐 아니라 나중에 에바 부인을 통해서 만나게 된 온갖 부류의 인간들도 스스로 이 ‘카인의 표식’을 지닌 인간들로 자부했습니다. 즉 자기들이야말로 ‘용기와 개성을 지난 강자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데미안이 성경 해석을 하면서 보여준 일탈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석하면서도, 예수님께 대해 겸허한 자세로 신앙 고백을 한 강도는 우직하지만 유약한 범죄자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도전한 다른 한 강도는 사나이답고 지조도 있는 카인의 후예라고 주장했지요. 이 두 강도에 대한 실제적인 성경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좌우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있던 병정들이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들이밀면서 이렇게 도전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If You are the King of the Jews, save Yourself! [누가복음 23:37]) 이 말을 들은 강도 중 한 사람이 한술 더 떠서 이렇게 요구하지요.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Are You not the Christ? Save Yourself and us! [23:39]) 그러자 다른 한 강도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고 그 강도를 꾸짖으면서, 그나 자기는 저지른 범죄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게 당연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은 놀라운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 Your kingdom! [23:42]) 그는 데미안이 말한 것처럼 십자가상에서 “마음이 유해져서는 회개와 참회의 눈물 어린 향연을 벌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의 왕으로 인정하면서 이제 곧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왕으로 등극하실 거라고 고백했던 것이지요. 이런 그의 진실한 고백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수용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Truly I say to you, today you shall be with Me in Paradise. [23:43]) 그날 숨이 다하게 되는 즉시, 그를 이 세상과 평행 세계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들여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데미안의 문제는 성경 본문의 원 의미를 밝힌 후에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게 아니라, 성경 본문의 내용까지도 왜곡시킨 상태에서 자기주장과 억측을 가미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문학 작품을 읽고 비평할 때 취해야 하는 기본 원리를 무시한 채 자기 의견이나 자기 논리에만 몰두하는 것은 ‘허공을 치는 일’ 혹은 섀도복싱(shadowboxing)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그의 언급이 성경에 문외한이거나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들, 특히 싱클레어와 같은 젊은이들에게는 매혹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성경 내용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의 이야기가 그저 토대가 빈약하거나 위태로운 “카드로 지은 집”(house of cards)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런 측면에 대해 싱클레어 아버지가 싱클레어에게 미리 알려주면서 진지하게 경고한 바 있었지요. 그가 ‘카인파’에 대해 이야기해준 내용을 싱클레어는 그저 시큰둥하게 들었겠지만, ‘카인의 표식’에 대해 데미안이 언급한 내용은 이미 초대 교회 시절부터 등장한,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견해”요, “우리의 신앙을 파괴하려는 악마의 수작”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아브락사스”에 대한 믿음이나 그것에 대한 철학적 논의의 토대도 그다지 튼실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에서 소개되고 있는 이 존재는 “신인 동시에 악마이고,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품고 있는 대상”입니다. 언젠가 데미안은 십자가에서 회개하지 않는 강도를 옹호하면서 싱클레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은 선이고 고귀함이고 아버지 같은 분이고 아름답고 숭고한 존재이고 감상적인 존재이셔. 백번 맞는 말이야! 하지만 세상은 다른 것들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그것들은 모조리 악마의 것으로 떠넘겨지고 있어. 세상의 이 부분, 이 절반이 은폐되고 묵살되고 있어. 하느님을 모든 생명의 아버지라고 찬양하지만, 정작 생명의 토대를 이루는 성생활은 아예 묵살되고 악마의 일, 죄악이라고 선언하고 있다니까!”

 

즉 이 세상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인위적으로 떼어 내어 전자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후자는 배척해서는 안 되며, 그 모든 것을 신성하게 여기며 숭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대한 예배뿐 아니라 악마에 대한 예배도 이루어지든지, 혹은 “악마까지 포함하는 하느님”을 만들어내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아브릭사스란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품고 있는 존재입니다. 피스토리우스에 의하면 아브락사스를 믿는 신앙은 신선하고 멋진 것이긴 하지만 아직은 젖먹이 단계에 처한 고독한 종교이므로, 열광적인 예배와 비밀 종교의식을 갖추는 단계까지 진전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진실한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데미안이 언급하는 세상의 ‘절반’이란 무엇일까요? 성생활과 같이 일반적으로 죄악과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삶의 영역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말했듯이 성생활은 생명의 토대를 이루는 인간의 활동입니다. 그런데 성생활 자체를 세상의 절반 중 한 가지로 분류하고는 은폐하고 묵살하면서 악마의 일, 죄악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지요. 성을 피조물에게 나누어 줄 선물로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성생활을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누리도록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생활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올바르게 누리는 게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서 혹은 기독교가 성생활을 악마의 일, 죄악이라고 선언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착각입니다. 더구나 이 그릇된 전제에 근거해서 악마에 대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빗나간 주장이자 억측에 불과하지요. 사상누각 언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만드시고 기쁨으로 허락하신 성과 성생활을 영위하는 일에 악마에 대한 예배가 왜 필요하단 말입니까? 도리어 그 선한 것을 악용하는 악마의 궤계를 분별해서 물리치는 게 필요할 뿐입니다. 로마서 16:19-20의 제안처럼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해야 합니다.” 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사단은 예배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밟아 으깨지는 것”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그 일이 우리가 간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열어 밝혀 줍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머지않아 행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6:19-20)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곧 사탄을 쳐부수셔서 여러분의 발밑에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I want you to be wise in what is good and innocent in what is evil. The God of peace will soon crush Satan under your feet The grace of our Lord Jesus be with you.)

 

이 시점에서 김영민 교수가 정독 훈련 과정으로 제안한 둘째와 셋째 사항을 또다시 떠올려 봅시다. "책 내용을 근저에서 뒷받침하고 있는 가정과 전제들을 재구성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것과 "비판적 독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데미안”이라는 작품을 통해 관통하는 이런 시각, 즉 세상의 절반도 인정해야 한다면서 하나님과 악마를 함께 숭배해야 한다는 안목은 우선 성서를 오독한 데서 비롯된 시각입니다. 특히 성경이 성생활을 악마가 작동하는 죄악이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마귀 숭배를 이끌어 낸 것은 그릇된 전제에서 이루어진 논리적 비약에 불과하지요. 데미안이든 신학을 전공했다는 피스토리우스든 트인 마음으로 성경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정독하지 않고, 성서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으로 성서의 내용을 왜곡하는 데 급급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자기들이 오독하고 왜곡시킨 내용을 토대로 자기주장을 형성했으니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선한 일에는 순진한 반면 악한 일에는 슬기로울 때, 이렇게 비틀어진 안목으로 경도되기 마련이지요. 이만하면 데미안이나 피스토리우스가 ‘카인의 표식’이나 ‘아브락사스’에 대해 전개한 주장의 타당성이 판가름 나지 않았나요?

 

-이원론의 실상 깨닫기-

사실상 데미안이나 피스토리우스가 두 반쪽 세상을 다 인정하고 아브락사스를 숭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인류 역사상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태동한 ‘이원론’(dualism)의 변형입니다. 이원론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마즈다교 혹은 배화교)나 마니교(Manichaeism)가 표방한 근본 원리입니다. 그래서 이런 종교들은 하나 같이 빛의 세력과 어두움의 세력 간에 진행되는 우주적인 갈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니교는 영지주의적인 기독교, 불교 및 조로아스터교의 요소들을 결합한 종교이자 서기 3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비롯된 종교적인 이원론 체계로서, 한때는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종교에 무려 9년간이나 심취해 있다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지요. 이 종교의 이원론적인 배경으로 인해 지금도 ‘Manichaean’이란 영어 단어가, “선과 악을 별개의 존재로 이해하는 세계관”(a world view of distinct good and evil)을 지칭하는 의미를 띤 채 사전에 남아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 이원론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먼저 C. S. 루이스가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물 탄 기독교’(Christianity-and-water)에 대해 여러 번 경계한 것에 대해 잠깐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 ‘물 탄 기독교’는 하늘에 선한 하나님이 존재하시므로 모든 게 다 괜찮다면서 죄와 지옥과 마귀와 구속 같은 어려운 교리들을 다 무시해 버리는, 너무 단순한 종교입니다. 온 세상에는 명백하게 악하긴 하지만 겉보기에는 무의미한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악한 측면을 부각해서 죄악시하고 마귀적인 것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지요. 그렇지만 루이스는 진정한 기독교란 이러한 ‘물 탄 기독교’보다는 이원론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 이 세상에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이 확연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엄연한 현실에 대해 기독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상이란 원래 선한 것이었지만 중간에 잘못되어 버린 것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여전히 그 온전한 상태에 대한 기억을 품고 있다고. 그래서 기독교는 악의 실재를 부인하지 않고, 이원론처럼 이 세상에는 전쟁이 진행 중이라고 인정합니다. 다만 이원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전쟁이 "독립된 세력들 간의 전쟁"(a war between independent powers)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도리어 반역자들이 전개하고 있는 "내전"(a civil war, a rebellion)이라고 봅니다. 즉 우리가 그 반도(叛徒)들이 점령한 세계의 일부에서 살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선하고 숭고한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배한다면 다른 반쪽 세상 존재인 악마에 대해서도 예배해야 한다는 식의 이원론이 어떤 젊은이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철학적인 논리상으로 지지를 받기는 어렵습니다. C. S.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우리가 어떤 것은 선하고 다른 어떤 것은 악하다고 언급할 때, 사실상 이 선과 악에 대한 개념에다 다른 제3의 요소, 즉 어떤 법칙이나 기준을 고려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이 요소에 부합하면 선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악이 되는 것이지요. 예컨대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억울한 사정에 처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선이라는 점과 살인이나 강간은 악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가리키는 양심의 기준 혹은 보편적인 원리가 존재합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예를 한 가지 들겠습니다. 두 반쪽 세계를 똑같이 허용하는 데미안에게 싱클레어가 반발하면서 이 세상에는 “금지된 추악한 일들이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라고 지적하자, 데미안은 “너는 물론 사람을 때려죽이거나 여자를 강간 살인해선 안 돼. 그건 안 돼.”라고 즉답합니다. 그렇지만 연이어 “영원히 ‘금지된’ 것은 없어. 언제든 바뀔 수 있지.”라고 덧붙입니다. 자기가 하는 말의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결국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제3의 요소인 기준에 따라 판단된다면, 이 보편적인 기준 혹은 이 기준을 만든 존재는 이 두 가지 것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말이 됩니다. 악은 독립적인 실재로 선과 맞짱 뜨는 세력이 아닙니다. 도리어 온 세상에 편재하는 보편적 원리와 그 원리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종속되어 한시적으로만 존재하는 반역 세력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영원히 멸망해서 사라져 버릴 대상이지요.

 

더구나 이원론은 우리가 실제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것에 비추어서도 지지받기 힘듭니다.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악 자체를 위해 악을 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들, 예컨대 돈이나 권력이나 쾌락과 같이 그 자체로는 선한 것들을 획득하기 위해 악을 저지르지요. 그렇다면 악이란 선한 것들을 그릇된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으로서,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어둠의 세계는 빛이 없는 세계이고, 악의 세계는 선이 결여되거나 왜곡된 세계인 셈이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빛이 선재(先在)하고 실재하는 것에 비해, 어둠은 변질되고 비실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설령 어둠의 세계 속에 실재성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명백하게 빌려온 것이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이원론은 허구의 세계입니다.

 

-두려움(Fear)을 두려움(Dread)으로 극복하기-

싱클레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심각하게 대두된 것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었습니다. 자기의 거짓말로 인해 프란츠 크로머에 책잡혀 일시적으로 그의 노예가 되면서 겪은 경험이었습니다. 크로머는 처음에는 싱클레어가 사과를 훔친 것을 주인에게 고발하겠다면서 그를 위협해서 돈을 뜯어냈고, 나중에는 부모 몰래 그 돈을 훔친 것을 물고 늘어지며 그를 괴롭혔지요. 시일이 흘러 갈수록 늘어나는 죄와 그것으로 인한 가슴 죄는 죄책감에 그가 얼마나 많은 두려움에 시달렸던지, “내 죄는 악마와 손을 잡은 것”이었다고 고백하는 단계까지 이릅니다. 이런 싱클레어의 모습이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데미안의 눈에 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부를 때 그가 놀라는 것을 보고, 데미안이 한마디 합니다. “절대 사람들을 무서워하면 안 돼.” 그가 뭔가에 잘 놀라는 것을 보니 분명히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포착하여 그렇게 일갈한 것이지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면 그 대상에게 자기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내주었다는 말이 되고, 급기야 그 두려움은 자기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똑바른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그 무서움을 완강하게 버려야 한다면서, 대안이 없다면 그 대상을 죽여 버리라고까지 권고합니다. 그렇게 할 마음이 있다면 감탄하는 심정으로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제안하지요.

 

그렇지만 싱클레어는 그 당시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크로머를 처단하지 못합니다. 대신에 부탁하지도 않은 데미안이 크로머를 조용히 만나 한번 대화한 것으로 인해, 크로머는 더 이상 싱클레어의 삶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싱클레어를 마주칠 상황이 되면 그가 먼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그저 싱클레어하고 이야기하듯이 크로머에게 몇 마디 해 주면서 싱클레어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자기 신상에 좋을 거라고 일깨워 주었다고만 응답했습니다. 싱클레어가 그의 이름을 다시는 꺼내지 않았지만, 나중에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은 후에 요양하는 동안 나타난 데미안에게서 그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듣게 되지요. “꼬마 싱클레어, 내 말 잘 들어! 나는 떠나야 해. 크로머나 아니면 다른 일로 아마 네가 나를 다시 필요로 하는 날이 언젠가 올지도 몰라. 그래서 네가 불러도, 나는 말이나 기차를 타고 허둥지둥 달려오지 않을 거야. 그러면 네 안에 귀를 기울여 봐. 내가 네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그 후로 싱클레어에게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데미안의 말대로 그가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면 자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의 친구이면서 인도자인 그와 똑같은 모습이.” 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지요.

 

두려움은 개인의 삶만 피폐하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데미안이 유럽에서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것을 두고 언급한 것처럼, 국가 간의 대규모 전쟁도 사람들이 그저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기에 서로에게로 도망치고 있는 형국에서 발생하게 된 큰 충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엔 이 세계가 몰락하게 된다고 그는 예언하고 있지요. 개인적으로는 싱클레어의 경우처럼 일정한 시기가 지나게 되면 더 이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단계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싱클레어가 김나지움을 마칠 즈음에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학우들도 그 점을 알아차리고 그를 은근히 존경하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데미안이 전쟁터에서 부상당해 누워 있던 싱클레어를 “꼬마 싱클레어”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해 보세요. 그러면서 앞으로 싱클레어가 크로머 같이 두려운 일로 자기를 필요로 하는 날이 온다면, 자기를 부르는 대신 싱클레어 안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면하지요. 결국 싱클레어가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데미안을 필요로 해서 그를 부른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지요. 아무리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죽기 전까지는 두려움 없이 살아가기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데미안의 권고에 따라 자기 속을 들여다 본 싱클레어가 발견하게 된 것은, 자기 ‘친구이자 안내자인 데미안과 연합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결국 그가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길을 발견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이 마지막 장면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에서 언급하는 두려움 해결책에 한번 주목해 보세요. 성경에서는 두려움의 원인이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고 봅니다. 겉보기에는 두려움이 신체적인 상해를 입거나, 물질적인 손해를 보거나, 안정적인 삶에 위협이 되거나, 명예에 타격을 입는 것과 연관되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혹은 가족]의 신체가 죽음에 처하거나 자신[혹은 가족]이 사회적인 매장을 당하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죽음을 담보로 하여 악당들이나 모리배들과 그들의 괴수인 마귀가 인류를 자기들의 종으로 삼아 온 것이지요.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우리 각자의 삶에 적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토록 코비드 팬데믹을 두려워하고, ‘똑똑한 집 한 채’를 확보하기 위해 ‘영끌’하고, 자녀의 학업 성적 향상과 스펙 쌓기에 올인하고, 대형 외제 차나 성형수술에 목매는 것도, 결국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직결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약 성경 중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Therefore, since the children share in flesh and blood, He Himself likewise also partook of the same, that through death He might render powerless him who had the power of death, that is, the devil, and might free those who through fear of death were subject to slavery all their lives. [히브리서 2:14-15])

 

이 말씀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목적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녀들이 평생토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악마의 종으로 사는 상태를 보다 못하여,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그들이 해방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 지시고 인류 대신 죽임을 당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지닌 마귀를 멸망시키셨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이 세상에서 두려움(fear)을 극복하는 길은 이 예수님을 경외(dread)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를 통해 예수님의 진면목을 인식하고 당신을 공경함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근원인 죽음을 부활(resurrection)로 극복하신 분, 죽음을 담보로 우리를 자기 종으로 삼은 악마를 멸망시킨 분은 역사상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온갖 낭설이나 선입견을 뒤로하고, 이 세상에서 그 사본의 수나 내용으로 볼 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문학 저작인 성경, 특히 신약 성경을 트인 마음으로 직접 읽으면서 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한번 탐색해 보세요. 두려움은 자신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두려움의 근원인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싱클레어가 자신의 내면에서 자기의 벗이요 안내자로 여긴 데미안과 자기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난 것이 제게는 이렇게 이해됩니다. 우리도 우리의 영원한 벗이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두려움에서 온전히 해방될 수 있다고.

 

-고유한 순응-

“데미안”의 주제는 온전한 자기 자신 되기입니다. 이것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구현하려면, 먼저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 각자의 독특한 진면목을 발견하고, 그 토대 위에서 주님의 사랑을 친밀하고 고유한 방식으로 누리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시각은 트레버 리 목사가 교회 내에서 진행되는 제자 훈련이 전인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활용한 “고유한 순응”(Unique Conformity)이란 표현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계에서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측면(Conformity)에 대한 강조는 빈번했지만, 성도들 각 개인의 고유한 자질과 그 기여라는 측면(Uniqueness)에 대한 강조는 드물었습니다. 우리 각자만이 갖고 있는 은사와 능력과 됨됨이를 온전히 개발하고 활용하는 것을 선양하지 못한 것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런 자질들이 각각의 삶의 현장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사회적 공의를 진작하는 데 활용되는 측면에 주목하지 못한 것은 뼈아픈 대목입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각 개인의 고귀한 능력들과 자질들이 ‘순종’이란 측면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에 가려 사장된 예가 얼마나 많을까요? 게다가 그 다양한 은사와 소질들이 온전히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삶의 현장을 간과한 탓에 허비된 예는 또 얼마나 많을까요?

 

지난 세월을 복기해 보자면, 일반인들이 각자 돈과 ‘사회적 지위’, 즉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를 획득하는 일에 올인하였듯이, 기독교계는 각 지역교회 별로 교회 내의 예배와 교제를 누리는 일에만 몰빵하는 행태를 보였을 뿐입니다. 특정 은사를 드높이고 특정 활동에만 목을 맨 나머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관심 가지고 계신 아름다운 세계와 각양각색의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일을 등한시했습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아무리 많은 예물을 드리고 웅장한 격식을 갖추어 예배를 많이 드려도, 하나님께는 “헛된 제물”이요 “가증히 여기시는 분향”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고 구약 성경의 이사야 선지자는 경고한 것입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Bring your worthless offerings no longer, Incense is an abomination to Me New moon and sabbath, the calling of assemblies-- I cannot endure iniquity and the solemn assembly [이사야 1:13])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을 열어 밝힙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Wash yourselves, make yourselves clean; Remove the evil of your deeds from My sight Cease to do evil, Learn to do good; Seek justice, Reprove the ruthless, Defend the orphan, Plead for the widow. [이사야 1:16-17])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유언을 ‘지상명령’으로까지 치켜세웠지만, 정작 그 말씀 속에 복음 전도에 대한 위임뿐 아니라 이사야가 언급한 대로 연약한 자들을 돕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측면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고찰하여 주목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20)는 유언을 받들었을 때, 어떻게 그 속에 엄존하는 긍휼 사역(mercy work)과 사회 정의(social justice)의 요소를 간과할 수 있었을까요? 아래 두 본문을 한번 묵상해 보세요. 하나님 혹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당신께서 어떠한 것에 진정한 관심을 품고 계신지를 확연하게 드러내어 줍니다.

 

■(신명기 10:17-19)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For the LORD your God is the God of gods and the Lord of lords, the great, the mighty, and the awesome God who does not show partiality nor take a bribe. "He executes justice for the orphan and the widow, and shows His love for the alien by giving him food and clothing. "So show your love for the alien, for you were aliens in the land of Egypt.)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He has told you,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es the LORD require of you But to do justice, to love kindness, And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즉 하나님 혹은 예수님은 아주 공평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형상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무력하게 고통당하고 부당하게 대우받는 이들에게 특별히 주목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사랑과 정의를 베풀어 주시는 최고의 신이십니다. 이런 분께서 당신의 자녀라고 자부하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게 무엇일지는 자명합니다.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연약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위해 공의를 구현하는 것이지요.

 

한 발 더 나아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유언의 말씀에 예수님의 ‘생태학적인 관심’(ecological concerns)이 표명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될까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떠한 존재이신지에 대해 천명하신 “직설적 선언”(indicative)에 주목해 보세요.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And Jesus came up and spoke to them, saying, All authority has been given to Me in heaven and on earth.) 예수님께서 보유하고 계시는 것은 하늘뿐 아니라 땅에 속한 모든 권세입니다. 즉 당신께서 물리적인 환경과 생물 전체를 아우르는 온 세상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생명과 환경과의 관계를 다루는 생태학적인 측면에 관심을 품고 있으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이 생명과 환경을 다루는 일에도 당신의 뜻이 반영되는 정도가 아니라, 오직 당신의 뜻에 의해서 생명과 환경이 운용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지금 인류가 처한 팬데믹 상황은 바로 땅에 대한 주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인간의 무한정한 욕심에 부응하여 무차별적인 개발과 환경 착취를 장기간 감행해 오던 과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자업자득인 셈이지요. 사정이 이러한데도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사회 공의를 실현하는 일뿐 아니라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손상당한 생태계를 살리고 회복하는 일에, 그리스도의 유지를 받든다는 교회가 뒷짐 지고 지켜보고만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쥐고 계신 우리 주님께 이 과업들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지혜를 허락해 달라고 간구합시다. 그리고 그 지혜를 좇아 순종해 가는 가운데, 우리 각자의 고유한 은사와 능력과 자질들을 유감없이 발휘합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