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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가 감형된다면 여생의 나날을 계수하며 살까?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3. 18.

사형수가 감형된다면 여생의 나날을 계수하며 살까?

 

얼마 전까지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백치”라는 작품을 읽었습니다. 작년 3월부터 진행해 온 서구 고전 소설 읽기 과정 중 열다섯 번째 작가의 작품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문학사상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작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그의 대표작입니다. 그중에서도 “백치”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가장 사랑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미쉬낀 공작을 통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려고 시도했습니다.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백치”에는 도스토옙스키가 극적으로 경험한 것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그중 한 가지가 사형 받기 직전에 감형받은 그의 경험입니다.

 

“러시아 문학 오디세이”를 집필한 끄로포뜨낀에 의하면, 도스토옙스키는 1849년에 페트라솁스키 동아리의 회원으로 공상적 사회주의 운동에 연루되었습니다. 당시에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푸리에, 생시몽, 카베의 작품을 읽고 토의하기 위해 한데 모였고 그곳에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해 가야 할 필요성을 논의하곤 했습니다. 이런 모임 중에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문학 비평가인 벨렌스끼가 고골에게 보낸 편지를 낭독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러시아와 러시아 정교회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 부분을 낭독했습니다. 그가 참가한 또 다른 회합에서는 지하 인쇄소 설립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러시아 황실이 1848년에 이루어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인해 극도로 긴장하여 서구의 위험한 사상의 국내 유입을 차단하고 불온한 반체제 모임을 감시하던 중에 이 모임이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849년 4월 23일에 그 회원들 모두가 내란 음모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석영중 교수에 의하면 당시 심문을 받는 중에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고결하게 신문에 임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 동아리의 주동자인 페트라솁스키나 조직의 실질적인 리더인 스페시노프도 거의 모든 사실을 자백했을 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에게 혐의를 전가하기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동지들'에게 불리한 발언은 말이나 서면으로나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실행한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믿음은 오랜 기간 동안 겪은 역경 가운데서 그를 지탱해 준 힘이 되었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신문 과정 내내 제가 타인에게 죄를 전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저한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친구의 죄를 감싸 줄 기회가 오면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9월 30일부터 11월 16일까지 진행된 비공개 군법 회의 결과 형이 확정되어,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시베리아 유형 4년과 사병 복무 형이 언도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니콜라이 1세는 이 불온한 젊은이들을 혼쭐내기 위해 가짜 처형식을 거행하도록 조처합니다. 일단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후에 마지막 순간에 감형시켜 줌으로써 황제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자비에 감동하도록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12월 22에 도스토옙스키를 포함한 그 정치범들은 사형장으로 이송되었고, 도스토옙스키는 둘째 줄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세 명의 사형수 중 하나였습니다. 사격수들이 사형수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형 집행 정지가 선포되고, 전속력으로 달려온 황제 시종무관이 진짜 선고문을 낭독했습니다. 이런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지 사흘 후에,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옴스크 강제노동수용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그곳에서 4년을 지낸 후에 사병으로 복무하는 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형 집행 후 감형 받게 된 경험은 도스토옙스키의 심령 속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치 종교적 회심과도 같은 변화가 그의 내면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 직후에 형 미하일에게 쓴 편지를 아래에 소개해 드립니다.

 

“사랑하는 형, 지금 이 순간 과거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사랑하고 포옹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죽음과 직면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가 되어서야 그런 사실을 깨달았어. 돌이켜 보니 비방과 실수와 나태 속에서 소중한 것을 얼마나 많이 잃어버렸는지 몰라. 내 심장과 영혼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몰라...... 삶은 선물이고 행복이야. 형! 형 앞에서 맹세할게, 나는 희망을 잃지 않을 거야. 내 영혼과 심장을 순결하게 간직할 거야. 나는 더 나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이것이 내 희망이자 위안의 전부야!” (석영중, "매핑 도스토옙스키")

 

이 사건 이후에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소설들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극적 사건이 “백치”에 그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인 미쉬낀 공작이 작년에 만난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들려준 내용입니다. 그 사람은 정치범으로서 다른 죄수들과 함께 사형대 위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총살형을 받는다는 선고문이 낭독된 지 20분쯤 후에 사면령이 내려져서 감형되는 극적인 경험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 두 개의 선고가 낭독된 그 간격, 15분에서 20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나는 몇 분 후면 죽을 것이다”라는 확실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남아 있는 5분을, 동료들과 작별하는 데 2분, 자신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데 2분, 그리고 남은 시간은 주변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는 데 할애했습니다. 이 세 가지 내용을 시간에 따라 실행에 옮긴 일을 생생히 기억하면서도, 그는 특히 스물일곱 살이란 혈기 왕성한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하는 것에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3분 후면 자기가 저 자연의 빛과 융합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앞으로 닥쳐올 “새로운 것에 대한 혐오감과 불투명성”으로 인해 오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을 견디기가 가장 힘들었던 이유는 “만약에 이대로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나?”라는 생각이 끝도 없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생명을 다시 찾는다면..... 그것이 영원이 아닐까? 그럼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다! 그때 나는 매 순간을 1세기로 연장시켜 아무것도 잃지 않고, 1분 1초라도 정확히 계산해 두어 결코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리라!”라고 고백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결국 독한 마음으로 변질되어, 한순간이라도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극적인 인생 역전을 경험한 것은 여간 경이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이 이야기가 소개된 후에 등장하는 대화가 더욱 제 마음을 끌었습니다. 작중의 예빤친 장군의 딸인 알렉산드라가 제가 던지고 싶은 질문을 공작에게 물어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작에게 그와 같은 열정적 얘기를 들려준 그 사람은 감형 처분을 받고 ‘그 영원한 삶’을 선사받지 않았나요? 글쎄, 그 사람은 이 엄청난 부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매 순간 정확히 계산하며 살았나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가 과연 감형 받은 후에 매 순간을 계수하면서 의미 있고 보람 있게 남은 생애를 살았을까요?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지만, 공작의 답변은 의외입니다. “아, 아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잖아도 내가 이미 거기에 대해 물어보았지요. 그 사람 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너무나 많은 순간과 시간을 잃고 살았답니다.” 그 답변을 들은 알렉산드라가, 그 말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을 하며” 산다는 게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미이냐고 다시 묻습니다. 공작은 “어찌 되었든 불가능한 거지요. 나한테도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역시 믿어지지 않는군요......”라고 응답하지요. 즉 믿기 어렵지만 바로 사형당해야 할 사람에게 ‘영원한 삶’이라고 인식되는 엄청나게 부요한 시간의 복이 다시 선사되어도, 그 사람이 그 고귀한 하루하루를 매 시간 계수하면서 의미 있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나라면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파스칼이 “팡세”에서 언급한 내용을 한번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쇠사슬에 묶인 한 무리의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모두가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매일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중 몇몇이 교수형에 처해진다.” 즉 우리 인간적 삶의 현실이 바로 사형수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는 언명입니다. 오늘 내가 살아 있다면, 그것은 오늘 내가 사형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숨 쉬는 하루하루가 각각 사형에서 면제된 엄연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을 하며’ 살아왔나요? 나는 지금까지 그 엄청난 시간이라는 부를 최대한도로 활용해왔나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계실지 궁금합니다. 그 사형 사건 전과 후의 삶이 현격하게 변화된 도스토옙스키도 미쉬낀 공작의 입을 통해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지적한 대로 “필멸에 대한 절대적인 확실성”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에서 가장 끔찍한 현실입니다. 인간이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처참한 고통의 원인은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이 절대로 없을 거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오늘 우리 각자는 사형을 면제 받았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 이후에 내세의 영원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약속이 엄존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 우주적인 기적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원한 삶을 꿈꾸며 이 세상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깨달아 “지혜로운 마음”으로 인생을 영위하는(시편 90:12) 그리스도인들이 없다는 것이 도스토옙스키의 인식이자, 우리 모두의 고민입니다.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하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40년 동안 광야에서 보살핀 모세였습니다. 그는 광야 생활 내내 날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티끌로 돌아가는 것”(3절)을 목도했습니다. “천 년이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 같을” 뿐인 하나님(4절) 앞에서, “인생은 한순간의 꿈”일뿐만 아니라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은 처지에 불과했습니다(5절). 꽃과 같은 영화를 누리더라도 그것은 이내 시들 운명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6절). 왜 이런 운명에 놓이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7절 시작이 “왜냐하면”<For>으로 시작됨) 우리의 “죄악”과 “은밀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때문입니다(7,9절). 그 결과 우리 평생이 하나님의 분노로 사그라들고, 우리 일생이 “한숨” 한 자락(a sigh)처럼 끝나고 마는 것이지요(9절). 한숨 한 번 지을 때마다 이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장수해서 80세, 100세까지 살아도 자랑할 것이라곤 수고와 슬픔뿐이지만, 그 자부심마저도 빠르게 지나가 버리고 우리는 그저 날아가 버릴 뿐입니다(10절). 누가 주님께서 품으신 노여움의 강도를 알고, 주님께 마땅히 표해야 할 두려움에 근거하여 주님께서 발하시는 분노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11절)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이어지는 12-17절에서 모세는 6가지의 기도를 “주 우리 하나님”(the Lord our God)께 아룁니다. 첫째, 지혜롭게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시간의 한계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12절). 둘째, 우리와 화해해 주신 하나님께서 긍휼하심을 허락해 주시도록(13절). 셋째, 시들어 가는 인생이지만 평생 변치 않을 주님의 인자하심이 가득 찬 아침을 날마다 맞이할 수 있도록(14절). 넷째, 주님 밖에서 고난과 재난을 겪은 우리에게 주님 안에서 기쁨이 가득 찬 여생을 허락해 주시도록(15절). 다섯째, 우리에게 주님께서 이루신 기적들을 드러내 주시고, 우리 자손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계시해 주시도록(16절). 여섯째, 우리에게 주님의 ‘아름다운 것’(beauty-KJV), 즉 ‘은총’(favor-NASB)을 내려 주시어 우리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되도록(17절). 특히 우리 손이 하는 일이 견실하게 확립되도록 허락해 달라는 마지막 간구는 거듭거듭 아뢰고 있습니다.

 

사형에서 면제된 삶을 하루하루 누리는 우리가 가치 있고 보람찬 여생을 영위할 수 있는 관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우리의 인생과 세계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과 세상은 허무한 한 바탕 꿈에 불과하거나 도무지 풀 길 없는 수수께끼일 뿐입니다. 먼저 인생의 유한성을 지각하고, 허투루 허비하는 날 없이 하루하루 마음을 챙기며 보내야 합니다. 현재가 암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간구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재난과 고난은 우리 죄악이 낳은 결과이거나 하나님의 섭리가 구현된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엔 주님께서 도모하시고 진행하신 일들이 드러나 당신의 영광을 드높이실 때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여생에 우리가 실행하는 일들이 견고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거듭 하나님의 은총을 고대해야 합니다. 모쪼록 모세의 여섯 겹 기도가 우리 모두의 삶과 사역 속에 온전히 성취될 수 있도록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