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는 ‘암흑기’이나, 르네상스는 ‘빛의 시대’라고?
지난 주말에 제가 출석하는 교회 성도님들께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매년 6월 한 달을 “선교의 달”로 보내면서 교회의 선교 역량을 점검하고 갱신하는 기회로 삼는 저희 교회는 올해에도 매주 선교에 관한 말씀들을 묵상하며 보내던 중이었습니다. 제가 정한 제목은 "근원으로 돌아갑시다: ‘오래된 미래’, 르네상스"였습니다. 팬데믹을 맞이한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짚어보면서 미래를 전망해 보려는 의도로 정해진 주제였습니다. 먼저 시를 한 편 읊고 시작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내일은 없다”였습니다.
이 시가 이번 강의와 연관이 되었던 것은, 현재 시점과 연결되지 않는 미래란 의미가 없다는 측면이었습니다. E. H. 카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한 것처럼, 과거나 미래는 현재 시점과 대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띤 과거로 회상되고 소망을 주는 미래로 기대되어야 하는 법입니다. 강의한 내용 중에서 오늘 나눌 내용은 주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 어떤 시각을 견지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르네상스라는 주제를 제대로 다루자면 중세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김태훈 작가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중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중세를 “암흑기”(The Dark Ages)로 보는 관점입니다. 고대 문화, 즉 그리스, 로마의 문화뿐 아니라 근대 문화와 비교해 볼 때 중세 문화는 뒤떨어진다는 입장입니다. 476년에 서로마가 멸망하고 15세기 들어 그리스, 로마의 문헌들이 재발견될 때까지 천 년간 대단한 일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중세가 근대국가의 토대가 된다는 관점입니다.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시각으로 중세 말과 근대 초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입장입니다. 지금의 세계사 교과서가 취하는 시각이지요. 중세 유럽 사회는 그리스, 로마문화와 기독교 문화, 그리고 게르만 문화가 장기간 동안 서로 결합되어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가운데 다양한 측면을 노정했습니다. 그 장구한 기간 동안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들과 사회적 여건들로 인해 중세인들의 생각이 서서히 발전하는 도중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혁신으로 연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김 작가는 중세라는 시대가 “그 안에서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기에 좋은 징검다리”가 된다고 역설합니다.
-중세: 암흑기(The Dark Ages) vs. 광명기(The Light Ages)-
중세를 암흑기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는 중세 시대의 종교 활동에는 전적으로 라틴어가 사용되었고, 그 성경조차도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다는 점입니다. 라틴어는 문학 언어인 고전 라틴어와 일반 대중들이 사용한 민중 라틴어가 있었습니다. 유희수 작가에 의하면, 9세기 이후로 민중 라틴어가 로망스어로 분화되면서 일반 성도들은 고전 라틴어로 전해지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투르 공의회(813년)에서 주교들이 민중 언어로 설교할 것을 주장했지만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일반 성도들은 라틴어를 몰랐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비싼 그 성경[필사본]을 집에 비치해 둘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이 말씀을 잘 이해했을 리 만무합니다. 그저 사제들이 말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인식했고, 온갖 미신적인 사상들과 이단 사설들에 좌지우지되기 일쑤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중세의 여성들”을 집필한 아일린 파워에 의하면 중세의 여성관은 세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여성을 “악마의 도구이고 열등하면서도 사악한 존재“로 본 것입니다. 즉 아담의 아내인 하와가 사단의 꾐에 빠져 인류에 죄가 들어왔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지요. 그래서 여성은 자기의 근원적인 약점을 인정하고 남성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고 교육받았습니다. 둘째는 첫째와는 다른 극단에 놓인 견해로, “여성성의 우월성”을 고양하는 입장입니다. 바로 동정녀 마리아를 찬양하는 분위기 속에서 마리아를 숭배하듯이 여성을 숭배해야 한다는 측면이 도드라진 것이지요. 셋째는 여성을 동지로 보는 시각입니다. 이 시각은 특히 피터 롬바르드가 여성에 대해 언급한 내용 속에 잘 담겨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통치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의 머리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또 노예로 만들어질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의 발바닥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동반자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의 옆구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통해 잘 양육 받았거나 그들의 손에 성경이 쥐어져 있었다면, 첫째와 둘째와 같은 극단적인 시각들이 쉽사리 자리 잡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에 무지했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줄 안다는 이들의 극단적인 견해들뿐 아니라 이단 사설을 전하는 이들의 메시지를 물리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중세 시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적인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고대 그리스, 로마 문헌들이 중세 시대에도 이미 전수되어, 라틴어로 번역되고, 필사되고, 토의되었습니다. 학문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급기야 11세기 말부터 유럽 곳곳에 대학이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볼로냐 대학[1088년]을 필두로, 옥스퍼드 대학[1096년], 파리 대학[1150년])이 속속 설립되어 지적 호기심이 많은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활발한 문예 활동이 이루어진 것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스페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번역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라틴어를 사용하던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회교 세계로부터 온 아랍어 문헌들을 접하게 되면서, 더욱 수준 높은 학문적 성과를 구가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당시 회교 지역은 유럽인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문화적 역량을 갖추고 학문적으로 진일보한 세계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럽인들이 “중세 전성기”(1050-1300년경)을 견인해 가는데, 도움을 제공해 준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과학적으로도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역사학자 셉 포크에 의하면, 중세 시대에 기계 시계(mechanical clock)가 최초로 발명되었습니다. 수학과 물리학에서도 큰 진전이 이루어짐으로써, 14세기에는 옥스퍼드 기법(Oxford techniques)을 활용하여 이전에는 양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된 온도나 속도와 같은 것들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광학과 렌즈를 이해하는 측면도 발전되어 안경이 최초로 발명되기도 했습니다. 이 안경은 나중에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여 많은 인쇄물들을 유럽 도처에 보급하는 상황과 맞물려 수요가 급증하면서 더욱 정교한 안경으로 변모했을 뿐 아니라, 망원경과 현미경의 단계로 발전하게 되지요. 광선에 대해 보다 광범위하게 이해하고 빛의 기하학적인 형상을 묘사한 것은 애초에 회교도 학자들의 업적이었지만, 결국 이런 지식들이 유럽 사회로 유입되어 중세 시대를 더욱 풍요롭게 했습니다. 중세 학자들의 과학적인 이해와 산물들은 중세의 문화를 과학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과학적 측면들은 중세 미술과 문학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셉 포크가 중세 시대를 “광명기”(The Light Ages)라고 일컬으면서 동명의 책을 저술한 것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중세의 과학 연구는 소박했고, 익명의 인물들이 기여했으며, 이전 학자들의 연구에 근거하여 조금씩 앞으로 진전되는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런 중세의 과학 지식이나 그 활용상은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웃음거리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특히 과거에 살던 사람들에 견주어 자기들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과학 지식을 무시하거나 그 동시대인들의 사상을 어리석다고 규정하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야기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잘못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결국엔 과학 연구할 수 있는 능력조차 잃게 됩니다. 지난 과학의 역사는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과학자들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여겨 모든 것을 다 접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계속 진전되어 왔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경우도 있었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발하고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과학 시대를 번번이 펼쳐왔습니다. 이런 역사가 주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중세 시대를 포함한 역사의 전 과정에서 이루어진 과학 지식과 업적을 존중하면서, 그것들 중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겸허한 자세로 접근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과학 지식과 업적에 대해 미래 세대가 비웃을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측면에서 모범을 보인 과학자를 들라면, 다음과 같은 자세를 견지한 아이작 뉴턴(1643-1727)이 그 적임자가 아닐까 합니다. “내가 더 멀리 봤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은 덕이다.”(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아이작 뉴턴, 1675) 자기가 이룬 것들이 이전 시대에 이루어진 과학적 지식과 업적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는 점을 시인한 것이지요.
-르네상스에 낀 거품 제거하기-
도현신 작가의 "르네상스의 어둠"을 읽어 보면, 르네상스가 이성과 빛으로 가득 찬 시대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우선 그는 중세에 대한 편견부터 바로 잡습니다. 중세 관련 서적을 집필한 프랑스의 장 베르동(Jean Verdon) 교수와 같은 최근 서구 학자들에 의하면, 중세는 결코 암흑기로 불릴 수 없으며 그 시대에도 나름대로 문명이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중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종교를 무시하고 이성을 절대시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산물이라고 명토 박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도 작가가 제시해 주는 르네상스 시대의 구체적인 실상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시대에 르네상스의 모토[“근원으로 돌아가자”]에 걸맞게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부활을 꾀하려는 시도가 전개되긴 했지만, 그 고전 문화가 르네상스에 끼친 영향은 예술 분야, 특히 회화와 같은 예술 분야로 국한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없었고, 그것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군사, 사회면에서도 그리스와 로마와 관련되는 부활의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고대 문명의 핵심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민주정치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 중에서는 ‘시뇨리아’(signoria=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시뇨레[군주]가 다스린 정부)라는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여럿 있었을 뿐입니다.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과 같은 다른 주요 유럽 국가도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권이 강화된 절대왕정만이 주름잡고 있었으니까요.
군사적인 부문에서는 약간 다른 면모를 보였습니다. 중세 시대 군대의 주력을 이루고 있던 무장 기사들 자리를, 장창(長槍)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차지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정만으로 갑자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그리스, 로마의 군사적인 전통이 부활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고대 게르만족이나 바이킹의 경우에도 창과 방패로 무장한 보병이 활약했고, 중세 시대에도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창과 방패로 무장한 보병이 한데 뭉쳐서 전열을 형성한 '방패벽' 전술을 오랫동안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활은 없었습니다. 그 고대 시대의 다신교적 경향이 종교적인 관용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추정과는 달리, 유럽인들은 르네상스 기간뿐 아니라 절대왕정의 시대로 접어든 17세기에조차도 기독교 이외의 다른 신앙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당시의 가톨릭은 개신교도 인정하지 않아 르네상스 기간 내내 곳곳에서 알력과 충돌이 이어졌습니다. 1529년 카를 5세[혹은 카를로스 1세]가 보름스 칙령을 발표하여 루터를 범죄자로 정죄하면서 개신교를 탄압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1531년에는 개신교 신자인 귀족들이 가톨릭 세력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을 체결했습니다. 이러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1572년 8월 22일에 벌어진 '성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프랑스 전역에서 칼뱅파 개신교도인 위그노가 남녀노소 구별 없이 가톨릭교도에 의해 무참하게 살육당했습니다. 그 희생자 수는 무려 7만 명에 달했습니다.
17세기 들어서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17세기 중엽의 잉글랜드에서는 성공회 신자가 아니라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개신교에 관해 관용을 베풀던 낭트칙령을 폐지해 버렸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러한 종교적 충돌의 결정판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진행된 “30년 전쟁”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과 중부 유럽에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에게 끔찍한 살육전을 벌인 시대였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르네상스 시기야말로 중세 시대보다 더 극단적인 종교적 광신이 주름잡던 시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이 시기에 종교적으로 이루어진 가장 큰 문화적인 흐름은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리스, 로마의 신앙을 되살리려는 시도 대신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개혁하여 새로운 기독교 신앙을 형성하려는 종교개혁의 노력이 각지에서 열화와 같이 타올랐던 것입니다. 이렇듯 르네상스를 그리스, 로마 문화가 부활한 시대로 간주하고 그 시대가 그 문화에 근거한 인본주의나 인간성 해방 운동으로 점철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실상과는 동떨어진 견해입니다.
그 시대는 많은 현대인들이 추측하듯이 당대인들이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문예 부흥 활동에 전념하던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유럽 전역이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잔인한 살육이 자행되던 피의 바다”의 시기였습니다. 더구나 16세기의 유럽인들에게는 또 다른 두려움이 상존했습니다. 오스만 제국과 1512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북아프리카 회교도 해적 세력이었습니다. 전자는 막강한 병력으로 유럽의 동부 내륙까지 쳐들어와 유럽인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후자는 ‘바르바리’(Barbary)로 불리던 해적단으로서 주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유럽의 해안 지대뿐 아니라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잉글랜드 및 북유럽까지 진출하여 노략질과 인신매매를 일삼았습니다. 이들의 약탈과 납치는 1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약 300년간 이어졌고, 그 기간 동안 납치된 유럽인의 수가 무려 125만 명에 달했습니다.
끝으로 그런 와중에 르네상스 시대 유럽인들은 후대의 역사에 길이 오점으로 남을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1492년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에, 유럽 국가들은 속속 그 신대륙 곳곳에 자기들의 식민지를 건설해 갔습니다. 그러던 중 그 신대륙의 식민지에서 일할 노동력이 더 많이 필요해지자, 16세기 들어 자기들이 이미 점령한 아프리카 지역의 거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흑인 노예들과 그들을 착취하던 백인 노예주들의 문제는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인종차별 문제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르네상스는 신본주의적인 중세 시대가 사라지고 그리스, 로마 문화가 부활하여, 인본주의적인 문화와 낭만적인 예술이 주도하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후대, 특히 계몽주의 시대의 인물들이 당대의 사조에 걸맞게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재단한 시각에 불과했습니다. 인격적인 신은 죽었다고 여기고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한 당대에는 통하던 관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시각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과학주의와 합리주의라는 유럽의 성공신화를 합리화할 수 있는 시발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생긴 낙관적인 회상에 불과했습니다. 르네상스의 실상을 파악하려면 그 회상에 낀 많은 거품을 제거해야 합니다.
-커뮤니케이션 혁명-
르네상스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과 회교 세계가 기여한 측면을 비중 있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 두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지식과 문화가 없었다면, 유럽에서 진행된 르네상스는 그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가바야마 코이치 도쿄 대학 교수에 의하면, 이미 9세기에 비잔틴에서는 자체의 르네상스가 진행되었고 7세기에 형성된 회교 세계도 그리스, 로마 문화를 꾸준하게 흡수해오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비잔틴에서는 9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전반에 걸쳐 전란으로 인해 잃어버린 그리스, 로마 고전들을 부활시키자는 운동이 활발했습니다. 회교 세계에서는 그리스 철학, 천문학, 화학, 물리학 지식들이 아랍어로 속속 번역되어 방대한 양의 자료들이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서유럽에서도 중세 시대에 걸쳐 그리스 고전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전통이 있었으나, 점차적으로 비잔틴과 회교 세계로부터 새로운 고전 지식들이 물밀 듯이 유입되었습니다. 당시의 라틴어 세계는 원전의 규모나 지식의 양으로 볼 때, 동방의 아랍어 세계와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요.
가바야마 코이치 교수는 유럽에서 특히 15세기와 16세기에 르네상스가 형성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 “커뮤니케이션 혁명”을 듭니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된 곳을 피렌체나 로마 등과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로 꼽지만, 그 문예 부흥의 분위기가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서유럽으로 퍼진 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기술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판 인쇄술입니다. 15세기 중엽에 그가 이 인쇄술의 실용화에 성공한 이후에, 유럽 전역에 걸쳐 정보의 확산이 가속화되었고 독서의 대중화가 확대되었습니다. 이전에 양피지에 손으로 필사하던 책 제작 상황과 책 수량에 비한다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는 출판문화가 형성된 것입니다. 활판 인쇄 발명 이후 50년 간 출간된 “요람기 책”(incunabula)이 무려 4만 점에 이른다는 점만 주목해 보아도, 구텐베르크의 업적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가 출간한 책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454년경에 제작한 “42행 성서” 180부였습니다. 한 페이지가 두 개의 단으로 나뉘어 있고, 한 단이 각각 42행으로 인쇄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성서가 결국 대중들의 손에 들어갈 것을 예견해 주는 업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직지심체요절”(1377년)이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무려 80년이나 빨리 제작되었지만, 그것은 귀족들을 위한 불교 서적이었던 것에 반해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만인을 위한 신속, 대량 출판 시대의 물꼬를 튼 것이었지요. 그의 인쇄 기술이 널리 전파되면서 50년 만에 무려 100개의 인쇄소가 설립되어 무려 900만 부나 되는 출판물들이 인쇄되었다고 합니다. 그 인쇄업자들이 찍어낸 자료 중에 요하네스 테첼의 면죄부[혹은 면벌부]도 있었고,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격문”(1517년)도 있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두 달 만에 이 격문이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최태성 작가가 지적했듯이, 구텐베르크는 이미 존재하던 금속활자, 프레스기와 종이를 창의적으로 조합한 달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통해서 르네상스가 가속화됨으로써, 16세기의 종교개혁, 17세기의 과학혁명 및 18세기의 계몽주의 운동이라는 열매가 연이어 맺히게 될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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