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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야만의 시대를 뛰어 넘는 교양 소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12. 31.

부조리한 야만의 시대를 뛰어 넘는 교양 소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지금부터 100년쯤 전에 서양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200년쯤 전에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요? 1803년부터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이 1815년에야 마감되면서 파리조약이 체결되고 오스트리아, 러시아 및 프로이센이 신성동맹을 맺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퇴위하면서 혁명이 사라지게 됩니다. 몇 백만이나 되는 건장한 사람들이 죽고, 수백만 에이커나 되는 토지가 황폐한 채로 내팽개쳐졌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유럽 지역 곳곳이 극심한 경제적 결핍을 겪게 되면서, 사람 사는 동네들이 불결하고 무질서했을 뿐 아니라 거리에도 불안과 공포가 넘실댔습니다. 패자도 승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스크바는 잿더미가 되었고, 영국까지도 보리 가격의 하락으로 농부들이 궁핍했고 통제 없는 공장 제도 운용으로 산업 노동자들도 가난과 공포 가운데 일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점심 식사 시간에 먹을 게 없어 한 사람씩 따로 헤어져 몰래 냇가로 가서 냇물을 마시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삶이 이토록 무의미하게 혹은 처참하게 보인 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Never had life seemed so meaningless, or so mean.)고 지적할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 시대에 염세 시인들(pessimistic poets), 염세 작곡가들(pessimistic composers)을 비롯하여 지독히 염세적인 철학자(a profoundly pessimistic philosopher) 한 사람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염세 시인들로는 영국의 바이런, 프랑스의 뮈세, 독일의 하이네, 러시아의 푸시킨이 등장했고, 염세 작곡가들로는 슈베르트, 슈만, 쇼팽 및 베토벤(자기가 낙천주의자라고 믿고자 한 염세주의자)이 출현했으며, 염세주의 철학자로는 쇼펜하우어가 자기 존재를 드러내게 되지요. 혁명은 죽고 현재는 폐허인 상태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그 환멸과 고뇌의 나날들을 종교적 희망을 품고 위로받고 있었으나, 상류층 사람들 대부분은 내세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린 채 황폐한 세상만 바라보고 있던 때, 이러한 염세주의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윌 듀랜트가 언급한 대로였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승리를 거두었고, 모든 파우스트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볼테르는 파괴의 씨앗을 심고, 쇼펜하우어는 그 열매를 거두어들일 운명이었다.”(Mephistopheles had triumphed, and every Faust was in despair. Voltaire had sown the whirlwind, and Schopenhauer was to reap the harvest.)

 

도널드 파머 교수는 쇼펜하우어(1788-1860)의 철학이 독일어권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토마스 만(1875-1955)의 저서들이 그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들 중에서 특히 폐허의 상황하에 있던 200년 전의 쇼펜하우어와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은 100년 전의 토마스 만을 한번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아마도 그들이 창궐하는 코비드 사태로 인해 고통당하는 현재의 세계에 어떤 형태로든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만의 많은 작품 중에 ‘마의 산’을 골랐습니다. 그의 문제적 대표작이기도 했지만, 스위스 다보스에 위치한 요양원에서 고통당하던 환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겪고 있던 병도 대부분 발열과 호흡기 관련 질환이어서 현재 우리의 처지와 잘 상응이 되기 때문입니다.

 

홍성광 번역가에 의하면 “마의 산”은 인간이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풀어 가는 그의 힘, 산문 정신이 그야말로 숨을 막히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9세기 이래의 유럽 소설 기법을 집대성해서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저작이기도 한데다, 그 내용도 쉽게 읽히지 않고 그 속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어 그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합니다. 토마스 만에 대해 그가 지적한 내용 중 주목할 만한 점은 비록 외적인 층위에서는 만이 리얼리스트라고 인식할 수 있지만, 내적인 층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아직 살아 있고, 이제야 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을 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이 그의 메시지에 유념해야 할 또 한 가지 이유입니다. (번역은 ‘을유문화사’<홍성광 역> 판을 활용했습니다.)

 

-“마의 산” 줄거리-

23세인 한스 카스토르프는 사촌인 요아힘 침센을 만나러 스위스 다보스에 위치한 베르크호프 요양원을 방문한다. 애초에는 3주간 머물 예정으로 그곳을 찾았지만 자신의 흉부에서 발견된 증상 때문에 그곳에 더 오래 머물게 된다. 그 요양원이 해발 1,600미터나 되는 산지에 있기도 하고 다른 곳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요양원의 성격을 고려하여, 그곳 환자들은 그곳을 위 동네로 부르고 아래 세상을 아래 동네로 부른다. 전 유럽 곳곳에서 몰려 온 환자들은 대부분 경제 사정이 좋은 사람들로서 숨 쉬기는 힘들지만 깨끗한 공기가 제공되는 그곳에서 치료받는 일정을 제외하면 하루에 다섯 번 식사를 하고 약간의 산책을 한 뒤 누워 안정을 취하는 일과를 취하고 있다. 한스가 여행한 때는 7월도 막바지에 들어선 한여름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계절이 딱 구별되지가 않고 계절이 서로 뒤죽박죽이 되어 달력대로 기후가 변하지 않았다. 대체로 눈이 안 오는 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데다가, 겨울 같은 날씨, 여름 같은 날씨, 봄 같은 날씨, 가을 같은 날씨는 있지만 사철이라는 것은 없었다.

 

한스는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접한다. 그 요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로 수술의 대가인 베렌스와 그의 조수로 환자들의 정신을 분석하는 크로코프스키를 만난다. 아주 어린 소녀 적에 폐 요양원에 들어와 그 뒤로 한 번도 바깥세상으로 나가 보지 않는 서른 살 가량 된 숙녀도 보고, ‘홀 아가씨’로 불리는 여종업원 외에 다양한 종업원들도 접한다. 한쪽 폐가 망가진 ‘쪽폐클럽“ 회원이라는 환자들도 만난다. 대화가 끝나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베르타 간호원도 만난다. 3년간 요양했으나 가망 없이 내버려진 상태에서 날카로운 칼과 장전된 총을 가지고 장난치는 알빈의 기행도 접한다. 이제는 신물이 나서 어찌할 수 없어 그런 식으로 자기 자유를 누리고 있으니 관대히 보아 달라는 그의 말을 듣는다. 다 낫고도 하산하려 들지 않는 환자 이야기도 듣게 된다. 고위 공무원의 딸인 오틸리에 크나이퍼는 그곳에 일 년 6개월가량 있었는데, 그곳 생활에 훌륭하게 적응해서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후에도 결단코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고 하면서 ‘여기가 내 고향인데요!’라고 항변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러시아 출신인 클라브디아 쇼샤를 접하고 난 후 한스는 그녀를 흠모하게 된다. 유부녀로서 요양 중인 그녀는 처음에는 한스의 경멸의 대상이었다가 나중에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요양원에 온 지 7개월 되는 시기에 맞게 된 사육제 날에 한스가 그녀를 ‘당신’ 대신 ‘너’라고 부르며 사랑 고백을 한 후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지만 그녀는 그 이튿날 그곳을 떠난다.

 

한스는 그곳에서 수시로 죽은 사람들을 접한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재빨리 2인용 경주용 썰매로 이송하여 처리하는 요양원의 방식에도 익숙해 간다. 사실상 그는 이전부터 죽음의 광경이나 인상에 이미 완전히 친숙해진 상태였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가 자기가 5세와 7세 되던 해 짧은 간격을 두고 세상을 떠났을 뿐 아니라, 엄격한 보수적 성향을 띤 개혁적인 칼뱅파 교단 소속으로 전형적인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할아버지도 그 얼마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는 부자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40만 마르크의 상속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에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는 여건에 놓여 있었고, 상류 계층이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세련된 교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학창 시절에 한두 번 낙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천재도 멍청이라고 할 수도 없는 평범한 지능의 소유자였다. 지인의 제안으로 조선소 기사가 되기 위해 시험을 치르고 한 조선소에서 실습 교육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아직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으나 화가가 되겠다는 과대망상을 품거나 화가가 되어 굶어 죽겠다는 생각을 한시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섬세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치아가 약하고 빈혈기가 있는 정도였으나 흉부에 침윤의 흔적이 발견되어 요양원에 머물게 된 것이었다.

 

한스가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 가장 깊은 연관을 맺은 인물들을 꼽자면 우선 사촌 요아힘이 있다. 군인 출신인 그는 좀 더 빨리 건강한 상태에 도달해서 군 복무에 임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양원에서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함부로 낭비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일단 요양 근무를 양심껏 엄수했다. 빨리 병이 낫고 싶다는 염원 때문이기도 했지만, 요양 근무 그 자체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결국 요양 근무도 요아힘에게는 일종의 군복무였고, 의무 수행도 군무를 수행하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년 6개월이 지나도 별 차도가 없자, 조바심이 난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관후보생으로 귀대해 버린다. 요양원에서는 탈주로 여기는 행위를 감행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소위로 임관한 후 신체에 탈이 나서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내 목숨을 거두고 만다.

 

다음으로는 이탈리아 문필가인 로도비코 세템브리니가 있다. 그는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고전문학자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카르두치의 부고 기사를 쓴 전력이 있는 문필가였다. 자칭 인문주의자이자 교육가로 자처하는 이 인물은 한스를 자신의 제자처럼 여기면서 다양한 문제에 대해 자기 시각을 펼치면서 그를 교육시키려고 한다. 인문주의자들의 혈관에는 모두 교육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강변할 뿐 아니라 자기도 인문주의 교육의 신봉자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한스도 그가 인문주의적 교육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제를 고상하게 만들고 이야기와 추상적인 이론을 교대로 섞어 가면서 지속적으로 자기에게 교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에는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있을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가 프리메이슨 회원임이 밝혀진다.

 

그가 요양원에서 벗어나 그 근처에서 홀로 살고 있을 때 그 지역으로 이주해 온 레오 나프타라는 신부 또한 한스에게는 소중한 스승이 되었다. 어떠한 주제가 등장하더라도 세템브리니와 대척적인 입장에서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개진하던 그는 유태계 폴란드인으로서 예수회 출신이자 신비가이자 허무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였다. 세템브리니가 시민적 세계 공화국을 주장하면 나프타는 교권적 사해동포주의를 주장하는 식으로 그들 간의 논쟁은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런데 어느 날 열띤 토론 중에 세템브리니가 그를 모욕하는 말을 내뱉자 참지 못하고 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정작 결투장에서 세템브리니가 자기에게 총을 쏘지 않고 허공에 대고 발사하자, 그는 도리어 자기 머리에 대고 총을 발사해 사망하고 만다.

 

이 두 사람이 서로 티격태격하며 토론의 장을 펼치던 시기에 요양원에 등장한 인물이 한 사람 더 있었다. 한스가 짝사랑하는 애인이었던 쇼사의 새로운 남자 친구로 군림한 민헤어 페퍼코른이었다. 그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자바에서 커피를 재배하던 사업가로서 그곳에서 한몫 잡아 평생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해 둔 네덜란드인 거부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지식인이었던 세템브리니나 나프타와는 다른 결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한 그의 등장으로 요양원의 분위기는 쇄신된다. 그가 통 크게 한턱 쏘는 날에는 온 환우들이 모여 카드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그의 비용으로 다 함께 근처에 있는 폭포 관광에 나서기도 하면서 친목을 도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세템브리니나 나프타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다가도 그가 옆에서 걸어가는 경우에는 그 인물의 존재로 인해 그들의 논쟁이 공허한 것이 되는 경우가 여러 번 발생하기도 한다. 논쟁을 벌이는 두 사람 사이에 더는 불꽃이 튀지 않았고, 섬광이 번쩍거리지 않았으며, 전류도 흐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과는 연적의 관계에 있었지만, 한스는 그가 자신에게 마치 아버지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그 풍채와 어투에서 풍기는 위대한 인물로서의 자질에 감복하여 그와 솔직한 인간관계를 지속해 간다. 그런데 그는 말라리아열로 계속 시달리던 중 건강이 버텨주지 못해 고전하던 중 스스로 자살하여 목숨을 끊게 된다.

 

이렇게 서로 대조되는 지식인들과 다양한 인물들의 의견과 삶의 방식을 접한 한스는 나중에 가서는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면서도 두서없이 횡설수설한다든가 말이 막히는 법이 없이 유창하게 말하는 단계까지 성장하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끝을 맺고는 자신의 구실을 다하는 사나이 대장부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페퍼코른이 자살한 후 무감각이라는 악마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무감각’이라는 이름의 악마와 요괴가 히죽히죽 웃는 가운데 세계가 그러한 상태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았고, 세계가 속수무책으로 고삐 풀린 이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던 중 요양원의 배려로 마련된 축음기는 실의에 빠진 요양원 환자들과 한스를 크게 위로해 준다. 한편으로 환자들은 우표 수집에 열을 내기도 하고 심령술 놀이에 열중하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예상치도 못한 해괴한 일들이 벌어진다. 정신분석을 담당하면서 심령계의 의사로 자타가 인정하는 크로코프스키 박사가 자신이 주기적으로 해 오던 강연을 통해 환자들을 괴이한 방향으로 이끌어 간 것이다. 자신의 연구 분야가 정신 분석과 인간의 꿈에 초점을 맞추면서 진행되었으므로 그는 잠재의식이라고 불리는 어두컴컴하고 광범위한 인간의 영혼을 다룬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그의 연구가 '지하와 지하 무덤'을 연상시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잠재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초의식(超意識)이라고 불리는 이 잠재의식의 세계는 그의 연구 과정에서 곧 신비적인 것으로 밝혀진다. 결국엔 천리안을 가진 처녀, 즉 모든 목소리를 다 알아듣는 처녀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면서, 엘렌 브란트라는 여성을 통해 죽은 자를 교령술로 불러 내는 일까지도 감행한다. 그리하여 죽은 요아힘을 불러내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한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베르크호프 요양원에는 어떤 유령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스는 이 유령이 자기들이 한때 그것의 간악한 이름을 들추어 말한 적이 있는 악마의 직계일 거라고 어렴풋하게 느낀다. 그것은 뭐라고 이름 붙이기가 난감한 불안 상태, 전투적인 상태, 아슬아슬한 흥분 상태였다. 서로에게 분노를 폭발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격투를 벌일 듯한 상황이 전개되는 게 일상사였다. 개인 간에 혹은 전체 집단 내에서 고함이나 격렬한 언쟁이 오갔을 뿐 아니라, 그러한 사태에 연관 없는 사람들조차도 언짢은 기분이 빠져 함께 흥분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그럴 때 그들의 입은 일그러지고 눈은 번득이고 얼굴은 창백해지며 몸은 부르르 떨었다. 세템브리니와 말다툼을 하다가 결투로 연결되어 결투장에서 나프타가 자기 머리를 쏘아 버리는 사건도 이런 와중에 발생한 것이다. 애당초 3개월 머물 요량으로 요양원을 찾은 한스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결국 7년 동안이나 그곳에 머물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천지를 요동치는 소리를 듣는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이었다. 지구의 기반을 뒤흔들어 버린 역사적인 재앙으로서 “이는 ‘마의 산’을 폭파하고, 7년 동안이나 단잠에 빠져 있던 한스를 성문 밖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쳐 버린 청천벽력이었다.” 그 순간부터 한스는 요양원 환우들이 아래 동네의 그 청천벽력에 모두 정신이 나간 채 무모하게 그곳을 떠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을 보았다. 자기들이 ‘고향’으로 여겨 온 요양소는 "공황 상태에 빠진 개미떼" 같았다. 그들은 6천 미터의 높이에서 격렬한 시련이 전개되고 있는 평지로 곤두박질하여 추락해 갔다. 한스도 이들과 함께 추락해 갔다. 그리하여 한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전장 한 복판으로 나아간다. 축음기로 들었던 슈베르트의 "보리수" 가사를 읊조리며 “아비규환 속으로, 빗속으로, 어스름 속으로 우리의 눈에서 사라져 간다.”

 

-병적인 유럽 사회상-

데이빗 웰버리 교수에 의하면, 잠깐 동안 머물려고 방문한 요양소에서 무려 7년 간 거주하게 되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개인적 상황은 1907년에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그 7년간의 유럽 상황을 묘사하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떠한 심적 상태가 그렇게 엄청난 세계적이고도 폭력적인 파국을 낳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토마스 만이 기울인 노고가 그 속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홍성광 번역가도 이와 비슷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이 소설에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유럽 세계의 정신이 총체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럽이 품고 있던 심리 상태를 엿볼 수 있는 장면 한 곳이 있습니다. 한스가 요양원에 도착한 후 세템브리니를 처음 만났을 때 한스가 건강한데도 그곳을 방문했다는 말을 듣고 그가 한 마디 건넵니다. “저승을 찾아간 오디세우스처럼 말입니다. 참 대담도 하시군요. 망자들이 취생몽사하는 이곳 심연으로 내려오시다니요.”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1,600 미터 고지인데 어떻게 심연이라는 표현을 쓰느냐고 한스가 응대하자, 그 인문학자는 “그렇게 생각될 뿐이지요! 단연코 그건 착각입니다.”라고 딱 잡아떼면서 자기들은 “깊은 심연에 빠진 존재들”이라고 언급합니다. 자기들이 좀 멍청해져 있어서 그렇지, 언젠가는 다시 정신을 차릴 날이 올 것이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세템브리니가 그 요양원을 ‘망자들이 취생몽사하며 사는 곳’이라고 언급한 것은 당시 유럽 세계를 묘사하는 주요한 비유가 됩니다. 이 표현이 과하다고 생각된다면, 그곳 환자들의 일상 중에 가장 공을 들이는 중요한 일과를 보면 더 잘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식사하고 치료 받는 시간 외에 하루에 세 시간씩이나 요양소 발코니에서 누워 깨끗한 공기를 쐬는 일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수평 생활”(The horizontal way of life)이라고 부릅니다. 그 시간 동안 취하고 있는 자세 때문에라도 꿈과 몽상으로 빠져드는 게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일과는 죽음의 상태와 유사한 자세를 취하며 유지하는 취생몽사의 상황인 것입니다. 한스가 처음에 요아힘에게 “여기서 테니스는 안 하는 모양이지?”라고 묻자, 요아힘이 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면서 던진 말이 이러했습니다. “우리는 누워 있어야 하거든. 언제나 말이야. 세템브리니는 늘 우리가 수평으로 살아간다고 말하지. 그의 시시껄렁한 재담에 따르면 우리는 수평 인간이래.”

 

역설적이게도 그 요양원에서는 건강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두고 멸시하듯이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평지’나 ‘저지’라고 일컫습니다. 그 요양원 내에서도 건강한 사람들이 멸시받는 이상한 상황이 전개되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통용되는 기준에 따라 증세가 가벼운 환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와 업신여김을 당했던 것이지요. 예컨대 “첫째도 체온, 둘째도 체온뿐인 사회”였기 때문에 체온이 낮은 것보다는 높은 게 더 존중받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런 기이한 행태는 요양에 가장 좋은 시기에 요양원을 떠나는 이들의 무모함에서 극적으로 표출됩니다. 거의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지역이지만 해빙기가 있기 마련이어서 그 시기가 되면 요양원 골짜기의 기상 조건이 세계 어디보다도 결핵 환자에게 좋은 상황이 전개됩니다. 그런데 그 시기를 이용해서 요양원 내에서 참고 버티며 그곳 기후가 몸을 회복시켜 주는 혜택을 누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곳을 벗어나는 이들이 해마다 속출하여 요양원이 썰렁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곳 공동묘지에 젊은이들이 그렇게 많이 묻혀 있는 게 납득이 되는 상황이지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선천적으로 법이나 질서라면 뭐든지 존중하는 한스는 이러한 정신에도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고 그 적응되지 않는 생활에 결국 적응하게 됩니다.

 

그 환자들은 요양원에서 지내는 동안에 온갖 불평을 다 해댑니다. 모두들 그곳에서 마치 자기 집에서처럼 편안하게 지내면서도 예외 없이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세템브리니가 말한 대로입니다. “저렇게 게으름 피우는 생활을 하면서도 동정을 받을 권리를 요구하기도 하고, 독설을 내뿜으며, 빈정거리고 냉소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유원지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급기야 “병이 방종의 한 형태”라는 폭탄선언을 합니다. 즉 병이 방종에서 생긴 게 아니라 방종 그 자체라는 말이지요. 이 말이 계속 한스의 뇌리에 남아 나중에 자기가 짝사랑하는 애인인 클라브디아 쇼사의 상태에 대해서도 동일한 시각을 적용하게 됩니다. 그녀가 그 요양원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여러 번씩이나 살아간 것을 고려해 볼 때 희망도 없을 정도로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병이 전적으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을지라도 대부분은 윤리적 결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세템브리니의 말처럼 “그녀의 병은 ‘방종’의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방종과 동일한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었지요.

 

어처구니없는 이러한 상황 묘사는 당시 유럽 상황에 대한 토마스 만의 복선이었습니다. 로널드 웰즈에 의하면, 19세기는 세계 평화의 시기였습니다. 기독교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서양 역사는 사실상 계속적인 전쟁의 역사였지만, 19세기의 특징 중의 한 가지가 바로 비교적 전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1914년까지는 비교적 조용한 시기였습니다. 전쟁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생산 활동에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19세기 초기에는 전쟁의 여파로 모두 신산한 삶을 영위해야 했지만, 해가 갈수록 생활수준은 계속적으로 향상되었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긍정적인 사회 변화를 더욱 촉진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유럽은 그 인구도 두 배로 늘어 4억여 명이 되었습니다. 경제 성장으로 인해 양질의 영양 공급이 이루어지고,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양질의 위생 시설, 의료 시설 등이 제공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부유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들을 일반인들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지요.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재화와 새로운 상황을 창출해 내었고,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새롭고 더 나은 생활의 징조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회적 진보에 대한 믿음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세계가 더 훌륭한 세계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행복’에 대한 계몽주의의 희망이 실현될 수도 있으리라고 믿게 된 것이지요.

 

이런 19세기 유럽의 시대적 상황을 토마스 만은 취생몽사의 사상과 행태가 지배하는 베르크호프 요양원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유럽인들은 한 마디로 방종이라는 병에 걸린 환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유원지 같이 편안한 환경 속에 살면서 온갖 것에 대해 불평해 대고, 병들지 않은 사람들을 폄하하고, 자기들이 걸린 병을 낫게 하는 환경을 거부하고, 누가 더 상태가 심각한가로 경쟁하면서 하루 종일 평행 상태로 누워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평가가 온당한 것일까요? 이것이 그러한지 계속 독해해 보겠습니다.

 

-이성적 계몽주의의 한계-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던 19세기 유럽 사회는 사회적 진보에 대한 믿음, 즉 언젠가 ‘행복’에 대한 계몽주의의 희망이 실현될 수도 있으리라는 믿음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말씀을 앞에서 드렸습니다. 베르크호프 요양원 환자들에 대해 폄하하는 발언을 해 대던 인문주의자 세템브리니의 지론은 이렇습니다. 무지한 지난 세월 동안 인류의 영혼에 깃들어 있던 미신적이고도 맹목적인 생각을 이성과 계몽이 계속 투쟁하여 쫓아내고 있다. 이런 싸움이 바로 “지상의 일이자, 지상을 위한 일이며, 인류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일”이며, “이성과 계몽이라는 두 힘은 그러한 싸움을 하면서 나날이 새롭게 단련되어 언젠가는 인간을 완전히 해방시켜, 진보와 문명의 길 위에서 더욱 밝고 부드러우며 순수한 광명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스와 같은 재능 있는 젊은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그가 백지 상태가 아니라, 마치 은현잉크로 이미 모든 것이 쓰여 있는 종이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교육자가 할 일은 옳은 것을 단호하게 육성하고, 잘못된 것이 싹트려고 하면 적절하게 영향력을 발휘하여 영원히 그 단초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그는 바로 그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가 회원으로 가입한 ‘진보 촉진 국제 연맹’은 한 가지 원칙과 목표 두 가지를 품고 있습니다. 그 원칙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이끌어 낸 것으로 인류의 가장 내적인 자연적 소명은 자기완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원칙에 근거하여 이 연맹은 두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째 목표는 자연적 소명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모든 사람의 의무로서 인류의 진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연맹은 시민 대학을 설립하고, 유효적절한 일체의 사회적 개선을 통해서 계급투쟁을 극복하며, 국제법을 발전시켜 민족 투쟁과 전쟁의 제거를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둘째 목표는 목적에 입각한 사회 활동을 통해 인류의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연맹은 이러한 지고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완전한 국가 설립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사회학적인 학문의 도움을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진리를 명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상적 이념을 견지하고 있던 세템브리니는 당시의 세계정세에 정통한 모습을 보이며 제반 정세가 문명의 길에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유럽의 전체 기상도는 평화 사상과 군축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주장하면서, 민주 이념이 진군을 계속하고 있다고 자평합니다. 터키를 예로 들면서 “터키가 민족 국가이자 입헌국으로 바뀐다는 것이 인간성의 승리가 아니겠는가!”라고 감격합니다.

 

이성과 계몽이 인류 역사에 끼친 긍정적인 열매는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인 인류의 사고와 행태를 바로잡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그것들을 계도하여 보다 진전된 문명사회로 진입하도록 인류를 이끌었다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17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8세기에 활짝 꽃 피운 계몽주의 시대는 전근대적인 어둠의 세계, 즉 봉건적이고 종교적인 권위나 특권이나 압제나 인습을 타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성에 경도된 정신이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인간의 죄성과 보편적인 도덕 원리와 초자연적인 영적 실재를 무시하고 치달은 결과 인류가 체험한 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명이 살상되고 문명 사회의 기반이 파멸된 현장이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1800년대 초기의 전쟁과 그 상흔이 그 참혹한 살상과 파멸의 맛보기였습니다. 그것이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 소설가, 음악가들을 염세주의로 빠져들게 한 신산한 현실이 되기도 했습니다.

 

1900년대 초기의 제1차 세계대전은 그 이전의 전쟁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가공할만한 파멸을 노정했습니다. 세템브리니가 ‘평화 사상과 군축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상찬했던 유럽 전체의 기상도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네 개의 제국들, 즉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오토만 터키 제국은 세계대전 후에는 모두 멸망해 버렸으니까요. 승전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도 엄청난 승리의 대가를 지불한 탓에 국내 사정은 패전국들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시기에 희생당한 이들의 통계는 우리를 전율하게 합니다. 총 9백만 명의 전투원이 사망했고, 2천만 명의 전투원이 부상당했으며, 또 다른 2천만 명이 장기적인 심리적 피해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민간인들도 영양실조로 인해 연약해졌을 뿐 아니라 전쟁 말기에 유럽을 휩쓸어 버린 ‘스페인 독감’(Spanish flu) 혹은 ‘1918년 인플루엔자 대유행병’(1918 flu pandemic)으로 인해 약 2천만 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진보를 도모하고 인류의 고통을 제거하겠다는, 인본주의적이고도 이성적인 계몽주의의 참혹한 결말이었습니다.

 

나르시시스트(narcissist)다운 인간의 오만한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된 소설 속 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어느 부활절 아침에 요양원 환자들이 물들인 달걀을 하나씩 받고 점심 식탁에는 설탕과 초콜릿으로 만든 토끼가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세템브리니가 그전에 커다란 기선에서 생활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몇 주 동안 소금물의 황야에서 광막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떠다니면서, 사정에 따라서는 완전하고 편리한 시설도 바다의 광대무변함을 다만 피상적으로만 잊게 해 줄 뿐, 마음 깊은 곳에서 은밀한 공포가 의식을 야금야금 갉아먹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한스는 그런 안락한 시설 자체가 외설적이고 도발적으로 느껴질 뿐 아니라 ‘나는 바빌론의 왕이니라!’라고 소리친 것과 같은 인간의 오만함이 느껴진다고 응대합니다. 그렇지만 선상에서 누리는 그런 사치스러운 생활은 “인간 정신과 인간의 자존심의 위대한 승리를 내포하고 있다”라고 평가합니다. “인간은 이런 사치스럽고 안락한 생활을 소금물의 거품 위에까지 확대하여 거기서 이런 대담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그들은 말하자면 자연력, 자연의 맹렬한 힘을 정복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혼돈에 대한 인간적인 문명의 승리를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읽을 때 문득 떠 오른 생각이 있습니다. 코비드 사태 초기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침범하여 격심한 고충을 겪은 일본 대형 크루즈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였습니다. 그 선상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하여 무려 705명이 감염되고 그중 6명이 사망했지요. 바다를 운행하기만 하는 거대한 선박이 ‘자연의 맹렬한 힘을 정복’하고 ‘혼돈에 대한 인간 문명의 승리’를 노정한다고 자평한 오만한 인간의 비참한 실상이 온 천하에 드러난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바이러스 하나가 침투해 들어오자 맥도 못 추고 집단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면서 다들 그곳을 탈출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을 보았지요.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요, 기괴한 자신감인지 모르겠습니다.

 

-파괴적 의지와 왜곡된 사랑-

오만한 이성적 계몽주의가 일정한 수준으로 판을 장악하고 있는 이 소설의 다른 한편에서는 무분별한 정신분석이 현란한 춤을 춥니다. 베렌스의 조수인 크로코프스키 박사가 진행하는 사랑과 병에 대한 정신분석입니다. 그는 우선적으로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의 세계를 규명한 것을 상찬하는 데 열을 냅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모든 본능 중에서 가장 불안정하고 위험스러운 강력한 본능으로 보면서, 이 사랑은 “근본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치유할 길 없는 도착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비록 순결의 의지가 득세해서 그것이 사랑의 힘과 충돌하여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그 승리는 ‘상처뿐인 승리’(Pyrrhic victory)요, 외견상의 승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욕구는 억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억제된 사랑은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있으면서 마음속의 은밀한 곳에서 호시탐탐 그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노리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억압된 사랑이 다시 정체를 드러낼 때의 모습은 다름 아닌 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병의 증상은 가면을 쓴 사랑의 활동이며 모든 병은 모습을 바꾼 사랑”이라는 게 그의 지론입니다. 그런데 이 병이 다시 변모해서 의식적인 욕정이 되기도 한다면서, 믿음을 가지면 정신분석가인 자기가 병을 낫게 해 주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는 이런 내용으로 강연한 후에 마지막에는 ‘구원을 안겨 주는 정신 분석’에 대해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면서 두 팔을 벌리고 모두들 자기에게로 오라고 촉구합니다. “너희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고 외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기 식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환자들 모두 예외 없이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이라는 자기 확신에 조금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메시야라는 것에 대해서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이는 프로이트였습니다. 무의식(unconsciousness)과 억압(repression)이라는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에 대한 이론, 환자와 정신분석자의 대화를 통하여 정신 병리를 치료하는 임상 치료 방식을 창안했기 때문입니다. 의사였던 그는 인간의 질병을 합리주의 방식으로 접근하여, 질병의 발생은 그 배후에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한때 최면요법을 도입했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뛰어넘어 환자들이 억제하지 않은 채 말하도록 하는 것으로 접근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환자들의 생애에 있어서 흔히 성(sexuality)의 문제가 질병에 이르도록 한다는 사실에 새롭게 주목하게 되지요. 그리하여 그는 성욕(sexual desires)을 인간 생활의 주요한 에너지로 새롭게 정의하였고, 치료 과정에서 자유 연상(free association), 감정 전이의 이론(theory of transference) 및 꿈을 통해 ‘억제된 생각과 판타지’(repressed thoughts and fantasies)를 관찰하는 치료 기법을 개발하여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널드 파머에 의하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쇼펜하우어 철학에 힘입은 바 큽니다. 쇼펜하우어가 자기 철학의 주요한 개념인 ‘의지’(will)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현상적인 이미지로 섹스(sex)와 폭력(violence)의 이미지를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약간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쇼펜하우어도 칸트와 같이 현상(phenomenon)과 실재(reality)를 구별하는 사고를 견지하면서 “세상은 나의 표상이다”(The world is my idea)라고 언급했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의미와 표상으로서의 세계”(The World as Will and Idea)에 등장하는 이 표현을 통해, 우리는 궁극적인 실재를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시간과 공간과 오성의 범주들을 통해 형성된 우리 자신의 개념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도 칸트처럼 어떠한 직관적인 경험들이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초합리적인 통찰력(extrarational insight)을 부여해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예컨대 청명한 여름 하늘을 꿰뚫어 보고 있을 때 경험하는 장엄한 감정이나 어떠한 위기의 순간에 경험하는 도덕적 의무감 같은 것들은 알 수 없는 물자체(物自體)의 세계(unknowable noumenal world)에 대한 초합리적인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지적하는 통찰력들은 칸트의 것들과 아주 다릅니다. 갖가지 종류의 인간적 경험으로 인해 쇼펜하우어는 궁극적인 실재의 성격에 대해 칸트가 견지한 것보다 훨씬 더 비관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겉모습 뒤에, 현상적인 베일(phenomenal veil) 뒤에, 본체적인 실재(noumenal reality)가 존재하지만, 그 실재는 거칠고, 격렬하고, 가혹하며 무의미한 힘이 존재하는 곳이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의지”(will)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힘은 모든 것을 창조하고서도 만족을 모른 채 “더 많이!”(More!)를 요구하면서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그리하여 쇼펜하우어는 자연 현상 및 인간의 제반 영역에 있어서 모든 사건은 생식(procreation)이나 파괴(violence)의 행위이며,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우리의 모든 행위는 어떤 방식으로든 생식과 파괴에 기여한다고 보았습니다. 프로이트의 이론 중에 “이드(id)”[자아와 초자아 밑에 있는 원초적 욕구]의 개념의 기원을 엿볼 수 있는 개념 전개이지요. 그 ‘id’'(영어 ’it'에 해당하는 라틴어)라는 이름 자체도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동일하게 그 본체적인 모호성(noumenal indeterminacy)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1920년에 언급한 대로입니다. “우리는 의도치 않게 우리 항로를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항구 속으로 조종해갔다.”(We have unwittingly steered our course into the harbour of Schopenhauer's philosophy.)

 

쇼펜하우어가 씨를 심고 프로이트가 거둔 이 ‘의지’의 사상과 실행을 두고, 과연 인류에게 ‘구원을 안겨 주는 정신 분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쇼펜하우어가 주창한 ‘의지’에 대해 좀 더 논의해 보겠습니다. 그에 의하면 의지는 현상계의 모든 것의 근원적 힘으로서 난폭할(brutal) 뿐 아니라 교활하기(immensely cunning)까지 합니다. 그래서 인간 정신은 자기 위선에 빠질 수 있고 심지어는 자신의 세계관마저도 위선적으로 구성하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이 품고 있는 의지의 실상을 인간이 파악하게 된다면, 자연이 그 피조물의 행복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재생산(reproduction)을 위한 요구만 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승화해서 예술이나 도덕이나 과학 심지어 종교까지도 형성해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입장은 기독교 칼뱅주의 신학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교리와는 판이합니다. 칼뱅주의가 말하는 죄는 맹목적이고도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의도적인 결심을 가리키는데 반해,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그 파괴적이고 교활한 의지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승화의 욕구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과연 의지의 승화마저도 인간 본성에 대한 거대한 사기극(a grand deception)으로 인식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우리에게 구원을 안겨다 줄 수 있을까요?

 

다음으로 소설 속의 크로코프스키 박사가 ‘모든 병은 가면을 쓴 사랑의 활동’이라고 주장한 것이나 프로이트가 ‘성(sexuality)의 문제가 질병에 이르도록 한다’는 주장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아맨드 니콜라이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모든 형태의 사랑을 두 가지 범주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성적(생식기의) 사랑(sexual<genital> love)으로서 남녀가 생식기적 필요 때문에 가족을 이루는 경우에 그들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적 욕구가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사랑(love in which the sexual desire is unconscious)으로서 부모와 자식 사이, 형제와 자매 사이의 긍정적인 감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후자의 사랑은 ‘목적이 억제된 사랑’(aim-inhibited love) 혹은 ‘애정’(affection)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사랑을 온통 성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한 것이지요.

 

프로이트가 주창하는 사랑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사랑과는 차원을 달리 합니다. 예컨대 C. S. 루이스는 사랑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기도 하고 헬라어 전통에 따라 네 가지 종류로 나누기도 했습니다. 두 가지로 나눈 경우를 살펴보자면, 첫째는 ‘필요의 사랑’(Need-Love)으로서 외롭고 겁먹은 아이가 엄마의 품을 찾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선물의 사랑’(Gift-Love)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이 가족의 미래 행복을 함께 누리거나 보지 못하고 죽을 수 있지만, 가족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계획하고 저축하는 사랑입니다. 네 가지로 나눈 경우를 살펴보자면, 첫째는 스토르게(Storge)로 가족 간의 애정, 둘째는 필리아(Philia)로 친구 사이의 우정, 셋째는 에로스(Eros)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 사이의 낭만적인 사랑, 넷째는 아가페(Agape)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에 대한 루이스의 주장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스토르게, 필리아 및 에로스는 일차적으로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는 데 반해, 아가페는 의지에 더 근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주장이 품고 있는 함의 속에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넉넉한 자유가 있습니다. 의지에 바탕을 둔 아가페를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는 소망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느낌을 제어할 수는 없지만, 항상 우리의 의지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말과 행동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We don’t have control over what we feel, but we always have control over our will and, therefore, over what we say and do.) 루이스는 아가페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자연히 갖고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마땅히 가져야 하는 의지의 상태”(a state of the will, which we have naturally about ourselves, and must learn to have about other people)임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둘째는 루이스도 프로이트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라는 성경구절(요한일서 4:16)을 인용했지만, 그 구절을 “사랑은 하나님이시다”(Love is God)라고 번역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는 점입니다. 모든 형태의 인간적인 사랑은 우상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 없는 행동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사랑에 관해 살펴본 것에 의거하자면, 과연 사랑을 오직 성에 관한 것으로 인식하는 프로이트식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시간 개념에 대한 갈무리-

이 소설 속에는 군데군데 시간에 대한 성찰이 자주 등장합니다. 우선 시간이란 우리가 약속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간다고 말하는데, 그것을 측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간이 균등하게 흘러가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균등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가정하는 것은 단지 질서 때문이지, 우리의 의식으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함부르크에서 다보스까지 가는 데 스무 시간이 걸리지만, 마음속으로는 1초도 안 걸립니다. 그리고 한스가 경험했듯이 처음에는 그토록 생생하던 시간 감각이 어느덧 사라져 버리고, 언젠가부터 하루하루가 휙휙 지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루의 개별적인 시간은 늘 새로운 기대로 길어지고 남모를 은밀한 체험에 부풀어 올랐지만 하루하루는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시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성질이 있는 것이다!”라고 고백하지요. 시간에는 눈금도 없고, 달이나 해가 바뀐다고 천둥이나 나팔 소리가 울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새해나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때 종을 치거나 예포를 쏘는 것은 인간뿐이지요.

 

둘째로, 시간이란 되풀이되는 게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환자로서 침대에 누워 보내는 나날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누구에게나 그 기간이 후딱 지나가 버리는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을 고려해 보세요. 똑같은 나날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지요. 인문학자 세템브리니가 한스를 만났을 때 나눈 얘기 중에 시간에 대한 이런 측면을 지적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라는 시간 단위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가장 작은 시간 단위는 달입니다. 우리는 큰 단위로 계산하거든요. 그것이 저승의 특권입니다.” 똑같이 인식되는 나날이 저승처럼 이어지는 요양원의 실상을 지적하고 있지요. 돌이켜 보니 연초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집안에서 지내는 나날이 적지 않았던 올 한 해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가장 작은 시간 단위는 주가 아니라 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시간이 되풀이된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시간을 영원한 현재, 혹은 영원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인식이 중세의 시간관이었다고 토마스 만은 설명합니다. 중세의 학자들은 시간을 망상에 불과하다고 보았고, 인과 관계를 통해 연속되는 시간의 경과도 감각 기관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서, “사물의 진정한 본질은 영원한 현재”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토마스 만은 ‘기다림’의 의미를 재조명합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시간을 앞질러 가는 것인데, 이런 자세는 “시간과 현재를 선물로서가 아니라 장애물로서만 느끼고, 그것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며 이를 마음속에서 뛰어넘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다린다고 해서 지루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짧게 인식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긴 시간 그 자체를 위해 살거나 이용하지 않고, 기다림 자체가 그 긴 시간을 집어삼키는 경우 말입니다. 그래서 만은 “오직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인간의 소화 기관이 이용 가치가 있는 음식물의 영양가를 소화하지 않고 대량으로 걸러 보내는 대식가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역설합니다. 이런 경우는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인간을 더 강하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기다리기만 한 시간은 인간을 늙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셋째로는 시간의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오랜 세월 동안 똑같이 정해진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원에서 요양하는 이들도 그렇겠지만 동일한 업무를 일상적으로 감당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이런 반복되는 일상에 무기력해지고 무감각해집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토마스 만은 이런 감정이 정신적인 것, 즉 시간의 체험에 기인한다고 역설합니다. “매일매일 똑같은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가 시간을 체험하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고, 그 시간의 체험은 생활 감정 자체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한쪽이 약화되면 다른 쪽도 이에 따라서 딱하게도 손상될 수밖에 없는 것”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도도 함께 제시합니다. “다른 생활에 새로이 적응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시간 감각을 새롭게 하여, 우리의 시간 체험을 갱신하고 강화하며 더디게 하여 이로써 우리의 생활 감정을 새롭게 하는”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장소와 공기를 바꾸고, 온천 여행을 하는 것”을 들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목적도 바로 “기분 전환과 부수적 사건을 통해 심신의 회복을 꾀하는 것”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시도를 그칠 때 발생하는 현상을 이 요양원의 장기 환자들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르크호프 요양원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거의 젊은이들인데, “늦어도 반년만 지나면 시시덕거리는 것과 체온 말고는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늦어도 일 년만 지나면 다른 생각은 전혀 품을 수 없게 되고, 다른 생각은 죄다 ‘잔혹하다’고,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잘못됐으며 무지한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야말로 “첫째도 체온, 둘째도 체온뿐인 사회”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요양원에서 한번 살아 본 환자라면 그곳을 “고향”이라고 부르며 지내게 됩니다. 심지어는 병이 다 나았다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향에서 어디로 가란 말이냐고 반문하는 젊은이도 생겨난 것이지요.

 

-생명의 기원과 죽음의 귀착지-

토마스 만은 ‘탐구’라는 장(章) 속에서 생명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합니다. 생명이란 무엇인지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전제한 후, 생명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이 고도로 발달된 구조를 갖고 있어 무생물계에서는 이와 비견할만 한 것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죽음이란 생명을 논리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생명과 생명이 없는 자연물 사이에는 아무리 탐구해도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심연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점도 환기시킵니다. 그러면서 인류가 지금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전례를 들고 있습니다. 우선은 기적과 다름없는 생명 현상을 기적으로 치부하지 않기 위해 자연 발생, 즉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무기물과 유기물의 중간 단계와 그 둘 사이의 이행 과정을 생각해 내어, 알려진 모든 유기체보다 훨씬 하등이긴 하지만 자연에서 좀 더 원시적인 생명 현상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유기체의 존재를 가정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다음으로 더 난감한 문제가 대두됩니다. 즉 비물질에서 물질의 발생이라는 또 다른 우연 발생의 문제가 대두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유기물의 우연 발생보다 훨씬 더 수수께끼 같고 모험적인 과정입니다. 사실상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심연을 메우는 이 문제는 유기 자연과 무기 자연 사이의 심연을 메우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절실한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유기체가 비유기 화합물에서 생기는 것처럼 물질을 생겨나게 하는 비물질 화합물, 즉 비물질의 화학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했으니까요.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생명의 근원에 관해 논의하려면 바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생겨난 것’을 푸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습니다. 둘째는 ‘비물질에서 물질의 발생이라는 또 다른 우연 발생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전자보다 ‘훨씬 더 수수께끼 같고 모험적인’ 사건이지요. 이 두 가지 기적 혹은 사건을 풀지 못하면서 ‘생명의 근원’ 운운할 자격은 없습니다. 유물론자들은 두 가지 사건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건 해결에 진화론을 들먹거리는 일은 비겁한 일일 뿐 아니라 무지한 일입니다. 진화론은 생물학의 원리이지 무기화학의 원리도, 마술의 원리도 아닙니다. 범신론자들도 자기들 주장에 대한 신빙성 있는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우주가 신이요 혹은 물질 자체가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점을 직관만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말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유신론자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시원과 그 종말에 대해 제시할 역사적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연말/연시를 앞둔 이 시기에 이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진지하게 궁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스는 요양원에서 지내는 동안 진행된 뢴트겐 검사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인식하게 됩니다. 즉 그는 빛의 도움으로 나중에 자신의 몸이 분해된 모습을 미리 엿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살이 다 분해되고 소멸되고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상태, “자신의 무덤 속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는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죽을 날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끝나자마자 아마추어 기수인 프리츠 로트바인이 사망하게 됩니다. 그 며칠 전부터 엄청난 산소를 마시며 목숨을 연명하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양원 사람들은 그 일을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하며 쉬쉬했습니다. 한스가 식사 시간에 그의 죽음에 대해 화제에 올리려 하자 이구동성으로 완강하게 거부하여 그는 무안해졌지만 속으로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듣지 않도록 세심하게 보호하는 게 요양원의 규칙이라는 것이었지요. 그때부터 한스는 요아힘과 함께 중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기 시작합니다. 한 가지 이유는 “주위에 만연한 이기주의에 대한 항의”였지만, 다른 이유는 “고통과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존경하려는 정신적 욕구”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요아힘도 반대했지만, 한스의 추진력과 자선에 바탕을 둔 행동력은 그 반감보다 더 강해서 함께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택에 그들은 “사마리아인” 혹은 “자비의 수도회 수사”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수평 생활을 일상으로 취하는 수평 인생들이 사는 곳이라 시시때때로 죽음이 그 요양원을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스와 요아힘이 나중에 방문하게 된 공동묘지에서 발견하게 된 사실은 사망자들 중에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그토록 많았다는 점입니다. 묘비명에는 사망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이름 대신 출신 국가명이 적힌 곳도 있었습니다(예컨대 슬라브인, 독일인, 포르투갈인). 그 묘지 중에는 사망자가 묻힌 날짜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많았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산 기간은 대체로 눈에 띄게 짧았습니다. 보통 20년 정도밖에 되지 않거나, 그것보다 그다지 더 길지 않았던 것이지요. 혈기에 넘치는 무분별한 젊은이들만 그곳에 잔뜩 묻혀 있는 셈이었습니다. “이들은 세계 각지에서 이곳으로 모여들어 영원한 수평 생활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문주의자인 세템브리니는 “죽음을 바라보는 유일하게 건강하고 고귀한 방식은, 게다가 유일하게 종교적인 방식은, 말하자면 그것을 삶의 일부분이자 부속물, 성스러운 조건으로 파악하고 느끼는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예컨대 고대인들은 죽음을 존중할 줄 알았다면서, 그들에게 “죽음은 삶의 요람이자 갱신의 모태로서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삶과 떼어 놓고 보면 유령이자 역겨운 몰골, 그리고 더욱 고약한 것이 되고 만다고 말하지요. 독자적인 정신적 힘으로서의 죽음은 지극히 방종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죽음이 품고 있는 힘의 사악한 매력에 끌려 그 힘에 공감하는 것은 “인간 정신의 아주 고약한 오류”를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다가오는 요아힘의 죽음에 대해서 베렌스 고문관이 위로해 준 이야기 속에서는 약간 다른 시각이 발견됩니다. 오래전부터 죽음의 하수인으로 일하고 있는 자로서 조언한다고 하면서, 자기는 죽음을 알고 있는데 사람들이 죽음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죽음이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령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음에 대해 무언가 제대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는 인식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둠에서 생겨나 어둠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두 어둠 사이에서 우리는 많은 경험을 하지만, 시작과 끝, 즉 출생과 죽음은 체험하지 못합니다. 이 두 가지는 주체적인 성격을 갖지 못하며, 자연적 사건으로 객관의 영역에 속할 뿐입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출생과 죽음은 우리가 결코 체험하지 못하는 영역이라는 베렌스의 말이 심금을 울립니다. 여기서의 출생은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는 출생을 말하기보다는 우리 생명이 시작되는 시원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 생명의 시원과 생명의 종말은 우리가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둠에서 생겨나 어둠으로 돌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롯되고 나중에 귀착되는 그 어둠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유물론적 무신론자들은 그 어둠이 물질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가 물질로부터 비롯되어 물질로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범신론자들은 그 어둠이 물질이자 바로 신이며 우리는 그 신의 꿈이요 환영에 불과한 존재로 결국 그 신에게 합일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유신론자들은 그 어둠은 물질에 생명을 부여한 인격적 신이며 우리는 그 신의 이미지대로 창조된 존재로 결국 그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인생, 아니 영원이 걸린 선택입니다.

 

-부조리한 시대의 야만성 앞에서-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이 문장은 이 소설의 축약판으로 이해되는 ‘눈(雪)’이라는 장(章) 속에서 한스가 스키를 타고 눈 속을 헤매다 비몽사몽의 경지에서 깨닫게 된 사실입니다. 그는 당시에 자기가 오래전부터 이 말을 찾고 있었으며 이것을 발견했기에 꿈을 끝까지 다 꾸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라고 여깁니다. 이 문장의 중요성은 이 소설 속에서 토마스 만이 이탤릭 체로 써서 강조해 둔 유일한 문장이라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 문장을 두고 안삼환 교수는, “그가 7년 동안의 취생몽사 끝에 마침내 얻게 된 깨달음이 전사 직전에 처한 그의 상황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라고 질문한 후,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그의 ‘마의 산에서의 체험’을 추체험(追體驗)해 가면서 정신적 고양(高揚)을 얻게 된다.”라고 지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깥 세계와 차단된 ‘죽음’의 공간에서 역설적이게도 ‘삶’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은 독일 교양소설의 변종의 하나인 ‘성년식(成年式) 소설’로도 읽힌다.”라고 이 소설의 의미를 독해합니다.

 

그렇지만 한스가 중환자들을 찾아 위로한 것은 이 경험을 하기 전이었습니다. 요양원 주위에 만연한 이기주의에 대해 항의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런 일을 감행한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환우들이 겪는 고통과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존경하려는 정신적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이러한 한스의 선행을 그의 스승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세템브리니가 비아냥거렸다는 점입니다. “자기 행실로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것인가?”라고 물으며 한스를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자기는 고작 공상적인 사랑에만 매몰되어 있으면서도 인류를 사랑한다는 자부심으로 충일해 있는 주제에 정작 실천적인 사랑을 베풀기 위해 진력하는 제자 한스를 비웃는 이 인문주의자 인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렇지만 한스는 세템브리니의 관점이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그 일을 그만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우선은 자신에게 그 계획이 여전히 무언가 유익하고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지만, 결국 설원 속에서 깨우쳐 뼈에 새긴 교훈(“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을 미리 실천에 옮긴 셈입니다. 더구나 그의 경건한 이웃 섬김은 내적인 만족감으로 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중환자들을 도우면서 그가 느낀 만족감은, 비록 비유적이고 관계가 복잡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직접적이고도 순수한 성질을 띠고 있기도 했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결국 한스가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은 것은 설원에서였지만 그는 그 “마의 산”에서조차 계속 성숙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선전포고가 내려지던 때 그는 자신이 “마법의 저주에서 풀려나 구원되고 해방된” 것을 절감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가망이 없었던 부조리한 시대를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인생의 진실과 사랑의 의미에 눈을 뜨고 난 후 급기야 인생을 옥죄고 있던 마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마의 산”에 입산한 지 7년 만인 30세에 구원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스가 눈앞에 펼쳐진 전장(戰場)이라는 야만적인 세상을 노래하며 진군하는 이유입니다. “가지에 새겨 놓았노라/수많은 사랑의 말을”, “가지가 살랑거리네/나를 부르는 듯이.”

 

새해를 목전에 두고 있지만 연초부터 몰아닥친 코비드 팬데믹의 길목에 여전히 서 있습니다. 초유의 사태로 여겼지만 제가 인생을 너무 짧게 산 데다 너무 좁게 본 탓이었습니다. 100살이나 살았어도 사정은 오십보백보입니다. 100년을 넘어 그 이전 시대를 돌아보지 못하면 맹인이긴 매한가지입니다. 결국 얼마나 나이 먹었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 멀리 돌아보았고 돌아보려고 하느냐가 핵심이 됩니다. “마의 산” 독해를 통해 200년 전까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것도 서양 세계만 일별했지만 얻은 수확이 쏠쏠했습니다. 밝아 오는 새해에는 보다 멀리 돌아보고 보다 넓게 둘러보는 복을 누렸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누리시고 많이 나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