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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시(時)-장기적 시간 관점을 품으라

친구의 소천과 우리 각자의 “구원 사업”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6. 8.

친구의 소천과 우리 각자의 “구원 사업”

지난 주말에 고향인 부산을 다녀왔습니다. 사랑하는 고교 동기 친구가 이 세상을 뒤로하고 하늘나라로 향했기 때문입니다.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말문을 잃은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였습니다. 작년 혹은 재작년에 환갑을 맞은 친구들입니다. 작년에 환갑을 맞은 저는 이제 언제 세상을 떠나도 여한이 없다고 여기고 있던 차였습니다. 정작 사랑하는 친구의 부음을 접하고 보니, 슬픈 마음이 앞을 가리기만 했습니다. 고교 동기이자 소천한 친구의 사촌인 친구로부터 그간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항상 담담하게 밝은 얼굴로 만나 대화하던 그 친구에게 그렇게 어려운 삶이 전개되고 있었는지 그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만날 때마다 저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여 주었지만, 그 친구가 자기 이야기는 좀처럼 털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간의 세월이 안겨다 준 마음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다른 친구들이 한결같이 나눈 얘기는 소천한 친구의 관대한 면모였습니다. 동창회 기금을 쾌척하기도 하고, 누구와 만나도 항상 자기가 먼저 지갑을 열었다고 합니다. 동석한 한 친구는 소천한 친구가 언젠가 만났을 때, 하룻밤 쉬고 가라면서 전망 좋은 호텔 방 한 곳을 잡아 주어 호강했다는 얘기를 추억담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친구는 제게도 관대했습니다. 2012년에 저희 가족이 잠시 귀국했을 때, 그 친구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고교 졸업 후 처음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제게 선약이 있어, 함께 식사는 나누지 못하고 잠깐 차를 한 잔 나누며 담소하게 되었지요. 그때 그 친구는 저희 부부가 날을 잡아 건강 검진을 꼭 받고 가라고 강권했습니다. 특히 이번 기회에 위와 대장 내시경을 꼭 받으라면서, 날짜가 정해지면 자기가 다 예약해 두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일정을 조정하게 되었지요. 7월 31일에 그 병원 근처에서 일박을 하면서 내시경 검사 받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 이튿날에 병원으로 직행해서 건강 검진을 받았습니다. 간호과장님이 직접 저희를 안내해서 검진을 진행해 주신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특급 대우를 받으며 내시경 검사까지 잘 마쳤고, 융숭한 점심 식사까지 대접 받았습니다. 그 검사 결과 제 대장에 용종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혈액 중 헤모글로빈 수치가 너무 낮다는 위험 신호도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모르고 있던 건강상의 적신호를 적기에 인식할 수 있었던 데는 그 친구의 덕이 컸습니다. 저희가 두고두고 그 친구에게 감사하며 그를 잊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간소하게 진행한 이번 장례 절차에서 각 단계마다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안타까운 모습으로 고인을 기리던 분들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친구의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직원 분들이었습니다. 친구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하는 순간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가눌 길 없는 슬픔을 나누던 그분들을 보며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평소 병원에서 근무하던 친구의 숨겨진 면모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을 가족처럼 대해주면서 그들의 필요를 따뜻하고도 세심하게 살펴 주었을 친구의 면모 말입니다. 마치 친 아버지나 오빠가 돌아가신 것처럼 슬퍼하고 애도하는 그분들을 접하면서, 직장 동료나 직원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영위해 온 그가 부러웠습니다. 자상했던 친구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라, 더욱 그리운 마음이 일었습니다. 

 

난감했던 갖가지 인생사를 뒤로 하고 이제 친구는 떠났습니다. 저는 명복(冥福) 대신 ‘명복’(明福)을 빌었습니다. 명복(冥福)의 ‘명(冥)’ 자는 해가 가려져서 빛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을 믿고 산 사람에게는, 죽음 이후의 삶이 어두운 곳에서 누리는 복이 아닙니다. 새로운 대명천지의 세상이 펼쳐지는 곳에서 누리는 복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조차도 필요 없는 곳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받은 모든 자들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22:5). 비록 오랫동안 특정 성당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지속하지는 않았지만, 영세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로 살아 온 친구가 내적으로 주님과의 교통을 이어왔을 것을 믿기에 장차 그곳에서 재회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였겠지요. 조문한 이후에 화장하고 봉안하는 1박 2일의 일정 가운데 계속 떠오른 것이 영국 가톨릭 신자 작가인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이 쓴 작품 한 편이었습니다. 한 장군이 새로운 세계 정부를 세운 후 전개되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마지막 말”(The Last Word)이라는 단편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20여 년 전에 폐위된 마지막 교황인 요한 29세(the last Pope, John XXIX)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전에 암살당할 위기를 모면한 이후에, 그는 정부의 결정으로 계속 생존을 이어갑니다. 그가 당시 생존해 있던 몇 안 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순교자로 비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정부가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그가 마지막 그리스도인이 되자, 그 정부 실권자인 장군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그를 소환합니다. 그와 교황이 나누는 마지막 대화가 주목거리입니다.

 

“(...) 저는 성하가 위엄 있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마지막 기독교도로서요. 지금은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I want you to die with dignity. The last Christian. This is a moment of history.)

“날 죽일 셈인가요?” (You intend to kill me?)

“그렇습니다.” (Yes.)

노인은 두려움이 아니라 안도감을 느꼈다. (It was relief the old man felt, not fear.) “지난 20년 동안 종종 가고 싶었던 곳으로 나를 보내 주는 셈이로군요.” (You will be sending me to where I've often wanted to go during the last twenty years.)

“어둠 속으로 말인가요?” (Into darkness?)​

"오, 내가 알고 있던 어둠은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빛이 없는 곳일 뿐이었죠. 당신은 나를 빛 속으로 보내 주는 겁니다. 감사드립니다."(Oh, the darkness I have known was not death. Just an absence of light. You are sending me into the light. I am grateful to you.)

 

이 대화에서 장군과 교황이 생각하는 ‘어둠’의 개념은 천양지차가 납니다. 장군은 죽음이 어둠의 세계라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가 바로 빛의 세계라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교황에게는 현세가 어둠의 세계, 즉 빛이 없는 세계였습니다. 전 세계를 절대 권력으로 장악한 사악한 한 장군에 의해 하나님의 교회도, 하나님의 사람도 죄다 사라져 버린 세상이었기 때문이겠지요. 그에게는 주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되는 죽음이 바로 빛의 세계였습니다. 자기를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보내 주어 고맙다면서 장군에게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결국 장군은 식사를 함께 하자는 자기 제안을 거절한 채 사형을 바로 집행해 달라는 교황의 뜻을 받아 들입니다. 함께 포도주만 한 잔씩만 나눈 후, 교황에게 총을 발사하지요. 마지막 문장이 뒤를 잇습니다. “방아쇠에 힘을 가해 총알이 폭발하기까지의 짧은 순간에 이상하고도 두려운 의심이 장군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사람이 믿었던 게 과연 사실일 수 있을까?”(Between the pressure on the trigger and the bullet exploding a strange and frightening doubt crossed his mind: is it possible that what this man believed may be true?) 주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모든 자녀에게 죽음은 빛난 천국으로 인도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이 단편 소설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언젠가 그레이엄 그린과 영국의 소설가인 앤서니 버지스(Anthony Burgess,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의 작가)가 나눈 대화 내용이 바로 납득이 되었습니다. 버지스가 묻지요. 자네가 좋아하는 솔 벨로(Saul Bellow)나 패트릭 화이트(Patrick White)가 모두 노벨상을 받았는데 자네는 언제 그 상을 받으려나? 그린이 이렇게 응답합니다. 얼마 전 스웨덴 기자 한 사람이 찾아와 같은 질문을 하더군. 그래서 나는 그보다 더 큰 상을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했지. 버지스가 또 묻습니다. 그게 무슨 상인가? 그린이 말하지요. 죽음이야.” 노벨상을 받은 솔 벨로나 패트릭 화이트가 존경스럽긴 하지만, 하나님의 빛이 충일한 세계로 인도하는 죽음을 노벨상보다 더 큰 상으로 여긴 그레이엄 그린의 영성이 더욱 부럽습니다. 

 

친구에게는 누님과 여동생이 한 분씩 계십니다. 누님은 서울의 유명한 여대 국문과를 졸업하신 후에 수녀로 종신서원 하여 지금까지 섬기고 계십니다. 여동생은 치과 의사로 봉직하고 있습니다. 자기 재산 중 일부를 제외하고 여동생에게 모두 일임한다는 오빠의 유언을 접한 여동생은, 그것을 사회로 환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 오빠에 그 동생이었습니다. 수녀로 평생을 살아오신 누님을 뵈오니, 그 병원에서 거리상 멀지 않은 수도원에서 수녀로 일생을 섬기고 계신 이해인 시인이 떠올랐습니다. 지원기(1년), 청원기(1년), 수련기(2년), 유기서원기(5-6년)를 거쳐 종신서원을 하신 후, 지금까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이웃들을 치열하게 섬겨 오신 분들이시지요. 그런데 이해인 수녀님과 누님의 삶을 지탱해 온 것은, 이 수녀님의 아래 시 한 편에 실려 있는 영성이 아니었을까요?

 

“(...) 당신의 넓은 길로 걸어가면 / 나는 이미 슬픔을 잊은 / 행복한 작은 배 // 이글거리는 태양을 / 화산 같은 파도를 / 기다리는 내 가슴에 / 불지르는 바다여 // 폭풍을 뚫고 가게 해다오 / 돛폭이 찢기워도 떠나게 해 다오.”

 

이 수녀님이 애기 수녀 때인 청원자 시절, 스물한 살에 쓰신 이 시(“바다여 당신은”)는, 수녀님이 “펄럭이는 커튼 사이로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이렇듯 많이 인내해야 한다고 느끼면서 쓴 시”였습니다. “돛폭이 찢기워도”라는 구절을 보세요. 이 수녀님이나 누님 같이 오롯이 주님께만 헌신하는 길을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온 수많은 천국 일꾼들의 진정하고 결연한 자세를 엿볼 수 있지 않나요?

 

이 수녀님에게 글 쓰는 재주를 물려주신 어머님께서, 1991년 12월에 수녀님에게 보내 주신 성탄 카드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하지요.

 

“작은 수녀님에게, 은사 중에 뛰어난 글재주 / 신년에도 하느님의 지혜 은총 입어 언어의 구원 사업 / 예수님께 영광 드리고 인내의 덕을 쌓아 성모님을 닮으세요.”

 

얼마 전에 이 성탄 카드 내용을 접하며 마음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한 표현이 새로운 깨달음으로 제 가슴에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은사와 능력으로 기회를 좇아 이웃을 섬기며 사는 모든 것이 바로 “구원 사업”이로구나. 이 수녀님의 경우엔 시를 통해, 이번에 소천한 친구의 경우엔 의술을 통해,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친구들의 경우엔 교육을 통해, 법정에서 의뢰인을 돕는 친구들의 경우엔 변호 활동을 통해, 음악을 하는 친구들의 경우엔 작곡이나 연주를 통해,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의 경우엔 미술을 통해, 사업을 하는 친구들의 경우엔 사업을 통해, 교회에서 섬기는 친구들의 경우엔 사역[사목]을 통해, 그리고 부족한 제 경우에도 글과 강의[강연]를 통해, 우리 모두가 각자 우리 하나님의 크낙한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 있구나. 할렐루야! 오, 하나님, 우리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God, be merciful to us, the sinners!) (누가복음 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