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유로지비,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미쉬낀 공작(2)
-칼날 아래 살기: 자존감 없는 삶-
퇴역 장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슬하에서 살던 나스따시야는 일곱 살 때 부모를 잃은 후에 또쯔끼의 배려로 보호를 받아 오다가 열두 살 때 그의 눈에 띄여 가정교사를 통해 개인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열여섯 살 때부터 “환희”라는 또쯔끼의 영지에서 4년 간 지내게 됩니다. 그 기간 동안 또쯔끼는 매년 여름마다 2-3개월씩 그곳에 머물다 가곤 했지요. 그 당시에 바로 자제력이 결여된 호색한인 그의 면모가 드러나 그녀를 범합니다. 그런데 한참 그의 혼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즈음에 그녀는 또쯔끼가 사는 뻬쩨르부르그로 혈혈단신으로 찾아옵니다. 그가 어떤 여자와 결혼하든 상관없지만 지금의 혼사를 훼방 놓기 위해 찾아왔다며 그와 맞짱을 뜹니다. “나스따시야는 짐승같이 혐오스러운 이 사내를 욕되게 할 수만 있다면,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을 처절하게 파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라고 공언합니다. 그동안 또쯔끼가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짐작하게 해 주는 상황이지요. 자기의 약점을 쥐고 있는 나스따시야를 간과하지 않은 또쯔끼는 그녀와 타협하고 양보를 했습니다. 그녀의 참된 모습에 눈이 멀었던 그는 나스따시야의 미모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용해 먹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녀를 뻬쩨르부르그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길들이고 호사스럽게 치장시켜 상류 사회의 허세를 사게 할 속셈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재(理財)에는 초연”했습니다. 평생 먹고살 수 있는 금전을 제공해 주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비록 안락한 생활은 누렸으나 매우 검소하게 살았으며 뻬쩨르부르그로 이주한 이후 5년 간 거의 아무것도 축적해 놓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쯔끼가 소개해 주는 온갖 신랑감들(공작, 근위 기병, 외교관, 시인, 소설가 및 사회주의자)도 그녀의 마음에 어떤 인상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녀에게 마치 “심장 대신 돌멩이가 들어앉아 있고, 감정이란 감정은 죄다 말라비틀어져 버린 듯” 했습니다. 혼자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며 책을 읽고, 공부하며 음악 듣는 것을 즐겼을 뿐입니다. 그녀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라고는 가난한 관리 부인들, 두 명의 무명 여배우 및 몇몇 노파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노인과 노파나 좀 모자란 사람들까지 지극히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예빤친 장군, 페르디쉬첸꼬라는 젊은 관리, 쁘찌찐이라는 괴팍한 청년, 그리고 가브릴라까지 알게 된 것입니다. 견실한 청년인 가브릴라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인식한 나스따시야는 그의 진정한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면 그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그리하여 그와 만남을 거듭하면서 그의 결혼 제의를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가족이 그녀에 대해 석연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한 그녀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결혼할 수 없다면서 난감해합니다. 반면에 또쯔끼가 희사한 75,000 루블은 기꺼이 받겠다는 뜻도 내비칩니다. 그 돈은 그녀의 의사에 반하여 “더럽혀진 순결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일그러진 운명에 대한 보상금”으로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나스따시야에게는 양면적인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한 가지는 소박하고 사치하지 않으며 홀로 있기를 좋아하고, 가난하고 무명인 사람들과 사귀는 데만 마음 두는 모습입니다. 비록 어릴 때 고아가 되긴 했지만 또쯔끼가 마련해 준 가정에서 편안하게 지내면서 악기도 연주하고 그림도 그리며 지냈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삶을 누렸던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가지 모습은 자기를 무시하고 이용하려는 자들을 경멸하면서 응징하는 측면입니다. 자기가 아버지처럼 신뢰했던 또쯔끼가 자기를 범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받은 심리적 충격에서 비롯된 측면일 것입니다. 이런 이중적인 측면이 그녀의 얼굴에 담겨 있습니다. 그녀의 사진을 처음 본 공작이 놀랄만한 미인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매우 고생을 한 것이 두 눈에 드러나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녀의 운명이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명랑한 얼굴 속에 많은 고뇌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지요.
바로 여기에서 나스따시야의 근원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그녀가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자기를 존중하지 않았기에 다른 누구도 존중하지 않는 심리 상태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낮은 자존감에 시달린 그녀는 감정적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심각한 정신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툭하면 신경질을 내고 의심을 잘할 뿐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고 자존심을 건드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우선 불신하고 무시합니다. 예컨대 가브릴라를 소개받아 교제하고 있었지만, 그를 “참을성 없는 거렁뱅이”라고 일컬으며 무참히 굴복시키고 인정사정없이 그의 위에 군림하려 듭니다. 가브릴라의 집에서 미쉬낀 공작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를 하인으로 착각하면서 ‘팔푼이 같다’, ‘웬 백치야’라며 모욕을 줍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런 표현을 함부로 쓰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지요. 그러다가도 여린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녀가 가브릴라의 집을 갑자기 방문해서 오만방자하게 굴 때, 공작이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나요? 당신은 정말로 그런 사람이에요? 아니에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라고 지적하자 태도가 돌변합니다. 가브릴라의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 입술을 맞추며 “난 사실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저분이 잘 알아맞혔어요.”라고 속삭이기도 하지요.
자존감의 기반이 없었던 나스따시야에게 공작은 특별한 존재로 다가옵니다. 그녀는 자기를 존중해 주고 첫눈에 믿어 주었던 공작을 자기 인생에서 최초로 자기 “마음을 맡길 만한, 진정으로 믿을 만한 분”으로 여깁니다. 그녀가 자기 생일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또쯔끼가 제공해 준 모든 환경을 포기하고 자기가 있던 거리로 나 앉겠다는 뜻을 비칠 바로 그때, 공작이 이런 그녀를 데려가 살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로고진의 여자가 아닌 성스런 여인으로 나스따시야를 묘사하면서 자기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녀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을 하겠지만 현재 자기에게는 유산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녀가 원해서 또쯔끼와 산 것이 아니기에 그의 정부로 살았던 과거도 부끄러워하거나 나무라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확인시킵니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고 않았고, 그녀의 삶이 파멸당했다고 할 수도 없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는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자기가 돌봐 주고 평생 존경하며 살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무릇 자존감은 자기를 존중해 주는 타자를 만날 때 순적하게 형성되는 법입니다. 나스따시야가 자기를 존중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존중해 주는 타자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 눈앞에 자기를 거룩한 존재로 인식하고 사랑해 주며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공작의 진실한 고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어찌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러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나스따시야는 그런 공작의 말을 고맙게 여기면서도 그의 결혼 제안을 거절하지요. 자기는 또쯔끼의 정부였으니 공작에게는 아글라야가 어울린다면서, 자기는 거리의 여자로서 지금 놀고 싶으니 로고진과 가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떻게 된 영문일까요? 공작의 제안은 고맙게 수용했지만, 공작이 자기를 지속적으로 존중해줄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자기를 두고 흥정하려는 사람들만 접했을 뿐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고 존중해 주는 이를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작의 제안이 너무 생경하게 들렸던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그녀는 이 시점에서 “두 줄기의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자기가 시골에서 5년 간 외롭게 살고 있을 때 공작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정직하고 착하고 어리석은 듯한 사람이 문득 나타나더니 ‘나스따시야, 당신은 죄가 없어요. 나는 당신을 존경해요!’”라고 언급하더라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일이지요. 이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공작이 꿈속에서 그녀를 만나 그녀의 가장 깊은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집을 떠나며 작별 인사를 할 때도 나스따시야가 “처음으로 인간다운 인간을 보았어요!”라고 외치며 공작을 칭송한 것도 그녀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사와 감격의 발현이었을 것입니다.
나스따시야를 두고 공작과 로고진이 나눈 대화 속에서 불길한 비유가 한 가지 번뜩입니다. 공작이 나스따시야가 로고진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서, 그 이유로 그와 결혼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가리킵니다. 만일 그를 나쁘게 생각하면서 결혼하기를 원하는 것은 마치 “의도적으로 물속으로 뛰어들거나 칼날 밑으로 파고들겠다는 의미가 된다”면서 누가 그렇게 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로고진은 “물속이나 칼날 밑이라! 흠! 그거군. 그 여자가 나에게 시집오겠다는 것은 아마 내 칼을 기다리겠다는 뜻일 걸세!”라고 응답하지요. 결국 그녀는 공작과의 결혼식 직전에 그에게 피했다가 그의 칼날에 유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자존감의 기반이 요동치던 한 여인의 인생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화두가 무겁습니다. 먼저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주고 사랑해 주는 의미 있는 타자를 만나는 복이 우리 인생의 관건입니다. 다음으로 그 복을 누린 만큼 타인에게 그 복을 기꺼이 전수하는 것이 영광스러운 삶의 방향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첫 번째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15:7에서 드러나 있는 원리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Therefore, accept one another, just as Christ also accepted us to the glory of God.) 우리는 이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거를 다 청산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당신의 형제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원리를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구현해 준 하나님의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원리가 손상되는 일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 원리를 깨닫고 신뢰하기만 하면 그 원리에서 제시된 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 원리의 기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죽음과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이웃들을 향해 나설 차례입니다.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가 만나고 대화하며 삶을 나누는 모든 이웃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그들을 신실하게 섬겨 가야 합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진심으로 존중할 뿐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다른 사람들도 기꺼이 존중해 가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묘지 속에 살기: 질투하는 사랑의 노예-
나스따시야를 탐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빠르펜 세묘노비치 로고진입니다. 부자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청년으로서 나스따시야에게 모든 것을 걸지요. 그녀를 한번 본 이후에 반하기 시작해서 아버지가 사업상 처리하라고 준 5천 루블짜리 채권 두 장을 팔아 그녀에게 줄 귀고리 한 쌍을 선물하는 대담함을 연출합니다. 나중에 그 아버지가 그녀를 찾아가 땅바닥에 흰머리를 조아리고 눈물로 호소해서 다시 되찾는 기행이 전개되기도 하지요. 이 1만 루블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거금을 나스따시야를 위해 내놓기도 합니다. 가브릴라와 결혼하려는 그녀를 찾아가 10만 루블이라는 거금을 내놓으며 자기와 결혼해 줄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재정적 선물에도 불구하고 나스따시야의 마음을 얻는 데는 실패합니다. 결국에는 그녀가 미쉬낀 공작과 결혼하기로 한 날에 그에게 자기를 데리고 도주해 줄 것을 요청하여 그녀를 도와주지만, 그 이후에 그는 그녀의 심장을 찔러 살해해 버립니다.
로고진은 왜 그토록 사랑하는 나스따시야를 살해했을까요? 예상할 수 없었던 비극적인 결말을 접하며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우선 공작이 그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처럼 그는 정열적인 사람입니다. “그놈의 정열을 빼면 시체나 마찬가지지.”라고 나스따시야도 인정하는 측면입니다. 그 정열이 나스따시야라는 여인에 의해 불붙었습니다. 1만 루블, 10만 루블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그녀를 위해 허비한 것을 보세요. 결혼 조건으로 지불하겠다고 약속한 그 10만 루블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단 하루 만에 온갖 고리대금업자에게서 그 돈을 융통하는 그의 실행력은 놀랍습니다. 더구나 자기가 애써 마련해 온 그 돈다발을 나스따시야가 벽난로에 던져 넣고 가브릴라를 시험할 때, 그는 도취된 채 오로지 나스따시야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 있는 심정으로 “바로 이런 사람이 여왕이다!”라고 읊조리기만 하지요. 나중에 나스따시야가 그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물에 빠져 죽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로고진에게 돌아온 것은 나스따시야의 경멸과 모욕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쓰레기 쳐다보듯” 자기를 쳐다보곤 했습니다. 언젠가 그가 나스따시야에게 자기와 혼인하기로 약속하고 정숙한 주부가 되기로 해놓고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냐고 항의하자, 그녀는 그를 모욕하며 응대합니다. “나는 지금 당신이 내 하인이 되겠다고 해도 싫을 거야. 그런데 나보고 당신의 아내가 되라고?” 이 말을 듣고 그가 끝장을 보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하니, 그녀는 복서인 껠레르를 불러 그의 목덜미를 들어 내던져 버리라고 말하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달려들어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패줍니다. 이런 일들이 거듭되면서 그녀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과 그 모든 수모 때문에 그는 그녀를 몹시 증오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로고진이 나스따시야를 최종적으로 처단하기로 결단하게 한 것은 질투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두 번씩이나 그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결혼식 직전에 도망칩니다. 모스끄바에서 그와의 결혼식을 목전에 두고 공작에게 뛰어들어 로고진으로부터 구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공작에게서도 도망치지요. 결국 로고진의 색출 망에 걸려 그와 결혼하기로 거의 맹세에 가까운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 후 겨우 2주일이 지났을 무렵 그녀는 결혼 전야에 세 번째로 도망칩니다. 이번에는 어느 시골로 자취를 감췄다고 했는데, 그곳이 휴양지인 빠블로프스끄였습니다. 이때 모스끄바에 있던 미쉬낀 공작도 자신의 모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고 그곳으로 옵니다. 그녀에게 외국으로 가서 건강을 회복하도록 설득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녀가 몸과 마음이, 특히 마음이 몹시 상해 있어 많이 돌봐 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공작은 로고진을 만나 그녀가 그에게 시집을 간다면, 그건 ‘그녀에게’ 파멸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도 그녀보다 더 심하게 파멸할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둘이 다시 헤어진다면 자기가 대단히 기쁠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때 로고진은 공작에게 “우리는 사랑도 다른 식으로 하고 있어. 모든 게 달라.”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네는 연민 때문에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지? 나에겐 그녀에 대해 그 따위 연민은 없어. 더구나 그녀는 나를 몹시 증오하고 있어. 그녀는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 항상 다른 남자와 나타나서 나를 비웃고 있는 거야. 실제로 그래. 나와 같이 결혼식장에 가면서 나에 대해 생각하는 걸 잊어버린 거라네.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여자처럼 말야.”
자기가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사모하고 있다는 것은 로고진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기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다름 아닌 미쉬낀 공작이었습니다. 그녀가 자기 생일 파티 할 때부터 그에게 빠지게 되었다고 로고진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나스따시야가 공작과 결혼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이유라고 그가 짐작하는 것이 기가 찹니다. 그녀가 공작의 일생을 망쳐 버리고 파멸시킬 것이라고 스스로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공작을 너무 열렬히 사랑한 나머지 공작 곁에 있을 힘을 잃고 그에게 빠져나온 것이라고 로고진은 이해한 것이지요. 이런 그의 생각을 듣고 그 모든 것이 그의 질투심이라는 병에서 비롯된 것임을 공작이 일러 주어도 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이전에 공작이 가브릴라와 처음 만나 대화하던 중에 가브릴라가 로고진이 나스따시야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공작이 던진 대답이 예언적인 언명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결혼하고 싶어 할 겁니다. 그럴 기회만 주어진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할 수 있을 거요. 결혼을 하고 1주일 후면 이 여자를 칼로 베어 버리려고 할 겁니다.” 로고진이 자기 사랑에 끝내 반응하지 않는 나스따시야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식어지면 “칼부림”을 할 위인임을 공작은 일찌감치 간파한 것입니다.
로고진의 광적인 질투와 그의 애처러운 짝사랑은 구약 아가서 8:6,7을 상기시킵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바닷물도 그 사랑의 불길 끄지 못하고, 강물도 그 불길 잡지 못합니다. 남자가 자기 집 재산을 다 바친다고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웃음거리만 되고 말겠지요.”(새번역) (For love is as strong as death, Jealousy is as severe as Sheol; Its flashes are flashes of fire, The very flame of the LORD. “Many waters cannot quench love, Nor will rivers overflow it; If a man were to give all the riches of his house for love, It would be utterly despised.”) 과연 로고진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했고, 그의 시샘은 저승처럼 극성스러웠으며, 그 사랑의 불길은 그 어떤 불길보다 거셌습니다. 바닷물이나 굽이치는 물살도 쓸어갈 수 없는 불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의 엄청난 재산을 다 바친다고 사랑하는 나스따시야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나스따시야의 조롱만 샀을 뿐입니다.
죽음과 저승을 연상 시키는 사랑의 질투에 사로잡힌 로고진의 삶을 이해하는 메타포가 작품 속에 등장합니다. 그것은 묘지입니다. 공작이 로고진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느낀 첫인상은,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더러운 초록색의 이 3층짜리 집은 커다랗고 우중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뽈리뜨가 그의 집을 방문하고서도 그런 인상을 받았나 봅니다. 그가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로고진]의 집은 묘지 같았으나 그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또한 그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충실한 현실적 삶이 지나치게 충만하기 때문에 가구나 장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해할 만도 하다.” 로고진은 자기가 “미쳐 있는 것” 혹은 자신의 “광적인 질투”와 관련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순간을 위해 살고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묘지라는 메타포를 묵상하던 중에 디모데전서 5:6이 떠올랐습니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But she who gives herself to wanton pleasure is dead even while she lives.) 교회 내의 참 과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맥 속에서 등장하는 이 문장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 중의 ‘향락’(wanton pleasure)이라고 번역된 헬라어가 사용된 다른 한 곳, 야고보서 5:5이 이 측면을 밝히 드러내 줍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You have lived luxuriously on the earth and led a life of wanton pleasure; you have fattened your hearts in a day of slaughter.) 이 구절의 ‘너희’는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부당하게 돈을 벌어 재물을 축적하고 무고한 자들을 정죄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한편, 사치하고 방종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인간들입니다. 이 구절이 속한 문맥의 특징은 이런 인간군을 향한 회개에 대한 호소나 권면이 없는 대신 단지 정죄만 명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현시점이 인류 역사가 마지막에 돌입한 “말세”(the last days)인데도 그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재물을 쌓았을 뿐 아니라, 우주적인 심판이 전개되는 날인 “살륙의 날”(a day of slaughter)을 눈앞에 두고도 사치와 방탕으로 자기 마음을 살찌우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썩은 그들의 금과 은의 ‘녹’(rust)과 뚱뚱하게 비대해진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죄악을 증언해 줄 것입니다(야고보서 5:3 참조). 성경의 정신을 따라 그들을 향해 권고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그들에게 임박한 미래의 심판을 경고할 뿐입니다.
디모데전서 말씀이 기억났다고 해서 로고진이 방탕한 삶에 목숨을 걸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단순히 “정욕의 노예”만은 아니었고, “투사”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신앙을 되돌리려는 투쟁”에 임하기도 한 투사였던 것입니다. 한때 방탕한 삶을 산 탓으로 자기 재산 중의 극히 일부를 날려 버리기도 했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자기가 미쳐 있는 것을 기어코 쟁취하고야 마는 질투의 화신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위에서 인용한 두 구절에 등장하는 ‘wanton life’(향락, 방종)라는 표현 중 'wanton'이라는 단어야말로 그를 적확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이 단어가 여성에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단어는 무절제하고(undisciplined), 무모하고(reckless), 극도로 부주의하고(extremely careless), 심술궂고(malicious), 방탕하게 행동하며(act lasciviously), 다른 사람을 전적으로 무시하며 행동한다(acting with utter disregard for others)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들은 로고진이 영위한 삶의 행태를 그대로 옮겨 줍니다. ‘Wanton life’을 일삼은 그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였습니다. 묘지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검은 구름 아래 살기: ‘훨씬 더 똑똑한’ 범인(凡人)의 삶-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묘사되는 이 작품 제4부에서 작가는 ‘평범한’ 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인물들 두 부류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틀에 박힌 범인(凡人)들’이고 둘째는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한 범인(凡人)들’입니다. 작가는 전자가 후자보다 더 행복하다고 봅니다. 전자는 자기가 누구라고 자칭하거나 특정 감정을 느끼거나 남에게 어떤 사상을 듣거나 하면, 자신이 독자적인 신념을 얻었거나 독창적인 사상을 낳았다고 편안하게 상상하면서 흡족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자는 자기를 비범하고 독창적인 인물로 상상하더라도, 그 마음속에 자리 잡은 회의 때문에 절망의 늪 속에서 헤맵니다. 상상한 자신의 모습과 현실적인 자신의 모습이 시시때때로 극명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고뇌하면서 좌절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후자에 속한 이들은 독창적인 인간이 되겠다는 소망이 지나쳐 상당한 기간 동안 어리석은 짓을 벌인다고 합니다.
이들 중에 주목할 만한 이들은 선량하고 신실하게 자신의 의무를 훌륭하게 잘 감당하고 있으면서도 평생 편안한 마음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내 일생을 어디에 허비했던가?’라고 자문하면서, 자기가 처리한 평범하고 하찮은 일들만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대단한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독창적인 업적을 이루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들이 발견하고 발명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평생토록 확실히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겪는 고뇌와 절망은 갈릴레이나 콜럼버스 못지않습니다. 결국 전자에 속한 이들보다 훨씬 불행하다는 것이지요.
삶의 장 속에서 자신의 성정과 은사와 재능에 걸맞는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을 폄하하는 한편 자기의 됨됨이와 무관하지만 거창하게 보이는 독창적인 일의 성취만을 선망하는 자세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요? 먼저 자신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 각자는 고유하고 특유한(unique) 존재이긴 하지만 반드시 독창적인(creative)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거나 그림 그리기를 선호할 수는 있지만, 독창적인 노래를 작곡하거나 비범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한 영역에 은사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몫입니다. 그것들로 그들은 사회에 기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른 영역에서 각자의 은사와 재능으로 기여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가치 있는 일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문제가 됩니다. 작곡가나 화가의 일은 가치 있지만, 우리의 일은 무가치하다고 보는 안목 말입니다. 위 단락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의 과업에 들이는 시간을 허비한 것으로 치부하는 시각이지요. 이 시각에 합당한 근거가 있을까요? 고유성과 독창성의 가치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이 그 배후에 존재할 공산이 큽니다. 끝으로 비교 의식도 한몫합니다. 독창적인 일과 우리의 일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긴 하지만, 전자가 후자보다 더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지요. 가치의 잣대를 잃어버린 행태에 불과합니다. 시대(century)와 지역(continent)과 문화(culture)를 초월해서 엄존하는 원리 혹은 진리를 가치의 잣대로 삼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작가는 ‘훨씬 더 똑똑한 범인(凡人)들’에 속한 대표적인 인물로 가브릴라를 듭니다. 그도 후자에 속한 이들이 겪는 고뇌를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장 독창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지만, 지속적으로 자신이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자각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소년 시절부터 마음에 상처를 크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속에 이는 질투심과 돌발적인 강렬한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도약하려고 시도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모험할 기회가 생기면 지나치게 똑똑한 탓에 결행하지 못하곤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죽도록 괴로워했지요. 하지만 자기 집안의 빈곤한 처지를 혐오하고 증오했던 터라,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취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컨대 그가 예빤친 장군 집과 관계를 맺을 때도 비굴한 행동이 이익이 된다면 끝까지 철저하게 비굴해야 한다고 다짐했지요. 그러나 그가 철두철미할 정도로 비굴하게 행동한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 대신 하찮게 보이는 비열한 행위는 얼마든지 해내곤 했습니다. 예컨대 로고진을 카드놀이 판에 끌어들인 후에 끄니프 녀석한테 속임수를 쓰게 해서 200 루블을 따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다면서, 로고진이 나스따시야 건으로 가브릴라 집으로 찾아왔을 때 그 사실을 들어 항의하지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가브릴라는 더 대담해집니다. 자신의 결혼을 떼돈 벌 호기로 여긴 것이지요.
또쯔끼와 예빤친 장군은 나스따시야에 대한 가브릴라의 열정을 이용하여 그녀와 결혼하도록 다리를 놓아줍니다. 나스따시야의 정부이자 예빤친의 사위가 될 또쯔끼는 75,000 루블이라는 거금을 희사해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자신을 매수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접하면서 나중에 나스따시야에게 이 모든 수모를 철저히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지만, 가브릴라는 고심 끝에 그 “불결한 여인”과 결혼하기로 작정합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커다란 자본이라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돈으로 여러 가지 장애물을 단숨에 뛰어넘어 일약 거대한 자본가가 되겠다는 목적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돈을 벌면 “최고로 독창적인 사람”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여전히 그의 뇌리 속에 ‘훨씬 더 똑똑한 범인(凡人)들’의 면모가 역동적으로 살아 쉼 쉬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 시점에서 그가 내뱉은 말은 알쏭달쏭하면서도 물신의 마력을 한껏 드러내 주는 언명입니다. “돈보다 치사하고 증오스러운 게 없다는 말은, 그것이 인간에게 재능까지 부여하기 때문이지요. 아마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부여할 겁니다.” 자기에게 독창적인 능력이 없는 것이 돈이 없기 때문이므로 비범한 창조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필코 돈을 벌어야 한다는 그의 확신이 경이로울 뿐입니다. 가브릴라가 이렇게까지 돈을 밝힌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로고진은 자기가 돈으로 그를 매수하러 왔다면서 나스따시야를 위해 10만 루블을 내놓게 된 것입니다.
‘훨씬 더 똑똑한 범인(凡人)들’의 대표 격인 가브릴라에게 혹평을 날리고 세상을 뜬 인물이 있었습니다. 폐병으로 앓다가 나스따시야가 죽고 난 2주 후에 사망한 이뽈리뜨입니다. 평생 동안 자기를 박해하여 자기 미움을 샀던 인물들 중 대표자가 가브릴라였다면서 그에 대해 맹공을 퍼부은 적이 있습니다. 온갖 최상급이 총동원된 원색적인 비난이었습니다. 가브릴라는 “가장 파렴치하고 가장 교만하고, 가장 비열하고 추악한 범인(凡人)의 전형이자 화신이자 그 극치”, “거만한 범인이고, 자신을 의심할 줄 모르는 범인이며, 가장 태연자약한 범인의 챔피언”, “상투적 인물의 대명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가슴과 머리에는 그만의 독자적인 사상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 대신 ‘끝없는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합니다. 자기가 가장 위대한 천재라고 확신했다가도 암울한 순간이 찾아오면 의심이 솟구쳐 올라, 화를 내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해 한 가지 비유를 덧붙입니다. “아, 당신의 지평선에는 아직도 검은 구름이 걷히지 않고 있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당신이 좀 바보스러워지면 그 구름은 사라질 거예요.” ‘훨씬 더 똑똑한 범인(凡人)들’의 삶을 지향하는 그의 장래가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돈의 마력이 세상 끝날까지 미칠 것이기에 막대한 부를 일구는 일에만 전력투구하는 한, 그의 인생 여정에는 먹구름만 잔뜩 끼어 있을 것입니다.
최고로 독창적인 인물로 평가받기 위해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믿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버는 일에 목숨을 거는 가브릴라가 이 작품 속에만 존재할까요? 이 작품 속에는 옛날 러시아의 유모들이 아이들을 양육할 때 그들을 얼러 주면서 콧노래로 흥얼거려 주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장군이 되어 황금 옷을 입고 다니거라!”라는 노래입니다. 그 유모들에게는 러시아인의 최고 행복은 장군이 되는 것이었고 장군이야말로 “평온하고 멋진 행복의 국민적 이상”이었던 것입니다. 장군이 이상적인 인물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 노래에는 흥미로운 점이 담겨 있습니다. 장군이 어떻게 황금 옷과 연관이 될 수 있을까요? 이순신 장군처럼 자기 한 몸 버려 고국을 수호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장군이 되어 수많은 재산을 축적하여 호의호식하는 모습이 러시아 유모들 눈앞에 아른거렸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나라의 “부자 되거라!”라는 콧노래의 러시아 버전인 셈입니다. 돈이 있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사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천하를 주름잡고 있습니다. 이뽈리뜨의 비유를 빌어 표현해 보자면 “전 세계의 지평선에는 아직도 검은 구름이 걷히지 않고 있습니다.” (계속)
'심(心)-마음을 따르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상적인 초록 불빛에 자신을 던진 로맨티시스트,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 (0) | 2021.07.11 |
---|---|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유로지비,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미쉬낀 공작(3) (0) | 2021.03.11 |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유로지비,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미쉬낀 공작(1) (0) | 2021.03.05 |
본말 전도된 사상의 순교자를 자처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뫼르소 (2) | 2021.01.17 |
참된 행복의 거처 (2) | 2021.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