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유로지비,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미쉬낀 공작(1)
제 경우에는 책을 두 번 읽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특히 소설의 경우에 처음 읽을 때는 등장인물들의 이모저모와 줄거리의 전개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내용이나 심오한 의미를 띤 문장들을 놓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가슴에 와 닿는 사건이나 감동적인 인물이나 심금을 울리는 문장들을 발견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대개는 두 번 읽으면서 새로운 교훈이나 신선한 사상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예컨대 책 두 권 분량의 장편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그러했지만, 중편에 속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수하게 많은 복잡한 문장들로 구성된 “마의 산”은 끝까지 읽는 것 자체가 도전적인 과제였습니다. 그 가운데 전개되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는 데도 품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을 한번만 읽고 만다면 한 번 읽어 봤다는 감흥밖에는 남는 게 없었을 것입니다. 그 대신 다시 한 번 더 읽으면서 책에서 논의된 다양한 내용들을 통합하여 의미 있는 주제들로 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제 심령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적, 영적 열매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노인과 바다”는 빠른 시간 내에 독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내밀한 상징과 은유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는 재독이 긴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처음 읽을 때는 그가 자주 꾼 사자 꿈의 의미가 눈에 확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두 작품 다 세계 최고의 작가가 각각 12년, 15년을 공들여 완성한 작품들입니다. 이 측면만 고려해 보아도, 재독의 필요성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최고 수준을 띤 문학 작품의 성격상, 명시적인 다양한 내용 못지 않게 암시적인 상징이나 깊이 있는 비유를 다수 내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재독하는 과정을 통해 유익을 누리기 위해서, 처음 읽을 때 눈에 띄는 문장이나 구절에 밑줄을 치거나 떠오르는 생각을 짧게 기록해 두는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시 읽을 때 이런 부분들을 참조해 가다 보면, 그것들이 통합되어 어떤 중요한 주제를 드러내어 주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숨겨진 의미를 열어 밝혀 주는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 예컨대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을 때 밑줄 치고 기록해 두었던 것이 나중에 그 작품을 전체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즉 주인공 윈스턴이 오세아니아에서 불법인 일기 쓰기를 하면서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는 장면이 눈에 확 들어와 주목해 두었던 것들이었지요. 그리하여 ‘빅브라더의 시대로부터 사상의 자유가 있는 미래 혹은 과거를 향해’, ‘획일적인 시대로부터 저마다의 개성이 존중받는 미래 혹은 과거를 향해’, ‘이중사고의 시대로부터 진실이 존재하며 행해진 것이 사라질 수 없는 미래 혹은 과거를 향해’, ‘고독의 시대로부터 홀로 고독하게 살지 않는 미래 혹은 과거를 향해’라는 소주제들을 중심으로 그 작품에 관해 논평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읽으며 노트하는 내용 중에는 읽으며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질문들도 포함됩니다. 그 당시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바로 찾을 수 없을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재독하는 가운데 그 질문이 해결되는 경우를 자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독해하는 중에 떠오른 질문 중에는, “총 24권 중에 왜 귀향 이후의 사건 내용이 무려 절반(12권)이나 될까?”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 작품이 다루는 내용상, 그 귀향 사건이 그전에 벌어진 복잡다단한 천신만고의 여정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을 품고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그 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귀향한 후에 오디세우스의 아내인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처단하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제우스와 아테나의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디세우스의 고향인 ‘이타케’는 단순히 그가 돌아갈 물리적인 본향만을 의미하지 않고, 도리어 ‘신적 통치와 공의(公義)가 살아 숨 쉬는 이상적인 곳’이라는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갈망을 품고 있는 시원적 본향에 대한 상징이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오디세이아”가 인본주의를 선양하는 교본이 아니라, 도리어 경천애인 하는 오디세우스가 시원의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기록한 위대한 고전이라는 점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영국 작가인 D. H. 로런스가 언젠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을 대충 아는 것보다 10여 권의 책을 아주 깊게 잘 아는 것이 더 낫다.”(it's better to know a dozen books extraordinarily well than innumerable books passably.)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 10여 권의 책이 고전이라고 한다면 더욱 그의 말에 동감합니다. 책을 아주 깊이 아는 길이 거듭 읽는 것이라는 점에 유의하면서, 이번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하나를 독해해 보겠습니다. 그가 자기 작품 중 가장 사랑한 작품이라고 고백한 “백치”로서, 독일 드레스덴에서 체류 하던 중에 무려 18개월이나 공을 들여 완성한 작품입니다. (줄거리는 영문 위키피디아 "백치"<The Idiot> 편을 참조했고, 번역은 "열린책들"<김근식 역>의 것을 인용했음.)
-“백치” 줄거리-
(1부) 레프 니꼴라예비치 미쉬낀 공작(26세)은 스위스에서 5년 간 간질병 치료를 받고 난 후 빼쩨르부르그로 가는 기차 안에 있다. 공작은 이반 표도로비치 예빤친 장군의 집을 방문할 계획을 품고 있다. 자기를 부양해 주던 빠블리쉬체프가 사망한 후에 장군의 부인이면서 자기의 먼 친척뻘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를 방문하게 되었다. 자기가 일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해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차 안에서 상인의 아들로서 거액(1백만 루블 정도)을 상속받은 거부인 빠르펜 세묘노비치 로고진을 만나 대화하게 된다. 그로부터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 바라쉬꼬바(25세)라는 여인의 이름을 듣게 되고 그녀로 인해 작고한 자기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다는 얘기를 접하게 된다. 단 10 루블에도 벌벌 떠는 아버지의 채권 1만 루블로 그가 귀고리 한 쌍을 사서 그녀에게 선사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그녀를 찾아가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로 빌어 그 귀고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함께 동승한 레베제프라는 아마추어 법률가에 의하면, 그녀는 대지주이자 부호인 아나파시 아비노비치 또쯔끼(55세)라는 인물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 또쯔끼는 예빤친 장군의 사업 파트너로서 그와 교분이 두터웠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로고진은 레베제프는 경멸했지만, 공작에게는 마음이 가서 자기가 잘 보살펴 주겠노라며 자기에게로 오라고 초대한다. 공작도 그 초청을 받아들이며 기꺼이 찾아 가 도움을 받겠다고 답한다.
사병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독학하여 자수성가한 예빤친 장군(56세)의 집에서 공작은 장군의 비서인 가브릴라를 만나게 된다. 그는 장군과 또쯔끼가 나스따시야와 혼인시키려고 하는 청년이었다. 또쯔끼는 고아가 된 나스따시야를 일곱 살 때부터 돌보아 준 후견인이었지만, 몇 년 전부터 자기의 처지를 곤란하게 하는 그녀를 떼어 내려고 안달하고 있었다. 예빤친 장군의 장녀인 알렉산드라와 결혼할 계획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가브릴라에게 75,000 루블을 희사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나스따시야는 가브릴라의 의도를 의심스러워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자기 결정을 유보한 채 그 날 자기 스물다섯 번째 생일 파티에서 그것을 발표하겠다고 한다. 가브릴라와 장군이 공작 앞에서 그 주제를 토의하던 중에, 가브릴라는 공작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 준다. 공작은 아름답지만 암울한 그녀의 표정에 충격을 받는다.
공작은 결국 예빤친 장군의 세 딸(알렉산드라-25세, 에잘라이다-23세, 아글라야-20세)과 자기 친정 가문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그의 부인 리자베따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모두 그에 대해 호기심이 잔뜩 생겨 자기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데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공작도 그 분위기에 맞추어 자기의 병, 스위스에 대한 자기 인상, 예술, 철학, 사랑, 죽음, 덧없는 인생, 사형제도 및 당나귀에 대해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토로한다. 자기가 사랑에 빠진 경우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요구에 응하여, 스위스에서 지낼 때 알게 된 마리라는 가난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떠돌이 프랑스 장사꾼이 끌고 가 순결을 잃게 한 후 버리고 간 그녀를 두고 마을 사람이나 목사뿐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마저 박해만 하던 상황이었다. 공작이 그녀를 알고 지내던 초기에는 동네 아이들도 다른 어른들처럼 그녀를 부당하게 따돌리고 도덕적으로 정죄했지만, 나중에 공작의 설득을 받고 그들 모두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공작은 가브릴라의 아파트에 세 들어 살게 되는데, 그곳에는 이미 페르디쉬첸꼬라는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가브릴라 가족들은 그와 나스따시야와의 결혼을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하고 있었기에, 그들 간에는 이 주제만 나오면 긴장의 절정을 이루곤 한다. 공작이 그 집으로 입주한 날 나스따시야가 그 가정을 갑작스럽게 방문하게 된다. 충격을 받은 가브릴라가 가족들에게 그녀를 소개하자 그의 얼굴 표정을 보고 그녀가 오랫동안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그것 때문에 가브릴라는 살인적인 증오심을 품은 표정으로 돌변한다. 그때 공작이 그를 안정시키려 하자 가브릴라의 증오는 도리어 공작에게로 향하게 된다. 가브릴라의 아버지인 이볼긴 장군이 들어오자 나스따시야가 거짓말 잘하기로 유명한 그를 향해 시시덕거린다. 그러던 차에 로고진이 일단의 주정뱅이들을 데리고 갑자기 방문하여 가브릴라는 어쩔 줄 모른다. 그 자리에서 로고진은 나스따시야에게 흥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0만 루블을 제안하면서 흥정을 마친다. 사태가 수치스럽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가브릴라의 여동생인 바르바라는 화를 내면서 그 염치없는 여인을 끌고 나가라고 요구한다. 가브릴라가 여동생의 팔을 잡자, 그녀는 갑자기 제정신을 잃은 채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그가 그녀를 때리려고 하자 공작이 또 끼어들다가 뺨을 맞는다. 나스따시야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충격을 받고 나스따시야는 가브릴라를 향해 조소 띤 모습을 보인다. 급기야 나스따시야는 가브릴라의 어머니에게 사과하고 떠나면서 가브릴라에게 자기 생일 파티에 반드시 오라고 말한다. 로고진과 그 일당도 그 10만 루블을 마련하러 사라진다.
생일 파티에는 예빤친 장군, 또쯔끼, 가브릴라 여동생의 약혼남인 쁘찌찐 및 페르디쉬첸꼬가 와 있다. 가브릴라의 남동생 니꼴라이의 도움을 받아 공작도 도착한다. 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해 페르디쉬첸꼬가 참석자 각자가 평생 저지른 최악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제안에 경악하지만, 나스따시야는 그 제안에 들떠 있다. 또쯔끼의 차례가 되어 그가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이야기를 늘어놓자, 나스따시야는 공작에게 몸을 돌리고는 자기가 가브릴라와 결혼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언해 주기를 요청한다. 공작이 그와 결혼하지 말라고 조언해주자, 그녀는 모든 이들이 놀라게도 그의 조언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또쯔끼가 자발적으로 내놓은 75,000 루블을 용서하는 취지로 그에게 돌려주고, 예빤친 장군에게서 받은 진주도 부인에게 선물해 주라며 그에게 되돌려 준다. 바로 이 시점에 로고진과 그 일당이 도착해서 약속된 10만 루블을 내놓는다. 나스따시야가 그와 함께 떠나려고 준비하면서 그 상황을 활용하여 또쯔끼에게 창피를 주고 있을 때, 공작이 나스따시야와 결혼하겠다고 제안한다. 공작은 자기가 곧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될 것을 보여주는 문서를 내 보이면서, 공손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낸다. 이 제안을 받고 놀라기도 하고 감동이 되었지만, 나스따시야는 그 10만 루블을 벽난로에 던져 놓고는, 가브릴라에게 그것을 꺼내기 원한다면 그 돈이 그의 것이라고 말하면서 로고진과 함께 떠난다. 공작은 그들을 따른다.
(2부) 그다음 6개월 동안 나스따시야는 공작과 로고진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공작은 그녀의 고통으로 괴로워했지만, 로고진은 그녀가 공작을 사랑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자기 사랑을 경멸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온 공작은 로고진의 집을 방문한다. 공작은 점차적으로 로고진이 나스따시야를 대하는 태도에 경악한다. 로고진의 질투심이 폭발해 그녀를 때리기고 하고, 그녀의 목을 끊어버릴 가능성까지도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로고진과 공작 간의 팽팽한 긴장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친구로 헤어진다. 서로의 십자가 목걸이를 나눠 가짐으로 의형제를 맺은 단계까지 진전된 것이다. 그런데 공작이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몇 시간 동안 거리를 방황하는 동안에 그는 로고진이 자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느끼며 자기 호텔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로고진이 계단에 숨어 있다가 그를 칼로 공격하려 한다. 바로 그 순간에 공작은 간질이 발작하여 쓰러지고 만다. 이 장면을 접한 로고진은 놀라 달아나 버린다.
회복이 된 후에 공작은 빠블로프스끄에 있는 레베제프의 별장에 세를 들어 살면서 여름을 보낸다. 그는 나스따시야가 빠블로프스끄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빤친 가족들이 공작을 방문할 때, 그들과 함께 아글라야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부유한 장교이자 미남인 예브게니도 온다. 그렇지만 아글라야는 공작에게 더 관심이 많아, 공작을 당황하게 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나스따시야를 구하겠다는 공작의 고상한 노력을 언급하면서 푸쉬킨의 시인 “가난한 공작”을 읊조린 것이다.
그런데 예빤친의 방문을 어이없이 방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공작에게 유산을 물려준 빠블리쉬체프의 사생아라고 자처하는 젊은이인 부르도프스키가 도착한 것이다. 제대로 자기 의사를 밝히지도 못하는 부르도프스키는 일단의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폐병 환자인 17세 이뽈리뜨, 니힐리스트인 독또렌꼬 및 복서인 께떼르가 레베제프의 도움을 받아 공작과 빠블리쉬체프를 중상하는 글을 썼다. 그들은 공작이 빠블리쉬체프의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정당한 배상으로 그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한 허세는 심각하게 손상을 입게 된다. 공작을 위해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한 가브릴라가 그 주장이 거짓이며 부르도프스키가 속임 당한 것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작은 그 젊은이들과 화해하기 위해 얼마간의 도움을 줄 것을 제안한다.
이런 상황 전개에 넌더리가 난 리자베따는 냉정을 잃은 채 양쪽을 다 꾸짖는다. 그때 이뽈리뜨가 웃음을 터뜨리자 리자베따가 그의 팔을 잡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기침을 해댄다. 잠잠해지자 그는 죽음이 자기에게 임박해 있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잠시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한다. 그러면서 그들 모두에 대한 자기 사랑을 표하려고 한다. 공작과 리자베따가 그 환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의논하는 중에 다른 사건이 발생하여, 이뽈리뜨는 공작을 향하여 한바탕 욕을 해대고는 다른 젊은이들과 떠나고 만다. 예빤친 가족도 떠나고 리자베따와 아글라야는 공작에게 엄청 화를 낸다. 예브게니만 유쾌한 심정이 되어 작별 인사하며 미소 짓는다. 바로 그 순간 멋진 마차가 그 별장 앞에 서더니 그 안에 타고 있던 나스따시야가 예브게니를 낭랑한 목소리로 부른다. 모든 어음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로고진이 그것들을 다 매수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바로 사라져 버린다.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예브게니는 그러한 빚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폭탄선언을 하고 떠난 나스따시야의 의중은 모든 이들의 염려를 자아내는 민감한 주제가 된다.
(3부) 리자베따와 화해한 후에 공작은 별장에 있는 에빤친 가족을 방문한다. 그가 아글라야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고, 그녀도 그에게 매혹된 듯 보인다. 그렇지만 그녀가 공작의 미숙한 모습과 지나친 겸손에 대해 조롱하고 화내는 것은 여전했다. 어느 날 공작은 리자베따와 딸들과 예브게니와 함께 음악을 들으러 공원으로 산책울 간다. 그곳에서 그는 로고진과 나스따시야가 군중들 속에 있는 것을 목격한다. 예브게니를 목격한 나스따시야는 또다시 그에게 말을 걸면서 이전과 같이 명랑하게 그의 큰 아버지가 권총으로 자살했으며 그가 공금을 횡령했다는 소식을 전해 준다. 방탕한 노인이었던 그가 예브게니에게 유산을 남겨 주리라는 예상은 모든 게 허황된 것이었다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예브게니가 미리 사표를 내고 나왔다고 추측하기까지 한다. 이 이야기를 듣자 리자베따는 급히 딸들과 함께 빠져 나가고, 예브게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제자리에 앉아 있는다. 그때 그의 친구인 한 장교가 계집에겐 그냥 채찍밖에 없다는 말을 내뱉는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스따시야는 옆에 있던 사람의 말채찍을 집어 들어 그 장교의 얼굴을 가격한다. 그가 그녀를 공격하려고 하자 공작이 그를 제지하는 바람에 그는 밀쳐진다. 그때 옆에 있던 로고진이 그 장교에게 조롱하는 말을 던지고 나스따시야를 데리고 떠난다.
공작이 예빤친 가족을 따라 별장으로 가자 아글라야는 그에게 결투가 생길 수도 있으니 총을 어떻게 장전하는지 일러준다. 그때 예빤친 장군이 공작을 데리고 나갈 일이 생기자, 아글라야는 그의 손에 쪽지를 하나 쥐어준다. 그 쪽지에는 그 이튿날 아침에 자기를 비밀리에 만나자는 요청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로고진도 그에게 나타나 나스따시야가 그를 만나기 원한다는 전갈을 전해 준다. 그녀가 아글라야에게 그동안 편지를 써 보낸 적이 있다는 점도 통보해 준다. 나스따시야는 공작이 아글라야와 사랑에 빠졌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들이 결합되도록 도와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 정보에 어리둥절했지만 공작은 아주 기쁜 마음이 들어 로고진을 용서하며 형제 사랑으로 그를 대한다. 그 이튿날이 자기 생일인 것을 기억하고는 한 잔 하자며 로고진을 초대하기까지 한다.
성대한 생일 파티가 벌어져 샴페인이 따라지는 가운데 레베제프, 그의 딸 베라, 이뽈리트, 부르도프스끼, 니꼴라이, 이볼긴 장군, 가브릴라, 쁘찌친, 페르디쉬젠꼬, 껠레르가 참석해 있다. 그런데 예브게니도 참석하여 공작에게 다가와 우정 어린 조언을 청해 공작이 놀란다. 레베제프의 달변이 매개가 되어 참석자들이 여러 가지 고상한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뽈리뜨가 갑자기 큰 봉투를 하나 꺼내더니 그들에게 읽어 주려고 쓴 글이라며 그 안에서 종이를 꺼내 든다. 자기의 최종적 확신이 담긴 것이라는 그 글은 불굴의 자연의 법칙인 죽음에 직면한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살이라면서 권총으로 자기를 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그 글 읽기가 지속되자, 사람들은 다 지루해하면서 그가 자살할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몇 참석자들이 그를 제지하자 그는 자기 계획을 철회할 뜻을 비치더니, 갑자기 권총을 꺼내 들고 자기 정수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렇지만 날카롭고 건조하게 찰칵하는 소리만 났을 뿐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고, 그는 기절하고 만다. 총알을 장전했지만 뇌관 넣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잠이 들고 파티는 파해진다.
공작은 공원을 거닐다가 아글리야와 만나기로 한 곳에서 깜빡 잠이 든다. 그녀가 그를 깨운 후에 그들은 그녀가 나스따시야가 보낸 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기가 아글라야를 사랑하고 있기에 그녀가 공작과 결혼하기를 간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아글라야는 이 편지야말로 나스따시야가 공작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해석한다. 공작에게 그녀에 대한 감정을 설명해 보라고 다그친다. 공작은 나스따시야가 미쳤다고 답변한다. 자기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며 그저 깊은 연민을 품고 있을 따름이라고 말한다. 이에 덧붙여 자기가 빠블로프스끄로 온 것은 그녀를 위해서라는 점도 밝힌다. 그 말을 들은 아글라야는 화를 내며 그 편지들을 나스따시야 면전에 던지라고 하면서 가버린다. 공작도 두려움을 품고 그 편지들을 읽게 된다. 그렇지만 그날 나중에 나스따시야가 그에게 나타나 그가 행복한지를 물으며, 자기는 사라질 것이고 다시는 편지를 쓰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로고진이 그녀를 데리고 간다.
(4부) 리자베따와 예빤친 장군은 아글라야가 공작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아글라야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와의 혼담을 일축해 버린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를 조롱하고 꾸짖다가, 자기로서는 다만 나스따시야 문제만 해결되면 문제없다는 실언을 하게 된다. 공작은 그녀로 인해 순수한 기쁨을 경험하지만 그녀가 자기에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일 때는 혼쭐이 난다.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무르익고 있다고 여긴 리자베따는 그때가 공작을 귀족들 모임에 소개해 줄 적기로 여기고 만찬을 계획한다. 많은 귀빈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작이 실수하지 않도록 아글라야가 여러 번 주의를 준다. 그렇지만 공작은 자기 흥에 취해 가톨릭과 무신론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다가 리자베따가 아끼던 중국 도자기를 깨뜨리고 만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참석자들이 더 흥겹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어 분위기가 호전된다. 그런데 나중에 러시아의 귀족에 대해서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던 중에 간질 발작이 일어나 공작은 쓰러지고 만다. 참석한 귀족들에게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만 것이다.
그 이튿날 이뽈리뜨가 찾아와 자기가 아글라야의 요청에 따라 그녀와 나스따시야와의 만남을 주선했다고 일러준다. 그날 밤 아글라야는 공작을 찾아와 둘이 함께 나스따시야와 만나기로 한 곳으로 간다. 아글라야가 그곳에 간 것은 무언가를 토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스따시야을 책망하고 모욕하기 하기 위한 것이었다. 험악한 비난이 오가고 모욕 주는 말들이 계속 이어진다. 나스따시야는 로고진에게는 나가라고 하면서 공작에게는 자기에게 남아 달라고 요청한다. 그녀의 고통을 가슴으로 느낀 공작은 그녀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아글라야가 그런 식으로 나스따시야를 공격한 것을 나무란다. 아글라야는 고통과 증오가 섞인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그 자리를 떠나고 만다. 공작이 그녀를 쫓아갔으나 나스따시야가 그를 결사적으로 막다가 기절해 버린다. 공작은 그녀에게 머문다.
나스따시야의 소원대로 그녀와 공작은 약혼한다. 이 소식을 접한 대중들은 아글라야에 대한 공작의 행동을 비판하고 예빤친 가족은 그와 절교한다. 공작은 예브게니에게 나스따시야는 상처 입은 영혼이기 때문에 자기가 그녀 곁에 머물지 않으면 그녀는 죽고 말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기가 아글라야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그녀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렇지만 예브게니는 그들 간의 만남을 주선하기를 거절하면서 공작이 미쳤다고 여긴다.
공작과 결혼하기로 한 날 나스따시야는 아름답게 차려 입고 껠레르와 부르도프스끼의 안내를 받으며 교회로 향한다. 그런데 그녀는 많은 하객들이 결혼식장으로 몰려드는 가운데서 로고진을 발견한다. 그녀는 그에게로 달려가 자기를 그곳에서 데려가 주기를 요청한다. 마차를 잡아 그녀와 함께 역으로 간 그는 역에서 망토를 입은 여인에게 50 루블을 지불하고 그 망토를 사서 나스따시야를 가리고 떠난다. 그 이튿날 공작은 뻬떼르스부르그로 가는 첫 기차를 타고 로고진의 집으로 가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을 하인들에게 듣는다. 몇 시간을 허비하며 그를 찾다가 그는 이전에 로고진을 만난 적이 있던 호텔로 돌아간다. 그때 로고진이 나타나 자기와 함께 자기 집으로 갈 것을 요청한다. 아무도 몰래 로고진의 집 안으로 들어간 후에 로고진은 나스따시야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공작을 안내한다. 그 전날 그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 후에, 그가 그녀의 심장을 찔러 살해해 버린 것이다. 방수포에 감싸여 안치된 그녀를 보여준 후, 그는 공작과 함께 그녀가 있는 곳에서 하룻밤을 지새운다. 이튿날 로고진은 체포되어 재판받아 시베리아 중노동 15년 형을 선고받게 되고, 공작은 다시 병증이 재발하여 예브게니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로 치료받기 위해 떠나지만 그의 증세는 더욱 악화된다. 예빤친 가족들은 외국으로 나가 살게 되었으나, 아글라야는 추방당한 부자인 폴란드 백작과 도망쳐서 결혼한다. 그렇지만 그는 부유하지도 않고 백작도 아닐 뿐 아니라 추방당한 것도 아님이 밝혀지고, 다만 다른 가톨릭 신부와 함께 그녀를 부추겨 가족들에게 등을 돌리도록 조종한 것임이 드러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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