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무사’(死後無死)를 계시한 선지자,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연극의 본질을 짚어 주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연극이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말하자면 거울을 자연에다가 비추는 것이지, 즉 미덕의 대상에 대해서는 미덕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 주고, 경멸의 대상에 대해서는 경멸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며, 바로 그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시대가 품고 있는 외관상 모습과 역사적 흔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라네.”(필자 의역, the purpose of playing, whose end, both at the first and now, was and is, to hold as ’twere the mirror up to nature; to show virtue her own feature, scorn her own image, and the very age and body of the time his form and pressure.) 셰익스피어(1564-1616)의 “햄릿”(원제: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에서 햄릿 왕자가 왕궁에 상연할 유랑 극단 제1배우에게 당부하는 대사입니다. 제1배우에게 하는 말이지만 사실상 햄릿이 모든 배우들에게 기대하는 연기의 본질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즉 연극은 항상 자연 혹은 우리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 그 본질이기에 미덕과 악덕 및 시대상을 비추어 주는 거울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햄릿의 삼촌 클로디우스가 곧 상연될 연극을 보면서 그 속에 비추어진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도록 매개하는 역할 말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배우들이 “자신의 분별력을 선생 삼아서”(let your own discretion be your tutor) 행동과 말을 절도 있게 잘 맞추어야 하는데, 특히 적절하게 자연스러운 상태(the modesty of nature)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고 권고합니다. 그리하여 이 목적을 초과하거나 그것에 미달되면 서투른 사람들을 웃게 할 수는 있겠지만 분별력 있는 사람들을 비탄에 잠기게 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사실상 후자 한 사람의 판단이 극장 전체의 관객들의 생각보다 더 소중하다고 햄릿이 여기고 있다는 점도 밝힙니다. (“Now, this overdone, or come tardy off, though it make the unskilful laugh, cannot but make the judicious grieve; the censure of the which one must in your allowance o’erweigh a whole theatre of others.”)
햄릿의 언명이지만 사실상 연극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시각이겠지요. 사무엘 존슨이 그를 들어 “모든 작가들, 적어도 모든 현대 작가들보다 우월한 자연의 시인, 즉 자기 독자들에게 인생과 시대의 풍속을 충실하게 비추어 준 작가”(above all writers, at least above all modern writers, the poet of nature, the poet that holds up to his readers a faithful mirror of manners and of life)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햄릿의 이 대사에 묘사된 원리에 충실했던 셰익스피어의 예술적 면모 때문일 것입니다. 연극 무대는 삶의 실상 그대로여야 하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충실한 사실적 묘사야말로 연극의 기본 원리라는 것입니다. 연극만 그렇겠습니까? 다른 장르의 문학도 그 본질은 이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보편타당한 미덕의 진정한 면모를 상찬하고 악덕의 사악한 측면을 경멸하며 각 시대의 풍조와 도전거리를 열어 밝힙니다. 고전들을 한 편씩 정독할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각 작품 속의 시대와 장소가 각각 달라도 미덕을 기리고 악덕을 기피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이었습니다. 당대의 사회적 풍조가 아무리 종잡을 수 없고 특정 지역이 직면한 도전거리가 아무리 엄청나도 가식이 아닌 진정한 미덕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인간의 길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인생과 사회를 열어 밝히는 데 치열한 진정성을 담은 작품들을 줄곧 집필했기에 그를 16세기의 극작가이자 동시에 20세기에 사는 작가로 보는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연극을 통해 전하려 했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진실이 보편타당한 것이었기에 16세기에만 통한 게 아니라 현대에도 얼마든지 통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존슨이 지적한 대로입니다. “보편적인 자연을 올바르게 재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많은 사람들을 오래도록 즐겁게 할 수 없습니다.” (NOTHING can please many, and please long, but just representations of general nature.) 그리고 “다른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개별적 인간이라면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종(種)입니다,” (In the writings of other poets a character is too often an individual; in those of Shakespeare it is commonly a species.)
그래서 이러한 그의 탁월한 면모를 감상하기 위해 그의 작품 하나를 정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햄릿”입니다. 셰익스피어가 1599년에서 1601년 사이에 집필한 희곡으로서, 그의 4대 비극 중 첫 번째 작품으로 알려진 걸작입니다. 그 작품 속에 담겨 있는 모티프와 사상과 상징이 하도 다양하고 흥미진진하여 지금까지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히고 연구된 작품 가운데 하나이지요. “문학의 모나리자”(Mona Lisa of literature) 혹은 “문학의 스핑크스”(Sphinx of literature)로 불릴 만큼 탁월하기도 하지만 삶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박우수 교수가 지적하듯이 근원적인 존재 문제부터 시작하여 “죽음, 도덕적 양심의 문제, 연극과 연기술, 복수와 그 정당성의 여부, 신의 뜻, 인간의 의지와 운명의 힘, 궁정 정치의 모습들, 부권(父權)과 여성의 성적 억압, 전쟁과 진정한 용기 등 다양한 문제들을 동반”합니다. 그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작품 속에 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들에 대한 진정한 대면을 통해 그것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독자와 관객들의 공감을 자아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본 글에서는 죽음의 문제, 죄와 양심과 벌의 문제 두 가지를 묵상한 후 작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작품의 한글 번역문은 ‘열린 책들’<박우수 역>의 것을 주로 인용함)
-“햄릿” 줄거리-
(1막) 덴마크 왕궁을 지키던 병사들이 밤에 그 얼마 전에 죽은 선왕을 닮은 유령을 보는 사건이 발생한다. 햄릿의 영혼의 친구인 호레이쇼가 그 소식을 접하고 직접 확인해 본 결과, 그 보고가 사실인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이 사실을 덴마크의 왕자이자 왕세자인 햄릿에게 전한다. 당시 햄릿은 선왕인 아버지가 죽은 후에 큰 고뇌에 빠져 지낸다. 어머니가 아버지 뒤를 이어 왕이 된 삼촌 클로디우스와 곧바로 결혼해 버렸기 때문이다.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제대로 표하지도 않은 채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성급하게 재혼한 어머니 때문에 큰 배신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의 고백 그대로였다. “연약함이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구나. 한 달도 못되어, 아니, 니오베처럼 온통 눈물범벅이 되어 아버지의 시체를 뒤따를 때 신었던 신발이 채 닿기도 전에, 바로 그 어머니가-아, 하느님, 말 못 하는 짐승도 그보다는 더 오래 슬퍼했을 겁니다-숙부와 결혼을 하다니.” 그 상심한 마음 때문에 왕권을 이을 태자의 신분이었으나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왕과 왕비의 간곡한 권유로 덴마크에 머물겠다고 대답한다. 이런 와중에 선왕 유령 소식을 접한 햄릿이 그곳에 가서 그 선왕 유령을 만나게 되자 그 유령은 놀라운 진실을 전해 준다. 삼촌 클로디우스가 선왕이 잠든 틈을 타서 그의 귓속에 독약을 풀어 넣어 독살한 것이라는 진실이었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소식이었지만 우선 호레이쇼에게 그 유령에 대해 함구해 줄 것을 맹세하게 한 다음, 자기가 앞으로 필요할 경우에 짐짓 미치광이 노릇을 할 작정이니 모르는 척해 줄 것을 부탁한다.
(2막) 햄릿은 자기 애인인 오필리아를 만나서 미친 사람 행색을 해 보인다. 그의 아버지 플로니우스는 그것을 오필리아에 대한 사랑이 가로막히자 발생한 사랑의 광기로 여기고 왕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 한다. 한편 햄릿이 실성한 것을 파악한 클로디우스왕은 자기가 햄릿의 친구라고 생각한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정작 햄릿은 독사보다 믿지 못할 동창생으로 여기는]을 독일에서 불러들여 햄릿의 속마음을 캐내려 한다. 거트루드 왕비는 아버지의 죽음과 자기의 성급한 결혼 말고는 다른 원인이 없다고 여기지만, 왕은 다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햄릿을 만난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는 그로부터 덴마크가 최악의 감옥이라는 말 외에는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한다. 한편 햄릿은 막 도착한 유랑 극단에게 ‘곤자고 살인’이란 연극을 상연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그 제1배우에게 자기가 주는 대사를 좀 끼어 넣어 줄 것을 요청하고 허락을 받아 낸다. 연극을 통해 왕의 양심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3막) 햄릿과 오필리아가 만나는 장면을 통해 그의 광기의 원인을 알려고 했던 왕과 폴로니우스는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듣고는 엇갈린 평가를 내린다. 폴로니우스는 계속 버림받은 사랑 타령을 해댔지만, 왕은 다른 원인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밀린 조공을 받아 오도록 햄릿을 영국으로 보낼 결심을 굳힌다. 한편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은 햄릿이 자기 마음에 상처 주는 말로 일관하는 것을 보고, 오필리아는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던 그가 이제 광기로 다 시들어 버렸다고 생각하고는 좌절한다. 햄릿이 ‘쥐덫’이라고 개명한 ‘곤자고 살인’ 연극을 보면서 불쾌해 하던 왕은 급기야 연극 도중에 일어나 나가 버린다. 그렇지만 왕의 조카가 왕을 독살하는 연극 장면에서 석연치 않은 표정을 내비친 것을 호레이쇼가 주요한 단서로 간파해 낸다. 한편 왕은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에게 햄릿과 함께 영국으로 떠날 채비할 것을 명하면서도, 내심 형제 살인이라는 큰 죄를 저지른 자신을 돌아보며 극심한 죄의식으로 고뇌하며 기도하려고 시도한다. 기도하는 그를 보고 칼을 뽑아 해치우려던 햄릿은 마음을 고쳐먹고 더 끔찍하게 복수할 때를 기다린다. 곧이어 만난 어머니와 대화하던 중 휘장 뒤에 숨어 있던 자(폴로니우스)를 누군지도 모른 채 칼로 찔러 죽인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가 어떻게 모든 분별력과 감각을 잃어버린 채, “살인자, 악당, 전남편의 2백 분의 1에도 못 미치는 놈, 왕들 가운데 광대, 제국과 왕권을 소매치기한 자, 선반에서 귀중한 왕관을 훔쳐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은 도둑”인 클로디우스와 결혼할 수 있었냐며 그녀를 책망한다. 그 자리에 등장한 아버지 유령과 햄릿이 대화하기 시작하자 남편 유령을 보지 못한 왕비는 햄릿이 미쳤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햄릿은 어머니가 하늘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지난 일을 회개하고 앞으로의 죄책을 피할 것을 권고해 준다.
(4막) 햄릿이 폴로니우스를 죽였다는 소식을 접한 왕은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에게 햄릿을 찾아 폴로니우스 시체의 행방을 물어 교회당으로 가지고 오도록 시킨다. 햄릿이 계속 횡설수설하는 것을 본 왕은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에게 지체하지 말고 바로 영국으로 떠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그들 편에 영국왕에게 보내는 국서, 즉 햄릿을 즉시로 죽이라는 개인 서신을 상세히 적어 보낸다. 그때 노르웨이 왕의 조카인 포틴브라스가 도착하여 자기 대장을 통해 덴마크의 국토를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안전 통행권을 간청한다. 한편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 때문에 정신이 나가 버린 오필리아가 왕비를 접견하러 온다. 미친 오필리아를 곁에서 지켜본 왕은 그녀의 오빠인 레어티즈가 돌아와 자기를 해할까 두려워 호위병들을 불러 문을 지키게 한다. 그렇지만 레어티즈가 폭도들을 이끌고 덴마크의 군관들을 제압한 후 왕실 문을 부수고 들어온다. 레어티즈가 왕에게 자기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초지종을 묻는 중에 정신 나간 오필리아가 등장해서 레어티즈 마음을 찢어 놓는다. 햄릿이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목숨도 노리고 있다고 왕이 레어티즈에게 일러주는 사이에 햄릿에게서 온 편지가 도착한다. 영국으로 가는 도중에 사건이 생겨[해적을 만나 자기 혼자만 그들의 포로가 되었다 풀려남] 자기 혼자 덴마크로 돌아오게 되었다며 알현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바로 그때 왕은 햄릿을 해할 계책을 꾸며 내었다. 곧 장검술이 특기인 레어티즈와 햄릿이 검투 시합을 벌이도록 주선해서 레어티즈의 칼에 의해 죽임 당하도록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레어티즈는 자기 칼에 독을 묻혀 햄릿을 독살할 계획을 세우고, 왕은 왕대로 혹시라도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햄릿이 마실 잔에 독을 풀어 넣는 계책까지도 마련해 두었다. 그런데 그때 왕비가 나타나 오필리아가 실수로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준다.
(5막) 오필리아의 무덤 앞에서 조촐한 장례식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있던 햄릿은 그곳에 레어티즈가 있는 것을 보고 오필리아가 숨을 거둔 것을 알게 된다. 누이를 한 번 더 껴안아야겠다며 무덤 속으로 뛰어드는 레어티즈를 보고 햄릿도 함께 뛰어들었다가 서로 붙들고 싸운다. 그들을 떼어 놓은 왕은 자기가 세워 둔 계책 실행에 들어간다. 한편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영국으로 향하던 배 속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해 준다. 왕이 영국왕에게 보낸 국서에 자기를 제거하라는 명령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얼른 다른 국서를 한 장 써서 원래 것과 바꿔 넣는다. 그 속에는 그 국서를 갖고 간 자들을 즉시 처형하라고 써두었다. 그것으로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은 황천길로 가게 된 것이다. 그때 궁신 오스릭이 등장해서 왕이 레어티즈와의 검술 경연에서 햄릿에게 큰 내기를 걸었다는 전갈을 전해 준다. 검투 시합이 시작되자 처음에는 햄릿이 우세하기 시작했다. 시합을 보고 있던 어머니 거트루드가 축배를 들어 햄릿을 응원하겠다며 한 잔 마시려 하자 옆에 있던 왕이 제지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용서를 구하고 한 잔 마신 후 햄릿에게 잔을 건넨다. 그는 나중에 들겠다며 사양한다. 독배를 먼저 거트루드가 마신 것이다. 그러다가 햄릿이 레이터즈의 칼에 상처를 입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드잡이를 하는 중에 그만 서로의 칼이 바뀌는 상황이 전개된다. 이 시점에서 햄릿이 자기 칼, 즉 레어티즈의 칼로 그를 찔러 상처를 낸다. 두 사람 모두에게 독이 감염된 셈이다. 바로 그때 왕비가 쓰러진다. 피를 보고 기절한 것뿐이라는 클로디우스왕의 말에 왕비는 마지막으로 외치면서 죽는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 술, 저 술! 아 사랑하는 햄릿! 저 술, 저 술 때문이다. 독을 마셨구나.” 자기 꾀에 자기가 당한 것을 알게 된 레어티즈는 햄릿에게 사실을 고한다. 독약 묻힌 칼에 감염되어 햄릿이 곧 죽게 될 것과 왕비가 독살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범인은 왕이라는 것을 털어놓는다. 그 말을 들은 햄릿은 독 묻은 칼로 왕을 찌르고, 남은 독배를 왕이 마시도록 함으로써 왕도 죽는다. 왕이 당연한 보상을 받은 것을 확인한 레어티즈는 마지막으로 햄릿과 서로 용서할 것을 제안한 후 죽는다. 햄릿은 죽으면서 절친 호레이쇼에게 이런 참상의 연유를 모르는 이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전해 줄 것을 부탁한다. 함께 죽겠다는 호레이쇼를 만류한 후 포틴브라스 왕자와 영국 대사들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된 햄릿은 왕위를 포틴브라스에게 계승한다는 자신의 뜻을 전하고 숨을 거둔다. 호레이쇼는 햄릿이 부탁한 대로 그 시체들을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단 위로 올려 두고 영문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 일의 전모를 이야기해 주도록 도와줄 것을 포틴브라스에게 부탁하자 그가 그대로 집행하도록 명령한다.
-죽음의 광시곡-
무엇보다 이 작품 속에는 죽음이 판칩니다. 햄릿 아버지의 죽음을 필두로, 폴로니우스의 죽음, 오필리아의 죽음, 거트루드 왕비의 죽음, 클로디우스 왕의 죽음, 레어티즈의 죽음, 햄릿의 죽음 및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의 죽음이 차례로 뒤를 잇습니다. 햄릿의 절친 호레이쇼를 제외하고 모든 주요 등장인물이 목숨을 잃습니다. 한 사람의 탐욕이 빚은 비극의 열매였지요. 햄릿과 함께 이승을 하직하려다가 그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살아남은 호레이쇼는 비극 햄릿의 의미를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 여러분들 역시 음탕하고 피에 젖은, 천륜을 어긴 행위들과 우발적인 하늘의 심판과 우연한 살육과 꾸며 놓은 가짜 계략에 의한 죽음과 마지막 판국에 음모가 어긋나 음모자가 당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So shall you hear / Of carnal, bloody and unnatural acts, / Of accidental judgments, casual slaughters, / Of deaths put on by cunning and forc’d cause, / And, in this upshot, purposes mistook / Fall'n on the inventors' heads. All this can I / Truly deliver.)
■음탕하고 피에 젖은, 천륜을 어긴 행위들 = 클로디우스왕이 햄릿 아버지를 독살한 행위/거트루드 왕비가 자기 남편 죽인 클로디우스와 결혼한 행위.
■우발적인 하늘의 심판 = 오필리아의 죽음(?)/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의 죽음(?)
■우연한 살육 = 폴로니우스의 죽음/왕비의 죽음/레어티즈의 죽음/햄릿의 죽음
■꾸며 놓은 가짜 계략에 의한 죽음 = 왕비의 죽음/레어티즈의 죽음/햄릿의 죽음/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의 죽음.
■마지막 판국에 음모가 어긋나 음모자가 당한 이야기 = 레어티즈의 죽음/클로디우스의 죽음.
그만큼 연극 ‘햄릿’에 있어 죽음은 중요한 모티프입니다. 물론 그 죽음의 시발점은 햄릿 아버지인 덴마크 왕의 죽음이었습니다. 햄릿에게는 그 죽음이 특별했습니다. 왕비와의 대화 속에 표현된 그대로입니다.
■“왕비: 너도 알고 있듯이 누구든 삶은 끝나고 지상에서 영원으로 넘어가는 법이란다. (...) 그렇다면, 너에겐 죽음이 왜 그리도 특별해 보인단 말이냐?”(Thou know’st 'tis common, all that lives must die, Passing through nature to eternity. <...> If it be, Why seems it so particular with thee?)
■“햄릿: 마마, 보인다뇨? 실제로 그러합니다. 저는 ‘보인다’는 말을 모릅니다.” (...) 그렇지만 저는 겉으로 보일 수 없는 것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슬픔의 장식이자 의복에 불과한 것입니다. (Seems, madam! Nay, it is; I know not seems. <...> But I have that within which passeth show; These but the trappings and the suits of woe.)
즉 자기가 입고 있는 겉옷이나 시커먼 상복, 긴 한숨, 강물 같은 눈물, 낙담한 얼굴 모습 등은 슬픔의 장식과 연기에 불과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자기의 진심은 마음속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진심은 죽은 아버지에 대한 각별한 감정이었지요. 자기가 존경하던 아버지가 숨을 거둔 이후에 그에게는 “세상만사가 한없이 따분하고 싱겁고 무의미하고 무익할 뿐”(How weary, stale, flat and unprofitable/Seem to me all the uses of this world!)이었습니다. “누구든 삶은 끝나고 지상에서 영원으로 넘어가는 법”(all that lives must die, / Passing through nature to eternity)이라는 어머니의 조언이나, “세상 사람치고 죽지 않고 사는 사람 있다더냐, 세상에서 처음으로 죽은 자로부터 바로 오늘 죽은 자에 이르기까지 다들 생자필멸의 법칙을 따르는 법”(whose common theme / Is death of fathers, and who still hath cried, / From the first corse till he that died today, / ‘This must be so.’)이라는 삼촌 왕의 권면도 자기의 마음속 허무감을 넘어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살하고 싶지만 조물주가 자살을 금하는 법(His canon 'gainst self-slaughter)을 정해 두어 감행하지 못할 뿐이었지요.
계속 죽음을 묵상하는 동안 햄릿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발견해 냅니다.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구나”(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라는 유명한 독백을 통해서입니다. 이 독백 이후에는 죽음에 대한 숙고가 등장합니다. 그는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잠자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꿈을 꾸게 되는 게 문제라고 봅니다. (To die, to sleep. To sleep, perchance to dream - ay, there's the rub.) 이 꿈이 두려워서, “사멸할 이 육신의 허물을 벗어 버리고 죽음의 잠 속에서 우리는 무슨 꿈을 꾸게 될까? 그 때문에 우리는 망설이고 이 장구한 인생의 재난을 이어 가는구나.”라고 본 것이지요. “그게 아니라면 그 누가 시대의 채찍과 조롱, 억압자의 횡포와 거만한 자의 비방, 짝사랑의 고통과 법의 게으름, 관리의 오만함과 훌륭한 사람들이 하찮은 사람들로부터 참고 받아 내는 업신여김을 견디겠는가?”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미지의 나라”(The undiscover'd country)인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the dread of something after death)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알지 못하는 저승으로 달려가기보다 이승의 질곡을 참고 살게 하는 것”(makes us rather bear those ills we have / Than fly to others that we know not of?)이라고 본 것입니다. 바로 이 두려움 때문에 “양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고”(Thus conscience doth make cowards of us all), “중대한 계획도 물줄기를 틀어 실행이라는 이름조차 잃는구나.”(And enterprises of great pith and moment, With this regard their currents turn awry And lose the name of action.)라고 읊조립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 이런 이해를 하고 있는 햄릿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햄릿의 답변을 가늠하게 해 주는 그의 고백 한 자락이 있습니다. 레어티즈과 검술 경연을 하기 직전에 자기를 염려해 주는 호레이쇼에게 한 말입니다. “걱정 말게. 나는 조짐 같은 것은 믿지 않네.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데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 죽음이 지금이라면, 다음에는 오지 않을 것이고, 다음에 오지 않는다면 지금 오겠지. 죽음은 지금이 아니라도 나중에 올 거야. 준비가 가장 중요하네. 죽을 때 자신이 남길 것에 대해 간여하는 이는 없는 터. 일찍 죽은들 무슨 상관인가? 올 테면 오라 하게.”(Not a whit, we defy augury. There’s a special providence in the fall of a sparrow. If it be now, ‘tis not to come; if it be not to come, it will be now; if it be now, yet it will come. The readiness is all. Since no man has aught of what he leaves, what is’t to leave betimes? Let be.) 즉 하찮은 참새 한 마리의 죽음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간여한다는 것을 믿는 자기에게는 죽음이 일찍 오고 나중에 오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담담히 밝힌 것입니다. 곧 닥칠지도 모를 죽음 앞에서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한 죽음의 진실을 참으로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그였기에 아버지 유령을 만났을 때도 그 유령이 손짓하여 자기를 오라고 하자, “두려울 게 무언가? 내 목숨은 하나도 아깝지 않네. 유령처럼 내 영혼도 불멸이긴 마찬가진데 저것이 내 영혼에 무슨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Why, what should be the fear? / I do not set my life at a pin’s fee; / And for my soul, what can it do to that, / Being a thing immortal as itself?)라는 반응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즉 자기 영혼이 불멸이라는 것을 믿고 있기에 유령을 만나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중대한 문제이지만, 죽음의 문제는 그것이 잠일 뿐 아니라 꿈꾸는 잠이기 때문이라는 햄릿의 언명이 새로운 의미를 띠고 다가옵니다. 인생이 꿈(일장춘몽)이라는 시각과는 반대의 상황 전개인 셈입니다. 사실상 인생도 단순히 잠에 불과하다면 아무도 개의치 않을 것이지만, 꿈꾸는 잠이라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닐까요? 현란하고 복잡다단하기 이를 데 없는 꿈이 펼쳐지는 현장인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이 잠에 불과하다면 개의할 자가 누구일까요? 문제는 꿈꾸는 잠이라서 문제인 것이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상몽(祥夢)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몽이 기다리고 있다는 게 골칫거리입니다. 게다가 현세의 잠이 한시적인 경험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내세의 잠은 영원히 꿈꾸는 잠의 세계입니다. 이런 사후 현실에 대한 우리의 고뇌를 적실하게 지적한 시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시인 존 드라이든은, “죽음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죽음이 무엇이고 사후 세계가 어디인지 몰라서 두려워한다.”(Death, in itself, is nothing; but we fear / To be we know not what, we know not where.)라고 언급했습니다. 시인 T. S. 엘리엇도, “소위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 너머에 있는 것이 죽음이 아닐까 봐 그게 우리는 두렵고 두려운 거다.”(Not what we call death, but what beyond death is not death, / We fear, we fear.)라고 읊은 적이 있지요. 시대의 예언자인 시인 두 사람이 똑같이 지적한 인간의 근원적 문제입니다. 죽음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끝이 아니라서 난감해하기 전에 다시 한번 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햄릿은 죽음 너머에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불멸'(immortality)을 믿었습니다. (이 글의 제목에 있는 ‘사후무사’<死後無死>는 ‘죽음 이후에 그 죽음이란 게 없다’는 의미로 앞의 엘리엇의 문장에서 따왔음.)
혹자는 얘기할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생명이 없으니 의식이나 잠재의식도 없지 않겠냐고. 그러니 잠은 있으되 꿈은 없을 거라고. 그곳은 온통 무의식의 상태일 거라고. 셰익스피어의 말은 그야말로 꿈같은 말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자기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생명을 누리고 의식을 갖게 된 것도 온통 ‘무’의 상태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요? 무신론적 과학이든 유신론적 신앙이든 이 점을 기본적으로 설정해 두고 있습니다. 전자는 무에서 어떻게 물질이 생겨났는지는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지만 무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무에서 물질이 생겨나고 물질에서 생명이 비롯되었다고 믿는 것이지요. 후자는 태초에 무였던 상태에서 신이 세상 만물을 창조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떠한 입장을 취하든 태초에 무에서 생명이 태어나고 의식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면,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종류의 생명이 태어나고 의식이 생길 것을 기대하고 믿는 게 그렇게 문제가 될까요? 태초의 생명과 의식 형성이나 사후의 생명과 의식 생성은 둘 다 신앙의 세계입니다! “죽음을 두려움 없이 맞이하는 척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He who pretends to face death without fear is a liar.)라는 루소의 말이 적용되지 않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그들의 확신이나 죽음을 두려움 없이 맞을 수 있다는 그들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생명의 근원에 대해선 모른다.’라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하는 과학자와 일반인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시원(始原)되는 신을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나는 태초에 물질이 존재한 것을 믿는다.’, 혹은 '나는 태초에 물질이 생명의 기원이 된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마지막 그룹이 자기가 생명의 기원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과학’의 차원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정직하지 않습니다. 비과학적이거나 초자연적인 문제인 생명의 근원을 반과학적이거나 맹목적인 태도로 접근하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생명의 기원에 대해 유신론자들은 신앙을 말하지만, 자기들은 과학을 말한다고 강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성의 중요한 기능이 오류를 분별해 내는 것이라고 칸트는 지적했습니다. 이성의 잣대로 이러한 사이비 과학자들의 주장을 분별해 보세요.
-죄와 양심과 상벌-
<클로디우스의 죄와 양심>
클로디우스의 악행은 크게 보아 네 가지입니다. 우선 형을 죽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형수를 속이고 그녀와 결혼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햄릿에게 물려야 할 왕위를 찬탈한 것입니다. 네 번째는 햄릿을 두 번씩이나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배후에는 거짓말과 위선이 존재합니다. 이런 그가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당합니다. 어떻게 양심의 부담을 느끼는지 두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왕의 고문인 플로니우스가 햄릿을 만나기로 되어 있는 오필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을 읽고 있어라. 이처럼 신앙심이 있어 보여야 혼자 거니는 것이 이상하게 비치지 않는 법이다. 이런 일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흔히 경건한 얼굴과 신앙심 깊은 행동으로 우리는 악마를 사탕발림한단다.”(Read on this book, / That show of such an exercise may colour / Your loneliness.-We are oft to blame in this, / 'Tis too much prov'd, that devotion's visage / And pious action we do sugar o'er / The devil himself.)
이 말을 들은 왕은 방백(aside)으로 이렇게 한 마디 덧붙입니다.
“아, 너무나 옳은 말이다. 그 말이 내 양심에 아픈 채찍을 가하는구나. 화장술로 단장한 창녀의 뺨과 화장 분의 관계도 더없이 위선적인 나의 말과 행동의 관계에 비한다면 조금도 추하지 않구나. 아, 무거운 양심의 짐이여!” ([Aside.] O’tis too true! / How smart a lash that speech doth give my conscience! / The harlot’s cheek, beautied with plastering art, / Is not more ugly to the thing that helps it / Than is my deed to my most painted word. / O heavy burden!)
즉 자기를 창녀에 비유하고 있지요. 자기 말과 행동의 관계가 마치 창녀의 화장 분과 그것으로 단장한 뺨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의 가책이 채찍처럼 아프고 짐처럼 무겁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방백이 아니었다면 어느 누구도 클로디우스에게 이런 양심적인 측면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방백이 일시적인 실언이 아니었다는 점은 클로디우스가 거듭 자기 양심의 가책을 털어놓는 데서 드러납니다. 폴로니우스가 왕비와 햄릿과의 대화를 도청하러 가겠다며 떠난 후에 이렇게 홀로 고백합니다.
“야 나의 범죄, 그 악취 하늘까지 닿는구나. 형제 살인이라는 태초의 저주가 찍혔구나(O, my offence is rank, it smells to heaven; / It hath the primal eldest curse upon't, - / A brother's murder!). 마음의 결심만큼이나 간절하지만 나의 더 큰 죄가 그 마음 꺾어 버리니 기도할 수가 없구나. (...) 이 저주받은 손이 형님의 피로 두껍게 범벅되었다 한들 자비로운 하늘에는 이 손 눈처럼 희게 씻어 줄 빗물이 없단 말인가? (...) 기도의 힘이란 우리 타락을 막아 주거나 타락한 다음 용서해 주는 것이거늘, 그 밖에는 기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내 더러운 살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면 될까? 살인의 결과물들인 왕관과 야심과 왕비를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는 판에 그건 안 될 말. 죄의 산물을 간직한 채 용서받을 수도 있을까? 이 세상의 타락한 물결 속에서 죄의 금칠한 손이 정의를 밀쳐 버리고 사악한 재화가 법을 매수하는 일은 흔치 않더냐.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안 통할 일. 거기서 속임수는 없고 행동은 본색을 드러내며 우리의 죄악과 가까이 얼굴 맞대게 되면 증거가 드러나고야 만다. (...) 빠져나오려고 애쓸수록 더 깊이 옭매이는 덫에 걸린 영혼이여! 천사들이여, 도와주소서! 뻣뻣한 무릎아, 꿇어라. 철심 박은 심장아, 갓난아이 근육처럼 말랑해져라. 그러면 만사가 좋아지리라. (무릎을 꿇는다) (...) 말은 하늘로 올라가고, 생각은 아래에 남는구나. 생각 없는 말이 하늘에 갈 리 만무하니. (My words fly up, my thoughts remain below. Words without thoughts never to heaven go.) (퇴장)”
자신의 범죄가 형제 살인이라는 태초의 저주에 속한 것으로서 그 악취가 하늘까지 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더 비극적인 사실은 이 죄책감이 기도하겠다는 마음의 결심조차 꺾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기도의 역할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고 죄 지은 후에 용서해 주는 것인데, ‘왕관과 야심과 왕비’(crown, ambition and queen)를 포기하지 않은 채 용서받기를 기대한다는 게 가당치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안 것이지요. 하늘나라에서는 위선이란 통하지 않고 모든 행위의 본색이 다 드러난다는 것을 자기 양심이 증거하니까요. 무릎까지는 꿇었지만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천사를 부르기도 하고 하늘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 ‘생각 없는’ 기도가 하늘에 상달될 수 없다는 것을 자기도 알고 있습니다. 양심이 가리키는 자신의 죄악에 대한 가책은 느꼈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범한 죄악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도, 그것을 바로 잡을 시도도 하지 않은 채 파멸하고 마는 클로디우스는 이 작품 속의 중요한 반면교사입니다.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기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뉘우”치기(felt remorse)는 했지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은 채 자살해 버린 가룟 유다가 떠오릅니다(마태복음 27:3-5).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어떠한 것일까요? 햄릿이 어머니에게 제시해 주는 조언을 한번 참고해 보겠습니다. “어머니, 제발 자비를 바라신다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제가 미쳐서 헛소리를 한다며 영혼에 아첨의 고약을 바르지 마세요. 고약은 단지 아픈 곳을 감싸 줄 뿐입니다. 그동안 썩은 고름은 보이지 않게 서서히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해치기 마련입니다. 하늘에 고백하고, 지난 일을 회개하고, 앞으로 다가올 일을 피하십시오. 잡초에 거름을 뿌려서 더 무성하게 만들지 마십시오.”(필자 의역-Mother, for love of grace, / Lay not that flattering unction to your soul / That not your trespass, but my madness speaks. / It will but skin and film the ulcerous place, / Whilst rank corruption, mining all within, / Infects unseen. Confess yourself to heaven, Repent what's past, avoid what is to come; And do not spread the compost on the weeds,) 즉 ‘영혼에 아첨의 고약 바르기’와 ‘참된 회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기 죄악을 직면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변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처리하지 않은 그 죄악이 서서히 내면의 모든 것을 파괴하게 된다고 햄릿은 경고합니다. 마치 잡초에 거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참된 회개란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그것으로부터 돌이키는 것('회개'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되면 장래의 죄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햄릿은 강조합니다. 무려 400여년 전의 희곡 “햄릿” 속에서 영혼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될 줄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거트루드의 죄와 양심>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클로디우스에 대해서는 복수를 부탁한 선왕 유령은 아내에 대해서는 악의를 품지 말고 그녀의 영혼을 달래 주라고 햄릿에게 두 번씩이나 권고한 것을 보면, 그녀는 클로디우스와 다른 경우라는 암시를 줍니다.
■“그러나 이 일을 어떻게 추구하든지 조금이라도 너의 어머니를 적대하는 마음을 품거나 그녀에 대해 악의를 꾀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그저 하늘의 뜻과 그녀의 양심의 가책에 맡겨 두어라.”(But howsoever thou pursu'st this act, / Taint not thy mind, nor let thy soul contrive / Against thy mother aught; leave her to heaven, / And to those thorns that in her bosom lodge, / To prick and sting her.)
■“저길 봐라. 네 어미가 몹시 놀랐구나. 네 어미의 괴로운 영혼을 달래 주어라. 상상력은 가장 연약한 육신에서 가장 잘 움직이는 법. 햄릿, 어머니를 위로해라.”(But look, amazement on thy mother sits. O step between her and her fighting soul. Conceit in weakest bodies strongest works. Speak to her, Hamlet.)
즉 거트루드는 남편이 죽은 후 클로디우스와 결혼했지만 육체적으로 아주 연약한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이었고 그 일로 인해 속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유령이 알아차렸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거트루드의 대사를 곰곰이 들여다 들여다보면 그녀는 전 남편이 클로디우스에게 독살되었다는 점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햄릿에게 ‘누구든 삶은 끝나고 지상에서 영원으로 넘어가는 법’인데 왜 아버지의 죽음이 특별하게 보이느냐고 질문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의 죽음이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죽음으로 인해 아들 햄릿이 “항상 눈꺼풀을 내리깔고 흙속에 들어간 아버지를 찾”기만 했기에 그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햄릿이 그녀에게 아버지를 죽인 것이 클로디우스였다고 말할 때에도 그녀는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게 드러납니다. 다만 햄릿이 실성하는 지경까지 간 것이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자기가 클로디우스와 성급하게 결혼한 것이 원인 제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품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햄릿이 어머니가 클로디우스와 결혼한 것은 “결혼이라는 육체에서 영혼을 빼내 버리고 성스러운 종교를 말장난으로 만들어 버”린 행위(such a deed / As from the body of contraction plucks / The very soul, and sweet religion makes / A rhapsody of words.)였다고 질타하면서 아버지와 클로디우스의 그림을 보여주며 어머니의 무분별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온갖 신들이 대장부의 표본을 보여 주기 위해 자신들의 도장을 찍은 듯한 진정 아름다운 형상”(A combination and a form indeed, / Where every god did seem to set his seal, / To give the world assurance of a man.)을 지난 남편 대신 “곰팡이 핀 이삭처럼 멀쩡한 형님을 좀먹는 인간”(like a mildew'd ear / Blasting his wholesome brother)에 불과한 클로디우스와 결혼하다니, 그리고 “어떻게 이 아름다운 산을 떠나 이런 황야에서 풀을 뜯고 살찌려 할 수 있단 말”이냐(Could you on this fair mountain leave to feed, / And fatten on this moor?)며 눈이 제대로 있느냐고 책망하지요.
이 책망을 들은 거트루드는 이렇게 반응하지요. “아, 햄릿, 그만해라. 너는 내 눈을 내 영혼 속으로 돌려놨구나.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검고 오톨도톨한 그런 오점들이 그곳에 서려 있구나.”(O Hamlet, speak no more. / Thou turn'st mine eyes into my very soul, / And there I see such black and grained spots / As will not leave their tinct.) 즉 햄릿의 신랄한 비난이 가슴 아프긴 하지만 자기 영혼 속을 다시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고, 그 속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오점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백 외에 커트루드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대사가 별로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주목할 만한 다른 한 가지 독백이 실성한 오필리아와 만나기 직전에 드러납니다.
“(방백) 죄의 본성이 그러하듯이, 아무리 사소한 것도 죄로 물든 내 영혼에는 큰 불행의 서곡으로 비치는구나. 죄의식이란 속수무책의 의심으로 가득 차서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도리어 죄를 드러내게 되는구나.”(To my sick soul, as sin's true nature is, / Each toy seems prologue to some great amiss. / So full of artless jealousy is guilt, / It spills itself in fearing to be spilt.)
즉 이제 자기 영혼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상태이기 때문에 사소한 일이라도 생기면 그것이 결국 큰 불행으로 연결될까 봐 두려워진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지요. 더구나 그 죄의식은 어리석게도 계속 의심하며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부지불식간에 그 죄를 드러내게 된다는 언급도 덧붙입니다. 이런 측면은 햄릿이 죄 있는 인간들의 모습에 대해 지적하는 대사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래, 내 듣기에 죄 있는 인간들은 연극을 보다가 기묘한 장면을 알아보고선 오래전에 저지른 살인을 고백한다 했지. 살인은 비록 혀가 없어도 아주 신기한 혀를 빌려 말한다 했지. (...)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겠군. 연극이란 왕의 양심을 잡아내기 위한 것이렷다!”(I have heard / That guilty creatures sitting at a play, / Have by the very cunning of the scene, / Been struck so to the soul that presently / They have proclaim'd their malefactions. / For murder, though it have no tongue, will speak / With most miraculous organ. (...) I'll have grounds / More relative than this. The play's the thing / Wherein I'll catch the conscience of the King.)
즉 죄의식에 짓눌려 있다가 어떤 감동적인 것에 의해 감정적인 동요가 생기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죄를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언급한 대로 “심지어는 아주 사악한 악당”까지도 태어날 때부터 그 마음속에 양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그리고 거듭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새롭고 더욱 커다란 감탄과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내 머리 위에 총총히 빛나는 별들과 내 가슴 속의 도덕 법칙이 그것이다.”(“실천이성비판”) 셰익스피어는 “햄릿”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양심에 새겨진 이 도덕 법칙을 확연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 도덕 법칙은 “따로 가르쳐야 할 필요가 없고 단지 계발하기만 하면” 된다는 칸트의 권면을 고려하자면, 클로디우스와 같은 반면교사가 그 계발 과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본 블로그 중 “20세기 코헬렛 ‘희랍인 조르바’”에서도 나눈 대로, ‘자신이 퇴락한 삶을 살고 있다’는 ‘양심의 부름’을 들을 때 ‘양심을-가지려고-원함’으로써 자신의 ‘본래적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하이데거)도 상기합시다. 여기에다 언제라도 죽음에 직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봄”이라는 차원도 더해봅시다. 양심 혹은 도덕 법칙에 자신의 뜻과 의지를 일치시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자 이성적인 선택의 길입니다.
<현재 진행형인 벌>
햄릿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 한 가지는 이 클로디우스가 당한 벌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입니다. 형님인 선왕을 독살하고 왕으로 등극한 후 형수를 취했지만 그는 계속되는 심리적 어둠 가운데 삽니다. ‘채찍처럼 아프고 짐처럼 무거운’ 양심의 가책과 자신을 지저분하고 추한 존재로 보는 자아상 때문이지요. 그리고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거듭 거짓말하고 위선을 떨며 삽니다. 예컨대 대신들과 왕비와 햄릿 앞에서 하는 말을 참고해 보세요. “따라서 한때의 형수이자 이제는 짐의 왕비, 전쟁을 앞둔 이 나라 왕실의 반려자를 짐은 말하자면 맥 빠진 기쁨으로 한쪽 눈에 웃음을, 다른 쪽 눈엔 눈물을 머금고 장례식에 기쁨을, 결혼식엔 애도를 간직하며 기쁨과 슬픔의 무게를 평평하게 유지한 채 비로 맞아들였소.”(Therefore our sometime sister, now our queen, / Th'imperial jointress to this warlike state, / Have we, as 'twere with a defeated joy, / With one auspicious and one dropping eye, / With mirth in funeral, and with dirge in marriage, / In equal scale weighing delight and dole, / Taken to wife) 그리고 그 자리에서 햄릿에게는 이렇게 언급하지요. “친아비가 제 자식에게 보이는 고귀한 사랑을 짐도 그대에게 똑같이 베푸노라.”(And with no less nobility of love / Than that which dearest father bears his son / Do I impart toward you.)
게다가 자신의 범죄를 폭로하거나 자기 위치에 위협적인 존재를 발견해서 제거하려는 노력도 끝없이 기울입니다. 이것은 마치 김용규 작가가 언급한 대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른 이후에 현재 진행형 격인 벌을 받은 것과 흡사합니다. 그가 제 발로 자수한 것은 사실상 클로디우스가 겪은 것과 같은 온갖 벌을 다 짊어져야 하는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우선은 살인 행위 자체가 벌이었고, 그 범죄에서 비롯된 심리적 어둠 상태, 그 범죄를 감추려는 거짓과 위선 등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영적 감옥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재 진행형인 벌은, 죽음 이후의 삶의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때 받을 상벌의 그림자 격일 것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클로디우스라는 살인자 왕이 받는 구체적인 벌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가 측은해 보일 정도로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몹시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함”이란 의미를 지난 전전긍긍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태입니다. 초반부에서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빠른 재혼으로 인해 실의에 빠져 있는 햄릿 앞에서 쩔쩔매며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그를 달랩니다. 그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겠지요. 나중에 햄릿이 폴로니우스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도 실권을 지닌 왕답게 그의 살인죄를 바로 처단하지도 못한 채 그저 영국으로 빨리 보내어 그곳에서 영국 왕이 그를 죽이도록 조치합니다. 햄릿을 사랑하는 백성들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가 한 고백을 참고해 보세요. “햄릿을 즉시로 죽이라는 취지를 국서에 상세히 적었으니 영국의 왕이여, 이를 실행하라. 내 핏속의 열병처럼 햄릿이 날치니 그대가 나를 치료해 주어야겠다. 결과를 알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쁨을 모르겠구나.”(By letters conjuring to that effect, / The present death of Hamlet. Do it, England; / For like the hectic in my blood he rages, / And thou must cure me. Till I know 'tis done, / Howe'er my haps, my joys were ne'er begun.) 열병처럼 날뛰는 햄릿을 자기가 처치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조공 바치는 영국 왕이 처단하여 자기를 치료해 주기를 고대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자기가 기쁨을 누린 적이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고백까지도 합니다. 그러다가 햄릿이 영국으로 가는 여정에서 살아 돌아오자 비겁하게도 레어티즈를 통해 그를 죽일 것과 선왕에게 했던 식으로 그를 독살할 계책을 세우기까지 하지요. 그에게는 “인간을 그 이기심의 깊이와 자신이 저지를 수 있는 잔혹성을 대체로 인정할 줄 모르는 이기적이면서도 구제불능인 존재”로 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평가가 어울립니다.
-독보적 언어 연금술사,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1564-1616)는 대략 39편의 희곡과 소네트[14행의 짧은 시로 이루어진 서양 시가] 154편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함량 미달의 작품을 대량으로 집필했다면 그것들은 지금까지 남아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작품들 중에는 인류의 고전으로 남아 지금까지도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장 위대한 영어 작가”(the greatest writer in the English language) 혹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극작가”(the world's greatest dramatist)라는 명성을 낳게 한 작품들이지요. 그런데 장갑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기울어진 가세 탓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가 홀로 이 많은 작품들을 집필한 데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정규 대학 교육, 그것도 일류라는 대학에서 받는 교육을 우상시한 인간들의 추태였지요.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았습니다. 당시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출신의 극작가들(존 릴리, 조지 필, 로버트 그린, 크리스토퍼 말로 등) 중에는 그에 대한 질투를 노골적으로 밝힌 이도 있었습니다.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한 로버트 그린이 셰익스피어를 비난한 것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깃털로 아름답게 장식하여 벼락출세한 까마귀 한 마리가 있는데, 그는 호랑이의 마음을 배우라는 가죽으로 둘러 감싸고는, 우리들 중 최상의 시인만큼 뛰어나게 무운시를 감동적으로 써낼 수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완전한 팔방미인<Johannes factotum>이기 때문에, 제 딴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대를 휘젓는 연극배우<Shake-scene>라고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there is an upstart Crow, beautified with our feathers, that with his Tiger's heart wrapped in a Player's hide, supposes he is as well able to bombast out a blank verse as the best of you: and being an absolute Johannes factotum, is in his own conceit the only Shake-scene in a country.)
이 글이 어떤 식으로 교묘하게 셰익스피어를 비난하는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벼락출세한 까마귀’(an upstart Crow)라는 표현에서, ‘upstart’라는 단어가 비천한 집안 출신을 강조하면서 특히 ‘갑작스러운 변화 때문에 천박하고 뻔뻔해진 사람’(especially one made immodest or presumptuous by the change)이라는 의미를 띠고, 'Crow'는 귀에 거슬리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는 새를 대표하는 까마귀라는 점을 주목해 보세요. 셰익스피어가 비천한 집안 출신으로서 갑작스럽게 출세한 후 천박하고 귀에 거슬리는 배우요 극작가가 되었다는 점을 비꼬고 있지요. 그것도 대문자를 써서 그 까마귀가 마치 셰익스피어의 별명이나 예명인 것처럼 처리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 깃털로 아름답게 장식하여’(beautified with our feathers)라는 표현에서 ‘우리’라는 말은 바로 유명 대학 출신 극작가들로 구성된 내집단(in-group)인 “대학 출신 재간꾼들”(the University Wits)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셰익스피어가 이런 극작가들이 꽃피운 연극의 장 속에서 출세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 표현이 셰익스피어가 그들의 연극을 표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우리들 중 최상의 시인’(the best of you)이라는 표현이 그 유명 대학 출신들 중 최고로 잘 나가던 크리스토퍼 말로라는 점을 은근히 묘사하고 있지요. 말로보다 무운시도 기막히게 잘 적는다고 셰익스피어가 자부하고 있다는 점이 기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한 술 더 떠서 자기를 완전한 팔방미인에다 무대 장악 능력에서는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연기 능력을 보유한 존재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공교롭게도 로버트 그린은 이 글이 실린 소책자(“많은 후회로 얻은 서푼짜리 기지” <Groats-worth of Witte, bought with a million of Repentance>)가 출간되기도 전에 죽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서로 알고 지내던 셰익스피어의 지인 한 사람이 그 소책자 서문에서 셰익스피어에게 사과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그 글이 출간된 게 1592년이니까 셰익스피어가 그 이전에 이미 런던으로 진출하여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린 극작가였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언필칭 탁월한 유명 대학 출신 극작가들은 1580년대에 들어서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존 릴리(1553-1606)를 제외하고, 로버트 그린(1558-1592), 크리스토퍼 말로(1564-1593), 조지 필(1556-1596) 모두 1590년대 초, 중반에 요절하고 맙니다. 그린은 방탕하고 제멋대로 살았고, 필은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말로는 술집에서 싸우다가 살해당했습니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당대의 인기 극작가로 날리던 토마스 키드(1558-1594) 역시 이 시기에 죽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릴리는 이미 인기를 잃은 처지였으니, 그야말로 당시 연극계에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상태가 전개된 것입니다.
최성일 출판 평론가가 셰익스피어의 성공 비결에 운(運)이라는 요소 한 가지를 더하고 싶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이런 시대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말할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지혜와 운이 서로 맞서 싸울 때 지혜가 있는 힘을 다한다면 어떤 운도 그것을 꺾을 수 없습니다.”(Wisdom and fortune combating together, / If that the former dare but what it can, / No chance may shake it.-“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사실상 악운 대신 행운이 다가와도 그 운을 포착할 수 있는 안목과 실력이 없다면 헛것에 불과하지요. 제임스 샤피로 교수가 지적한 대로 셰익스피어는 “심오한 전환기”에 대한 감수성(his sensitivity to “the epochal, to moments of profound shifts”)이 뛰어났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종교와 세속성, 귀족 계급과 상인 계급, 기사들과 행정가들 및 영웅들과 회의주의자들 간에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s=작은 변화들이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쌓여, 이제 작은 변화가 하나만 더 일어나도 갑자기 큰 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 상태가 된 단계)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이 셰익스피어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프랑수아 라로크가 지적한 대로, “16세기에 이르러 연극은 하나의 제도가 되었고, 교양 있는 젊은이들이 연극을 필생의 업으로 여기고 진지하게 도전하고 나”선 상황에서 수많은 실력자들이 자웅을 겨루는 시대였던 것이지요. 당시 집필된 희곡 작품 수나 출간된 책 수도 엄청났다고 합니다. 예컨대 1558년부터 1642년까지 약 3,000개의 연극 작품이 집필되었는데 그 중 650개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고, 1558년부터 1579년까지 영국 런던에서는 2,760종의 책이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평균 인쇄 부수(1250부)를 감안한다면 이 숫자는 45년간 425만 명의 인구 일인당 평균 두 권의 책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극작가 군이 터를 잡고 있고 그렇게 많은 독자이자 관객들이 탄탄하게 뒤를 받쳐준 상황에서 셰익스피어가 탄생했습니다. 프랑수아 라로크가 지적한 대로 셰익스피어의 비극 연금술의 결정적 요인 중 한 가지가 각색 재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비록 독서(다른 한 가지 요인)를 통해 많은 영감을 얻었겠지만, 민간전승이나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을 활용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탁월한 작품들과 인상적인 인물들을 다양하게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몇 가지 예외가 있지만, 셰익스피어는 극 중 인물이나 플롯을 스스로 창조한 경우가 없다. 그는 민간전승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주제를 취해 왔다. 그러나 무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빌려온 줄거리를 크게 손질하기도 했고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내용을 바꾸기도 했다.”(라로크) 그래서이겠지요. 신화 작가인 미하엘 쾰마이어는 “셰익스피어는 인간을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그 결과 문학을 새롭게 썼다.”라고 주장하면서 셰익스피어 희곡의 주요 등장인물의 다양한 개성에 주목합니다. “A rising tide lifts all boats.”라는 경제 관련 표현을 셰익스피어의 상황에 대입해 보면, 15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활발해진 런던 연극계라는 밀물로 인해 많은 극작가들이 뜨게 되는 상황 가운데서 셰익스피어도 덩달아 두각을 드러내는 경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이런 측면을 상고하면서 올해 우리나라 문화계의 경사들 몇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올해 아카데미상을 석권한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거사가 아니겠지요? 100년이나 되는 영화 제작 역사가 기반을 이루고 있는 상황 속에서, 최근 들어 수많은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및 배우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창의적인 영화 예술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과정에서 맺힌 찬란한 열매였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요즘 세계무대에서 사상 초유의 ‘케이(K)팝 쌍끌이 흥행’에 대한 기대를 걸게 해 준 BTS와 블랙핑크도 어느 날 공중에서 떡하니 떨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많은 기획사와 프로듀서들이 터를 잡고 그렇게 많은 청소년들이 아이돌 그룹 가수 되기를 꿈꾸며 피땀 흘린 장이 없었다면 언감생심이지요. 그렇게 진지하게 가수 훈련에 임한 두터운 연습생 층이 없었다면 BTS나 블랙핑크 멤버들을 어떻게 발굴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 각자가 일하고 애쓰는 영역에 많은 경쟁자들이 있다는 게 불리하거나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올림픽 정신으로 각자의 영역에 참여한다면 우리 모두가 그 "참여하고 잘 싸우는" 과정에서 희열을 누리며 승자에게 박수쳐 주는 도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승리하고 정복하는" 결과에만 목매는 삶의 태도가 문제인 것이지요. 적자생존이라는 원리를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 적용하려는 사단적인 사조에 맞섭시다. 우리의 재능과 은사를 최대한 발휘하여 이웃에게 기여함으로써 기쁨을 누리면서 우리 가운데 우뚝 솟은 '셰익스피어'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 줍시다. 우리 각자의 가치는 그러한 재능과 역량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의 존재 자체는 무비의 가치를 띠고 있고 무한한 영광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햄릿이 계시했듯이 이 세상살이가 끝이 아닙니다.
끝으로 셰익스피어는 52세가 되기 며칠 전인 1616년 4월 23일에 죽었습니다. 그 날은 스페인의 문호 세르반테스가 죽은 날이기도 해서 “세계 책의 날”(World Book Day)로 지키는 날입니다. 당시에는 15세를 넘기는 아이들이 전체 아이들 중 반 밖에 되지 않았고, 어른들의 수명도 30세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의학 지식이 일천할 때인지라 소독약이나 항생제도 발명되지 않은 상태여서 전염병이 생기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전염병이 발발하지 않아도 먹거리 공급 상황이 불확실해서 흉작이 이어지면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해 비타민 결핍으로 인해 병을 얻어 죽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앞에서 요절했다고 소개한 극작가들도 사실상 당대의 평균 수명으로 보자면 일반적인 사망 사례이고 셰익스피어는 장수한 셈입니다.
결국 셰익스피어는 당대에 때 이른 죽음을 숱하게 목격했습니다. 우선은 20, 30대에 요절한 동료 극작가들이었고, 다음으로는 어린 나이에 병들어 죽은 아이들과 전염병에 감염되어 죽은 일반 대중들이었습니다. 그의 가정도 이런 시대 사정을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그와 부인 앤 사이에는 맏딸 수산나와 쌍둥이 주딧(딸)과 헴네트(아들)가 있었는데, 1596년에 헴네트가 11살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특히 1564년, 1592-1593년, 1603년 그리고 1623년에 런던을 휩쓴 흑사병으로 인해 약 10만 명이 희생당했으니까요. 그중에서도 1592년이라면 우리에게는 낯익은 해이지요.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입니다. 우리나라가 왜적에 의해 쑥대밭이 될 때 영국 런던은 흑사병으로 인한 시체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극장이 폐쇄되어 연극배우들은 시골로 돌아다니며 공연해야 할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런던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그야말로 햄릿처럼 삶과 죽음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사는 신세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어느 누구 못지않게 죽음을 깊이 묵상하고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는 기회가 많았을 것이기에 “햄릿”과 같은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우리 각자의 나이가 얼마이든 죽음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그 죽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훈이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셰익스피어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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