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 이후의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어제 줌(Zoom) 모임 한 곳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언택트 시대에 변화하는 선교”라는 제목으로 관심 있는 여러 분들이 함께 참여하여 토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모임 전에 관련된 두 편의 강의를 다 시청하고 참여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강의에 대한 논평을 듣고 논평자가 제시하는 질문을 중심으로 토의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그 두 강의 중 한 가지를 듣고 논평하게 되었는데, 그 제목은 “포스트 코로나와 선교: 코비드 이후에 세계 크리스천은 무엇을 할 것인가?”이었고, 발제자는 조샘 인터서브 코리아 대표였습니다. 먼저 강의 내용을 요약한 후에 제 논평을 이어갔습니다. 아래에 소개해 드립니다. 제게 허락된 시간 내에 소개하지 못한 내용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조샘 선교사는 코비드 이후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먼저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를 인용합니다. 그 책 속에서 논의된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라는 개념을 활용하면서, 코비드 이후에 이루어질 선교 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제도 이론(Institutional theory)에서 사회 안정과 사회생활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요소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즉 규제의 요소(regulative element), 규범적 요소(normative element), 문화적/인지적 요소(cultural-cognitive element) 세 가지를 언급하면서, 이 모든 요소들이 현재 코비드 상황에서 동시에 섞여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다음으로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Politics as a Vocation)를 인용합니다. 그 강의에서 제시한 세 가지 권위 혹은 합법화 과정(legitimations), 즉 전통적(traditional) 권위, 카리스마적(charismatic) 권위, 합법적인(legal) 권위(=합리적인 규정과 그것에 근거한 기능적인 역량의 타당성에 근거한 것)를 인용하면서, 현재 코비드 상황에서 특히 세 번째 합법적인 권위와 연관된 자아적 개념과 주체적 이익 우선이라는 경향에 주목하지요.
지금 이 코비드 사태를 겪으면서 자신이 소중한 게 맞다는 개인 중심성의 규범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중요한 것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농후해져서, 먹고살기 위한 경제적 관계, 나를 지켜주는 공적 권력의 인정과 지지, 공공재에 대한 협력 필요와 연관된 합의 마련, 직계가족이나 소수와만 맺는 긴밀한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진전되고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런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상황 가운데서 교회와 선교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 선교사는 우선 방금 언급한 규범적이고도 인지적인 요소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교회와 선교의 본질을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교회 생활 및 선교 활동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언급합니다. 제국주의와 동일시된 유럽권의 선교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선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지만, 선교란 복음전도와 교회개척이라는 고정된 시각을 떨쳐 버릴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으로 돌아가 선교의 본질을 논의합니다. 즉 골로새서 1:19,20과 에베소서 1:9,10을 통해, 선교의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라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선교의 본질은 그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선교의 본질을 붙들 때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그 이후에 조 선교사는 이런 변화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회 활동과 선교 현장 속에서 적용될 수 있는지 논의하면서, 구체적으로 더 진작될 활동 혹은 모임과 더 쇠퇴할 활동 혹은 모임을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새로운 일을 하려면 기존 것을 버려야 한다. 런(Learn)을 하려면 언런(Unlearn)을 해야 새로운 것이 들어온다.”라면서, 세 가지 대조되는 시각을 제시합니다. 즉 첫째로 버려야 할 것은 ‘대상성’이고 새롭게 배워야 할 것은 ‘관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운 적 있는가?”라고 도전합니다. 둘째로 버려야 할 것은 ‘종교적 영웅의 시대’이고 배워야 할 것은 ‘광장에 선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삶 속에서 그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으로서, 예컨대 목회자가 이제는 축구 선수가 아니라 코치로 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셋째로 버려야 할 것은 ‘교회성장운동’이고 배워야 할 것은 ‘코이노니아’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비기독교인 사이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모이는 크고 작은 모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의적절하고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한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묵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강의에 대한 제 논평입니다. 첫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조샘 선교사가 인용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s)이 사실상 “한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시간”이라는 점입니다. 이것과 연관하여 두 가지 측면이 현재 코비드 이후를 모색하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토마스 쿤이 새로운 패러다임과 낡은 패러다임을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 둘 사이의 장, 단점을 비교해서 어느 쪽이 월등한지 판단할 수 있는 논리적인 방도가 없다는 얘기이지요. 그러니까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이전 것에 비해 새롭게 등장하는 과학적 데이터를 보다 유용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지, 이전 것보다 더 정확하거나 보다 진리에 가까운 모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쿤의 책을 주해한 샤록과 리드가 언급한 대로, “혁명의 ‘시간’은 언뜻 드는 생각이나 전통적으로 생각되어 온 것보다는 훨씬 기간이 긴 특징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패러다임 변화를 가져온 과학자들로 언급하고 있는, 코페르니쿠스(1473-1543), 뉴턴(1643-1727), 라부아지에(1743-1794), 다윈(1809-1882), 아인슈타인(1879-1955) 간의 기간에 주목해 보세요.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를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언급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를 인용한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과학 혁명 기간이 우리 기대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인 것처럼, 선교 혁명 기간(예컨데 회교권 선교 혁명 혹은 대대적인 추수)도 우리 예상보다 훨씬 더 길지 않을까요? 독일 철학자 나탈리 크납은 마르틴 루터가 세 번씩이나 세계 종말을 예고한 실수(1532년, 1538년, 그리고 1542년-우리 세계가 기원전 3960년부터 시작했다고 본 것)를 저질렀다고 지적했습니다. 게다가 세 번째로 짚은 종말의 해 이듬해인 1543년에 지동설을 발표한 코페르니쿠스를 “바보”로 언급하는 실수를 더하기도 했습니다. 자기로 인해 종교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새 시대가 열리고 있었지만, 루터는 단지 옛 시대가 사라지는 것을 눈앞에 두고는 세상의 종말이 도래한 것으로 오해한 것이지요. 우리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의 종말이 도래하는 게 아니라, 또다시 새로운 500년[종교개혁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이라는 세월이 열리는 시점에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요? 그것을 전제한다면 우리 선교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요? “그리고 내일 세상의 멸망함을 알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태도를 견지한 루터처럼 현재 우리가 심어야 할 사과나무는 어떤 것일까요?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조샘 선교사가 인용한 막스 베버(1864-1920: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 올해가 사망 100주년)의 주장과 관련된 것입니다. 인용 부분은 “소명으로서의 정치”(Politics as a Vocation)에서 제시한 세 가지 권위 혹은 합법화 과정(legitimations), 즉 전통적(traditional) 권위, 카리스마적(charismatic) 권위, 합법적인(legal) 권위를 의미하거나, “경제와 사회”(The Theory of Social and Economic Organisation)에서 제시한 세 가지 리더십 유형, 즉 카리스마형(the charismatic), 세습형(the hereditary) 및 관료형(the bureaucratic)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전자의 ‘합법적인 권위’는 후자의 ‘관료형 리더십’과 상응하는 관계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스 베버의 '합법적인 권위'나 '관료형 리더십'이라는 개념에서 도출된 사회 상황이 효율적인(efficient) 것은 맞지만, 베버는 그것이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효과(dehumanising effects)를 갖고 있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즉 합리적인 규정과 그것에 근거한 기능적인 역량의 타당성을 기반으로 진행되는 사회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들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지요. 앞에서 언급한 쿤의 “과학 혁명”의 첫 번째 측면과도 연관되는 대목입니다. 즉 새로운 패러다임은 낡은 패러다임에 비해 더욱 정확하거나 진리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보다 유용한 것일 뿐이라는 점이지요. 코로나 이후에 전개될 것으로 기대되는 선교 상황이 이런 사회 상황을 반영하게 된다면, 이것이 이전보다 더 성서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컨데 조 선교사가 지적한 대로 합리성과 기능성을 극대화하면서, 개인과 가족 혹은 소그룹의 유익과 관심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적 결정들이 용인되거나 그것들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재편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선교 상황 여건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붙잡아야 할 선교적 방향성과 장려해야 할 선교 활동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팬데믹 이후의 선교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인 것을 고려한다면, 이전 역사 가운데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견주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 보통 르네상스가 시작된 시기를 14세기로 지적하는데, “서양 철학과 신학의 역사”의 저자인 존 프레임은 꼭 집어서 1350년경부터라고 지적합니다. 그 해를 꼭 짚은 이유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1346년부터 시작하여 1353년까지 유럽에서 창궐한 대역병(Great Plague), 즉 흑사병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특히 1348년에서 135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럽 인구의 1/3에서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으니까요. 그 무시무시한 전염병을 겪으면서, 삶과 죽음과 신앙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싹터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tes)라는 르네상스 시대가 열린 것이 아닐까요? 한편으로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으로 돌아가 인간성의 의미와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고전주의가 발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과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로 돌아가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정립하는 종교개혁이 꽃피우게 된 것이지요. 결국 대역병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대의 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 시발점인 1350년부터 시작하여 약 170년만인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되지요. 이처럼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기간 중에도 놀라운 성찰의 기회가 마련되어 그 이후에 또 다른 차원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이루어질 것을 저는 꿈꿉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기회가 아니면 언제 우리가 우리 존재의 시원(始原)으로 돌아가 올바른 삶과 신앙의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덧붙여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 선교사의 역설에 귀 기울 때, 문득 흥미로운 일화 한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언젠가 제레미 잭슨이 쓴 교회사 관련 책(“No Other Foundation: The Church Through Twenty Centuries”)을 읽던 중 발견한 내용입니다. 그 책의 역자인 김재영 목사가 애틀랜타에서 목회하면서 콜롬비아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학교에 칼 바르트에게서 직접 배운 노 교수가 한 사람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관찰할 기회가 잦았다고 하는데, 한 번은 자기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장로교회 출신 유학생들 중에는 자기가 아주 어렸을 때 다녔던 미국 장로교회의 자기 부모님들 세대의 신앙 행태와 닮은 이들이 많다고. 잭슨이 그 책을 출간한 게 1980년이었고, 그 번역본이 나온 게 1998년이었으니까, 우리나라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무려 100년 동안이나 부지불식간에 미국, 캐나다, 호주 및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의 신앙 행태를 답습해왔던 것이지요. 그 목회자들에게 배워 세계 각지로 파송되어 활동해 온 우리나라 선교사들은 그들과 달랐을까요? 모쪼록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서 교훈을 얻고,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신앙과 선교의 본질을 깊이 성찰하여 새로운 영적 개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길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제 논평을 마감하면서 드리는 제 질문은 아래 두 가지입니다.
1. 우리가 지금 새로운 500년이라는 세월이 열리는 시점에 있다고 본다면, 우리 선교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요? “그리고 내일 세상의 멸망함을 알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태도를 견지한 루터처럼 현재 우리가 심어야 할 사과나무는 어떤 것일까요?
2. 선교 상황 여건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붙잡아야 할 선교적 방향성과 장려해야 할 선교 활동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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