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회상의 힘
-한국전쟁과 부모님-
2주 전에 부산을 다녀왔습니다. 고교 동창 절친과 함께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만날 때마다 제가 가 보지 못했던 곳을 친절하게 소개해 주었던 고마운 벗이었기에 그날도 어디로 가게 될까 궁금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만나자마자 직행한 곳은 서구 부민동에 위치한 “임시수도 기념관”이었습니다. 원래는 경상남도 도지사 관사였지만 한국전쟁 당시 부산이 임시수도 역할을 감당할 때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던 곳이 중심 건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12년 들어 옛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관사를 개조하여 새로운 전시관으로 개관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발발과 관련된 자료들, 피난민들의 생활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정치, 경제, 문화상을 보여주는 전시실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부산문화역사대전”에 의하면, 한국 전쟁 기간 남북한 주민들은 크게 2차례의 피난을 경험하였다고 하지요. ‘1차 피난’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남쪽으로 진격하는 인민군을 피해 38선 인근 주민과 서울·경기 지역의 민간인들이 대규모로 대구, 부산 등을 향해 이동한 경우였습니다. 이때 피난한 약 150만 명은 UN 연합군의 서울 수복(1950년 9월 28일)으로 인한 정부의 귀환 정책에 의해 대부분 고향으로 귀환했습니다. 이후에 진행된 ‘2차 피난’은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UN 연합군이 수세에 몰리는 것이 드러나면서 북한의 민간인들이 다수 월남하였고, 또 1·4 후퇴 시기에 서울과 이남 지역의 주민들이 대규모로 피난한 경우였습니다. 이 시기에 피난한 480만 명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거나 돌아가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한 채 피난 지역에 정착하였습니다.
1차 피난기에 부산에 잔류한 인원이 15만 명, 2차 피난기에 몰려들어 온 인원이 26만 명이나 되어 1952년 2월 29일 현재 부산의 인구는 총 88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지요. 1차와 2차 피난기에 정부는 피난민을 수용소 시설에 수용함으로써 부산의 혼란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2차 피난기에는 현재 남구 우암동의 적기, 영도구의 봉래동과 청학동, 그리고 대연 고개, 남부민동, 당리 등에 약 7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40여 개의 수용소를 마련하였습니다. 정부가 유엔민사원조사령부로부터 다수의 구호물자를 공급받아 지원했지만, 부산의 모든 피난민을 구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하지요. 주택의 경우도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모자라 집값이 폭등하게 되어, 많은 피난민들은 부산시청 앞과 부산역 일대에 노숙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이에 부산 지역의 피난민들은 정부의 피난민 구호책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살길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소중히 가지고 내려왔던 옷가지며 패물, 집기 등을 생존을 위해 방매하여 소위 ‘도떼기시장’이 성황을 이루게 되었는데, 현재 국제시장이 바로 그 주된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부두 등지에서 험한 중노동에 투신한 이들이나, 국제 시장과 자갈치 시장 등에서 지게꾼과 노점상이 된 이들도 많았습니다.
당시 제 부모님은 평양에서 거주하시던 중 1.4 후퇴 때 부산으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부산역 앞 영주동에 있는 피난민 판자촌에 거처를 마련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휴전 협정이 맺어진 지 4개월만인 1953년 11월 27일에 발생한 “부산 역전 대화재”로 피해를 입게 되어 거처를 다시 물색하셔야 했습니다. 당시 이 화재로 인해 주택 3,132채가 전소되었을 뿐 아니라 사상자 29명, 이재민 6000여 세대 3만여 명이 발생하는 재산과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고 하지요. 현재 화폐 가치 기준으로 1조 7700억 원에 해당하는 피해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정착하시게 된 곳이 바로 수용소가 마련된 영도구 청학동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집 근처에 있던 장터 이름이 “천막 시장”이었고, 집에서 고갈산 혹은 봉래산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수용소”라는 동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은 이런 한국전쟁 역사를 방증하는 것이지요. 제 아내 가족도 평양에서 피난하여 부산에 정착했는데 청학동에서도 일정 기간 지내다가 국제시장 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임시수도 기념관”에 마련된 동영상을 보던 중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포탄과 총탄을 피하여 피난하던 사람들, 열차와 배 위가 메어 터지게 들이닥치던 사람들, 곳곳에 즐비하던 시체 더미들, 부산으로 밀려들어 노숙하거나 판잣집 단칸방에서 지내면서 날마다 끼니 때우기에 여념 없던 사람들, 시장 바닥에서 방매하거나 부두나 역사에서 무거운 짐을 나르던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부모님과 형제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리고 머나먼 타향으로 쫓겨 와서 척박한 상황을 극복하며 살아야 했던 당신들의 고뇌와 고충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서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습니다. 그 난리 통에 아들 둘을 잃어버린 어머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헤아리는 것도 벅찼습니다. 저도 아기 때 배탈이 나 죽을 뻔했으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요?
지난 제 인생 가운데 막막했던 때가 몇 번 기억에 납니다. 대학 시절 신앙 훈련 받기 위해 집을 떠나 자취하던 초기, 군 복무를 위해 영천 육군3사관학교에 입소하던 시기, 첫 직장이었던 포항제철 기숙사에 적응하던 초기, 유학하기 위해 필리핀에 정착하던 초기, 말레이시아로 진출하여 정착하던 초기, 교수로 임용되어 영어로 영어 교사들에게 강의하던 초기, 국내 재정착을 위해 귀국하여 대구에 정착하던 초기 등입니다. 각 시기마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정서적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죄다 제가 선택한 길이었고, 각각 저를 돕는 손길이 마련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저 그동안 익숙했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감당한다는 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상의 적응 과정 중 초기 단계였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경우는 판이했습니다. 어느 날 청천벽력같이 벌어진 재난이었습니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남기고 떠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숨 건 피난길에 오르셔야 했습니다. 가진 것 없이, 어느 누구도 도와주는 이 없이 타향에서 가족들 몸 뉠 곳과 입에 풀칠할 것을 마련하셔야 했습니다. 아들 둘도 가슴속에 묻으셔야 했습니다. 그 시기를 어떻게 감내하실 수 있었을까요?
기념관에 마련된 동영상을 보는 동안 부모님께서 겪으신 고난의 현장과 제가 겪은 소소한 고뇌의 순간들이 서로 오버랩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제가 이미 체험한 고생과 현재 직면하고 있는 도전거리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 과거는 그저 사치스러운 고난의 시기에 불과했고, 현재는 엄살 부리는 도전의 시기라고나 할까요? 부모님께서 통과하신 고난의 풀무와 대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부모님의 경험이라는 가장 내밀하고도 주관적인 기억이 내재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비교여서 더욱 강력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직접 겪지 않았지만 당신들의 체험이 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바로 가족의 유대감일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나 과거 이야기가 빚어내는 신비가 아닌가 합니다.
-역사의 의미와 신비-
역사는 우리가 직접 겪지 않았어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그 역사를 어떻게 구성해서 이해하고 해석하든 우리는 그것에 나름대로 응답하게 되지요. 그렇지만 기록된 혹은 구두로 전승된 그 역사는 이미 정형화되어 있지만, 다시 우리의 구성과 이해와 해석에 대해 말을 걸어오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그 역사에 대해 재구성하여 다시 이해하고 재해석하게 됩니다. 이렇게 역사가 말을 걸어오고 그것에 응답하는 동안 역사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이 생길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 이전에는 발견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 새로운 측면이 드러나는 순간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아마도 E. H. Carr가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로 본 게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예컨대 박상익 교수가 지적한 역사적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당대의 아테네와 현대의 세계가 천양지차입니다. 당시의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많은 소피스트들 중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불량한 자로 이해했을 개연성이 높지만, 현대인들은 서양 철학의 창시자로 존중하고 있지요. 17세기의 “30년전쟁”(1618-1648)과 갈릴레이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30년전쟁”은 당시 유럽사를 뒤흔든 사건으로서 온갖 유럽 국가들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뉘어 맹렬하게 싸우던 시대였지만, 바로 그 시대에 과학자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지요. 동시대 사람들은 이 둘 중 30년 전쟁을 더 중요하게 간주했겠지만, 현대인들은 압도적으로 갈릴레이를 더 중요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부터 형성되어온 공화주의나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도 고려해 봅시다. 왕권신수설이 당연시되던 시대의 공화주의란 국왕에 대한 반란 내지는 '국왕 살해'(regicide)를 획책하던 반역자들의 급진 과격 사상에 불과했지만, 현재 미국에서는 공화당이 오히려 보수 정당 취급을 받을 정도로 공화주의는 보편화되었습니다. 게다가 19세기 중반까지 서양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폭도 지배'(mob-rule)와 동의어로 경멸하던 용어였지만, 20세기 들어와서는 인류가 추구해가야 할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정치 형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내용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과거와 현재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그 이해와 해석이 현격하게 변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로 이해하는 시각은 서양 사회가 오랫동안 견지해 온 관점입니다. 김용규 선생이 지적한 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언급한 시간관도 그러하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전개되는 시간관도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미래를 현재라는 시점과 나란히 겹쳐 놓는 “시간의 병치(倂置)”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는 “상기의 힘”과 “정신의 집중”을 역설합니다. 즉, 과거, 현재 및 미래를 각각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셋이 우리 영혼 안에서 각각 회상하고, 관찰(혹은 직관)하며, 기대하는 대상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그저 분산된 채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집결된 하나의 통일체가 됨으로써, 우리의 삶이 불변하는 것이 되어 의미와 가치를 띠게 됩니다. 한발 더 나아가 이 의미와 가치가 진리와 구원으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의 병치” 개념을, 프루스트는 “합치된 시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잃어버린 모든 것과 아직 다가오지 않은 모든 것들까지 불러 모아 하나의 통일체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계시해주고 우리의 삶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회복시켜 줍니다. 그가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크로노스의 산물로, “되찾은 시간”을 카이로스의 열매로도 볼 수 있습니다. 크로노스란 일상에서 과거, 현재, 미래로 연속하는 객관적이고도 정량적인 시간으로서 흘러가버리는 가치 없는 것 혹은 허무한 것의 대명사이지만, 카이로스는 목적의식이 개입된 주관적이고도 정성적인 시간으로서 저울로 잰 분별력과 칼 같은 결단이 필요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그 둘의 모습이 이러한 측면을 드러냅니다. 크로노스는 자기 아들에게 지위를 뺏긴다는 예언을 믿고, 자식들이 태어나는 대로 차례로 잡아먹다가 제우스에게 쫓겨난다는 농경과 계절의 신입니다. 현재라는 자식들이 생겨나는 족족 미래라는 기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크로노스에게 잡아먹히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그야말로 허무한 시간대, 잃어버린 시간대를 비유하고 있지 않나요? 한편 카이로스는 제우스의 막내둥이로서 “기회와 행운의 신”으로 묘사되어 있지요. 생긴 모습이 그의 범상치 않은 면모를 드러내 줍니다. 숱이 많은 앞머리, 대머리인 뒷머리, 커다란 날개 달린 등, 날렵한 날개 달린 두 발목, 그것도 모자라 양 손에 각각 저울과 칼을 들고 있지요. 앞에서 다가올 때 잘 붙잡지 않으면 바람처럼 지나가 버려 도무지 잡을 수 없는 기회답지 않습니까?
프루스트는 시간의 병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서로 다른 두 장소도 나란히 병치해 놓는 시도도 전개합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초자연적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서로 이질적인 공간을 나란히 잇게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자이크처럼 각각 서로 다른 조각이 통일된 이미지와 의미를 형성해내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통합된 공간 속에서 불변하는 자기 자신을 되찾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프루스트가 주장하는 “되찾은 시간”이란 것은 회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 공간과 공간이 겹치면서 형성된 시간적, 공간적 입체상을 제시해 주게 되지요. 즉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시간인 것입니다.
-회상으로 마련된 “되찾은 시간”-
이제 그 쓰라리고 슬펐던 한국전쟁 발발일도 어제로 70 성상이 지났습니다. 사람의 한 평생에 해당하는 기간이지요. 그동안 부모님도 벌써 소천하시고 저는 막 육순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아픈 역사는 한낱 “잃어버린 시간”으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제가 회상하고 상기하는 과정을 통해 “되찾은 시간”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진실을 드러내고 그 의미와 가치를 밝혀주는 당신들의 시간으로 말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도 “인생은 나그넷길”이라는 진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사랑을 실천해가는 데 있다는 것과 그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이라는 점을 구현해 주신 당신들의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도 저는 그 역사를 상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진실과 의미도, 성경 속에 드러난 구속사를 회상함으로써 “잃어버린 시간”으로 간주될 수 있는 그 과거의 역사를 “되찾은 시간”으로 누리는 데 있지 않을까요?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역사로 말미암아 내세가 이미 시작되었고 그 완성을 향해 힘차게 진행해가고 있다는 진실을 상기한다면, 그리스도인에겐 “잃어버린 시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세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되찾은 시간”의 본질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풍성하고 영원한 삶의 장 말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자면, 그리스도의 이야기, 하나님의 나라 역사는 당신의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선포되고 구현됩니다. 비록 이 이야기와 역사가 먼저 제 것으로 확립되어야 하겠지만, 거기에서 멈추어선 안 될 것입니다. 부모님의 인생과 제 삶과의 대화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진행되었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제 삶과의 대면도 교회라는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지속될 것입니다. 로널드 웰즈가 설파한 대로입니다.
“기독교가 개인적 요소(personal element)를 가진 것은 틀림없지만, 엄격히 말해서 기독교는 개인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개별성(individuality)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참다운 정체성(identity)이 집단성(collectivity)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 서로 지체(members)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 언어로 말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였으며(has come), 현존하며(is present), 앞으로 도래할 것이다(is yet to come).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의 집단적 시민권(collective membership)은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공통적인 확신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위한 결단’(decision for Christ)을 내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여러 지체’(members incorporate)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시(時)-장기적 시간 관점을 품으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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