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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 앞에 벌벌 떠는 것이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8. 3.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 앞에 벌벌 떠는 것이다?

인생사가 불안정하지 않은 때가 언제 있었겠습니까만 요즘같이 한 달 후 일 년 후의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때도 드물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저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라는 주제입니다. 특히 주위가 혼란한 가운데 절실히 필요한 지혜를 궁구 하던 중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말씀이 상기되었기 때문입니다(시편 111:10, 잠언 1:7). 왜 그럴까를 묵상하던 중 먼저 하나님을 경외함의 의미를 깨닫는 게 순서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그 작업에 열쇠가 되는 것으로 그 용어와 유사한 표현과 대조적인 표현들을 한 번 정리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유사한 표현으로는 잠언 8:13의 ‘악을 미워하는 것’으로서, 그 구체적인 악의 예로 교만, 거만, 악한 길과 왜곡된 말들을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잠언 15:33, 22:4에 나타난 대로 ‘겸손’과 짝을 이룰 때가 많으며, 결국 이 용어는 시편 111:10, 시편 112:1, 전도서 12:13에 나타난 대로 ‘큰 기쁨으로 행하는 순종’과 직결됩니다. 이 용어와 연관되는 인상적인 유사어 중에는 ‘주님을 피난처로 삼음’(시편 31:19) 혹은 ‘주님의 은총을 고대함’(시편 33:18)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런 유사어들을 몸으로 실천해 보인 이가 바로 욥입니다. 욥을 묘사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에서 떠난 이’(욥기 1:1, 8, 2:3)라는 것입니다. 욥기 서두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소개하시는 장면에서 두 번씩이나 언급되어 있지요. 한 발 더 나아가 욥의 삶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즐거워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사야 11:3)의 예표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과 대조되는 표현으로는 잠언 8:13에 나타난 대로 교만한 태도와 왜곡된 말로 볼 수 있는데 이런 태도는 잠언 28:14의 ‘강퍅한 마음’이 그 근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상적 대조어 중에는 잠언 23:17의 ‘죄인을 시기함’이 있습니다. 죄인들이 악을 수백 번이나 거듭 행하면서도 무병장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전도서 8:12) 그들의 처지를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수 있다는 것인데, 사실상 이것은 외면적인 현상일 뿐 주님께서는 마치 그림자처럼 그들을 단명시키십니다 (전도서 8:13). 설령 악인들이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와 기회를 선용하여 형통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은 도리어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비와 햇빛을 허락해주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을 찬양하는 기회로 여겨야 하겠지요.

 

결국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을 깊이 숙지하여 자신의 위치와 소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당신의 은총을 고대하는 삶을 기반으로 하면서, 계시된 말씀에 즐겁게 귀 기울이는 중에 악을 저버리고 기쁨으로 순종하는 삶의 자세를 일컬음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기대감을 품고 하나님을 숭앙하는 겸허한 자세”(Reverent humility to God with an expectant heart')가 될 듯합니다. 그 대척점에 있는 교만(pride or arrogance)을 고려하여 ‘겸허한 자세’(humility)가 핵심적 요소로 자리 잡는다고 이해한 것이지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아 누리는 복으로, 비록 잠언 22:4에는 부귀, 영화, 장수라는 항목을 언급하고 있지만,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시편 103:11), ‘아버지가 자녀를 긍휼히 여김 같이’(시편 103:13)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신다는 말씀에 다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 자비와 긍휼의 내용 중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당신의 약속을 알게 될 뿐 아니라(시편 25:14).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선한 것들을 계속 쌓아두셨다가 결정적인 때에 사람들의 목전에서 베풀어 주신다(시편 31:19)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누릴 복 중 진동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현시대와 직결된 것은, 그들이 결코 격변하는 이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그들의 피난처(refuge)와 산성(stronghold)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시편 46:1-3, 11). 두려움은 그 특성상 한 가지 대상을 품으면 다른 대상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다른 어떤 대상도 두려울 게 없는 법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무릇 지혜라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실제적으로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한 유용한 통찰력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신 고유한 피조물이라는 점을 깨닫고 자신만이 갖고 있는 특질과 은사를 파악하여 자신의 분수와 소명을 파악하는 한편 자신만의 길이 장차 의미 있게 전개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자세가 그 통찰력의 기반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예컨대 시편 139:14에 계시된 것처럼 자신이란 존재가 경이로운 하나님의 창조 경륜을 통해 “두렵고도 기이하게”(fearfully and wonderfully) 빚어진 결과임을 깨닫는 것이 이 불가해한 세상을 살아가는 근본 자세가 됩니다. 이에 덧붙여 계시된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삶에 의해 형성된 성화된 분별력을 발휘한다면 인생에서 직면하는 어떠한 문제라도 최선의 해결책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사에서 사람들이 당면하는 위기들이 대부분 자신에 대한 이해의 부족 혹은 자신의 능력과 은사에 대한 기대와 전망의 결여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컨대 대통령, 장관, 혹은 국회의원이 될 자질이나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들이 무지와 탐욕으로 그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자신들에게뿐 아니라 전 국가적으로 얼마나 많은 폐해를 가져왔는지 이전과 현재의 우리나라 현실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 기대와 낙관적 전망 없이 살아감으로써, 적극적으로 자신의 은사와 능력을 계발하여 자신의 인생을 보다 빛낼 기회를 놓친 이들 또한 얼마나 많았고 현재도 많을까요? 남은 위기의 경우들은 보편적인 원리에 반하는 삶의 자세(예컨대 술이나 이성에 탐닉하는 경우),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선택(예컨대 두루 정보를 섭렵하지 않고 섣불리 내린 선택의 경우), 혹은 인정에 매인 결정(예컨대 보증 서주는 경우)과 같이 성화된 분별력으로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번 기회에 하나님을 경외함과 연관된 성구들을 다시 묵상하는 중에 새롭게 가슴에 와 닿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에 근거한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이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두려워한 나머지 당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벌벌 떠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당신의 어떠하심을 깨닫고 당신을 숭앙하는 마음으로 충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께서 당신을 신뢰하는 자녀들에게 베풀어주실 크나큰 은혜와 복을 적극적으로 기대하는 것이 그 핵심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측면은 최근에 읽기 시작한 신명기 말씀 서두에 언급된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과도 관련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불신의 내용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비관적이고도 비극적인 미래에 대한 전망이었습니다.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1:27)라는 그들의 원망 어린 고백은 하나님의 맹세 어린 저주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일러준 영적 실상, 즉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1:30-31)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들의 해방 여정에서 그들을 안아 현재까지 인도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충만한 면모를 인정하고 깨닫지 못했기에 이전과 현재에도 그들을 위해 싸워주시고 그들보다 먼저 앞서 가셔서 그들이 갈 곳과 머물 곳을 예비해 주실 하나님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기대하면서 가나안 입성을 위해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 헤맨 이스라엘 민족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절망에 속아 설득당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현시해주는 강력한 반면교사인 셈입니다(고린도전서 10:11). 결국 이 사태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마음에 품고 있던 하나님께 대한 인식 수준을 드러낸 셈이지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심오한 경외심 혹은 ‘앙망’의 단계까지 진전하지 못한 채 천박한 정탐꾼들의 말에 좌우될 수 있을 만큼 흐릿하고 몽롱한 심상에 지나지 못했다는 점이 드러났습니다. 바로 이 점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두려워하기를 원하시는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숭앙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면 수시로 우리 마음에 엄습해 들어오는 온갖 흉한 소식과 전망에 휩쓸려 쉽사리 절망에 사로잡히는 지경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심오한 경외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떤 세상사의 파도도 우리 마음을 전복시키지 못할 것이고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강물을 따라 당신께서 허락해주실 복과 번영을 누리며 당신께서 마련해두신 천성까지 도달하게 되겠지요.

 

이전에 말레이시아에서 경험한 해고 위기가 떠오릅니다. 갑작스럽게 외국인 교수들을 대량 해고하는 상황을 가까스로 넘기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에 대한 기대가 제 믿음에 있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경험이었습니다. 식사를 하던 도중 앞에 앉아 있던 동료 교수가 제 걱정을 하며 부지런히 다른 대학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해주었을 때, 이상스러울 정도로 제 마음이 평온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곧 폭탄같은 해고 통지가 날아들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언가 확정된 것은 없었으나 제 마음은 고요함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오로지 제 마음을 붙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다른 두려움이 자리 잡을 곳이 없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