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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금세와 내세: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8. 1.

 

금세와 내세: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다?

얼마 전 참석한 교회 예배 시간에 다른 교회에서 온 목사님이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세대통합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서로가 지체임을 확인하는 시간이 될 뿐 아니라 어른들의 신앙이 다음 세대에까지 순적하게 잘 전수되기를 비는 마음으로 드린 예배였습니다. 그 취지에 맞게 그동안 특히 어린이 신앙 지도에 열과 성을 다해 온 강사를 모셨습니다. 아동부터 장년까지 함께 참석한 예배였지만 모두가 즐겁게 말씀을 듣고 화답한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우리나라 주일학교에 학생들이 너무 적게 출석해서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지만 이미 출석하고 있는 학생들도 구원의 확신이 없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점을 설교 중에 여러 번 지적했습니다. “오늘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면 제대로 확신 있게 답하는 주일학교 학생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질문에 확실하게 답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할 책임이 주일학교 교사들과 어른 성도들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질문을 접하다 보니 제가 대학 다닐 때 캠퍼스에서 사영리나 다리예화로 전도하는 이들이 학생들에게 접근해서 감초처럼 활용하던 똑같은 질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한두 단어가 첨가 혹은 대체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비슷한 유형을 띠고 있었습니다. “오늘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 혹은 “오늘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신(믿음)이 있느냐?” 고국에 돌아와 여러 곳에서 참석한 예배 시간이나 특별 집회 시간에도, 다양한 곳에서 만난 성도들에게서도 여전히 이것과 유사한 질문을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목회자들 중에는 이 질문을 성도들이 더욱 신앙생활에 정진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성도들 중에는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하며 살고 있지만 죽고 난 후에 천국에 들어갈 자신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질문은 너무 피상적인 질문이자 신학적으로도 왜곡된 질문이라는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질문이 낳은 폐해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질문의 문제점이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과 연관될 수도 있지만,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시간관에 대한 오해와 관련 맺을 수 있다고 봅니다. 잠깐 성서적인 시간관을 설명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사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에 의하면 “때가 찼다”(The time is fulfilled.)라는 선언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최초의 일성이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라"(1:15)라는 문맥입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님의 때이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때였습니다. 성서가 제시하는 인류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우주의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임하시는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결정적인 역사의 한 시점에 당신의 이름(“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태복음 1:21)로 이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그때가 보다 세부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리키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마태복음 26:18).

 

주목할 점은 성경이 그때를 또한 말세 혹은 마지막 때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히브리서 1:2, 베드로전서 1:20, 사도행전 2:17, 요한일서 2:18).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좇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결정적으로 우주적인 구원을 확보하신 때가 바로 인류 역사의 마지막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연이어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 것도 동일한 말세(the last days)라는 시각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마지막 시간”(the last hour)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로부터 2천 년이 지나도 아직 이 세상의 끝날(the end of the age)(마태복음 28:20)이 도래하지 않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편으로는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베드로후서 3:8)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당신께서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3:9)기 때문이라는 점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말세라는 과거 시점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말세와 직결되는 “이 세대(this age), 이 세상(this world), 금세(the present age) 혹은 현세”(로마서 12:2, 에베소서 1:20-21, 디도서 2:11-13, 마가복음 10:29-30, 누가복음 20:34-35)와는 차원이 다른 “오는 세상(the age to come), 저 세상(that age), 내세”라는 시대가 막을 열었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죄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사단의 속임수와 기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악한 “이 세대, 이 세상, 현세, 금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결정적으로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 혹은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성경은 다양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여신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마태복음 12:28).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금세와 내세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에베소서 1:21)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을 뿐 아니라 내세의 능력을 맛보게 되었습니다(히브리서 6:4-5). 우리는 이미 어둠의 권세에서 예수님의 사랑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골로새서 1:13). 영적으로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고(에베소서 2:6-7)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속에 숨겨 있습니다(골로새서 3:3). 이런 영적 차원을 고려해보면 사도 요한이 우리가 지금 영생을 얻었다 혹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요한복음 3:36, 5:24). 영생이란 단어에서 사용되는 영원하다(aionios)는 용어의 의미가 질적인 풍성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장차 부활 이후에 온전히 참여하게 될 그 생명을 지금 누리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금세와 내세 간에 미래의 과도기가 존재하는 게 사실입니다. 신학에서 말하는 "Already but not yet"도 결국엔 이 두 시대가 계속 진행되어 가는 긴장 관계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 10:11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에서 언급되고 있는 "말세"(the ends of the ages)는 결국 "두 시대가 중첩된 시점"(overlapping of the two times)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과도기라는 것도 우주적인 구속의 완성(consummation)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결정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재 상태를 보자면 육신적으로는 금세(시공간적으로)에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이미 내세에 살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각자의 육신적인 경우로 볼 때는 내세가 미래의 일이겠지만 우주적으로는 내세가 이미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내세가 이미 진행 중이라는 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재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온 우주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점만 보아도 자명해집니다. 이미 세상 떠난 성도들은 지금 내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자 이제 한 번 더 “오늘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신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생각해볼까요? 지금까지의 논의에 의하면 우리는 현재 예수님을 믿고 당신과 연합됨으로 하나님 나라 혹은 영생 혹은 내세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온전한 실체는 미래의 것이겠지만 주님과 긴밀하게 교제하는 경험과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통치하시는 역사를 통해 그 실체를 미리 맛보고 누리며 우리 인생을 영위해갑니다. 우리의 몸이 세상을 떠나는 날 혹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 온전한 실체를 누리는 새로운 장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현재 하나님 나라 혹은 영생 혹은 내세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나중에 따로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 혹은 영생 혹은 내세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게 되어 영생을 누림으로 이미 내세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을 몸으로 평생 본보이다가 지난 2013년 5월 8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댈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가 평소에 자주 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야.”(I think that when I die, it might be some time until I know it.)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영적으로 부활하여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에 거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이 자기에게 닥쳐도 그 사실을 즉각적으로 깨닫지는 못할 것이라는 유머러스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언젠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 받았을 때 이렇게 답변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하고 당신과 하나님 속에 흐르는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결코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특별히 언급하셨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결코 사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성서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계시되어 있는 이런 영적 실상에도 불구하고, 오늘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신(믿음)이 있느냐?라고 묻는 것은 마치 하나님 나라 혹은 영생 혹은 내세를 누리는 것이 전적으로 미래의 일이라고만 상정할 뿐, 현재 이미 진행되고 있는 영적 상태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이 질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혹은 영생을 누리는 것이 단지 각 개인이 품고 있는 믿음에만 달려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 또한 큽니다. 물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혹은 당신과 연합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 믿음이 참된 것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알고 믿고 떤다고 하면서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것(야고보서 2:19-20,26)은 우리 믿음이 참된 것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사실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들에게는 다시 사영리 혹은 다리 예화식 복음을 제시한 후 다시 예수님을 영접하는 “신앙의 강화”를 꾀하기보다는 복음의 진면목을 확연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과 더불어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받은 이가 맺어야 할 삶의 열매를 점검해보도록 인도하는 게 더 바람직할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