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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구원의 확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8. 2.

구원의 확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구원받은 객관적 증거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부활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주관적인 증거는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 언급할 때 꼭 인용되곤 하는 말씀 중에 요한일서 5:11-13이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5:11-13).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점을 “알게” 하기 위해 이 서신서를 쓰게 되었다는 사도 요한은 그 요한일서 곳곳에서 “안다”는 말을 스무 번 이상씩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이러한 “영적 지식”을 체험하기 원하는 그의 열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영생을 현재 누리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점을 인식할 수 있는 몇 가지 영역을 계시해 두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진리의 빛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1:5-2:3). 우리 삶을 하나님의 빛 가운데 두고 죄악이 드러날 때 그 죄악을 고백하고 바로잡으며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3장 이후에서 언급되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범죄하지 않는다”(3:6, 9, 5:18)는 말씀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1:8, 10)이라는 말씀과 조화롭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3:5)을 알고 장차 예수님과 같이 될 것을 소망하면서(3:2-3) 주님 안에 거하는 자가 범죄 하지 않는다(3:6)는 것은 마땅한 영적인 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엄연한 영적인 현실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죄악을 감추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과 당신과의 교제 가운데(1:7) 그 죄악을 내어 놓고 고백하여 죄 사함 받는 것이 올바른 도리라는 것입니다(1:9). 이 두 가지 측면이 2:1에 영광스럽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아멘입니다.

 

성도들이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주관적 증거 두 번째는 “예수님을 이 땅에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2:23, 4:2, 5:20)입니다. 참 하나님이요 영생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고백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성도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이것 자체가 성경이 인정하는 중요한 구원의 주관적 증거가 된다는 점을 성도들이 인식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는 무지하고 교만하여 예수님에 대한 이런 계시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부지기수이지만 열린 마음과 겸허한 마음으로 아무리 궁구해도 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자세를 겸비하고 예수님의 진면목을 이해하려고 하면 반드시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깨닫고 당신을 믿게 될 것입니다(요한복음 7:17, 예레미야 29:13). 그렇지만 이미 이러한 진실을 믿고 있는 이들은 그 믿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간직하고 그 믿음이 더욱 자랄 수 있도록 주님 아는 지식을 더해가야 할 것입니다.

 

주관적 증거 세 번째는 “형제 사랑”(3:14, 18-19)입니다. 형제를 진실한 행동으로 사랑하는 것이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실행해갈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제와 이웃들에게 진실한 심정으로 선행을 베풀 때 우리 마음속에 우러나는 기쁨과 평안이 바로 이러한 확신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요?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사랑이심”(4:8)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마치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는 것”(누가복음 6:44)과 같이 그 믿음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 믿음의 대상이 성경에 계시된 참 하나님이신지 아닌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절실한 이유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지상 명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태복음 22:37-40)은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같은 계명입니다(39절-“둘째도 그와 같으니”).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이는 반드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언의 대우(對偶)도 참일 것입니다. 즉,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인 셈이지요.

 

이렇게 요한일서에 나타난 구원의 주관적 증거만 살펴보아도 구원의 확신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은 자신의 믿음이 예수님의 성육신,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이고도 객관적인 구원의 토대에 뿌리 내리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자신의 믿음이 참된 것임을 분별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를 누리고 진리의 빛에 비추어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형제/이웃에게 실천적인 사랑을 나누는 삶을 영위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도전하면서 참된 믿음 생활을 격려하는 야고보의 서신에서도 이런 시각과 동일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1:27)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순전한 경건의 모습이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돌보고 자신을 세상의 악으로부터 지키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이웃 사랑과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삶. 그 순서만 다를 뿐 사도 요한의 시각과 동일한 내용이 아닙니까?

 

우리가 구원을 얻어 현재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자 의무이기도 합니다(요한복음 1:12, 요한일서 5:13).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하고 고민하는 것이 일상사가 되어 버린 이 세상 속에서, 이미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내가 현재 그 시대 속에 포함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있을 뿐 아니라 장차 온전하게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보다 더 나은 특권이 어디 있을까요? 이런 지식 없이 살 때 다른 사람들처럼 불안해하면서 죄악에 빠지고 헛된 쾌락에 탐닉하게 되는 어리석은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지식을 갖는 게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확고한 미래의 전망을 가진 이는 결코 좌고우면하지 않습니다.

 

성경 속에 명백하게 계시된 영광스러운 복음의 진리가 효과적으로 능력 있게 전달되는 경우가 희귀한 것이나 그 능력의 복음이 믿는 성도들 속에 역사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현실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습니다. 모쪼록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분들이 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복을 금세와 내세에서 온전히 누리며 이 소중한 복을 널리 전파하고 선양하는 일에 형통할 수 있도록 함께 도고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