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가 하늘 높이 비상하며 외치는 까닭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세상은 당신의 상상력에 자기를 내맡기고 / 기러기처럼 그대에게 소리쳐요, 격하고 또 뜨겁게 - / 세상 만물이 이루는 가족 속에서 / 그대의 자리를 되풀이 알려주며.
(Whoever you are, no matter how lonely, / the world offers itself to your imagination, / calls to you like the wild geese, harsh and exciting - / over and over announcing your place / in the family of things.)
이 추운 겨울의 한복판, 팬데믹 때문에 더욱 외로운 일상을 인내하는 모든 분들과 나누고 싶은 시 한 편이 있습니다.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Wild Geese)입니다. 2009년 9/11 사태 추모식에서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이 읊은 시로 유명하지요. 이 시 속에 소개된, '세상은 당신의 상상력에 자기를 내맡기고'(15행)라는 구절의 취지를 따라 제가 상상한 대로 이 시 속의 세상사를 다시 풀어 보겠습니다. (신형철 평론가의 번역 참조함)
"기러기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어요.
사막을 가로지르는 백 마일의 길을
무릎으로 기어가며 참회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당신 몸의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게 두어요.
절망에 대해 말해보세요, 당신의 절망을, 그러면 나의 절망을 말해줄게요.
그러는 동안 세상은 돌아가죠.
그러는 동안 태양과 맑은 빗방울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나아가요,
넓은 초원과 깊은 나무들을 넘고
산과 강을 넘어서.
그러는 동안 맑고 푸른 하늘 높은 곳에서
기러기들은 다시 집을 향해 날아갑니다.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당신의 상상력에 자기를 내맡기고
기러기처럼 그대에게 소리쳐요, 격하고 또 뜨겁게 -
세상 만물이 이루는 가족 속에서
그대의 자리를 되풀이 알려주며."
(Wild Geese
You do not have to be good.
You do not have to walk on your knees
for a hundred miles through the desert, repenting.
You only have to let the soft animal of your body
love what it loves.
Tell me about despair, yours, and I will tell you mine.
Meanwhile the world goes on.
Meanwhile the sun and the clear pebbles of the rain
are moving across the landscapes,
over the prairies and the deep trees,
the mountains and the rivers.
Meanwhile the wild geese, high in the clean blue air,
are heading home again.
Whoever you are, no matter how lonely,
the world offers itself to your imagination,
calls to you like the wild geese, harsh and exciting -
over and over announcing your place
in the family of things.)
착한 사람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타인의 안목을 의식한 착함, 타인이 설정한 선함이라면 더욱 그것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모든 측면에서 착한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내가 나아갈 길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가는 길은 곳곳에 넘어질 곳 투성이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마련된 대로(大路)를 걷는 일은 넉넉한 자유를 줍니다. 그 길은 가 보지 않은 길이지만, 나를 위해 이미 열려 있는 길입니다.
회개하기 위해서라면 사막을 백 마일씩이나 무릎으로 걸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공로 의식으로 행동을 취하는 것은 회개하는 길이 아닙니다. 용서받기 위해서라면서 취하는 행동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한 일을 참회한 것으로 퉁치는 것도 금물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만 위무할 뿐입니다. 피해를 입힌 당사자에게 진솔하게 용서를 구하고 그로부터 용서받는 게 무엇보다 우선적입니다. 그가 용서해 주지 않더라도 그것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내가 범한 죄를 원 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가 용서해 준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당신 몸의 부드러운 동물'이란 번역보다는 ‘당신 몸이라는 부드러운 동물’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적절합니다. 우리 몸 전체가 동물적인 존재이자 부드럽고 연약한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물들의 몸은 옷이라는 게 필요 없을 정도로 잘 보호되고 있을 뿐 아니라 단단하기까지 합니다. 호랑이나 팬다는 이렇게 추운 날에도 눈 위에서 뒹굴며 놉니다. 그들의 털과 가죽이 몸을 완벽하게 감싸주고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알래스카 반도 남쪽에 수천 마리가 떼 지어 사는 해달은 해변에서 주어 온 돌을 자기 배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조개를 내리쳐서 살을 꺼내 먹습니다. 그만큼 해달의 갈비뼈와 등뼈가 튼튼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 몸은 연약하고 부드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굵고 두툼한 털도 없고 가죽처럼 질긴 피부도 없으며 무쇠처럼 단단한 뼈도 없습니다.
이 몸은 모든 동물적 존재가 공유하는 자질입니다. 식욕과 성욕과 같은 기본적인 욕구를 품고 있습니다. 몸으로 걷고 활동하고 운동하고 놀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오감을 활용하면서 즐기고자 하는 경향도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몸 가진 우리의 실상입니다. 몸의 순리를 좇아 몸이 간절히 애호하는 것을 애호하는 게 우리가 지녀야 할 도리입니다. 특정한 감각에 탐닉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감각을 무시하고 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닙니다. 먹는 것뿐 아니라 운동하고 다양한 감각을 활용하는 측면을 통해서도 몸의 자연적인 욕구를 충족해 가야 합니다.
이 부드러운 몸이라는 동물성에는 천부적인 외모, 기질, 지력 및 재능에다 신체적 혹은 심리적 병력들도 모두 포함됩니다. 이것들은 죄다 우리 조상들의 몸을 통해 전수된 유전적 요인들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독특한 기질과 건강을 유지하는 데 불리한 병력들까지도 수용하면서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본성과 기질과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고 누리는 게 우리의 도리입니다.
‘내 생긴 대로 사는 데 뭐!’라면서 타인에게 상처주는 조악한 자세는 '내 몸이라는 부드러운 동물'을 다루는 논의와는 결이 다릅니다. ‘내 생긴 대로’가 거칠고 조잡하면 그것은 본질적인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 생긴 대로’는 부드러워야 합니다. 타인과 다를지라도 유연하게 내 다름을 표현하고 타인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내 몸이라는 부드러운 동물'이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한다고 여기는 내게 절망(despair = hopelessness)이 존재합니다. 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타인에게도 이 절망이 엄존합니다. 이 절망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하는 보편성을 띱니다. 내 것(mine)이 있고 네 것(yours)이 있습니다. 이러한 절망을 느끼는 것이 바로 동물과 우리가 다른 점입니다. 동물은 가르침 받지 않아도 자기가 살아야 하는 방식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갑니다. 새들이 둥지 짓는 것을 한번 보세요. 그것들의 부모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결과일까요? 그에 반해 인간은 배워야 하고 내성(內省)하는 존재입니다. 배움에 끝이 없고 자기 성찰에도 마지막이란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절망은 교정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둘러 보며 희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절망하고 있을 바로 그 순간에도 온 세상은 계속 희망에 찬 모습으로 전진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계라는 ‘부드러운 동물’이 간절히 애호하는 길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절망하고 있을 바로 그 순간에도 태양과 투명한 조약돌(pebbles)같은 빗방울이 풍경을 가로질러, 대초원지대, 광대한 나무들, 산맥과 강을 넘어 움직입니다. 매끈매끈한 조약돌 물팔매로 잔잔한 호수 위에 물수제비가 빚어지는 것처럼, 빗물은 온 세상 곳곳에 물수제비를 만들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렇듯 맑은 날이거나 비가 오는 날이거나 세계는 자기가 간절히 원하는 자기 길을 갑니다. 도대체 그것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기러기가 그 힌트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가 절망하고 있을 바로 그 순간에도 기러기들은 많고 푸른 대기 속에 높이 떠서 다시 집으로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최고로 높이 나는 새가 바로 이 기러기 중에 있습니다. 7,290미터까지 올라 비행하는 줄기러기 혹은 인도기러기가 있습니다. 해발 8,848미터인 에베레스트 산의 지형을 따라 '롤러코스터 비행'을 하면서 최고 7,290미터까지 상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줄기러기들은 그렇게 높이 하늘로 올라 한 해에 번갈아 가며 두 군데 보금자리로 날아갑니다. 번식하는 곳인 러시아 남동부나 중앙 아시아 같은 지역과 월동하는 곳인 인도 북부나 미얀마 북부가 바로 그들의 처소입니다. 계절에 따라 정확한 이동 경로를 밟아 그 두 군데를 왕복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지금은 '자기들의 부드러운 동물'의 본성에 맞게 철 따라 그 먼 거리를 여행해야 하지만, 계절 따라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기러기가 높이 나는 하늘은 신성함이 깃든 맑은 곳일뿐만 아니라, 소망으로 충일한 푸른 곳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온 세상 천지가 신성한 시원의 본향으로 새롭게 변혁될 날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온갖 존재들은 내게 자기들의 모습을 드러내며 외칩니다. 내가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너무 내성하고만 있지 말고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이면서 내 상상력을 발휘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좀 더 분명하게 기러기처럼 귀에 거슬리면서도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소리칩니다. 한편으로 제발 정신 차리고 세상 만물이라는 가족 속에서 내가 차지할 자리를 지켜 가라고 다그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원의 본향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다고 감정이 북받쳐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이 엄연한 진실을 잊고 사는 나날들이 너무 많아, 기러기들이 하늘 높이 비상하며 외치듯이 온 세상이 거듭거듭 내게 소리칩니다. 저 하늘 나라, 시원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그 날을 고대하며 온 세상 가족들과 함께 인내하며 살아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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