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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선사하는 일상의 원동력(2)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6. 4.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선사하는 일상의 원동력(2)

-반지의 제왕의 안목-

줄거리에 주목하면서 “반지의 제왕” 속에 드러나 있는 주요한 안목들을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울러 인문학과 함께 성서가 밝히 계시해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관심을 품고 있는 분들에게도 이러한 정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래 내용에는 주로 클라이드 S. 킬비의 글(“Mythic and Christian Elements in Tolkien", 1974) 중에서 ‘반지의 제왕’과 연관된 부분이 많이 참조되었습니다.

 

1. 두 세계가 존재한다는 시각

이 작품 중에는 가장 명백하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두 세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 세계는 거의 천사적인 것이지만, 다른 한 세계는 지옥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선하고 바른 이들의 유대관계(Fellowship)가 있는가 하면 이에 대응하는 악한 이들의 유대관계도 있습니다. 악한 이들은 사단적인 지도자인 사우론[그 이름은 saurian(도마뱀류의)이나 reptilian(파충류의)라는 단어를 연상시킴]이 한때 속박시키고 있는 무리임이 분명한데, 그 구성원들에게는 비교적 내부 갈등이나 반대가 거의 없는 한 조직으로 활동하는 효과적 면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르도르는 “모든 악한 것들”을 자기에게 끌어들인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두 세계에 있어 가장 주도적인 상징은 어둠과 빛의 대조입니다. 사우론은 검은 손(Black Hand), 검은 주인(Black Master), 검은 자(Black One), 검은 그림자(Black Shadow), 사악한 주인(Dark Lord), 어둠(Darkness), 사악한 힘(Dark Power), 적(the Enemy), 검은 땅의 주인(Lord of the Black Lands) 등으로 불립니다. 미나스 티리스의 가장 높은 벽 위에 높이 솟아 있는 에첼리온(Ecthelion)의 탑은, “크고 매끈하고 균형 잡힌 상태로 진주와 은으로 만든 뾰족한 대못처럼 깜빡이면서 하늘에 빗대어 빛났고, 그 꼭대기는 마치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것처럼 깜빡였으며, 흰색 깃발은 찢어진 채 아침의 미풍 속에서 흉벽에서 휘날리고 있었습니다.”(shone out against the sky, glimmering like a spike of pearl and silver, tall and fair and shapely, and its pinnacle glittered as if it were wrought of crystals; and white banners broke and fluttered from the battlements in the morning breeze) 반면에 사우론의 탑은 “시커멓게, 그것이 서 있는 광대한 그늘보다도 더욱 시커멓고 더욱 어둡게 솟아 있었습니다.” (rising black, blacker and darker than the vast shades amid which it stood) 흰색 나무는 고대의 복된 왕국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흰옷은 거의 언제나 입은 자 속에 있는 선을 상징하지만, 반지유령(Ringwraiths)의 검은색 복장은 확실히 은밀하고 영속적인 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브루이넨 여울(Ford of Bruinen)에서 반지유령들의 검은 말들은, 프로도를 안전하게 데리고 간 글로르핀델(Glorfindel)의 말이 띠고 있는 초월적인 흰색과 대조를 이룹니다. 예전에 복된 땅에 살고 있었던 강력한 장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알려진 글로르핀델(Glorfindel)에게도 그와 동일한 초월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 “반지의 제왕” 전편에서, 납빛 얼룩투성이인 데다가 거대하게 부푼 몸체, 악취가 코를 찌르는 배, 울퉁불퉁하고 털이 나 있는 다리와 발톱으로 무장한 채, 절벽 아래에 있는 검은색 구멍에서 나온 셸롭(Shelob)보다 더 무시무시한 형상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적들에게서 조그마한 호빗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힘이나 교묘한 재간이 아니라 천상의 로슬로리엔(Lothlorien)에 있는 갈라드리엘(Galadriel)이 그들에게 선사해 준 빛나는 작은 유리병(phial of light)을 자기들이 직접 지니고 있다는 기억이었습니다. 셸롭의 악한 눈(眼) 무더기 앞에 그들이 그 유리병을 내밀었을 때, 그것은 셸롭이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두려움, 즉 “무시무시한 빛의 감염”(the dreadful infection of light)을 자아냈습니다. 나중에 호빗들은 그 빛이야말로 복된 왕국에서 비롯된 빛이요, “모든 빛들이 사라진 어두운 곳에서” 그들에게 비추는 빛임을 회상했습니다. 그것을 준 이가 “죽지 않는 여인”인 데다가 단테의 베아트리체(Dante's Beatrice)의 광휘나 성모 마리아(the Virgin)의 이미지를 상기시켜 주는 영광을 드리우고 있는 갈라드리엘이었던 것입니다.

 

해, 달 및 별들의 빛은 오르크들과 다른 악한 인물들은 싫어하지만, 선한 이들의 사랑을 받는 대상입니다. 골룸은 달을 향해 쳐다보고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것이 자기를 염탐하는 “고약하고 고약한, 무시무시한 빛”(Nassty, nassty shiver light)이라고 말합니다. 오르크들이 밤에만 여행하는 이유도 바로 그들이 해를 증오하기 때문이며, 모르도르도 어두운 구름들이 종종 땅 근처에서 돌고 있는 장소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리아와 다른 고분들(Barrows)과 연관된 극도의 어두움은, 마치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은 땅”(욥기 10:22)이라고 욥이 묘사한 음부(Hades)의 어두움과 같은 잠재력이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선한 이들은 빛을 사랑합니다. 모르도르 안에서 완전히 홀로 되어 전적으로 버림받았다고 느끼던 샘은, 잠들어 있는 프로도에게서 조금 벗어 나와 주위를 정찰하다가, 우연히 자기 위에 있는 어둡고 사악한 산 너머를 바라보게 되고 급기야 흰 색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의 아름다움이 그의 마음을 찔렀다. (The beauty of it smote his heart.) (...) 그리고 소망이 그에게 찾아왔다. 결국엔 어둠의 세력이라는 것은 단지 사라져 버리는 조그마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in the end the Shadow was only a small and passing thing)이 맑고 차가운 한 줄기의 광선처럼 그의 마음을 찔렀다. 그것이 세력을 미치는 범위 너머에는 빛과 고귀한 아름다움이 영원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there was light and high beauty for ever beyond its reach.)” 그는 프로도에게 다시 돌아와 고요하고 소망이 넘치는 가운데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 보다 더 일찍 샘은 빛의 유리병 역사를 기억해 내면서, “우리도 여전히 동일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있습니다.”(We're in the same tale still.)라고 프로도에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고대의 신성한 역사와 엄숙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암시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반지의 제왕”이라는 이야기 속에는 불변하고 영원한 것들이 모든 주요한 사건들에 알맞게 조정되어 있는 셈입니다.

 

빛과 어둠의 대조와 더불어, 악이란 어떤 본질적인 실재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라는 개념이, 사우론과 그의 졸개들을 유령들(wraiths)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 속에 현저하게 암시되어 있습니다. 반지유령들이 타고 있는 말들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검은 색 복장은 그들의 ‘비실재성에 형태를 부여해 준다’(give shape to their nothingness)는 내용을 접하게 됩니다. 프로도도 웨더톱(Weathertop)에서 반지를 사용함으로써 유령과 같은 자질을 아주 조금 취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꾀부리는 골룸은 단지 “살아 있는 것의 그림자”(the shadow of a living thing)에 불과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악이란 흉내 내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창조해 낼 수 없는 것임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시대에 엘다(Eldar)를 시기해서 모르고스(Morgoth)가 새로 세상에 들어온 요정들 중 몇을 붙잡아서, 서서히 그들을 오르크들로 키웠다는 사실이 신뢰를 얻은 바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가장 비열한 행위들 중의 한 가지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엔트족(Ents)를 시기해서 식인종 거인류(Trolls)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오르크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키운 그 그림자는 단지 흉내 낼 수 있을 뿐 만들 수는 없다. 즉 자체적으로 새로운 실제적인 것들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The Shadow that bred them can only mock, it cannot make: not real new things of its own.)라는 언급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오르크들에게 생명을 부여해 주지 않았고, “단지 그것들을 파멸시키고 왜곡시켜 버렸습니다.” 철학가들과 신학자들은 종종 악의 비본질성(the inessentiality of evil)에 주목해왔습니다.

 

우리 주변이 암흑같이 어두울지라도 이 세상에는 “반지의 제왕”에서 제시한 것과 같이 빛의 세계가 엄존한다는 시각을 견지하는 게 무엇보다 긴요한 일입니다. 이 시각으로 빛의 세계에 자기를 두는 일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빛은 하나님의 세계요, 어둠은 사단을 비롯한 악한 자들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기지도 못하듯이(요한복음 1:5), 사단과 그 졸개들은 하나님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기지도 못합니다. 빛과 어둠을 가릴 수는 없다, 모든 게 다 상대적일 뿐이라는 말은 자가당착일 뿐입니다. 그 말이 옳다 해도 그것 자체도 상대적인 언명에 불과하니까요. 빛과 어둠을 뒤섞는 어둠의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체가 어둠의 말임을 깨닫지 못한 채 내뱉는 말이지요.

 

“반지의 제왕” 속에 빛과 어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말은 그 작품이 이원론(Dualism)을 지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어둠의 세력들은 한결같이 “살아 있는 것의 그림자”(예컨대 골룸의 경우)이거나, 원래 선한 것들이 왜곡되고 변질된 존재(예컨대 오르크들)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결코 빛의 세계의 존재들과 같이 독립적인 실체를 갖춘 존재들이 아니지요. 신약 성경에서도 우주에 존재하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 자주 언급되어 있지만, 그 존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즉 창조되었을 때는 선한 존재였으나 나중에 변질되고 왜곡된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비록 현재에도 빛과 어둠의 세력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독립된 세력들 간의 전쟁일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내전이요, 반란”(a civil war, a rebellion)에 불과한 것이지요(C. S. 루이스). 반지의 제왕 속에서 그 내전 혹은 반란이 진압되고 그 모반 세력들이 축출되듯이, 이 세계 속의 어둠의 세력도 무력으로 진압되고 축출되는 날이 조만간 도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그림자에 불과한 어둠, 실체 없는 어둠, 비본질적인 어둠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도리어 빛과 빛의 무리 편에 서겠다는 시각을 견지합시다.

 

2. 구속의 가능성이 있다는 시각

지속적으로 악을 행하는 어둠의 세력이 존재하지만, 그 사실과 더불어 항상 구속(救贖)의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점을 “반지의 제왕”은 웅변적으로 드러냅니다. 사실상, 악이란 한 때는 선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들(people who were once good and therefore know the way back home) 속에서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모르고스(Morgoth)와 사우론조차도 처음에는 악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이 확실히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사루만이 백색 위원회(the White Council, 세상의 선한 세력을 위해 일하는 강력한 마술사들과 요정 지도자들 그룹)의 위원 자리에서 원한과 질시로 돌돌 뭉친 수다쟁이로 전락하게 된 비극은, 이 이야기 속에 극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저급한 타락에 처해 있던 순간에 프로도의 생명을 앗아가려고 시도할 때조차도, 프로도는 샘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한 때 우리가 감히 대항할 수 없었던 고귀한 부류에 속한 위대한 존재였다. 그가 타락한 상태에 있고 그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이다. 그렇지만 그가 그 치유책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여전히 그를 살려 두고자 한다. (He is fallen, and his cure is beyond us; but I would still spare him, in the hope that he may find it.)” 호빗 프로도의 신성한 품위가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이지요.

 

반지유령들(Ringwraiths)도 한 때는 누메노르(Numenor) 출신의 선한 이들이었지만,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약속과 유사한 약속, 즉 지식에 대한 약속 때문에 사우론 진영의 꾐에 빠져버린 이들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경우에 있어 동정심(compassion)이 일반적인 도덕 기준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빌보에게 기회가 생겼을 때 골룸을 죽이지 않아서 애석하다(a pity)고 프로도가 간달프에게 언급하자, 간달프는 프로도를 꾸짖습니다. “그의 손을 붙든 것은 동정심(Pity-대문자)이었다. 동정심(Pity)이었다. 자비(Mercy)였다. 즉 필요 없이 공격하지 않는 것(not to strike without need)이다.” 프로도도 결국 이 동정심을 배워 나중에 골룸이 자기 얼굴에 침을 뱉을 때 그것을 실행하게 되지요.

 

“반지의 제왕”이 한편으로는 빛과 어둠의 두 세계를 선명하게 제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어둠의 세계가 구속받을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늘기억하고 견지해야 할 균형 잡힌 시각이기도 합니다. 우선 그 어둠의 세계에 속해 있는 이들이 원래 빛의 자녀들이었지만, 사우론 세력의 꾐에 빠져 어둠의 세력에 속하게 된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원래의 빛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지요. 그들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그들이 언제 치유되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그들을 향해 동정심을 발휘하는 길이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골룸과 사루만을 대하며 인내하는 프로도의 모습을 접하면서 디모데후서 2:24-25에 나오는 “주의 종”의 면모가 떠올랐습니다.

 

(디모데후서 2:24-25)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이 구절들 가운데 “참으며”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로 번역된 헬라 원어는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무작정 참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참는 것”(patient when wronged, NASB)입니다. 더구나 그 참는 이유는 그렇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이가 회개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구속의 가능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면모를 밝히면서 천국의 대로를 계시해주는 프로도를 기억하며, 온 세상에 편만한 구속의 가능성에 눈 뜹시다.

 

3. 초월적 주관자에 대한 시각

프로도와 그의 친구들 위에서 그들을 온전히 주관해 가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점이 제시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간달프는 반지의 역사를 프로도에게 설명하면서, 사우론이 “고안한 어떤 것을 넘어서 존재하는”(beyond any design) 힘이 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빌보는 “그 반지를 찾도록 계획되었다”(was meant to find it)는 것과, 그러므로 프로도도 “그것을 가지도록 계획되었다”(was meant to have it)는 점도 간달프는 언급합니다. 당시 위기에 처한 가운데땅을 구원한 이 반지 원정대가 탄생한 엘론드 회의가 우연히 이루어진 모임이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서로에게 낯선, 그 회의에 모인 인물들은 엘론드가 정식으로 초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주변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하여 자발적으로 그들이 바로 그 시기에, 그곳으로 모여든 것이었지요. 그래서 이런 상황이 우연한 일로 보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엘론드가 못 박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초월적 주관자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꼭 알맞은 때에 여러분이 이곳에 와서 함께 만나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처럼 보일 수도 있소. 하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가, 세상의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정해져 있다는 점을 믿어야 할 거요.”(You have come and are here met, in this very nick of time, by chance as it may seem. Yet it is not so. Believe rather that it is so ordered that we, who sit here, and none others, must now find counsel for the peril of the world.)

 

조금 후에 아라고른이 프로도에게 그가 그 반지를 가지고 가는 것은 “정해진 일”(it has been ordained)임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게 됩니다. 교만한 보로미르는 힘과 권력을 신봉하는 자이므로, 자기들이 “인간의 힘과 충성심을”(in the strength and truth of men)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프로도의 확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엄청난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초자연적인 인도와 도움(supernatural guidance and help)을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보로미르는 생각합니다.

 

톨킨의 이야기 속에는 절대주권을 쥐신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물론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그 절대자의 존재는 곳곳에서 신비로운 광휘를 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 중에, 이미 존재해 있는 자신의 본래적 모습의 의미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추구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고 확언하는 이들보다 더 솔직합니다. 이 세상에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점이라는 사실을 후자의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가 존재한다는 점을 가리킵니다. 만일 이 세상에 빛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고 그 빛을 인식할 수 있는 눈 가진 존재가 없다면,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것도 결코 인식할 수가 없는 법이지요(C. S. 루이스). 온통 어둡기만 한 세상에서 어둡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국 문제는 “의미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가 되겠지요. 성서는 그 의미가 유일한 신(神),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다고 계시해줍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이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할 것이고 그 소통 내용을 기록하도록 배려할 것이라는 점은, 인간이 자신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언어와 그 기록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의 주된 소통 도구가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서에 접근하고 그것을 독해하는 방식은, 일반 다른 역사서나 문학 작품에 접근하고 그것을 독해하는 방식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및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같은 저작들의 사본들을 대하고 이해하듯이, 성서의 사본들을 대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역사성에 관한 객관적 증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사본상의 권위로만 보더라도 신약성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한 역사서와 문학 작품들은 ‘참’된 전거로 보지만, 성서는 ‘거짓’된 자료로 취급하는 이들이 허다하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라면 믿지 않기로 결단한 특정 집단의 이중 잣대(double standard)에 불과하겠지요. 이 잣대에 현혹되지 말고, 온 세상에 편만한 의미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온 우주를 주권과 섭리로 운행해 가시는 하나님을 믿고 좇는 시각을 견지합시다.

 

4. 그리스도 이미지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시각

현대 문학 속에서 그리스도 이미지를 탐구하려는 경향이 지속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 “반지의 제왕” 속에도 그리스도 이미지는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가장 깊고 가장 어두운 지하에서 사는 생물인 불타는 발록과 간달프가 투쟁하는 장면에서 그 둘이 바닥없는 협곡 속으로 떨어지는데, 이러한 상황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신 것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이고, 간달프의 부활(resurrection, 분명히 부활로 명명됨) 후에 그 반지의 전우들(Fellowship)이 그를 응시할 때,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발견한 놀라운 기쁨과 동일한 어떤 감흥으로 그렇게 바라보게 됩니다. 간달프의 머리카락은, “햇볕에 드러난 눈과 같이 희고, 그의 복장은 희게 빛났다. 그의 짙은 눈썹 아래 있는 눈은 밝고 태양 광선처럼 꿰뚫는 듯했으며 그의 손에는 능력이 있었다.”(white as snow in the sunshine; and gleaming white was his robe; the eyes under his deep brows were bright, piercing as the rays of the sun; power was in his hand) 난쟁이 길미는 그의 무릎에 파묻힌 채, 밝은 간달프의 빛으로부터 자기 눈을 그늘지게 했습니다. 나중에 간달프는 “빛으로 가득 차 있고”(filled with light), 그의 머리는 “이제 신성하게 되었다”(now sacred)는 것과, 그가 치유자가 되었고 전투 시에 갑옷도 필요 없다는 것 등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지하에서 그가 발록과 벌인 투쟁을 다 이야기하려면 1년도 부족할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간달프 스스로가 자기에게는 지상에 “영원한 거처가 없다”(no lasting abode)고 언급한 점이나, 그와 세상의 다른 “방랑자들”(wanderers)이 셔(Shire) 지방을 주의 깊은 눈으로 보호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언급한 점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리븐델(Rivendell)에서 프로도가 헌신한 것과 그 친구들을 떠난 후 그와 샘이 겪은 대부분의 여정, 특히 모르도르를 통과한 절망적인 여행, 멸망의 산에서 맞은 원정의 클라이맥스, 그들이 치르기로 되어 있는 삶의 대가,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승리와 승리의 열매들을 그리스도와 연관된 상징으로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예컨대, 골고로스(Gorgoroth)의 갱도를 통과하고 오로드루인(Orodruin)을 올라가는 마지막 투쟁을 감행할 때, 프로도가 자신이 점점 더 반지의 무게에 짓눌리게 된다는 점을 샘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고려해 봅시다.

 

“어떤 음식의 맛도 느낄 수 없고, 물도 느낄 수 없고,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고, 나무와 풀이나 꽃에 대해 어떤 기억도 나지 않으며, 달이나 별에 대해 어떤 심상도 떠오르지 않는 처지가 되어 버렸어. 나는 어둠 속에서 벌거벗고 있어. 샘, 이젠 나와 불의 수레바퀴 사이에는 아무런 가림막도 없어.”(No taste of food, no feel of water, no sound of wind, no memory of tree or grass or flower, no image of moon or star are left to me. I am naked in the dark. Sam, and there is no veil between me and the wheel of fire."

 

이런 장면이 최소한 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마지막 날들의 사건들을 우리가 돌이켜 볼 때 느끼는 절박한 어떤 감정을 암시해 주는 것은 아닐까요?

 

프로도는 그 절대반지(the One Ring)의 보호를 거절하고, 오르크로 가장한 것(orc disguise)을 벗어 던지고서는, 자신의 운명을 향해 바로 나아갑니다. 마지막 순간 그 반지를 파괴시키지 않으려고 프로도가 일시적으로 결단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외치신 것(“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을 적어도 조금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암시를 주고 있는 더 진전된 힌트는, 오로드루인의 정상 위에 있는 어둠 속에서는 갈라드리엘의 빛나는 유리병조차도 많은 빛을 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프로도와 골룸이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비틀거리고 있을 때, 샘은 그들이 마치 선과 악의 화신, 즉 골룸은 “가증한 정욕과 분노로 가득 찬”(filled with a hideous lust and rage) 존재이고, 프로도는 그 가슴에 불의 수레바퀴를 쥐고 있는, “흰색 옷을 입은 인물”(a figure robed in white)로 서 있는 것을 시각적으로 일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투쟁 이후에 승리는 성취되고, 우리는 톨킨 자신이 고안해 낸 의미심장한 표현인 유커태스트러피(Eucatastrophe)(‘파국’이라는 단어 앞에 ‘좋은’이란 의미의 접두어 ‘eu’를 붙인 조어로서, ‘이야기 중에 눈물을 자아내는 기쁨이 우리를 찌르는 갑작스럽고도 행복한 상황 변화’라는 뜻)에 깊이 감동됩니다. 샘과 프로도는 오로드루인 발치에 있는 잿빛 언덕으로 비틀거리며 내려가다가 거기서 나란히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때 바람의 왕 과이히르(Gwaihir the Windlord)가 이끄는, “보냄 받은” 독수리들이 와서, 그 충성스러운 종들을 취하여 그 악취가 진동하는 곳이자 불의 강인 그 장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들이 다음으로 인식한 것은 바로 아름다운 이실리엔(Ithilien) 숲속에서 녹색과 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너도밤나무 가지 아래에 있는 부드러운 침대입니다. 샘은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때 자기 옆에 “흰옷을 입고, 녹음이 우거진 햇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가운데 있는 순수한 눈과 같이 빛나는 턱수염을 한”(robed in white, his beard now gleaming like pure snow in the twinkling of the leafy sunlight) 간달프가 있는 것을 발견해 내었습니다. 그들은 이내 “왕”(the King)께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샘이, “모든 슬픈 것이 이제 꿈이 됩니까?(Is everything sad going to come untrue?)”라고 묻자 그렇다는 답변이 들려옵니다.

 

“‘거대한 그림자가 떠났다.’(A great Shadow has departed.)라고 간달프가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웃었는데, 그 소리는 마치 음악 같았고(like music), 혹은 바싹 마른 땅의 물 같았다(like water in a parched land). 그리고 샘이 귀 기울이고 있을 때, 자신이 셀 수 없는 나날 동안 순수한 기쁨의 소리(pure sound of merriment)인 웃음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지금까지 알아 온 모든 기쁨의 메아리(the echo of all the joys)와도 같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그러나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달콤한 비가 봄바람을 전하고 태양이 더 밝게 빛날 때, 그의 눈물은 그치고, 그의 웃음은 솟아났으며, 웃으며 그는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일어났다. (Then, as a sweet rain will pass down a wind of spring and the sun will shine out the clearer, his tears ceased, and his laughter welled up, and laughing he sprang from his bed.)

 

‘내가 어떻게 느끼냐구요?’라며 그는 울었다. ‘글쎄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제 느낍니다. 저는 느낍니다.’ 그는 자기 팔을 허공에 흔들며, ‘저는 겨울 후 봄과 같이, 나뭇잎 위의 태양과 같이, 그리고 트럼펫과 하프와 내가 여태껏 들어 본 적 있는 모든 노래들과 같이 느낍니다!’(I feel like spring after winter, and sun on the leaves; and like trumpets and harps and all the songs I have ever heard!)”

 

이런 장면이 지니고 있는 종말론적인 함축은 거의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더욱더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여정 내내 사랑하는 동료로서 동행해 온 방랑자 아라고른이 바로 그 돌아온 왕(The returning King)입니다. 오랫동안 세상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었고, 기이한 청각과 시각의 힘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짐승들과 새들의 언어들을 이해하고 있던 존재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주권과 전지, 전능, 편재하심을 상징해 주는 존재라고 할 것입니다. 아라고른은, “자신의 모든 옛날 영역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곧 자신의 왕위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프로도와 샘이 자기 앞으로 다가오자, 처음에 그는 그들이 원래 얼마나 자기를 불신했는지 그들에게 부드럽게 상기시킵니다. 그러고 난 후 그는 놀랍고도 혼란스럽게도 그들 앞에 자기 무릎을 꿇었습니다(he bowed his knee). 그리고 “프로도는 그의 오른편에, 샘은 그의 왼편에 두고”(Frodo upon his right and Sam upon his left) 그들 손을 잡고는, 그들을 자기 왕좌로 데리고 가서 그들을 그것 위에 올려둡니다. 거기에서 그 “보잘것없는 인물” 두 명(two nobodies)이 처음에 왕으로부터, 다음에는 모든 백성들로부터 잘했다는 칭찬(Praise them with great praise!)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한 음유시인의 읊조리는 시 한 자락[“아홉 손가락을 가진 프로도와 운명의 반지” 이야기(the tale of Frodo of the Nine Fingers and the Ring of Doom)]도 듣게 되는데, 특히 샘은 거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오 위대한 영광과 광휘여! 이제 제 모든 소원이 성취되었습니다!”(O great glory and splendour! And all my wishes have come true!)라고 샘이 일어나 외치며 울기 시작하자, 모든 참석자들도 함께 웃고 웁니다. 가운데땅 모두를 육신 입은 악에게 종노릇 시키려는 사단적인 역사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온유한 자들과 순종하는 자들이 승리를 쟁취하게 되고 저 세상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짜릿하고 웅장하며 참으로 하늘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이 적절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느끼게 됩니다.

 

“반지의 제왕”에는 하나님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어른거린다는 점을 놓칠 수가 없습니다. 사실상 이 작품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는 자신을 희생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그리스도 이미지를 띤 인물(Christ figure)이 존재해왔습니다. 예컨대 사회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자신의 책 “황금가지”(The Golden Bough) 속에서 이런 인물들에 대해 거듭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도 이런 인물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르니아 연대기”, “해리포터”, “슈퍼맨” 시리즈, “배트맨” 시리즈, “어벤져스” 시리즈 등에도 이런 인물을 항상 찾아볼 수 있지요. 이렇게 보면 이 인물은 숱한 신화와 소설의 중심축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서를 읽을 때 저는 자주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극적이고 경이로운 신화나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제 머리로 짜낼 수 있는 이야기는 대충 이런 것입니다.

 

신이 온 세상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책을 시도하다가, 결국 하나뿐인 자기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것도 왕가가 아니라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갖가지 고생을 겪으며 세상 일반인들의 고초를 두루 경험하게 합니다. 신의 아들로서의 특권은 한 가지도 누리지 못한 채, 다른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에서 연단을 받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인격적으로 온전히 성숙했다고 여겨지는 어느 때에 그에게 신적인 능력과 지혜를 부여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깊은 필요들을 채워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자녀로서 걸어가야 할 정도(正道)를 세상에 가르치도록 합니다. 그러던 중 이런 사역과 가르침을 백안시하면서 그의 영향력에 시기와 질투의 시선을 보내던 세속 권력의 눈 밖에 나서, 그는 공공질서를 어지럽히고 내란을 획책한 인물로 모함받게 됩니다. 거짓 증인을 동원한 상태에서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한 세속 권력은 순식간에 그에 대한 사형을 집행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는 다시 살아나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선언합니다. 이와 동시에 아버지 신의 권력을 위임받아 불법을 자행하며 백성들을 수탈하던 세속 권력자들과 그 수하들을 죄다 처단해 버립니다. 그동안 불법하고 무도한 권력자들에게 고통당하던 백성들은 이 새로운 신의 아들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태평성대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면 이 내용이 신약의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이야기와 흡사하지 않나요? 제가 성경을 여러 번 읽었다고 해서 이런 스토리가 제게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극적이고 경이로운 스토리 속에는, 분명 우리가 그동안 읽었던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들처럼,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품은 인물과 그를 박해하고 희생시키는 세력과 그 이후 이루어질 놀라운 반전이 공유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수한 신화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품은 인물의 원형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성서는 계시하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태어나 30여 년의 생애를 보낸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그 숱한 그리스도 이미지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의 생애는 그야말로 신화가 역사적 사실이 된 사건입니다. 톨킨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간 역사의 유커태스트러피(Eucatastrophe)다. 부활은 성육신 스토리의 유커태스트러피다.”

 

그의 거룩한 면모를 다양하게 극적으로 그리고 있는 “반지의 제왕”에서 제게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왕이 된 아라고른이 두 호빗에게 무릎 꿇어 절하고 그들을 왕위에 앉힌 후 그들을 찬양하는 장면입니다. 신약 성서가 만왕의 왕으로 지칭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저 세상에서 우리를 맞아주시고 섬겨주실 모습을 암시해주는 부분이지요. 이 세상에 임하실 때도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던 예수님(마가복음 10:45)께서는, 온 천하의 왕으로 군림하실 저 세상에서도 자기 백성들의 필요를 섬기는 자로 존재하실 것(누가복음 12:37)을 저는 믿습니다. 섬기는 것이 바로 사랑이요, 사랑은 예수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즉 예수님)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2:37) 주인(즉 예수님)이 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들 것이다.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가슴 저미도록 그리워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장 속에서 참되고 은혜로우신 이런 왕과 함께 진정한 사랑을 나누며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이라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 본질이 사랑인 예수님, 지금도 이 세상을 당신의 주권과 섭리로 통치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믿고 좇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처사요 올바른 시각입니다.

 

5. 인생에는 자기만의 소명이 있다는 시각

반지 원정대원들의 원정 과정 그 자체는 신앙적인 헌신의 표지를 띠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프로도는 간달프에게서 어떤 위험에 대해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위험한 원정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 왜 내가 선택되었죠?”(I was not made for perilous quest. <...> Why was I chosen?)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그에게 간달프가 제시한 답은 이러합니다.

 

“그 이유가 다른 이들이 소유하지 못한 어떤 장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확신할 수 있을 게다. 적어도 권력이나 지혜 때문은 아니지. 그렇지만 너는 선택되었지, 그러므로 너는 네가 지니고 있는 힘과 마음과 기지를 사용해야만 해.”(You may be sure that it was not for any merit that others do not possess; not for power or wisdom, at any rate. But you have been chosen, and you must therefore use such strength and heart and wits as you have.)

 

나중에 엘론드의 회의(Council of Elrond)에서 프로도는, 웨더톱(Weathertop)에서 겪은 경험을 통해 반지유령들의 사악함을 깨닫고 자기 앞에 놓인 과업의 중요성을 온전히 인식한 후에, 고요하게 그리고 “마치 다른 어떤 의지가 그의 조그마한 목소리를 사용하고 있는 듯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록 내가 그 길을 알지 못하지만, 내가 그 반지를 가지고 가겠습니다.”(I will take the Ring, though I do not know the way.)

 

또한 이 이야기 속에는 의지라는 요소가 단순한 금욕주의(simple Stoicism)라는 요소 위에 우뚝 서 있으면서, 적어도 신앙적인 색깔을 띤 어떤 것으로 존재합니다. 프로도가 그 대의명분을 위해 진정한 헌신을 드린 것으로 인해 그와 샘이 적의 영토 안으로 점점 더욱 깊숙이 진입해 들어가면서, 자신들의 의지를 점점 더 많이 구사해야 할 필요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았습니다. 모르도르를 통과하는 전 여정은, 자신들의 안전이 자신들의 목적의 성취와 연관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안전을 고려하지 않는 헌신적인 마음의 여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멸망의 산(Mount Doom)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반지의 무게와 점차적으로 그것을 도피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프로도의 지속적인 욕구로 인해 자신의 내부에서 전투가 벌어짐으로써, 자신이 쉬운 길로 나아가도록 거듭 강요당하게 됩니다. 그 반지의 힘 중의 한 가지는 자아를 파괴시킴으로써, 그 사용자로 하여금 사우론의 영역 속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유령(wraith)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로도의 성품이 점차적으로 위대해지고 있다는 분명한 한 가지 증거는, 계속적인 신체적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유혹에 대해 지속적으로 저항하려는 그의 의지입니다.

 

반지 원정대원들처럼 우리도 각자의 삶 속에 부여된 소명이나 대의명분이 존재한다는 시각을 품고 산다면 어떤 일이 이루어질까요? 자신의 의지를 더 들여 지금보다 더 절제하면서 심지어 안전을 무릅쓰면서까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자신만의 과업이나 대상을 위해 헌신하게 되지 않을까요? 더구나 그 소명이나 과업이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장점이나 권력이나 지혜와는 무관하게 허여된 것임을 인식한다면, 그것에 대해 자만하거나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지요. 그리하여 한 눈 팔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소명과 대의명분에 충실을 기하는 것으로 삶의 보람과 가치를 찾는 복된 인생이 마련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소명과 대의명분을 결정해주는 무슨 ‘엘론드 회의’가 공식적으로 열리길 기대하긴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와 더불어 삶을 영위해가는 동안 우리 각자가 참여하는 일과 관계 속에서, 남다른 보람과 의미를 느끼며 기여하기도 하고 남다른 열정과 관심으로 기여하기 원하는 삶의 영역에 주목해야겠지요. 그리고 우리 각자를 사랑해주고 오랫동안 잘 관찰해 주신 분들이나 동료들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여야겠지요. 이런 과정들이 비공식적인 ‘엘론드 회의’가 되어 각자의 소명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경륜을 좇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유한 존재인 이상, 우리가 감당해야 할 소명이나 대의명분이 반드시 존재할 것입니다. 이 소명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시각, 그리고 그 소명대로 보람 있고 의미 있게 한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빛을 발하는 시각을 견지합시다.

 

6. 공동체 형성과 그 기능에 대한 시각

“반지의 제왕”에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빛과 어둠, 혹은 선과 악의 세력이 각각 이루고 있는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세부적으로 관찰해 보면 더욱 다양한 공동체가 눈에 띕니다. 예컨대 요정 공동체, 난쟁이 공동체, 인간 공동체, 호빗 공동체들이 존재하고 그 각 공동체 속에도 서로 다른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하게 주목받는 공동체는 반지 원정대(Company of the Rings)입니다. 원정대원은 두 명의 인간(아라고른과 보로미르), 한 명의 요정 레골라스, 한 명의 난쟁이 김리, 네 명의 호빗(프로도, 샘, 메리, 피핀)에다 지도자인 간달프를 포함해서 총 9명입니다. 왜 9명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대항해서 투쟁해야 할 대상인 반지유령의 숫자가 9명이기 때문입니다. 왜 호빗이 4명이나 포함되었을까요? 반지 운반자인 프로도와 그를 도울 샘 외에 다른 두 호빗(메리와 피핀)이 뽑힌 것은, 그들의 자원하는 심령과 그 네 명간에 존재하는 우정 때문이었습니다.

 

가운데땅의 운명이 달린 이 중대한 과업에 원정대원 절반에 해당하는 4명이 호빗으로 구성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그 시기에는 반드시 그들처럼 주목받지 않는 작은 사람들이 그 과업을 수행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간달프의 주장에 주목해 보세요.

 

“이 원정은 강한 자들만큼이나 많은 희망을 품은 약한 자들에 의해 성취될 수 있소. 사실 이런 것이야말로 종종 세상의 수레바퀴를 움직인 행동 방침이었소. 위대한 자들의 시선이 다른 곳에 쏠린 사이에, 작은 사람들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했기 때문에, 그 일을 했던 거요.”(The quest may be attempted by the weak with as much hope as the strong. Yet such is oft the course of deeds that moves the wheels of the world: small hands do them because they must, while the eyes of the great are elsewhere.)

 

마침내 프로도가, “그 길은 모르지만, 제가 그 반지를 가지고 가겠습니다.”(I will take the Ring, though I do not know the way.)라고 선언하자, 엘론드가 이렇게 말하지요.

 

“지금은 샤이어 사람들의 시간이오. 그들이 그 평화로운 들판에서 일어나 탑들과 위대한 이들의 지혜를 뒤흔들 때가 왔소. 모든 현자들 중 누가 이런 일을 예측이나 할 수 있었겠소? 그들이 현명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시간이 닥치기까지는, 왜 그들이 그 일 알기를 기대해야 하겠소? 그러나 이것은 무거운 짐이오. 너무나 무거워서 아무도 그것을 남에게 함부로 지울 수는 없소. 나는 그것을 그대에게 지우지는 못하오. 하지만 만약 그대가 기꺼이 그것을 맡아준다면, 그대의 선택이 옳았다고는 말해줄 수 있소. (...)”(This is the hour of the Shire-folk, when they arise from their quiet fields to shake the towers and counsels of the Great. Who of all the Wise could have foreseen it? Or, if they are wise, why should they expect to know it, until the hour has struck? But it is a heavy burden. So heavy that none could lay it on another. I do not lay it on you. But if you take it freely, I will say that your choice is right; <...>)

 

이렇게 형성된 반지 원정대의 여정은 그야말로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원정 과정 중의 갖가지 고비마다 그 9명 각각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어느 한 사람도 불필요한 존재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약하기도 하고(the weak) 덩치도 작아(small hands) 이런 과업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 호빗들의 헌신과 기여는, 외모로 가치 판단하는 당시와 현대의 세태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누가 가장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될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보기에 연약하고 왜소한 인물이나 공동체가 역사를 바꾸는 이루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을, “반지의 제왕”은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모로 한 개인이나 공동체의 가치를 판단하지 맙시다!

 

반지 원정대처럼 공동체는 맡은 과업이 있고 그 과업을 잘 수행하게 되면 칭송과 함께 보상도 누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라고른과 그 가문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아라고른은 이실두르 가문의 후계자인데 그 가문은 전성기가 지나고 그 후계자들의 숫자도 줄어들어 이리저리 흩어져 황야의 방랑자 혹은 사냥꾼(Rangers of the wild, hunters)처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공동체의 역할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모르도르뿐 아니라 세상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던 사우론의 부하들을 사냥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곤도르의 탄탄한 탑(stalwart tower)과 견고한 성벽(strong walls)이나 그곳 주민들의 칼로도 그 사악한 것들을 처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적들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고, 평화와 자유도 더 이상 구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실두르 후계자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들을 경멸하는 ‘스트라이더’(Strider-성큼 성큼 걷는 사람이란 뜻)라는 별명을 들어야 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바쁘게 걸어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긴 다리로 성큼성큼 돌아다닌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지요.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을 자기 일족의 임무로 알고 남모르게, 성실하게 그 일을 감당해왔던 것이지요. 이처럼 세상에 필수적인 일을 감당하고 있지만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공동체가 있다는 점은 현재 진행형이지 않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에게 허락된 은사와 능력과 기회를 좇아, 교회 공동체와 사회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영역에서 충성스럽게 기여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누가 칭송해 주든지 해 주지 않든지, 심지어 이실두르 후계자들처럼 경멸을 받는 경우가 있더라도 묵묵히 우리 각자와 우리 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길을 가면 될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 나라 향해 가는 순례의 도정일뿐이니까요.

 

“반지의 제왕”은 어느 한 위대한 인물의 업적을 기리는 찬가집이 아닙니다. 수많은 인물들이 갖가지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어 각각 그 공동체의 대의명분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대서사시입니다. 사람들, 요정들, 호빗 공동체들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심지어 나무수염이 속한 나무 공동체(Ents)도 존재하고, 바람의 왕 과이히르(Gwaihir the Windlord)가 이끄는 독수리 공동체도 등장합니다. 전자 공동체는 이센가드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후자 공동체는 자신들의 과업을 마친 후 운명의 산에 쓰러져 있던 프로도와 샘을 구출해 내는 작전을 수행하지요.

 

우리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공동체의 협업으로 인해 우리 각자의 일상이 지속되어 가는 것이겠지요. 평상시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일부 공동체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서 체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컨대 면봉, 마스크, 의료 방호복, 진단키트 및 인공호흡 장치를 제작하는 공장 공동체가 없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소위 세계 강대국들마저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게다가 끝없는 경제적 탐욕으로 산림을 벌채하고 자연환경을 훼손한 결과가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를 낳았다는 것은 이제 만인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나무수염이 자기 동족인 엔트족(Ents)을 소집하여 설득해서 사루만과 이센가드를 박살낸 이유를 기억하시나요? 사루만이 팡고른 숲 가장자리에서 나무들을 베기 시작해서 오르크들을 그 숲속으로 데리고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태를 맞으면서 우리 인류도 이제 사루만과 같이 탐욕으로 똘똘 뭉친 존재로 변해 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로 이제 자연의 역습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요. 자연 환경 보호와 회복에 대한 대 변혁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제에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의미 있는 기여를 하는 이들과 그 공동체(자연 공동체 포함)를 둘러봅시다. 그들에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이 세상에 남겨 두고 가신 것은 위대한 개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였습니다. 각 공동체 속에 약점과 허점이 수두룩해도 주님께서는 그 공동체를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고 당신의 구속 경륜을 이루어가십니다.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 이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공동체에 속한 우리 각자도 주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향해 품고 계신 놀라운 계획과 전망을 잊거나 포기해선 안 됩니다. 장차 영광스럽게 변화하여 그리스도의 신부 공동체로 서는 그 날을 바라보며, 성령께서 우리를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에베소서 4:3). 하나님께서 이룩해 주신 공동체의 형성과 그 기능에 담긴 신비를 존중하는 시각을 견지합시다.

 

7.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는 시각

톨킨이 자기 작품에 대한 비평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직접 그 작품을 읽어 가면서 발견하게 된 것은, 죽음이라는 주제가 두드러지게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톨킨은 죽음이란 결코 적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면서, “반지의 제왕”이 주는 메시지는 결국 참된 “불멸”(true immortality)을 “끝없이 연속되는 장수(長壽)”(limitless serial longevity)로 혼동하는 무시무시한 위험성이었다고 합니다. 즉 “시간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ime)와 “시간에 집착하는 태도”(clinging to Time)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며, “반지의 제왕”은 전자를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돈(confusion)이야말로 원수의 작품이며 인간적 비극의 주요한 원인들 중 한 가지라는 점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라고른(Aragorn)의 죽음과 반지유령(a Ringwraith)과를 비교해 보면 극명해진다고 지적합니다.

 

J. E. A. 타일러가 톨킨의 세계를 편집한 “The Complete Tolkien Companion”(1976)에 따르면, 아라고른은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엔 죽음을 맛보게 되지만, 반지유령(=나즈굴의 번역 표현)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모두 9명인 이 반지유령들은 원래 가운데땅의 영주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악한 행위와 행습에 빠져 살다 그만 사우론을 경배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각자에게 모든 다른 사람들을 장악할 수 있는 능력과 장수(長壽)를 주는 힘의 반지(Rings of Power)를 사우론에게 받은 후부터, 그들은 사우론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반지가 약속해준 불멸의 삶은 끔찍했습니다. 지독히 따분한 상태로 오래 지속되기만 하는 나날들, 삶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고달파지는데도 죽음이라는 위로가 거부되는 불멸의 삶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습니다. 부여받은 능력이라는 것도 오직 테러를 가하는 힘일 뿐이었고, 그렇다고 반지를 되돌려줄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결국 유령(wraths)으로 전락하여, 절대반지를 낀 자를 대항하려는 의지도 없이 죽지 못하는 영(deathless spirits)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상태로 무려 4천 년 이상을 살다 사라졌으니 이것보다 더 끔찍한 운명(fearful doom)이 또 어디 있을까요? 이들과는 다른 차원 가운데 존재하는 요정들(elves)이 '죽음'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로 부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사실상 요정들이 직면하는 유혹거리는 다른 것이라고 하지요. 그것은 바로 오래 살면서 축적한 기억이라는 짐에 짓눌려, 시간을 멈추려는 시도를 하도록 만드는 나태한 애수(哀愁)(faineant melancholy)라고 합니다.

 

이렇듯 “반지의 제왕”은 ‘끝없이 연속되는 장수(長壽)’가 아니라 참된 ‘불멸’(true immortality)을 추구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 불멸의 세계로 들어서는 길이 바로 ‘죽음’이라는 선물이라고 일러 줍니다. 그 죽음 이후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그곳에서 영원한 삶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앞에서 언급한 대로, 프로도와 샘이 아라고른 왕을 배알하러 나왔을 때 왕의 절을 받고 왕과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장면은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종말론적인 상황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태복음 25:21, 새번역)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샘과 같이, “오 위대한 영광과 광휘여! 이제 제 모든 소원이 성취되었습니다!”(O great glory and splendour! And all my wishes have come true!)라고 외치며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까요? 우리뿐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그 자리에 있던 다른 형제, 자매님들도 모두 함께 웃고 우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날이 벌써부터 그리워집니다!

 

반지 전우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묘사하는 감동적인 부분에서, 아르웬 에벤스탈(Arwen Evenstar)이 “별과 같은 흰 보석”(a white gem like a star)을 집어 프로도(Frodo)에게 건네주도록 톨킨이 묘사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 보석은 복된 왕국 자체에 대해 그녀가 지닌 권리를 상징해 주는 것으로서 분명 요한계시록 2:17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그 돌을 소유한 것의 결과는 갈라드리엘(Galadriel)과 프로도(Frodo)의 배가 복된 영원한 땅이 있는 서쪽으로 향해 나아가는 영광스러운 항해 장면을 보면 명백해집니다.

 

“배는 대양 멀리 서쪽으로 항해했다. 마침내 어느 비 내리는 밤에 프로도(Frodo)는 대기 중에서 달콤한 향기를 맡게 되었고, 물 위로 밀려드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에게는, 봄바딜의 집에서 꾼 꿈처럼, 회색 비 커튼이 죄다 은색 유리로 변하면서 원래 상태로 말려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고, 그는 재빠르게 돋는 해 아래 등장한 흰색 해안과 그것 너머에 있는 머나먼 녹색 초원을 바라다보았다.”(And the ship went out into the High Sea and passed on into the West, until at last on a night of rain Frodo smelled a sweet fragrance on the air and heard the sound of singing that came over the water. And then it seemed to him that as in his dream in the house of Bombadil, the grey rain-curtain turned all to silver glass and was rolled back, and he beheld white shores and beyond them a far green country under a swift sunrise.)

 

자신이 위험한 원정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배(聖杯, the Grail-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 쓰시던 잔)를 좇아 간 그 조그마한 호빗에게 결국 그 지복의 영광이 도달한 것입니다.

 

아무리 장수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금주에 만 60세를 맞는 제게 죽음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닙니다. 이전 우리 조상들의 평균 수명이 얼마나 짧았으면 이 나이까지 사는 것을 축하했을까를 생각해보면서, ‘메멘토 모리’할 각오를 다잡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못다 사신 생애를 하루하루 덤으로 산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앞으로 죽음이 임하는 날까지 제게 허락된 날을 계수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혜롭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엄숙하고 심각하게 여생을 보내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반지의 제왕” 속에 아름답게 묘사된 것처럼, 죽음 이후에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그곳에서 이루어질 우리 주님과의 온전한 교제와 이미 그곳으로 가 있는 사랑하는 분들과 우리 모두가 한 공동체를 이루어 누릴 영광스러운 교제를 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그 새로운 하늘과 땅으로 인도하는 문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삶은 그곳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이자, “이 세상 소풍”(천상병의 “귀천”)입니다. 이 시각을 함께 견지하시길 초대합니다.

 

-안목과 미덕 두 마리 토끼 잡기-

소설이란 세계가 독자의 심령에 말을 걸뿐 아니라 기운을 북돋워주고 인격을 고상하게 하고 저급한 생각에 도전하며 영혼에 영감을 불어넣는 능력이 있다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최상의 예가 제게는 바로 이 “반지의 제왕”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작가를 통해 역사하신 성령의 영감을 저도 함께 받아 누리며 호흡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문학 작품은 성령께서 당신의 깊은 뜻을 조명해주시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봅니다. 세르티앙즈(Sertillanges)가 말한 대로입니다.

 

“천재 작가들을 접할 때 우리는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 즉각적 유익을 누린다.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전에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우월성만으로도 유익을 끼친다. 그들은 우리의 길을 선도한다. 우리를 산정(山頂)의 공기(the air of the mountain tops)에 길들인다. 그간 우리는 저지대(a lower region)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단숨에 우리를 자신들의 대기 속으로 데려간다. 그 고매한 사상의 세계에 가면, 진리의 얼굴이 베일을 벗는 듯하고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 우리가 이 선견자들을 알고 따른다는 사실에서 성찰하게 되는 것이 있다. 결국은 우리가 다 한 인류이며, 영(靈) 중의 영(the Soul of souls)이신 우리 주님의 영(the universal Soul)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이다. 신성한 말이 터지려면 우리는, 그 성령께 자신을 맞추기만 하면 된다. 모든 영감-언제나 예언적인-의 근원에는 ”인간이 글로 쓰는 모든 내용의 처음이 되고 마지막이 되는 저자(the first and supreme author)이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Intellectual Life")

 

톨킨은 1958년에 쓴 편지에서, “반지의 제왕”을 집필하면서 의도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메시지는 없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분위기와 배경 면에서 자신이 보기에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집필하겠다는 의도는 품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특별히 계시된 진리의 비전을 설교하거나 전달할 목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취향, 사상 및 신앙이 포함되기 마련이라는 점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런 것이 있더라도 등장인물들이 그 작품의 세계관 속에서 자기들만의 삶을 통해 넌지시 그 일을 하도록 자유를 부여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풍유법(=알레고리<allegory>. 어떤 이야기 전체를 비유적 의미를 담는 그릇으로 삼는 수사법. 은유법과 비슷하지만, 은유는 한 단어나 문장을 활용하는 데 반해 풍유는 이야기 전체를 활용한다는 데 그 차이가 있음.)이 동원된 소설이나 이야기를 싫어했습니다. 너무 노골적으로 도덕과 종교적 진리를 교훈하고 선전하는 경우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톨킨이 설교를 하는 대신 이야기를 창조하는 데 전력한 것도 바로 이런 시각이 작용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알레고리를 싫어한 톨킨도 알레고리(allegory)와 적용가능성(applicability)은 구분한 바 있습니다. “독자의 자유 속에서 후자를 볼 수 있고, 작가의 지배하려는 의도 속에서 전자를 볼 수 있다.”(The one resides in the freedom of the reader, and the other is the purposed domination of the author.) 이런 정신으로 마크 에디 스미스는 “반지의 제왕”을 통해 발견하고 누릴 수 있는 미덕들로서 우리 삶 속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을 30개(예컨대, simplicity, generosity, friendship, faith, community, sacrifice, failure, humility 등)나 자기의 책(“Tolkien's Ordinary Virtues”, 2002)에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번 글에서 시도해 본 ‘시각 재정립’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반지의 제왕”을 읽는 과정은 일상생활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주요한 안목뿐 아니라 우리가 평생 계발하고 누려가야 할 미덕도 함께 함양되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셈입니다. 안목과 미덕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흥미로운 독서 활동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