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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시(時)-장기적 시간 관점을 품으라

인생3막과 머리 염색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2. 14.

인생3막과 머리 염색

올해는 제가 환갑을 맞는 해입니다. 음력 6월 1일이 되면 만으로 60세가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환갑잔치하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그동안 연령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진 듯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요즘 65세부터 노인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때부터 기초연금을 수급받고 지하철도 무료도 승차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으로 보아서입니다. 그렇지만 UN이 지난 2015년에 제안한 새로운 연령 기준은 우리나라와 한참 차이가 납니다. 이 기준은 0-17세는 ‘미성년자’(underage), 18-65세가 ‘청년’(youth/young people), 66-79세가 ‘중년’(middle-aged), 80-99세가 ‘노년’(elderly/senior), 100세 이후는 ‘장수노인’(long-lived elderly)으로 나눕니다. 이전의 연령 구분과는 달리 현재 세계인들의 건강 상태와 평균 수명을 고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기준에 따르자면 저는 아직 중년도 아닌 청년인 셈입니다.

 

작년에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방한해서 인터뷰하면서 던진 인상적인 말도 이 연령대 구분을 고려해보니 납득할 만했습니다. 현재 82세인 그에게 가장 좋았던 때가 70-80세였다는 것이었습니다. 80대인데도 많은 강의나 인터뷰를 거뜬하게 소화하면서 끝도 없는 지식과 지혜를 풀어놓는 것을 보며 경탄해마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 인생의 황금기인 중년을 막 통과한 연령대에 놓인 셈입니다. 올해 100세를 맞는 김형석 교수도 언젠가 자기 인생의 전성기가 60-75세까지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지요. 친구였던 김태길 교수나 안병욱 교수도 동의했던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분들도 역시 인생의 청년기와 중년기의 황금시대를 언급한 셈입니다. 60세 이전까지는 모든 면에서 미숙했다고 김 교수님이 고백한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아직도 청년기에 불과한 시기이니까요.

 

올해를 포함해서 아직 6년이나 남은 ‘청년기’를 어떻게 보내야할까를 묵상하던 중 먼저 떠 오른 생각이 2년 전 귀국한 이후에 머리 염색하지 않은 게 지혜로운 결정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제게 머리 염색하기 권하는 분들이 여러 분 계셨습니다. 이제 인생3막을 준비하는 제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영역에서든 활동하려면 백발로는 곤란하다는 점을 고려해서였습니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나이 든 사람들 뿐 아니라 거리에서 마주치는 60대 이상의 남성들 가운데 검은색 머리를 하고 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은 걸 보면 타당한 제안이었습니다. 작년에 기간제 교사직을 지원하느라 서류를 준비하는 중에 들린 한 복사점 주인아주머니(혹은 할머니)도 같은 맥락의 권고를 해 주었지요. 제가 그 집을 자주 들락거리니까 궁금해서인지 무슨 자료를 준비하는 중이냐고 물어왔습니다. 기간제 교사 지원 중이라고 했더니 잠시 후에 한 마디 해 주셨습니다. 합격하려면 머리 염색부터 하라고. 그래야 잘 보아줄 게 아니냐고. 또 잠시 후에 제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지셨습니다. “빽 있습니까?” 이 질문을 듣고 제가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네, 항상 갖고 다니는 빽 하나 있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일갈이 떨어졌습니다. “그 빽 말고 다른 빽요!” 그 ‘빽’이 없어서였는지 무려 서른 군데 이상 넣은 지원서가 효력을 본 곳은 단 한 곳뿐이었고 그것도 들러리로 면접할 기회를 얻는 데 그쳤습니다. 머리 염색해서 머리가 새카만 사진을 지원서에 붙였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요?

 

제가 말레이시아에서 교수로 임용된 게 45세였는데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흰머리가 희끗희끗 난 정도였습니다. 그 후로 해가 갈수록 계속 머리카락은 백발로 변해갔습니다. 아마도 유전적인 요인(어머님 쪽)에다 격심한 스트레스가 가중된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는 흰머리 때문에 신경 쓸 일이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생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분위기가 전반적일 뿐 아니라 아직도 노인을 공경하는 분위기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흰머리 때문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귀국해보니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노인들이 염색한 검은 머리를 하고 있는 통에 염색하지 않은 저 같은 이들이 눈치가 보이는 경우를 자주 접하곤 했지요. 지금은 덜하지만 길을 걸어갈 때면 저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을 느낄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압박감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본 결과 머리 염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우선은 백발을 노쇠의 상징으로만 보고 젊음의 미(美)만 찬양하는 우리나라의 사회적 통념이 잘못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유전적 성향과 인생 진행시기에 맞게 드러나는 흰 머리는 자연스러운 모습인데도 이를 백안시하는 분위기는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이런 현상은 “신체적 노화에 불안과 강박을 느끼면서 그것에 역행하고자 하는 욕구”나 “늙고 싶어 하지 않는 현대인의 욕망과 건강, 활력에 대한 압박감”의 표출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연스러운 자신의 외모를 수용한 후 이를 자연스럽게 가꾸어가는 한편 내적인 성품과 역량을 계발해가는 데 역점을 두어 평생 공부하고 수양하는 대신, 무리하게 외모에 손을 대서라도 아름답고 젊게 보이려는 노력은 지나친 한편 내적인 면모를 가꾸는 일에는 소홀하기 이를 데 없는 현 세태를 좇아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젊음과 건강을 우상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적지 않습니다.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표방하는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신영전 교수가 지적한 대로 “‘건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질병이나 장애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온존(well-being)한 상태”인 ‘건강’(Health is a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세계보건기구의 정의)을 누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비판한 대로 이 건강의 정의는 “불완전하게 태어나 불완전하게 살다 종국에는 죽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무시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이 ‘완전한 건강’이란 신화의 피해자들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 많은지 모릅니다.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건강의 잣대로 재고 신경 쓰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새로운 건강식품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 나오고 건강 산업이 날로 비대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완벽한 건강을 드러내 주는 완벽한 얼굴과 몸매를 만들기 프로젝트가 우리나라 곳곳에서 성행 중입니다. 이런 건강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그와는 반대로 “노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노년을 이질적 타자로 간주하고 사회에서 배제하는 차별적 시선”으로 확대됩니다.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이 그토록 애용하는 ‘꼰대’라는 표현도 사실상 “나이를 기준으로 한 정형화된 생각과 혐오”가 상당히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완벽한 건강이라는 신화와 외모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사회가 내적인 성찰을 중시하거나 인격적인 성숙을 도모할 리가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이 회자된 지 오래지만 이 문구는 사실상 원래 문맥과 다른 의미로 알려져 있지요. 운동을 통한 신체 단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아니라 강건한 신체만을 추구하면서도 정신적인 단련을 소홀히 하는 태도를 경계한 것이 원래의 의미였습니다. 이 문구는 로마 시대에 유베날리스가 자신의 풍자 시에서 사용한 것인데 그 완전한 문장은,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까지 깃들기를 기도하라”였습니다. 당시 수많은 로마인들이 육체적인 단련을 위해 목매는 상황을 풍자하는 상황에서 내적 품성과 인격을 갈고닦는 데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권고한 것이지요.

 

머리 염색하지 않은 다음 이유는 흰 머리가 신체 노화를 상징하긴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쌓인 연륜과 전문성을 드러내는 삶의 훈장으로 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이 동의하는 영역입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16:31), “젊은이의 자랑은 힘이요, 노인의 영광은 백발이다.”(잠20:29-새번역) 노인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인정해온 보편적인 도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다양한 연령대 가운데 노인만을 특별히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됨 자체가 지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노년을 포함한 그 인생의 여정 모든 부분이 각각 고유하고 독특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입니다. 더구나 평생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한 그들(부모를 포함하여)을 존중하지 않고 그들이 쌓은 경륜과 지혜를 무시하는 사회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습니다.

 

그런 지점을 인정하더라도 로마에 가서는 로마인이 하는 대로 해야 한다(이제 한국에 살고 있으니)며 머리 염색하기를 종용하는 이가 있었지만 그 말은 어디까지나 참고하라는 금언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물에 휩쓸려 가는 통나무가 되지 말고 물을 거슬러 가는 작은 물고기가 되라는 금언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연로한 사람들이 나이 든 사실을 숨기고 더 젊다는 점을 피력하려고 애를 쓰지만 과거에는 젊은이들 중에 자기가 너무 동안이라 손해 보는 것 같아 조금이라고 나이 들어 보이려고 애쓰는 이들이 많았던 때도 있지 않았나요? 우리나라 노년층의 머리 염색은 그저 노인을 폄하하고 차별하는 불건전한 사회적 이목을 의식해서 빚어진 추세일 뿐이라고 봅니다. 말레이시아의 예를 들었지만 서양인들의 경우를 주목해보십시오. 그들 중 머리 염색한 이들이 있긴 하겠지만 우리처럼 대다수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백발을 자연스러운 인생 여정의 한 현상으로 이해할 뿐이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늙음을 방치한 듯한 흉한 백발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단정한 머리 스타일이 적절한 패션과 겸하면 흰머리도 매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머리 염색하지 않기로 한 마지막 이유는 스스로도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날마다 상기하면서 남도 일깨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세 달쯤 전인 지난 해 11월 초 부산에서 열린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1979년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만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마음을 같이 하는 동창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졸업한 이후에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들의 얼굴을 반갑게 접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여럿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특히 고교 시절 학생회장을 맡았던 절친이 그동안 벌써 세상을 떠 동석하지 못한 점이 그렇게 애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교 시절 그토록 팔팔했던 친구들 중에 암 투병하고 나서 몸을 추스르는 중에 있는 이도 눈에 띄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라는 공동의 인식 위에서 개인과 사회의 삶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동창회 만찬이 만일 과거 오래 전 이집트에서 거행된 것이라면 아마도 그 잔치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흥이 무르익었을 때쯤엔 하인들이 들것에 해골을 담아 연회장 탁자 사이를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이런 정경을 기록에 남긴 헤로도토스가 당시 사람들이 죽음을 연상시키는 이런 행동을 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설명하지는 않지만, 죽음을 상기하는 가장 큰 효과는 우리 눈앞의 일들로부터 가장 중대한 일로 시선을 옮겨준다는 데 있지 않을까요? 지난 2005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졸업식 연설을 하던 스티브 잡스가 강조한 마지막 대목인 죽음의 효용성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췌장암 진단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적이 있던 그가 남긴 혜안이었지요.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거의 모든 것들, 즉 모든 외부적인 기대, 모든 자만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모든 두려움이 일시에 사라져 버리고 참으로 중요한 것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안목이나 판단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임박해 있기에 자신의 인생이 짧다는 것과 이미 벌거벗은 상태인 자신의 처지에 눈을 뜨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 대신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를 용기를 가지라는 권면인 셈이었습니다.

 

다른 이의 백발을 접할 때마다 제 인생의 종말이 다가왔다고 자각하게 되고 제 백발을 다른 이가 볼 때마다 그들도 죽음에 대한 채비를 점검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추한 늙음 대신 품위 있는 늙음, 아름다운 늙음이 자리 잡아야겠지요. 결국 저로서는 품위 있고 아름다운 늙음을 지속하기 위해 애써야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안목은 신경 쓰지 않는 게 절실합니다. 제가 아무리 품위 있고 아름답게 행동한다고 해도 다른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조종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인생의 불행은 다른 이의 안목을 의식하여 내 길을 포기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아무도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실패한, 모든 사람의 마음 얻는 일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애처로운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