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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성경 메시지에 대한 회교도들의 이해도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5. 13.

성경 메시지에 대한 회교도들의 이해도

올해 라마단이 지난달 23일에 시작하여 이번 달 23일에 마감됩니다. 해 뜬 후부터 해 지기까지 하루 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침도 삼키지 않은 채 진행하는 회교도들의 금식월입니다. 모쪼록 이 기간 동안 전 세계 18억 명이나 되는 회교도들을 기억하고 기도해주시면서, 그들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계기가 되길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기도하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회교도들이 성경과 그 메시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시사해 주는 글을 한 편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십여 년 전(1998.12.16.)에 제가 작성한 기도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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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간동안 제 마음을 아프게 한 책이 한 권이 있습니다. 이 책은 어느 회교도 젊은이가 제게 한번 읽어보라고 빌려준 것인데, 여러 번 소개를 받았기에 선뜻 한 번쯤은 읽어볼 마음이 있었던 책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이곳 언어로 번역된(원래는 우르드어로 쓰인 것) “이사벨라”라는 제목의 종교 소설이었습니다. 이 제목만 보면 무슨 애정 소설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내용은 이 책의 표지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로, 기독교와 회교의 비교 종교 연구에 근거한 신앙적인 내용의 책이었습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그 옛날 스페인 ‘코드로바’에 가톨릭 지도자의 딸인 ‘이사벨라’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진리를 탐구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허위성에 좌절하고 회교의 진실성에 감복하여 결국 회교도로 개종한 후, 회교에 정통한 학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회교로 이끌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회교 지도자와 가톨릭 지도자들과의 종교 논쟁과, 회교도가 된 이사벨라와 한 기독교 여성 지도자와의 종교 논쟁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을 많은 회교도들이 읽고 권할 뿐 아니라, 이 책의 왜곡된 내용에 의해 기독교를 이해하면서 자기네 종교의 편협한 틀 안에서 안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어 본 책 가운데 이 책만큼 괴로움을 준 책이 또 있을까를 지금도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이 책의 거의 매 페이지마다 회교도의 꾸란과 그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찬양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의 기독교(가톨릭) 지도자들의 무지와 무능력 및 불경건한 태도가 곳곳에서 배어 나왔을 뿐 아니라(어느 정도는 사실일 수 있겠지요), 회교도들이 교묘하고도 기만적인 방법으로 성경의 내용을 왜곡시키고 흠잡으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 영광을 탈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개종한 인물들이나, 자기네 종교 지도자들의 기만에 속아 넘어 간 상태에서 기독교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내내 지녀온 회교도들이 불쌍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이 과정 가운데 온 세상의 왕으로 세세토록 영광 받으셔야 할 우리 주님께서 겨우 무함마드를 위한 조연급으로 전락해 버린 이 눈앞의 현실을 보며 마음에 이는 분노를 어떻게 억제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책 저자는, 성경에 입각하여 기독교를 이해하는 시도를 한다는 거창한 명목에도 불구하고,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일반 기독교 이단들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고 왜곡시키는 전통적인 방법들을 총동원하고 있었습니다. 각 항목에 해당되는 예를 아래와 같이 한두 가지씩만 들어보았습니다.

 

-성경을 미끼로 사용함(The Biblical Hook)

구원의 길은 죄의 용서가 아니라 선행에 의해서라고 하면서, 그 증거로 누가복음 1:6, 마태복음 16:27, 마태복음 19:16-20을 인용함. 그것도 마지막 것은 21, 22절은 생략한 채. 그러나 다른 것 말고도 그 두 구절만 보면 구원의 길(예수님을 좇음)이 명백해 지는 것을.

 

-문맥의 조작(Collapsing Contexts)

도덕과 정의를 구현하는 회교와는 달리 기독교에서는 한 가지 측면만 강조하고 있다면서, 범죄 행위는 처벌되지도 않고 누가 왼편 뺨을 치면 오른편 뺨도 얻어맞도록 내놓아야 하는데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이런 것을 따를 수 있겠냐고 함. 그러나 왼편과 오른편의 순서를 바꾼 것은 애교로 봐주더라도, 마태복음 5:39 하반절의 문맥에 어디 이런 내용이 있단 말인가? 악(악한 사람)에 대해서, 보복하는 심정을 품지 말고(Total nonretaliation) 자연적인 반작용(Reaction)이 아닌 경건한 반응(Response)을 보이는데 주도권을 쥐라는 의미가 아닌가? 어디 또 얻어맞기 위해서 다른 편 뺨을 돌려 대라고 되어 있는가?

 

-주위의 문맥을 무시함(Ignoring the Immediate Context)

마태복음 27:3 이하와 사도행전 1:17 이하를 비교하면서, 가룟 유다가 종교지도자들에게 그냥 돈을 돌려 준 것과 밭을 산 것,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과 곤두박질하여 창자가 터져 나와 죽은 것과 같은 기록의 차이가 왜 있는가라고 하면서 반박함.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분명히 나중에 그 돈으로 밭을 샀다고 되어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이 저자가, 어찌 목매어 죽은 것과 곤두박질해서 창자가 터져 나와 죽은 것의 연관성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선택적 인용(Selective Citing)

예수님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보내진 선지자에 불과하다면서, 가나안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중 마태복음 15:24만 인용하고 나중에 그녀의 딸을 치유한 사실은 지적하지 않음. 논쟁하던 기독교인이 마가복음 16:15을 언급하면서 반박했을 때, 개종한 이사벨라는 16:9 이후는 나중에 기독교인들이 조작한 것이라면서 일축해 버림. 그러나 이것은 조작이 아니라 사본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당위성은 이미 마가복음 13:10, 13:27에 제시되어 있는데도 이 저자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음.

 

-비유적 표현의 문자적 해석(The Figurative Fallacy)

창세기 2:2-3에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말은 당신께서 피곤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피곤하실 수 있냐고 공격함. 기가 막혀 할 말이 없음!

 

-불충분한 증거 제시(Inadequate Evidence)

역대하 22:2-3과 열왕기하 8:25-26을 비교해서 나타난 숫자상의 불일치와 같은 예<다섯 경우 제시>를 들면서 너무나도 많은 상이점이 성경에는 존재한다며 성경의 허위성을 논증함. 그러나 사실상 이런 몇 가지 사소한 숫자상의 차이점이 도리어 성경의 온전한 보전을 위한 노력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 못함.

 

-정의의 혼란(Confused Definition)

아담도 선지자라는 주장. 예수님의 기적은 의심스럽고 꾸란의 존재는 기적이라는 주장.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의 의미. 삼위일체가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는 뜻이라는 강변.

 

-명백한 추론인양 가장함(The Obvious Fallacy)

논리적인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명백히’, ‘의심할 여지없이’, ‘조금도’, ‘한 마디도’, ‘난센스’ 따위의 말들을 자주 언급함. 예컨대 기독교 내에는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또는 기독교 내에는 노예해방에 대한 언급이 한 마디도 없다는 언급. 그러나 이 주장은 갈라디아서나 빌레몬서에 대한 저자의 무지의 고백일 뿐.

 

-성경의 권위 무시 및 보충(Rejecting and Supplementing Biblical Authority)

성경이 유대인들에 의해 변질되었다는 고질적인 주장을 수도 없이 거듭하면서, 구체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오직 꾸란만이 진리의 시금석이라고 함.

 

그러나 그 중 가장 심각한 기만은, 성경 저자의 정신에 입각해서 그 내용을 파악하고 특정 구절과 적합한 문화적, 지적 준거 안에서 글쓴이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를 주목하지 않고, 초지일관하여 자신들의 세계관으로서 성경을 해석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에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니신 분이 되실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고, 자신의 죄는 자신만이 져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짊어질 수 있는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우리 주님의 영광스러운 탄신일이 다가오는군요.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해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우리 주님께 다함없는 감사를 드리며, 오직 주님과 주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알지 못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깨닫게 된 복(마태복음 11:27)으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아울러 그 옛날 바리새인들과 같은 소경 된 인도자들(마태복음 23:16)의 그릇된 인도와 자신들의 굳어진 마음과 불의를 좋아하는 죄된 태도(에베소서 4:18, 데살로니가후서 2:11-12)로 말미암아 진리를 믿지 않고 있는 회교도들을, 우리 아버지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계속 중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곧, 당신의 영광스러운 복음으로 이들을 불러 주시고(데살로니가후서 2:14), 이들의 눈을 열어 주시어 “진리가 내미는 사랑의 손길”(데살로니가후서 2:10)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역사가 이 회교도들이 사는 곳곳에서 전개될 수 있도록 기도의 줄을 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의 복음은 바로 고국에 계신 믿음의 동지들과 함께 더불어 우리가 전해야 할 영광된 소식(데살로니가후서 2:14)임을 다가오는 새해에도 명심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어렵고 고단했던 지난 일 년 동안에도, 변함없는 성실하심으로 부족한 저희들과 함께 동역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