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전쟁: 모든 악은 사탄에게서 비롯된다?
작금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교만한 우리나라 사람 심판, 시진핑 심판, 신천지 심판, 동성애 심판, WCC 참여 심판, 생태계 교란 심판 등 다양합니다. 본 블로그 글 중 “고난: 자연재앙과 질병은 하나님의 심판이다”에서 말씀드린 바 있지만, 복잡다단한 인생사를 인과응보 혹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비성서적인 독단적인 태도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비열한 위로자들”, “무가치한 의사들”, “거짓말쟁이”로 매도할 뿐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 없다”라고 하시며 엄히 꾸짖으실 것입니다. 피조물이요 백성이며 종의 자리에 놓인 자기 분수를 깨닫지 못하고 창조주시요 왕이시며 주님 되신 하나님 자리에 앉아 모든 세상사를 판단하려는 그들의 오만 때문입니다.
자기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자기에게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때마다 하나님의 벌(즉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라고 말한 어느 목회자가 옳습니다. 그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때는 자기가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고 당신께 순종했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지난날에 평탄하고 형통한 삶을 누린 게 자기가 하나님께 복 받을 순종의 삶을 영위한 덕분이라고 판단하는 교만한 태도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들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침범하기 전에 별 탈 없이 잘 산 게 과연 하나님의 심판 받을 일이 없어서였을까요? 우리의 언행에 따라 하나님께서 즉각 심판하신다면 현재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이런 교만한 태도와 맞먹는 혼미한 시각도 왕왕 퍼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마귀의 짓”이라고 지목하는 것이지요. 주로 현재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어 곤경에 빠진 신천지에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들만이 그런 주장을 펼치는 게 아닙니다. 인생사 가운데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지거나 예기치 않았던 질병이 생길 때 이렇게 진단하거나 이렇게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더구나 대인 관계 속에서나 자기 속에서 그릇된 생각이나 감정, 혹은 덕스럽지 못한 말이나 행동이 튀어나올 때조차도 사탄 혹은 귀신을 들먹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실상 이런 사례들이 소위 “영적 전투”라는 주제와 연관된 것입니다.
-환경적인 악-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악을 환경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주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악이 전자라면, 우리가 도덕적 책임을 지고 선택한 것에 의해 생기는 악이 후자이겠지요. 예컨대 천연재해나 박해나 질병은 전자에 속하고 살인, 절도, 간음, 거짓말과 같은 갖가지 죄악된 언행들은 후자에 속합니다. 우선 환경적인 악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환경적인 악이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일까요? 환경적인 악을 물리적인 것과 질병으로 나누어보겠습니다. 먼저 물리적인 악이 사단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복음서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과 연관된 물리적 방해에 대해서도 사단의 역사라고 기록된 부분이 없습니다. 다만 데살로니가전서 2:18 정도의 기록이 등장할 뿐입니다(“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질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신 사례들을 잘 살펴보면, 귀신 들린 것을 치료한 것 제외하고는 병과 사탄과의 연관성에 대한 기록이 전무합니다. 사실상 누가복음 7:21이 언급하는 대로, 사복음서는 육체적인 질병과 귀신 들린 경우를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At that very time He cured many people of diseases and afflictions and evil spirits; and He gave sight to many who were blind.)
그렇다고 이런 성경적 사례들이 환경적인 악 속에 사탄이 개입할 수 있다는 개연성마저 부인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가 하도 엄청난 것이라 그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육체에 사탄의 가시를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Because of the surpassing greatness of the revelations, for this reason, to keep me from exalting myself, there was given me a thorn in the flesh, a messenger of Satan to torment me--to keep me from exalting myself!)
그것이 ‘육체에 가시’라고 되어 있으니, 아마도 그것은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공동번역)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에게 생긴 특정한 병을 “사탄의 하수인”(새번역)으로 일컬은 것은 그야말로 사도 바울에게 적용된 특정한 사례에 불과합니다. 이 병의 특이점을 깨달았기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다가, 약한 데서 온전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그 약점을 자랑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8-10). 즉 기도하는 과정 외에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의학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은 것이지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병이 생겼을 경우에는, 디모데에게 제안한 것처럼 약이나 의학 처방을 쓰도록 권면했습니다.
(디모데전서 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No longer drink water exclusively, but use a little wine for the sake of your stomach and your frequent ailments.)
이렇듯 특정한 경우 외에는 환경적 악과 사탄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이 침묵을 지키는 부분에 대해 추측을 덧붙이면서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월권행위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수 있는 권리나 의무가 없습니다. 다만 “모른다는 태도”(agnostic attitude)를 취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교조적인 태도”(dogmatic attitude)를 취하면서라도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존 스토트의 권면). 비이성적이고 독단적인 태도를 상찬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에 주목하고 그것을 선양하며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점을 밝히 드러내어 주는 성경 말씀이 바로 신명기 29:29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우리의 것을 구분하는 지혜를 발휘합시다. 피조물의 도를 넘지 말고 겸허하게 우리 자리를 지킵시다.
(신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The secret things belong to the LORD our God, but the things revealed belong to us and to our sons forever, that we may observe all the words of this law.)
-도덕적인 악-
환경적인 악을 사탄 탓으로 돌리는 것이 문제가 있다면, 도덕적인 악은 어떠할까요? 이 경우 역시 사탄이 그 주된 원인이라고 언급하는 사복음서의 계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도덕적 악은 우리의 내적인 욕심을 통해서 비롯된다고 지적하는 성구가 부지기수입니다. 예컨대, 음욕(마태복음 5:28), 불건전한 눈(마태복음 6:22-23), 갖가지 욕심(마가복음 7:17-23), 물질적 부에 대한 욕망(마가복음 19:16-30<부자 청년>; 누가복음 12:13-21<어리석은 부자>; 마가복음 12:1-12<악한 농부>), 불신앙(마가복음 6:6), 마음에 쌓은 악(누가복음 6:43-46) 등이 죄다 도덕적인 죄악들의 원천이라고 성경은 밝히 계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탄이 특정한 도덕적 악의 원인이 된다고 암시하는 구절도 좀 눈에 띄긴 합니다. 예컨대, 예수님께 간하는 베드로에게 당신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 것(마태복음 16:23), 사탄이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다는 것(누가복음 22:3-6; 요한복음 13:2), 사탄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했다는 것(누가복음 22:31-33) 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도 사탄의 역할은 각 제자들의 내적인 욕심과 병행하여 제시되어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잠시 묵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겪으실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이야기할 때 그가 예수님을 꾸짖은 사건(마태복음 16:22의 “간하여”는 “꾸짖어”의 의미임) 배후에는 사탄이 역사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책임이 없을까요? 성경은 당시 그가 하나님 일 대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증언해줍니다(마태복음 16:23).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누가복음 22장과 요한복음 13장과는 달리,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과 연관된 다른 관련 구절(마태복음 26:14-16; 마가복음 14:10-11)에는 사탄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의 내적 욕심이 한몫했다는 의미지요. 사실상 그는 예수님 사역단의 돈 궤를 관리하면서 그 속에 있는 것을 훔쳐가는 도적(요한복음 12:6)으로 묘사될 정도로 재물에 욕심 많은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팔 때에도 그 대가로 얼마나 줄 것인가를 흥정했을 정도니까요(마태복음 26:15).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의 제자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자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마가복음 14:50). 한편으로는 사탄이 그들을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한 결과였지만 예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꺾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주심으로써 그가 회복되어 다른 형제들을 굳게 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신의 십자가 구속과 부활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3년 내내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와 당신의 역할에 대해 누차 말씀해주셨으나, 메시야에 대한 기존 관념에 사로잡힌 채 그들은 그 진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누가 크냐를 따지고 있었을 뿐입니다(마가복음 9:30-35). 이런 그들이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한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사탄의 역사만이 주된 원인이 아니었지요.
(막9:30-35)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쌔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이렇듯 도덕적인 악의 원인에 대해서도 성경은 우리의 내적인 욕심에 주목하고 있지, 사탄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자신의 마음을 살펴 올바른 도덕적 선택을 해야 할 책임에 무게를 더 두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특정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태복음 23:33)라고 일컬은 점이나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요한복음 8:44)라고 원색적으로 지목하신 사례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이들의 도덕적이고도 영적인 죄악이 사탄의 영향력을 지대하게 받은 결과였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대목입니다. 사실상 이런 시각은 요한복음뿐 아니라 다른 서신서에서도 자주 발견됩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사도행전 26:17-18)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고린도후서 4:3-4)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에베소서 2:1-3)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즉 인간의 실존이란 사탄의 지배 하에서 눈이 멀고 마음이 혼미한 상태에 있으며 사탄의 뜻대로 살아가는 형편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님의 은혜로 눈이 뜨여져, 복음의 빛을 통해 그리스도를 뵙게 됨으로 당신을 모시고 거룩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즉 이제 인생이라는 무대 가운데 서 있는 존재는 하나님과 교제, 교통하며 살아가는 우리 각자인 것입니다. 무대 뒤쪽에 여전히 사탄이 서 있긴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조연에 불과합니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우리의 내적 욕심에 충동질하여 자기가 도덕적인 주권을 장악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내적인 욕심에 주의하면서 사단을 대적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영적 전투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영적 전투의 길-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성경은, 환경적인 악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사탄과 연관 짓는 경우가 아주 드물거나 그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악에 대해서는 그 원인으로 주로 인간의 내적인 욕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런 정보는 영적 전투를 감당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먼저 환경적인 악 중 물리적인 것에 대해서 사탄 탓을 해서는 안 되며, 일반 질병에 대해서도 사탄을 대상으로 전투를 벌여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일반 질병에 대해서, ‘병마야 물러가라’라고 명령하는 것은 성서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지요. 허공에다 지르는 고함에 불과할 공산이 큽니다. 그 대신 적용할 수 있는 건전한 질병 치유 지침을 야고보 사도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야고보서 5:14-16).
(야고보서 5:14-16)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데이비드 포울리슨은 이 말씀을 석의하면서 질병에 대한 성서적인 치료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첫째, 열정적인 기도(fervent prayer)가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구절 속에 기도와 연관된 표현이 네 번씩이나 등장하지요.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도록 자비를 구하며,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열심히 믿음의 기도를 하라는 것이지요. 둘째, 최고의 의료(the best available medicine)를 결합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와 연관된 원리입니다. 마가복음 6:13(“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에서처럼 여기 등장하는 ‘기름을 바르다’(anointing with oil)라는 표현은 의식적인 목적을 띤 것이 아니라 치유 효과를 의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의학적 원인과 치료책을 상세히 조사하고 주의 이름으로 적용하라는 것이지요. 셋째, 지혜로운 상담(wise counsel)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환경적인 악은 죄를 표면화하는 경우가 자주 있을 뿐 아니라, 질병이 때로는 상담을 필요로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역경을, 은혜 안에서 지속적으로 회개하고 성장하는 계기로 바꿀 수 있도록 목회 상담을 받으라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도덕적인 악을 처리하는 차원에서는 인간의 내적 욕심의 작동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물론 기본적인 문제는 그 내적 욕심과 연동되어 있는 사탄의 역사에 대적하는 일입니다. 예컨대,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11절)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서 4장에서 사도 야고보는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7절)라고 명령합니다.
사탄의 역사에 대적하는 구체적인 지침으로서, 에베소서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의존, 하나님의 말씀 사모 및 열렬하고 집중적인 기도라는 항목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6:14-18).
(에베소서 6:14-18)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쥐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공동번역 정리)
야고보서의 경우에는 회개와 하나님과의 동행 및 순종이라는 영역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4:7-10).
(약4:7-10)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즉 도덕적인 악을 극복하는 길은, 대인관계나 자신 속에서 드러난 악한 생각이나 감정이나 언행을, 사탄 혹은 귀신의 역사로만 여긴 채 “사단아 물러가라, 귀신아 떠나가라”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에 의존하면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당신과 긴밀하게 교제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죄악된 언행을 회개하고 당신의 뜻에 겸허하게 순종하는 데 존재합니다. 포울리슨이 지적한 대로입니다. “악의 세력과의 영적 전투는 엄습하는 어둠 가운데서 어둠으로부터 나와 빛으로 향하는 지속적이며 반복적인 돌이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회개, 믿음, 순종으로 영적 전투에 임해야 합니다.”(Spiritual warfare with the power of evil is a matter of consistently and repeatedly turning from darkness to light in the midst of assailing darkness. Christians fight spiritual warfare by repentance, faith, and obedience.-"Power Encoun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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