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두세 사람이 모이면 교회다?
최근 들어 제게 여러 번 전화 통화해준 한 대학 후배는 몇 달 전부터 서울에 있는 ‘지방교회’에 출석하면서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전에 몸담고 있던 선교 단체나 교회에서는 도무지 경험할 수 없던 “몸의 실행”을 누리고 있다면서 연일 감격하고 있습니다. 이 지방교회는 와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시작한 모임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요. 한 동안 이단적인 단체라고 해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언젠가 미국 풀러 신학교에서 그 단체에 이단성이 없다는 점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그 사역이 더욱 힘을 얻게 된 형국이 된 듯합니다. 그 발표 자료를 접할 기회가 없어 어떤 점에서 이단성이 있었다고 보았고 그 사항들이 어떻게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후배가 읽어보라고 보내준 책에 근거해 보면 여전히 무리한 성서적인 시각이 몇 가지 눈에 띄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누차 강조하는 바로 그 “몸의 실행”, 즉 그들이 누리는 풍성한 말씀의 교제와 깊이 있는 사랑의 교통에 관한 간증은 부러운 대목이었습니다.
그와 전화 통화로 교제하면서 계속 든 생각은 현재 많은 우리나라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그 지방 교회라는 공동체가 도전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그 문제는 “성령의 임재와 풍성한 말씀을 누리면서 진행되는 역동적인 성도 간의 교제와 성령께서 주도해 가시는 성도들의 능동적인 일상 사역”이 우리나라 교회에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근원적 차원의 문제에 비하면 예컨대 명성교회, 사랑의교회 사태는 그런 본질적 문제의 증상일 뿐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수년 간에 걸쳐 사회적 파장까지 몰고 온 중대한 기독교계 문제들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 가운데 포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문해 봅니다. 목회자가 일방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는 예배(주일 예배, 수요 예배, 새벽 기도회 등)를 제외하면 성도들 간에 주중에 묵상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면서 영적 교통과 성숙을 누리는 교제가 희귀할 뿐 아니라 성도들이 은사를 따라 각자의 삶의 현장 속에서 능동적으로 사역하는 것의 진가를 인정하고 지원해주지 않는 교회의 존재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교회의 의미>
먼저 교회란 용어의 의미를 한번 점검해 보면서 이 논의를 좀 더 전개해 볼까 합니다. 교회에 대해 언급하면서 두 사람 이상이 모이기만 하면 그 자체가 교회가 된다고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봅니다. 심지어는 우리 각자가 교회라면서 교회의 소명을 다해야 한다고 언급하는 경우도 간혹 접합니다. 아마도 전자의 오해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라는 말씀을 확대 해석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후자는 교회와 성전이라는 개념을 혼동한 경우인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에서 교회로 번역되는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용어가 두세 사람에게 적용되는 경우란 없습니다. 도리어 두 사람과 교회를 명백하게 구분하는 문맥이 존재하지요. 바로 앞에서 언급한 마태복음 18:15-20 문맥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할 때 처리하는 방식을 권면하신 내용입니다. 먼저 자기가 혼자 그 사람을 만나 권고하고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권계 하되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게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17절)는 요지의 말씀이지요. 이 문맥에 의하면 두 세 사람은 교회와 엄연히 다른 소그룹입니다. 예수님께서 ‘에클레시아’를 언급하신 이 문맥에 대해 언급하면서 어떤 성경학자는 이 용어가 회당을 의미한다고 지적하고 다른 성경학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역 기간 중에 교회에 대해 말씀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하지만, 크레익 키너에 의하면 이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이스라엘 '회중'을 의미하는 '카할‘(qahal)이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하기 위해 ‘70인역’(Septuagint-기원전 300년경부터 헬라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종종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런 상황에다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에서도 하나님의 남은 공동체(a remnant community)를 가리킬 때 이 히브리어(qahal)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봅시다. 결국 신약의 ‘에클레시아’(헬라어)는 구약의 ‘카할’(히브리어)을 잇는 하나님의 공동체인 셈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참된 이스라엘 공동체로서 장차 당신의 몸의 역할을 감당할 공동체를 가리키는 데 이 용어를 사용하신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아브라함, 이삭 및 야곱의 경우처럼 당신의 형상을 따라 한 사람 한 사람 독특한 존재로 빚으십니다. 이 세 사람은 한 가족이었으나 각각 다른 성정과 인격의 결을 갖고 태어나 한 세상을 누리다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때도 십자가 상의 두 강도의 경우처럼 각 개인의 믿음에 근거하여 각각 다르게 대우하십니다. 오직 십자가 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들이 취한 태도에 의해 각각 그 영원한 운명이 갈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속 계획은 그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한 공동체로 완성된다는 점을 성경이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인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지만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형성하셨습니다. 그 민족을 통해 당신이 어떠한 분이신지 증거하도록 하여 세상 모든 민족이 당신께로 나아오도록 계획하셨던 것입니다(출애굽기 19:1-6). 그렇지만 그 민족은 그 과업을 담당하기에는 너무 부적합한 공동체였지요. 숱한 배도의 과정을 거치다 앗시리아와 바벨론 유수까지 당했던 민족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을 버리시지 않고 다시 고향으로 불러들이시는 기적을 베푸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당신을 통해 새로운 영적 공동체인 교회를 선택하여 세우셨습니다. 이 교회야말로 참된 이스라엘(로마서 2:29-"이면적 유대인"; 갈라디아서 6:16-"하나님의 이스라엘")로서 땅 끝까지 나아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당신의 궁극적 공동체를 온전하게 이룰 당신의 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복음화 혹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선교적 과업 자체가 교회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비록 그 과업이 교회가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 꾸준히 추구해야 할 영역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이 과업 자체를 교회의 지상 목표로 삼아버린 것은 심각한 오해요 성급한 단견에 불과했습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의 신부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지요(에베소서 5:25-27; 요한계시록 21:1-4). 우리 각자가 복음을 통해 구원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연합되어 한 몸을 이루어(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에베소서 4:13)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스러운 결국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이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장래 영광을 바라보며 그 한 지체인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성을 다하지는 않고 도리어 자신의 욕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무너뜨리는 교회 지도자들이나 일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교회의 영광스러운 장래를 주목하는 대신 교회의 불완전한 현재의 모습에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성도들 또한 얼마나 많은지요? 이런 교회의 모습을 가리켜 마이클 그리피스 선교사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신데렐라”(Cinderella With Amnesia)로 일컬은 적이 있습니다. 즉 귀족 출신인 자신의 진정한 신원을 잊어버리고 왕자와 연인 관계, 나아가 결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장래의 모습을 그리지 못한 채, 누더기 옷을 입고 계모와 계모의 딸들의 하녀로 지내며 허드렛일 하느라 여념이 없는 신데렐라 말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영광스러운 장래의 모습을 상기하며 이제 무기력과 좌절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주님과 당신의 나라를 선양합시다!
<교회의 두 차원>
다음으로는 교회의 용례를 중심으로 교회의 두 가지 차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이 ‘교회’라는 용어를 몇 번이나 사용하셨을까요? 많을 것처럼 보이지만 정답은 단 두 번에 불과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 외에 마태복음 16:18에 한 번 더 등장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두 번에 걸친 교회의 용례는 그 가리키는 바가 각각 다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등장하는 교회는 어느 지역에 거점을 두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지만, 마태복음 16장에서 언급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전 세계적인 신자 공동체입니다. 보통 전자를 지역교회(local church), 후자를 우주교회(universal church)라고 표현합니다.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거룩한 공회’가 바로 이 우주교회를 일컫는 표현이지요.
신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용어가 총 114회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 90회가 특정 지역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24회만 우주교회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있는 셈이지요. 사실상 이 우주교회라는 개념은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귀납법적으로 연구하여 그 단어의 은유적인 용례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에베소서 5: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히브리서 12:23(“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교회>) 및 고린도전서 12:28(“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에 등장하는 교회는 어느 특정 지역교회를 일컫지 않고 전 세계적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특히 두 번째 구절에서 ‘사도’를 언급한 것만 보아도 그러합니다. ‘사도’는 어느 개 교회에서 세울 수 있는 직분이 아니지요.
외국에서 함께 동역하던 미국인과 언젠가 교회 문제로 논쟁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한 선교단체와 동역하는 문제를 놓고 논의하던 중 그가 그 선교 단체도 교회라고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신학교도 졸업했고 그동안 해외에서 사업한 경험도 많은 그가 한 말이라고 믿기지 않았습니다. 선교단체 구성원들이 우주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성도들이라는 말과 선교단체 자체가 교회라는 말은 서로 차원이 다른 말이지요. 그래서 여러 번 논쟁을 하던 끝에 서로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만을 확인한 채 그 문제를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와는 더 이상 동역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회 문제에 대한 이견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 문제가 중대한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대학에서 활동하던 1979년부터 85년까지의 기간은 그야말로 대학 선교단체의 전성기였습니다. 일반 교회에서 공급해주지 못하던 개인적인 신앙 양육 혹은 제자 훈련을 대학생 선교단체가 담당하기 시작하면서 교회와 선교 단체 간에 갈등이 증폭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 단체들 중에는 교회 눈치가 보여 말이나 글로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자기 선교 단체가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여긴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주일에 자기들만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과감성을 보인 단체도 있었지요. 성경에서 풍성하게 계시된 교회의 의미나 그 차원이나 목적을 이해한 정도가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양한 연령대에 속한 이들이 한 공동체 속에서 하나 되어 각각의 폭 넓은 은사를 활용하면서 서로의 필요와 사회의 필요를 함께 채워가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경험 대신, 같은 연령대에 속하면서도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대학생들만 모여 제자훈련하고 예배 드리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 영적 체험인지 그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사실상 성경과 신학에 대해 밝은 눈을 가지지 못한 그들보다도 그들을 그런 식으로 오도한 지도자들이 더욱 큰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지역교회 내에 소속되어 그 공동체 속에서 기여할 자신의 역할을 모색하기보다 지역교회와 피상적인 관계를 맺은 채 공동체의 '영적 수준'을 폄하하다가 공동체를 등진 수 많은 선교단체 출신 대학생 혹은 대졸자들이 바로 그들이 맺은 나쁜 열매입니다. 그들에게 건전한 교회관을 심어 주는 대신 자기 선교단체의 수량적 성장에만 목을 맨 당시의 선교단체 지도자들이 과연 지금에라도 그 책임을 뉘우치고 있을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지역교회에 (실질적으로) 소속하기는 꺼리면서 자기는 우주교회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지역교회에 소속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일반 기독교인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단체와 개인들에게 네비게이토선교회의 3대 회장이었던 제리 화이트는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The Church & The Parachurch: An Uneasy Marriage" 속에서 교회와 Parachurch(선교단체나 특수한 기능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기독교 단체)와의 관계를 소상히 밝히면서, 각 그리스도인들이 이 두 대상과 어떤 연관을 맺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모든 Parachurch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명확한 사역 형태의 선택에 직면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그것은 합법적으로 보다 광범위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지역 회중이 되거나 그런 회중을 낳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para-local church 그룹이 될 수 없다. 어떤 para-local church 그룹은 사실상 지역교회가 되었다. (...) 또 다른 선택은 para-local church 그룹은 전문가들로 남고 자기 구성원들은 한 지역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각 신자들은 많은 방식으로 자신의 은사들을 활용하고 표현할 수 있다. 완전히 합법적인 한 가지 방법은 para-local church 그룹 구조에서 사역하고 섬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여전히 그는 자신의 지역 회중에 대한 개인적, 성경적 책임을 수행해 가야 한다.”
<교회의 존재 목적>
그렇다면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일까요? 조직신학자인 웨인 그루뎀은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은 당신께 예배하는 일입니다(Ministry to God: Worship). 교회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로새서 3:16),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은 목적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에베소서 1:11-12)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다른 무엇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께 대한 교회의 주요한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성도들을 향해 지혜롭게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권면에 이어 성령 충만할 것을 명령한 사도 바울의 의도는, 성도들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에베소서 5:16-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로새서 3:16)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1:11-12)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에베소서 5:16-19)
둘째, 교회는 이미 신자가 된 이들을 양육해서 신앙적으로 성숙하도록 세워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Ministry to Believers: Nurture).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8에서 자신의 사역의 목표가 신자들을 기본적인 구원의 믿음에 머물도록 하는 게 아니라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도록 세워가는 데 있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본 블로그 “목사와 교사” 편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11-13에서 하나님께서 교회 속에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이들을 허락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일이 ‘성도들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성숙하여 예수님의 충만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로새서 1:28)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에베소서 4:11-13)
셋째, 세상을 향해서 교회가 할 일은 ‘모든 족속과 이웃에게 복음 전하고 그들을 제자 삼는 일’(마태복음 28:19; 골로새서 4:5-6)과 주님의 이름으로 ‘가난하고 빈곤한 자들을 돌보는 긍휼 사역’(ministry of mercy)을 담당하는 것입니다(Ministry to the World: Evangelism and Mercy). 물론 신약의 주된 초점은 교회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데 있지만(사도행전 11:29; 고린도후서 8:4; 요한일서 3:17), 불신자들을 돕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닮는 태도라는 점 또한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누가복음 6:35-36; 갈라디아서 6:9-1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로새서 4:5-6)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라디아서 6:9-10)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누가복음 6:35-36)
웨인 그루뎀은 이 세 가지 교회의 목적을 언급한 후에 이 목적들의 균형을 이루는 것(Keeping these purposes in balance) 또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 측면 모두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므로 어느 한 가지도 무시해서는 안 되며, 이것들을 축소하여 어느 한 가지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예컨대 예배를 무시하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성도들의 양육이나 긍휼 사역을 등한히 하는 교회는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오직 전도 혹은 선교(전도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에 있다며 성도들이 ‘직접 전도’(Direct evangelism)하는 일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독려하는 교회도 적지 않게 눈에 띕니다. 성도들을 양육하고 제자 훈련하는 일에 온통 신경을 집중하면서도 그들이 삶의 현장 속에서 복음을 빛내는 삶을 살아가면서 간접적으로 복음 전하고 이웃들의 깊은 필요를 발견하여 섬기는 일에 의미 있게 기여하도록 하는 측면에는 눈이 먼 교회도 수두룩하지요.
교회는 공동체로서 이 세 가지 목적들에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지만 성도 각 개인은 상황이 다르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들로서 특정한 사역과 기능을 위해 기여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각각 처한 형편과 처지가 서로 다른 우리가 시간과 자원을 예배에 1/3, 양육 사역에 1/3, 제자훈련과 긍휼 사역에 1/3씩 드리는 방식으로 균형을 잡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살아가서도 안 됩니다. 예컨대 찬양에 은사를 가진 성도라면 자신의 시간 중 상당한 부분을 이 찬양 사역을 위해 드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와 제자양육에 은사를 가진 성도도 마찬가지겠지요. 교회 안에서 진행되는 사역뿐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현장과 직업 현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역도 다를 바 없습니다. 이미 출간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 인문학”에서 한번 다룬 바 있지만, 골로새서 3:22-25 말씀을 한번 묵상해 보면 그 속에는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직장 속에서 Eyeservice(눈가림식 업무 태도) 대신 Heartservice(성실한 자세로 임하는 업무 태도)와 Soul-service(예배하는 자세로 임하는 업무 태도)를 구현하라는 주님의 엄중한 권면”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영위하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영적 예배가 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로마서 12:1)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골로새서 3:22-25)
우리나라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공동체적으로는 예배, 성도 양육 및 선교/긍휼 사역에 탁월할 뿐 아니라 그 균형을 이루고, 성도 개인의 은사와 재능과 기회를 따라 교회 안팎에서 보람 있게 사역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열매들이 맺힐까요? 우선 공동체가 키운 성숙한 일꾼들을 목회자나 선교사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존경할만한 교회 지도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이 시대에, 교회에서 잘 양육받고 삶의 현장 속에서 칭찬받는 성도들 중에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이를 공동체 전체가 한 마음으로 목회자로 세우는 날을 꿈꿉니다. 우리 삶의 전 부면에 영향을 끼치는 영역인 정치가 사회적으로 불신 받는 이 시대에, 교회에서 잘 양육 받고 정치와 연관된 전문 분야에서 실력을 쌓고 좋은 평판을 받는 성도들 중에 협상과 타협의 은사를 가진 이를 공동체 전체가 한 마음으로 정치인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날도 꿈꿉니다. 단 두 가지 예에 불과하지만 모든 성도가 주님 안에서 서로 연합되어 성숙해 가면서 각자 허락받은 은사와 재능으로 삶의 현장 속에서 복음을 선양하고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게 된다면 접하게 될 아름다운 교회의 열매들이 아닐까요?
제 진단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우리나라 성도들 중 많은 이들에게 교회 생활은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에 의해 영적 안식과 쉼을 누리면서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과 깊이 있는 사랑의 교제를 누리는 장이 아닙니다. 어떤 성도들의 경우는 그것이 구원을 받았으니 감사함으로 혹은 다른 성도들의 경우에는 구원받기 위해 의무적으로 감당해야 할 직무요 과정일 뿐입니다. 이런 직무와 과정을 등한시하는 다른 많은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몫까지 덤으로 지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주일 새벽부터 늦은 밤 시각까지 교회당 속에서 고군분투합니다. 이들은 모두 성령 안에서 성도들이 하나 된 가운데 말씀을 중심으로 누리는 영적 안식과 충전 없이 월요일의 일상생활 및 공적 생활을 시작해야 하지요. 이 주중 생활이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라는 시각도, 어떻게 이 생활을 성령 충만한 가운데 감당해가야 하는지에 대한 영적 지원도 없이 또 고군분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주일이 돌아옵니다. 이런 삶의 여정을 어느 성도가 다른 이에게 기쁨으로 자원하여 권하겠으며 어떤 다른 이가 이런 삶에 매력을 느껴 그 여정의 동반자가 되기를 원하겠습니까?
최근에 하나님의 은혜로 연락이 닿은 제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 가도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할 뿐 아니라 성도들 간에 말씀과 기도를 중심으로 성령 안에서 깊은 교통을 누릴 수 있는 장이 없어 고민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교회를 찾고 있지만 이런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교회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20여 년간 모국과 고향을 떠나 있어 그에게 적실한 영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교회를 소개해 줄 수 없어 너무나도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그가 직면한 문제는 제가 고국을 떠났던 20여 년 전에도 엄존했던 문제였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제 절친 중 한 분에게 당시 그가 거주하고 있던 곳 주변에서 추천해 줄 만한 교회를 찾기 어려워 난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완벽한 교회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복음이 신실하게 선포되고 성례가 규모 있게 집행되며, 성도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해줌으로써 그들의 성숙을 돕고, 그들이 삶의 현장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현시하고 자신들의 은사를 발휘함으로써 복음을 빛내는 ‘인사이더’(insider)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계도해 줄 수 있는 교회를 찾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런 교회다운 교회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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