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믿음, 구원 그리고 선행: 구원과 선행은 무관하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12. 27.

믿음, 구원 그리고 선행: 구원과 선행은 무관하다?

이미 출간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 인문학”에서 성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왕”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을 피력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그 왕 되심의 단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왕 되신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성서가 증언하는 바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특히 누가복음 18장 31절에서 19장 27절까지의 본문을 통해 성경이 증언하는 “믿음, 구원 그리고 선행”의 상관관계에 대해 상고해보겠습니다. 그 본문을 한번 묵독하신 후에 이 글을 계속 읽어 가시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이내 당하실 십자가 고난과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여리고 근방에서 소경 한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를 지나가시면서 삭개오를 구원하셨습니다. 그의 구원을 선언하시면서 곧 “열 므나의 비유”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 본문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이 질문을 드립니다. “누가 구원을 얻었습니까?” 소경과 삭개오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그 두 사람은 서로 대조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소경은 이름도 없는 이었고 무직자였고 거지였으며 불구자였습니다. 반면에 삭개오는 유명인이었고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으며 강건한 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두 사람은 서로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습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며 예수님의 도우심을 청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왔습니다. 본문을 통해서만 보자면 소경이 어떻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알게 되었으며 삭개오가 왜 그토록 예수님을 보기 원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서를 서로 참조해보면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소경은 아마도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시고 광풍도 잠잠케 하시며 죽은 이들을 살리신 예수님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벳새다에서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던 소경 한 사람이 눈 뜨는 기적을 체험했다는 얘기(마가복음 8:22-26)를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후에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누가복음 7:17)라고 기록된 것처럼 당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예수님에 대한 면모를 소문을 통해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그는 동료 세리들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접했을 소지가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 교통 하신 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 중 한 가지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누가복음 7:34)였습니다. 이런 예수님께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누가복음 15:1). 다시 질문드립니다.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바로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당신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진지한 기대감을 품고 예수님께로 나온 이들이었습니다. 그 기대감이 소경으로 하여금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 되었고 삭개오로 하여금 자기 신분이나 위치는 잊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한 번 뵙고자하는 동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구원은 바로 이러한 이들의 몫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듣고 기대감을 품은 채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의 복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누가복음 18:42)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친 소경은 눈도 뜨고 구원을 입었고 삭개오는 기쁨이 충만해진 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이 본문에 대해 두 번째 질문을 드립니다. “어떻게 구원을 얻었습니까?”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믿음으로”. 그렇지만 구원받는 과정에 또 다른 측면이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누가복음 19:10)는 점입니다. 이 사실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믿음이란 무용지물입니다. 내 믿음이 아무리 강하고 기대감으로 충일한 채 나아오더라도 예수님이 구원해주실 뜻이 없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2절)의 예를 보십시오. 한 과부가 자주 찾아와 번거로울 정도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3절)라고 요청했으나 그는 처음 얼마 동안 듣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재판장과는 극과 극의 대조를 보이셨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를 향해서 선언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모든 세리와 죄인들”에게 비유를 베풀어 말씀하신대로 예수님께서는, 양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누가복음 15:4)실 목자요, 드라크마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누가복음 15:8)으실 여자이시며, 탕자가 돌아올 때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누가복음 15:20)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듣고 구원의 기대감을 품은 채 당신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당장 구원받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의 대전제는,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는 점입니다. 온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사를 주재하시는 주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인 된 우리와 같은 처지를 죄다 경험하신 후에 십자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하셨습니다. 이 선언은 믿음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믿음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요한복음 1:11, 12)으로 이해하든,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는 것”(로마서 6:5)으로 이해하든, 그 전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땅에 오셨다는 것이요, 당신 백성의 삶의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는 사실입니다(요한계시록 3:20). 이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어떠한 믿음의 집도 허물어지기 마련이겠지요.

 

제가 말레이시아에서 산 20여 년간 영주권을 신청한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신청한 지 무려 3년쯤 지나서 연락이 와서 받아 보니 “불허”라는 통보였습니다. 다시 한번 더 탄원할 수 있다 해서 다시 신청했더니 다시 “불허”라는 통보를 보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에서는 전문 계약직 근로자로 3년쯤 일하면 영주권을 발급해줍니다. 어떤 경우에는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는 안내서까지 발송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나라에서는 무려 20년을 살고 그 기간 대부분을 전문인 계약직으로 보냈지만 영주권을 발급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는 제 기대감과 믿음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 나라 정부가 투자할 돈도 없고 뇌물도 바치지 않고 ‘빽’도 없는 기독교인인 제게 영주권을 줄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관건은 제 믿음의 강도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나라 정부와는 달리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잃어버린 저희를 찾아 구원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태산 같은 믿음이 없어도,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입니다(누가복음 17:5-6).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다니셨어도 믿음으로 화답하지 않은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오늘 본문, 18:59의 “앞서 가는 자들”과 19:7의 “뭇사람”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거나 함께 동행했으나 예수님께 대한 기대감을 품고 믿음으로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소경의 믿음 고백을 꾸짖어 잠잠하라 하고 삭개오 집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에 대해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구원의 복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장독 안에 들어가 뚜껑을 닫고 있어 보십시오. 비 한 방울 맞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은혜의 장대비가 내려도 그 복된 물 한 방울 누리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C. S. 루이스가 언급한 대로 믿음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와 구원받은 이들은 주님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이 은혜를 받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는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너희 뜻대로 이루어지거라”하십니다.

 

이 본문에 대해 세 번째 질문을 드립니다. “왜 구원을 얻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열 므나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왕 된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 비유의 등장인물은 왕위를 받기 위해 떠나는 귀인 외에 열 명의 종과 그 백성(19:14)입니다. 그 종들 중 두 종은 주인에게 받은 한 므나(노동자 100일간의 품삯에 해당하는 가치)로 주님의 명령대로 각각 장사하여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착한 종이라는 칭찬과 함께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 종은 장사하지 않고 그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다가 주인에게 되돌려주려 하였습니다. 그 종은 악한 종이라는 꾸중을 듣고 그 한 므나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왜 그가 악한 종이었을까요? 우선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13절)는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주인은 그 불순종의 저변에 깔려있는, 자기에 대한 불신과 몰이해에 주목했습니다.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1절). 자기 주인을 아무것도 심지 않았으면서 거두려고 하는 모리배나 협잡꾼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이 종은 주인에 대한 이런 불신과 몰이해를 바탕으로, “그 백성”과 마찬가지로 이 귀인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들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18:59의 “앞서 가는 자들”과 19:7의 “뭇사람”들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 악한 종을 보면 다른 두 종이 왜 선한 종으로 평가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종들은 주인의 됨됨이를 신뢰하는 가운데 주인의 장사하라는 명령이 주인의 지혜와 기반과 토대가 마련된 사업임을 알아차리고 각자의 역량대로 사업에 착수하여 나름대로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비록 사업 환경이 주인을 반대하는 이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주인의 전망과 사업 토대를 신뢰하면서 사업상의 역경을 헤쳐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각각 열 므나,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8-9). 그렇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선행으로 그 믿음의 진정성을 확증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10절 말씀이 이 점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0). 구원받는 조건이 선행이라는 말과 구원의 결과가 선행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언명입니다.

 

이 세상에서 도덕률을 온전히 지키거나 많은 선행을 베풀어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선행의 업적이라도 도덕률에 반하는 삶을 지속해온 엄연한 사실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이 도덕률의 존재를 부인할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이토록 시끄러운 이유가 바로 자기는 옳은데 타인이 그릇되다는 것 때문 아닌가요? 옳다는 기준이 이 세상에 엄존한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증언하고 있는 셈이지요. "인생은 불공평하다,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라고 선언하는 무신론자들이 과연 자기들의 그 말이 도리어 보편적인 도덕률과 인생의 의미의 실재를 반증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을까요? 인생에 어떠한 보편적인 기준이 없다면,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공평'이나 '무의미'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C. S. 루이스가 지적한대로, "이 우주 속에 빛이 없고, 그래서 눈을 가진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가 어둡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어둡다는 말은 의미가 없겠지요"(if there were no light in the universe and therefore no creatures with eyes, we should never know it was dark. Dark would be without meaning.).

 

결국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도덕률 아래 살아가고 있고 지속적으로 그 도덕률에 반하는 삶을 영위해 온 것을 잘 압니다. 이러한 죄악된 삶을 선행으로 덮을 수 있다고요?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그럴듯한 가정이지만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해 계시해 주신 구원의 길은 아닙니다. 아마도 모든 죄악이란 게 자신과 타인 간에 일어난 행위이므로 선행이 손해 배상 역할한다고 여긴 듯합니다. 그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 모든 죄악이 우선적으로 자신과 하나님 간에 일어난 행위라는 차원입니다. 도덕률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에게 범한 죄악을 해결할 방책으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길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하나님과 하나 되신 분이시라는 의미)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인간으로서 30여 년간의 생애를 누리시다가 결정적인 때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길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가복음 10:45-새번역)라고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 희생의 여정을 밟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으로 임하신 날이 바로 우리가 매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입니다.  

 

죄악으로 인해 영영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 대신 십자가에서 몸값을 지불해 주신 이 예수님을 믿고 우리 생명 속에 모시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 주셨기에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은 반드시 그 열매를 맺게 된다고 성서는 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이 두드러지고 성품은 예수님의 전 면모를 닮아가며 행위로는 온갖 선한 일을 도모하는 전인적인 삶의 변화로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복음 15:5-새번역)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 즉 당신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입술의 열매를 올려 드립시다"(히브리서 13:15-NASB)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갈라디아서 5:22-23-새번역)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골로새서 1:10-새번역)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지만 이런 전인적인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본 블로그 중 "구원의 확신" 편에서 이미 다룬 대로 예수님을 마음 속에 거듭 영접하거나 기계적인 방식으로 신앙의 강화를 꾀하기보다는 지속적인 성경 묵상과 기도를 통해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이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이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잘 알고 인격적인 교제를 지속해가다 보면 믿음이 자연스럽게 깊어지게 마련이고 그 신앙의 열매도 서서히 맺힐 것입니다. 결국 열매가 중요한 이유는 그 열매를 통해 그 나무의 어떠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래 말씀에서 주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천명하신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 않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15-21)

 

다시 정리해서 말씀 드리자면 우리 구원의 토대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고 구원의 조건은 우리의 믿음이지만 구원의 결과는 선한 열매입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이 비유 속의 귀인이 종들에게 한 므나씩을 주시며 자기가 다시 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사와 재능을 허락하신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닐까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많이 맺기를 기대하시는 것이겠지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4-7절)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은사(gifts)는 우리 각자에게 부여된 능력이나 재능을 가리키고, 직분(services/ministries)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별한 기회들을 의미하며 사역(working/effects)이란 용어는 기운을 북돋워준다는 의미의 헬라어에서 비롯된 번역어이니 우리 각자의 독특한 경향이나 욕구들을 일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요소들이 결국 지향하는 바는 ‘공익’, 즉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구원의 조건과 구원의 토대와 구원의 결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구원의 조건은 주님에 대한 기대감과 믿음입니다. 그 구원의 토대는 주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결과는 선행의 열매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몇 가지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이해합시다. 그러기 위해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고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좋은 신앙 서적을 읽읍시다. 명성과 인기에 편승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그 됨됨이를 모르는 설교자들을 멀리합시다. 대신에 성경 읽기 안내 서적과 함께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신앙 양서도 함께 읽읍시다. 시간이 부족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 중 한 가지인 이 일에 최우선을 둡시다. 예장통합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 따르면 2005년 우리나라 이단종파가 150여 개로 약 200-300만 명이나 된다고 하고 당시 기독교인 수는 대략 870만(18.7%)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단 신자들 대부분이 기존 교회 교인들인 점을 감안한다면 일반 교인들 중 1/4에서 1/3이 이단으로 유입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2005년 상황이 이 정도이니 지금은 더 많은 신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지 않을까요? 기존 기독교 신자가 이단으로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무지와 기존 기독교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일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지만 성도들의 미성숙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안고 규칙적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주님께서 우리에게 상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심을 알아도 당신 앞으로 나아가기 않으면 그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셋째, 각자의 은사와 기회를 좇아 선한 사업에 힘씁시다. 주님의 안목과 역사를 신뢰하면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은사와 기회와 성품을 따라 선한 사업을 수행해 갑시다. 비록 어떤 특정 재능 면에서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월등한 면모를 갖추고 있지 않아도 낙심할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부여된 재능 뿐 아니라 사역의 기회나 성격 및 기질들을 모두 종합해 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각자가 어떤 다른 누구도 담당할 수도 없고 기꺼이 감당하지 않으려 하는 어떤 특정 일감들을 처리하거나 어떤 특정인들을 잘 섬길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인에게 받은 한 므나로 각각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벌어 들인 종처럼 우리도 주인의 주권적인 섭리와 은혜를 신뢰하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충성스럽고 신실하게 당신께서 맡겨주신 은사와 재능을 온전히 다 활용하며 열매 맺는 생애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마이클 윌콕이 누가복음을 강해하면서 권면한 내용으로 맺는말을 대신합니다.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는 날에 이 세상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날이 가까워 옴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양식을 갑자기 바꾸어야 할 것인가? 즉 일상적인 생활을 그만두고 극단적인 경건주의에 빠지거나 전도 등의 봉사 활동에만 온 정열을 기울여야 하는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언제 오시든 간에, 우리가 계속적으로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이 점차적으로 악을 이기게 되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밖에 없다고 예측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주님 오시기까지 대적들은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끊임없이 주께 대항하여 음모를 꾸밀 것이며, 주의 종들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아무리 역사가 오랫동안 흘러가더라도 성도들은 주의 왕국을 예비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BST 누가복음, 237-2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