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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시(時)-장기적 시간 관점을 품으라

중1학년생의 현실 인식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12. 21.

중1학년생의 현실 인식

지난 25일로 “인생나눔멘토” 활동을 마감했습니다. 성주에 있는 한 중학교 1학년 14명(중간에 한 명이 전학 왔음)을 대상으로 지난 13주간 진행된 과정이었습니다. 다른 한 선생님과 함께 이 멘토링 과정을 운영했는데 그분은 멘티들이 장차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직업 분야와 연계된 실제적인 활동을 중심으로 멘토링을 진행했고 저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계발한다는 목적을 두고 철학적이고도 문학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진행했습니다. 다소 철학적인 인문학적 정보와 실제적인 직업과 연관된 활동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제시됨으로써 멘티들의 인생의 방향 설정과 진로 탐색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았겠나 자평해봅니다.

 

이 활동의 기본 취지처럼 일방적으로 멘토 두 사람이 자기 지식과 경험을 나눈 것만이 아니라 그 나눈 것에 대한 그들의 의견과 그들의 꿈과 삶을 청취함으로써 그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늘 죽음을 직면하며 사는 존재로서 단기간이 아닌 장기간의 시각에 입각해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단 하루만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과 한 달, 일 년 그리고 평생을 고려하며 사는 사람들은 각각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방식이 서로 현저하게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 후에 잠시 시간을 두고 “정직이 평생의 행복을 보장하는가?”라는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각자 생각해본 후에 자기의 선택에 따라 찬성과 반대 쪽에 앉으라고 했더니 놀랍게도 찬성 쪽에 앉은 학생이 14명 중 단 4명이었습니다. 반대 편 멘티의 수가 찬성 편보다 2배 이상이 된다는 사실이 주목거리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토의하는 내용을 보아도 반대 편 멘티들은 뜻이 확고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정직하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선의의 거짓말도 정직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기는 그들은 정직하게 살아가면 손해만 너무 많이 볼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보편적인 원리를 따라 살아가면서 자기가 말한 대로 실행하는 삶이야말로 짧은 기간이 아니라 인생 전체 혹은 인생 이후를 염두에 두는 사람이 취해야 할 바람직한 길이라는 멘토링의 주지(主旨)가 중1 멘티들의 확고한 현실 인식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요?

 

이제 14세인 그들이 붙들고 있는 이런 인생관의 일단이 그들의 눈에 비친 부모, 친척, 교사, 사회 지도자(정치, 경제, 문화, 종교 지도자) 및 연예인들과 같은 기성세대의 세태에서 비롯되었다면 과장된 말일까요? 기성세대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라는 황금률(Golden Rule)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남에게 대접 받기 원하지 않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지 마라”라는 은율(Silver Rule)만이라도 소극적으로 실행하는 본만 보였어도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이토록 불신에 가득 찬 상태로 빠져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부패한 정치인으로 알려진 이들은 차지하고라도 그동안 신뢰를 받고 있던 정치인들조차 권력과 돈의 노예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는 행태를 보일 때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은 좌절하기 마련입니다.

 

이번 멘티들은 잘 모를 미국 사례를 몇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 부부가 자신들의 공직 기간과 그 이후에 부정직한 방식으로 축재한 사례는 거론하고 싶지도 않지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그 영어 연설에 감동해서 공부하는 대상인 오바마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떠난 첫 해에 총 4천만 달러(약 470억 원)의 돈을 벌어 들였습니다. 그것도 출판업계 한 곳에서 벌어들인 돈만 그러합니다. 이런 오바마 밑에 그보다 한 술 더 뜨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았던 게 우연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예컨대 당시 재무부 장관을 지낸 티모시 가이트너라는 자는 재직 당시 위기에 처한 금융업계에 막대한 구제 금융을 퍼준 뒤 그 대가로 현재 금융업계에서 큰 보상을 받고 있지요. 장관직을 그만 둔 후 금융 회사 경영자가 되어 막대한 연봉을 받고 있으니까요.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엄청난 규모의 구제금융 덕에 그 위기 상황 속에서도 그 은행 경영자들은 역사상 최고 수준의 보너스를 챙겨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방만한 경영을 펼쳐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마땅한 금융 회사 경영자들에게 국민들의 피와 같은 세금으로 사상 최고의 보너스를 안겨 주고 퇴직 후에 그 비열한 행위의 대가로 치부의 길을 달리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나라가 현재 미국입니다.

 

오바마나 가이트너의 관계는 클린턴과 밥 루빈과의 관계와 판박이입니다. 2008년의 금융 위기와 같은 상황을 “밥 루빈 트레이드”(Bob Rubin Trade)라고 부르는 나심 탈레브에 의하면 루빈은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재무부 장관을 지낸 후 2008년 금융 위기 이전까지 시티은행 회장으로 거의 10년간 근무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가 받은 급료가 1억 2천만 달러가 넘습니다. 당시 밀어닥친 금융 위기로 시티은행이 지급 불능 사태에 빠지고 말았지만 그는 다른 대규모 금융업계의 경영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자기 이익을 다 챙긴 후에 그대로 뒤로 빠졌습니다. 회장이라는 자기 직함이 품고 있는 엄청난 책임을 직면하는 용기 대신 “검은 백조(‘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예상치 못한 큰 사건’이라는 의미)가 나타났다”고 비겁하게 변명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탈레브의 말처럼 그는 당시 은행이 지고 있던 위험 부담을 자기가 납세자인 미국 국민들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점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실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대학 교수들이 논문으로 발표한 리스크 모델을 활용하여 그 파멸적인 리스크를 숨기는 식으로 상당한 돈을 버는 것이 당시 금융업자들의 관행이었으니까요. 정부 관료가 의도는 좋았지만 판단 잘못한 탓으로 국세를 축낼 수도 있는 경우와, 루빈과 같이 자신이 내린 결정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면서 자기는 이익만 취하는 경우는 천양지차가 있지요. 바로 이런 경우를 “밥 루빈 트레이드”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그도 역시 ‘아름다운 명예’보다 ‘추한 재물’을 좇은 자들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루빈이 퇴직할 때 “알렉산터 해밀턴 이후로 최고의 재무장관”이라고 치켜 올리기도 했던 그 후안무치한 클린턴마저도 나중에(2010년) 지난 날을 회고하면서 대통령 재직 당시 은행 파생 상품들을 규제하지 말라고 한 루빈의 조언이 그릇되었다는 점을 실토했다고 하지요. 결국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는 그의 말보다 그의 행동이 명백하지 보여준 셈입니다.

 

클린턴의 사례를 통해 은율의 교훈도 배우지 못한 오바마와 같은 사례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미국에도 많지만 우리나라에도 수두룩하지요. 루빈과 가이트너에 비견되는 인물도 적지 않지만 소위 “전관예우”라는 뻔뻔스러운 행태를 이 대명천지에도 공공연히 일삼고 있는 대표 집단인 검찰이나 사법 기관의 경우에 비하면 ‘새발의 피’겠지요. 그들이 우리나라의 법률을 공정하게 관장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는 점이 그토록 역설적이고 비극적일 수가 없습니다. 닭장을 늑대에게, 양떼를 하이에나에게 맡긴 경우와 다를 게 있을까요? 그렇지만 사명감으로 임해야 할 “공직을 축재에 활용하는 것은 명백히 비윤리적인 행위다”라는 것은 나심 탈레브의 지적 이전에 인간 사회가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도덕률이라는 점은 변함없습니다. 사회의 정점에서 최대의 권력과 자원을 활용해서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그 영광스러운 소명에 대한 자부심을 “돈 몇 푼”과 맞바꾸는 그들의 인생관도 의심스럽지만 그들의 부패를 막지 않은 채 돈으로 전관예우해주는 사회 시스템도 책임이 있습니다. 공직을 떠난 후에도 청백리의 기상을 잃지 않는 고위공직자를 보기가 희귀한 사회, 공직을 축재의 수단으로 보는 자들을 걸러내는 사회적 규범이 없는 사회에 사는 우리 중1 멘티들이 성실하게 살아선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인생관을 가졌다고 한탄하는 제가 청맹과니인 셈이지요.

 

오바마와 클린턴의 경우는 우리 사회에 또 다른 교훈을 준다고 봅니다. 그들은 소위 보수적인 공화당 출신이 아닌 소위 진보적인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들입니다. 그들이 민주당 출신이기 때문에 공화당 출신 대통령인 부쉬와 트럼프와 다른 게 무엇이 있을까요? 그들의 말이나 연설이 아닌 그들이 취한 행동을 보면 자기가 내린 엄중한 결정에 대해 책임 질 줄 모르고 자기 사익 챙기기에는 누구보다 발 빨랐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요. 그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좌우로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덧없고 우스꽝스러운 일인지에 대해 언급한 조프 그레이엄과 빈스 그레이엄 형제의 말이 귓전을 울립니다. “나는 미국 연방 수준에서는 자유주의자로 통한다. 내가 살고 있는 주 수준에서는 공화당 지지자로 통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수준에서는 민주당 지지자로 통한다. 그리고 우리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자로 통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경우가 적지 않겠지요? “나는 대한민국 전국 수준에서는 녹색당 지지자로 통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도 수준에서는 자한당 지지자로 통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수준에서는 민주당 지지자로 통한다. 그리고 우리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는 정의당 지지자로 통한다.” 종잡을 수 없는 보수와 진보의 의미를 마음대로 재단한 채 자기와 자기 진영은 절대선인 반면 상대와 상대 진영은 절대악으로 규정한 후 자신들의 삶의 기반이 되는 국가의 발전과 국민 전체의 복리는 안중에도 없이 벌이는 요즘의 정쟁을 보노라면 마치 “자기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자르는 사람”(C. S. 루이스)이 떠오릅니다.

 

결국 그 관건은 스위스를 비롯한 게르만족 국가들의 국민들처럼 스스로 법규를 철저히 적용하고 준수하면서 정치와 공무를 담당하는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소정의 책임을 묻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지속해 가는 게 아닐까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과 자신의 경제적 형편의 유불리에 우선을 둔 채 특정 정당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면서 선출직 공무원 후보들의 됨됨이를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은 채 ‘묻지 마’ 투표를 감행한 것이 오늘날 이토록 혼탁한 국회 및 지방 의회 의정 활동을 낳은 주범이 아닐까요? 보편적인 가치와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편견과 무지에 기반을 둔, 우리나라 현 정치, 사회, 문화, 종교의 난맥상을 두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함께 도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