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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시(時)-장기적 시간 관점을 품으라

삶의 끝날 계수하기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9. 16.

삶의 끝날 계수하기

지난해 1월 말 귀국한 이후 지금까지 제가 장례식장에 조문 간 횟수가 14회였습니다. 제가 가야 했지만 통보받지 못해 가지 못한 두 곳과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한 장례식장 한 곳을 포함하면 17곳이나 됩니다. 그동안 결혼식엔 4회밖에 참석해보지 않았으니 장례식 조문이 무려 4배나 많았던 셈입니다. 조문을 갈 때마다 떠오르는 전도서 말씀이 한 곳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도서 7:2,4). 제 삶의 ‘끝’을 미리 경험해 보는 지혜가 장례식장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위중한 지병이 없는 한 대부분의 고인들이 80세 이상, 혹은 90세 이상을 사신 것을 고려해 보자면 인생3막이란 용어가 참 적실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고 이 3막을 어떻게 진행해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궁구하는 게 절실하겠습니다. 인생은 60부터, 70부터, 심지어는 80부터 라며 새로운 것들을 꿈꾸며 주도적으로 시도해보라는 조언이나 권면이 적지 않지만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옳다고 생각되는 소견대로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고 상의하는 중에 자신의 처지와 은사와 가능성을 견주어 보며 한 발 한 발 내디디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장기간 생명 연장 도구에 의지하다 돌아가신 고인들을 접하면서 어떻게 생명을 마감할 것인지를 준비해두는 게 지혜롭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언제 주님 앞으로 가게 될지 모르는 저로서는 하루 단위로 삶의 마감을 잘 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겠습니다. 잘못된 습관이나 운동 부족으로 병이 들지 않도록 잘못된 습관을 바로 잡고 자주 걷고 스트레칭하며 스트레스를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던 중 무슨 심각한 병에 걸리거나 기력이 쇠하여진 것을 절감한다면 생명을 더 연장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생을 잘 마감하기 위한 준비를 잘해 두어야겠습니다.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감사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허용해 주신 인생 순례의 여정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일에 최선을 경주해야겠습니다. 이때에도 역시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게 절실하지 않을까 합니다.

 

말레이시아의 대학에서 잠시 함께 근무한 한국계 미국인 교수님 한 분은 테니스 치는 일에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상하의 나라인 그곳에서 날마다 시간을 내어 그 운동을 하는 이들의 수는 극소수입니다. 실내에서 하는 배드민턴을 즐기는 이들은 많아도 직사광선이 작렬하는 실외에서 테니스를 치기가 고역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겁니다. 그 교수님이 테니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언젠가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된 어떤 유명 인사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문교부 장관 중에 민관식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나이로 89세까지 살았습니다. 무병장수하던 중에 잠자다가 운명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운명할 수 있었던 게 바로 그 사람이 젊을 때부터 좋아해서 평생 즐겼던 테니스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정보를 접한 다음부터 작심하고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하여 그때까지 즐기고 있다고 그 교수님이 제게 일러주었습니다. 자기도 민 장관처럼 병치레하지 않고 잠자다가 고요히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제가 그 교수님처럼 테니스를 시작할 일은 없겠지만 꾸준한 운동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권면으로 가슴에 담아 두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들을 돕고 있는 다마오키 묘유가 언급한 말은 다른 측면에서 교훈을 줍니다. “지금 사람들은 죽음을 타인에게 맡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병이 걸리면 의사가 고쳐주고 죽을 것 같으면 병원이 어떻게 해주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한다. 죽음도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대처할 수 있는데, 타인에게 맡긴다. 그런데 타인에게 맡기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얼마 전 제 친지 중 한 분이 자기는 에스키모 인처럼 생을 마감하고 싶다며 이은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툰드라 지대에 사는 에스키모 노인들은 엄동설한 중 기근이 닥치면 식구들 중 입을 줄여야 하니까, 자발적으로 “눈발이 세찬 깜깜한 밤의 얼음 위로 걸어 나간다”라고 하지요. 입 하나 줄이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짐승에게 잡혀 먹힐 미끼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동일한 차원은 아니겠지만 그 친지는 스스로 살만큼 살았다고 여겨지면 날씨가 추운 날 하루를 잡아 집을 나서겠다는 겁니다. 충분히 걷다가 피곤해지면 벤치 같은 곳에 앉아 있다가 잠이 오면 그대로 그곳에서 잠이 들어 생을 마감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마오키가 언급한 바와 같이 집이나 병원에서 많은 이들의 폐를 끼치고 자신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생을 마감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자성에서 나온 생각이라고 합니다. “노인이 자신이 사망할 시기를 예측하고 준비하고 계획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권을 소지”하도록 허용하는 에스키모 인들의 전통을 활용하겠다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생각이 깊었던 적이 있습니다.

 

에스키모 인들처럼 제 입 하나 줄일 요량으로 집 밖을 나설 일은 없겠지만 나이가 들어 소천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이제 준비해라”라고 일러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 것은 성서적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12)라고 간구한 모세의 죽음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병에 걸리거나 활력이 다해서 죽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명기 34:7)라고 기록될 만큼 건강했으나 가나안 땅을 보기는 하되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2012년 요르단에서 며칠간 지낼 기회가 있었을 때 모세가 서서 가나안 땅을 조망해 보았던 모압 땅 느보 산에 올라가 당시 모세의 심정의 일단이라도 느껴보려고 시도한 날이 문득 떠오릅니다. 모세가 당시 가나안 땅 거의 전부를 바라볼 수 있었던 비스가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건너편 이스라엘 땅이 충분히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안타까운 심정은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40년간 노심초사하여 이룬 출애굽과 광야 40년 여정을 마감하고 가나안 땅을 밟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모세 자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직도 그는 건장했고 눈도 밝았으며 지난 세월 동안 쌓은 연륜이 밑받침되어 있었기에 얼마든지 이스라엘인들의 가나안 정복을 주도해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충일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만 해라, 이제 됐다”고 하신 셈입니다. 네 인생의 몫은 여기까지라고 하신 것이지요.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를 장사 지낸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이셨습니다. 신명기 34:6에 보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장사 지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And He buried him in the valley in the land of Moab...”) 자기가 보기에 아직 일할 힘과 탁월한 경륜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만 해라’하시면 손을 떼고 주님께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게 우리 인생의 본연의 자세임을 모세 인생의 끝이 일러 주었습니다. 모세의 죽음의 전후 사정을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진다면 우리에게도 “이제 준비해라”라고 일러주시지 않을까요? 더구나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을 꿈꾸며 우리 날 계수하는 일(시편 90:12)에 지혜를 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마다하실 리 없습니다(야고보서 1:5). 모쪼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자 여러분들과 제게 우리 날 계수하는 일에 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거나 주위에서 인생을 마감한 많은 이들을 돌아보면 죽음이 두려워 비루한 인생을 살다 오명을 남긴 이들도 많지만 죽을 때를 깨닫지 못해 자신의 인생에 오점을 남긴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인물들을 찾아보자면 가나안 12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을 비롯하여 전자를 대표하는 사례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후자의 대표적인 반면교사는 구약의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의 경우는 여러 모로 보아 파격적인 사례입니다. 열왕기하 20:1에 보면,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때 히스기야가 보인 반응은 이해할 만합니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20:2,3). 그때 주님께서는 즉각적으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에게 15년간 더 생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적인 생명 연장을 입은 그는 생애 최대의 실수를 두 가지 저지릅니다. 첫째는 자기가 치유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바벨론 왕의 사신들에게 자기 보물고와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며 자랑한 실책이었습니다. 그 교만한 태도를 지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인해 그가 자랑한 모든 것들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갈 뿐 아니라 자기가 낳은 아들 중에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 가 환관이 될 자들도 있다는 예언을 듣자 그가 한 말이 기가 막힙니다.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20:19). 자기 실책으로 나라가 망하고 심지어 자기 아들들이 원수 나라 왕궁의 환관이 된다는 말을 듣고도 이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가 범한 두 번째 실책은 덤으로 산 15년 간 므낫세를 낳고 잘못 훈육한 채로 왕 삼은 일입니다. 유다 왕들 중 가장 오랫동안 치리 했으나(55년간) 자기의 악행으로 인하여 유다 백성들이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지는 벌을 받게 된 그 장본인이지요(예레미아 15:4).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서 자기 죽음을 통지 받았을 때의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요? 열왕기하 18:2(“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을 참고하자면 그가 54세까지 산 셈인데 15년 간 생명이 연장되었다고 했으니 38, 39세 어간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기가 막혀 벽을 보고 기도하면서 심히 통곡할 만큼 사실상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가 생명 연장된 다음 취한 언행과 그것들로 인한 엄청난 파국적 결말을 보자면 하나님께서 “너는 집을 정리하라”라고 했을 때 순종했더라면 그는 오는 세월 동안 다윗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칭송받았을 뿐 아니라 유다가 보다 오랫동안 그 역사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서 마음에 자리 잡은 생각이 한 자락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언제라도 주님께서 “너는 집을 정리하라”라고 말씀하시며 저를 부르실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평균 수명(82세-2016년 기준)은 그저 참고만 하되 언제라도 부르시면 감사함으로 나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다는 다짐입니다. 이 일에 제가 형통할 수 있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