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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我)-나를 알라

다이너마이트 같은 부적응자들의 서사로 자기만족을 깨뜨리는 플래너리 오코너(1)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10. 6.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 Courtesy of Kelly)

다이너마이트 같은 부적응자들의 서사로 자기만족을 깨뜨리는 플래너리 오코너(1)

이 세상에는 신이 없다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들의 믿음에도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을 믿는 자들을 어리석거나 맹목적이라고 말하지요. 그 말은 착각이고 오해에 불과합니다. 신을 믿는 사람은 과학적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빙성 높은 역사적, 철학적, 경험적 단서들이 충분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빙성 높은 단서들에 근거해서 신이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한편으로 신이 죽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이전에 살아 있었다는 뜻이고, 신은 그 본성상 죽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므로, 이 죽었다는 말은 특정한 성격을 띤 신이란 존재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여전히 신을 믿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만일 무신론자가 이렇게 말한다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셈입니다. 결국 우리 주위에서 신은 없다, 신은 죽었다는 말이 아무리 난무해도, 확신에 찬 무신론자는 극소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인구 통계가 이 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 세계 무신론자 수는 9%에 불과하니까요.

 

한편으로 무신론자 중에는 신을 믿는 자들이 유약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홀로 든든히 서거나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늘 신의 도움을 의지해서 살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주장에는 자기들은 그렇지 않다는 자신감이 배어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서 의연하게 자기 문제를 헤쳐나간다는 것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영어로 자기 계발서를 ‘self-help book’이라고 합니다. 인터넷 서점이나 오프라인 서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분야로 꼽힙니다. 유튜브나 팟캐스트 중에도 이런 주제로 운영하는 곳들이 넘치지요. 그런데 ‘self-help book’이란 표현을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단어가 ‘모순 어법’(oxymoron)입니다. 자조(self-help)나 자립(self-reliance)을 주장하는 이들이 도움을 받는 책이니까요. 자신들의 자부심대로라면, ‘self-help book’이나 ‘self-help’에 대해 조언해주는 유튜브나 팟캐스트와는 거리를 두어야 마땅하지 않나요? 그들이 참으로 정직하다면, 자기들이 전적으로 자립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적어도 인생의 어떤 분야에 대해서는, 그들도 권위 있는 누군가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니까요[스티븐 랭(Stephen Lang), "The Bible; What's in It for Me?"].

 

성경도 자조나 자립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고 행동할 뿐 아니라, 자신의 성숙을 위해 스스로 애쓸 것을 기대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현생에서 이루어가야 할 우리의 성화도 개인적인 책임의 영역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relying on yourself alone)은 반대합니다. 성경은 ‘철저히 교만과 오만에 반대합니다(thoroughly anti-pride and anti-arrogance).’(스티븐 랭) 그 점을 드러내는 성구를 아래에 조금 소개합니다만, 이외에도 숱하게 많은 구절이 존재합니다.

 

∎“모든 교만한 자를 살펴서 그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그 서 있는 자리에서 짓밟아서”(욥기 40:12)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너희 모두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께서 신실한 사람은 지켜 주시나, 거만한 사람은 가차없이 벌하신다.”(시31:23)

∎“주님께서는 오만한 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 저주 받은 자들은 주님의 계명에서 이탈하는 자들입니다.”(시편 119:21)

∎“주님은 거만한 사람의 집을 헐어 버리시지만, 과부가 사는 곳의 경계선은 튼튼히 세워 주신다.”(잠언 15:25)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 (잠언 16:5)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잠언 16:18)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야고보서 4:13-15)

 

즉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교만한 자라면 누구나 역겨워합니다. 그들을 찾아 책망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집을 헐어버리고 그들의 삶을 망하게 합니다. 왜 하나님은 교만을 그토록 싫어할까요? 교만이란 자신의 지력, 체력, 외모, 재력, 금력, 권력을, 마치 자기가 죄다 만들어내어 가꾸고 온전하게 한 것처럼 생각하고 뻐기면서 사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된 창조주인 하나님 대신 자신을 숭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통제하는 하나님 자리에 두는 삶을 하나님이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교만한 자 중에는 무신론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신을 믿는 자 중에도, 심지어 천지를 창조한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도 교만한 자가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내린 성서의 메시지 속에 그토록 많은 교만 경고 구절이 존재한다는 점은 대단한 아이러니입니다. 그들도 얼마든지 교만할 소지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들의 교만은 무신론자와는 결을 달리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는 원색적인 교만을 드러내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성취한 업적이나, 자기가 도달한 영적 성숙에 대한 자부심이 도를 넘어 다른 사람 앞에서 잘난 체하고 뽐내며 남을 업신여기는 것으로 진전하는 게 문제입니다. 자신의 판단과 잣대가 옳다고 여겨 남을 정죄하거나 폄하하는 태도로 드러나기도 하지요. 이런 행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자신이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행사하게 되어, 결국엔 ‘실제적인 무신론자’(practical atheist)로 전락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번엔 무신론자나 신자를 불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행자지하는 교만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지만 자기만족이나 자기의에 빠져 있는 교만을 단호하게 깨뜨리는 단편 소설 몇 편을 독해해 보겠습니다. ‘전미도서상’ 60주년(2010년) 소설 부문 최고상으로 뽑힌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 1925~1964)의 “단편 소설 전집”(1972년 수상작)에 나오는 작품들입니다. 미국 남부 조지아주 서배너 출신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녀는 루푸스병으로 3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2편의 장편소설과 31편의 단편 소설을 집필하여 미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그녀는 남부 고딕 [Southern Gothic,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공포, 신비, 환상을 담은 문학 작품]이란 장르를 통해, ‘인간의 죄악과 구원’이란 주제에 천착했습니다. 작품 하나하나에 여실히 드러나는 비뚤어진 인물들의 역겨운 허위의식과 위선적 태도는 의외로운 기괴한 결말과 한데 어우러져 무신론자와 신자들의 교만하고 위선적인 태도에 충격을 가합니다. 그것으로 독자들의 인격적 변혁을 꾀합니다. 먼저 네 작품의 줄거리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현대문학 번역본(“플래너리 오코너: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참조함.)

 

-줄거리-

<계시(Revelation)>

중년 여성 루비 터핀(Mrs. Ruby Turpin)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도덕적 우월성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남편 클로드(Claud)의 다리에 생긴 궤양을 치료하기 위해 그와 함께 의사의 진료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세련된 옷차림을 한 반백 머리 부인(a well-dressed grey-haired lady)과 말을 건네기 시작하면서 다른 환자들을 관찰하며 평가한다. 그녀는 자기가 백인 쓰레기(white-trash)나 깜둥이(nigger)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세상의 계급은 인종과 집과 땅의 소유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터핀 부인과 반백 머리 부인과 다른 백인 쓰레기 여자(the white-trash woman)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흑인을 경멸하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터핀 부인은 반백 머리 부인의 딸인 열여덟, 열아홉쯤 되는 처녀 메리 그레이스(Mary Grace)가 점점 불안해 하는 것에 주목한다. 웰즐리 대학에 다니는 그 여대생은 “인간 발달”(Human Develpment)이라는 제목이 달린 책을 읽으면서, 주위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와 자기 엄마가 자기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하며 거북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터핀 부인이 그녀와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녀는 거부한다.

 

자기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건 ‘성격이 나쁜 사람’(people with bad dispositions)이고, 세상에서 가장 나쁜 건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an ungrateful person)이라고 언급하자, 터핀 부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좋은 성격과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한다고 응대한다. 게다가 ‘고맙습니다, 예수님!’을 연발하며 소리를 친다. 그 순간 메리 그레이스가 읽던 책을 터핀 부인의 얼굴을 향해 던지고, 물리적으로 그녀에게 공격을 가하여 목을 조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달려온 의사에게 제지당한 채 바닥에 누워 있는 그 여대생의 얼굴을 향해 터핀 부인이 자기한테 할 말이 있냐고 묻자, 그녀의 입에서 ‘계시’(a revelation)의 속삭임이 흘러나온다. ‘아줌마 고향인 지옥으로 가요, 이 늙은 멧돼지.’(Go back to hell where you came from, you old wart hog.) 이때부터 터핀 부인은 자신의 세계관이 도전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존재론적 위기를 경험한다.

 

집에 돌아온 후 쉬기도 하고, 자기 이야기를 들은 농장 흑인 인부들의 동정과 칭찬을 접하기도 하지만,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 터핀 부인은 마침내 돼지우리 앞으로 가서 하나님을 향해 따진다. 왜 자기에게 그런 메시지(a message)를 보내는지, 자기가 어떻게 돼지이면서 자기일 수 있는지, 자기가 지옥에서 왔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지를 캐물으며 항의한다. 백인 쓰레기건 흑인 쓰레기건 도와주지 않은 사람이 없고, 날마다 허리가 부러지게 일하고, 교회도 다니는 자기가 어떻게 돼지 새끼들과 같으냐며 악을 쓴다. 그러더니 자기를 지옥의 멧돼지라고 부르라면서, “밑바닥이 꼭대기가 되게 하세요. 그래도 세상에는 위와 아래가 있을 거예요!”(Put that bottom rail on top. There’ll still be a top and bottom!)라고 부르짖으며 결정타를 날린다. “당신이 대체 뭔데요?”(Who do you think you are?) 태양이 지는 시각에 돼지들을 내려다보던 터핀 부인은 하늘에 남은 ‘자주색 선 한 줄기’(a purple streak)가 ‘흔들리는 대형 교량’(a vast swinging bridge)이 되어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것을 본다. 천국을 향해 올라가는 영혼들의 무리가 그 교량 위에 있었는데, 그 앞에는 백인 쓰레기와 흰옷 입은 검둥이 무리가 있고, ‘미치광이와 정신병자들’(freaks and lunatics)이 소리 지르고 손뼉 치고 개구리처럼 뛰면서 그 뒤를 잇고 있다. 그 행렬의 끝에는 그녀와 클로드처럼 ‘질서와 상식과 예의’(good order and common sense and respectable behavior)를 보이는 이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는 그들은 자기들의 미덕마저 타 버리는 것을 목격하면서 충격을 받는다. 이 비전을 목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터핀 부인의 귀에 들리는 것은 오로지 ‘별빛 가득한 들판으로 올라가며 할렐루야를 외치는 영혼들의 목소리였다.’(the voices of the souls climbing upward into the starry field and shouting hallelujah)

 

<좋은 시골 사람들(Good Country People)>

호프웰 부인(Mrs. Hopewell)은 몇 년 전 남편과 이혼한 후, 헐가(Hulga)라는 외동딸과 함께 산다. 32세인 딸은 10세 때 겪은 사냥 사고로 다리를 잃었지만, 철학 박사 학위를 가진 무신론자로 덩치도 컸다. 게다가 춤 한 번 춰 보지 못하고, 심장까지도 약해서 호프웰 부인은 그녀를 어린아이로 취급한다. 매일 아침이 되면 호프웰 부인의 집에서 일하는 프리먼 부인(Mrs. Freeman)이 찾아와, 호프웰 부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수다를 떨곤 한다. 프리먼 부인 가족이 그 집에 고용된 것은 그들이 ‘쓰레기’(trash)가 아니라, ‘세상의 소금’(the salt of the earth)에 해당하는 ‘좋은 시골 사람’(good country people)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딸 헐가는 프리먼 부인의 끊임없는 방문과 일반적으로 참견하는 태도에 인내심을 시험받기도 한다. 그녀는 자기의(自己義)가 강한 엄마를 자발적으로 맹인이 된 사람이라고 냉정하게 비판하며, 친절한 청년들을 보면 그 어리석음이 악취를 풍긴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느 날, 성경을 팔러 다니는 맨리 포인터(Manley Pointer)라는 청년이 그들의 집에 찾아온다. 호프웰 부인은 성경 구입에 관심이 없었지만, 그가 자기가 좋아하는 ‘착한 시골 사람’이라는 점과 딸과 같은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한편으로 그 청년은 헐가의 관심을 끌고 싶은 듯한 예리한 표정을 던지면서 그녀에게 넌지시 호감을 표한다, 헐가는 그의 가식을 쉽게 눈치채지만, 그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고 함께 대화를 나눈다. 헐가가 몇 살이냐는 자기 질문에 17세라는 답변이 돌아오자, 그는 미소지으며 헐가의 의족(wooden leg)에 주목하며 그녀가 용감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 서로의 공통점이 드러나자, 그는 토요일에 함께 소풍을 가자고 제안한다. 헐가는 그 전날 밤 자기가 그를 유혹한 후에, 그의 후회를 인생에 대한 깊은 이해(a deeper understanding of life)로 변화시키는 것을 상상한다. 이튿날 청년은 여전히 성경을 넣고 다니는 검은 가방을 들고 약속 장소에 나타났고, 함께 걷다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더니 헐가의 의족에 대해 물어본다. 그녀가 용감하다는 뜻으로 물어본 것이라고 하자, 헐가는 자기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답한다. 그 사실에 놀라던 청년은 잠시 후 그녀에게 키스를 감행했는데, 그것은 헐가에게 생애 첫 키스였다.

 

그들이 좀 앉아 쉬기 위해 근처에 있던 창고에 도착하자, 헐가의 의족 때문에 다락으로 못 올라가는 게 안타깝다는 청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헐가는 그에게 경멸스러운 눈길을 던지며 사다리를 통해 다락으로 올라간다. 두 사람은 키스를 하고, 청년은 헐가의 안경을 벗긴 후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 그는 그녀에게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요구하지만, 그녀는 그건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도 아닐 뿐 아니라, 자기처럼 ‘환상’(illusions)을 품지 않고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아는’(see through to nothing) 사람이 할 말이 아니라고 거절한다. 그리고 저주받은 존재인 우리가 ‘이 세상에는 볼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는 게’(see that there’s nothing to see) ‘일종의 구원’(a kind of salvation)이라고 역설한다. 자기가 30세이고, 학위도 많다는 것을 밝히기도 한다. 그렇지만 끈질긴 청년은 헐가에게서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얻어낸다. 그러자 그는 그 사랑을 증명해 달라면서, 먼저 헐가의 의족을 보여달라고 했다가, 그 다음엔 그것을 어떻게 떼고 붙이는지 시범을 해 달라고 요구하던 중에, 분리된 그녀의 의족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놓아둔다. 그녀가 다시 붙여놓으라고 거듭 요청하지만, 청년은 거절하며 성경 가방에서 위스키와 음란한 그림이 그려 있는 카드 한 팩과 작고 파란 콘돔 상자 하나를 꺼내더니, 위스키를 따라 그녀에게 건넨다. 그녀가 그에게 “너는 그냥 좋은 시골 사람 아니었어?”(Aren’t you just good country people?)라고 묻자, 그는 그 말이 맞지만 자기는 거기 붙잡혀 살지는 않는다고 응답하면서, “나는 언제 어느 때라도 너만큼은 착해.”(I’m as good as you any day in the week.)라고 대꾸한다. ‘내 다리 내놔!‘(Give me my leg!)라고 연거푸 외치는 헐가를 홀로 남겨 둔 채, 청년은 의족을 성경 가방에 넣고 떠나면서, 자기는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목초지에서 양파를 캐다가 그 지역을 떠나는 청년을 보면서, 호프웰 부인은 그를 ‘둔하고’(dull) ‘순진한’(simple) 소년이라고 언급하지만, 프리먼 부인은 어떤 사람은 그렇게 순진하게 살 수 없다면서, 자기는 결코 순진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The Lame Shall Enter First>

시청 소속 레크리에이션 지도사 셰퍼드(Sheppard)는 1년 전에 아내와 사별하고, 청소년기를 어렵게 보내는 아들 노턴(Norton)과 함께 산다. 그는 토요일마다 지역 소년원(the reformatory)에서 카운슬러로 일하면서, ‘보수는 없지만 모두가 외면하는 소년들을 돌본다는 자부심’(receiving nothing for it but the satisfaction of knowing he was helping boys no one else cared about)을 간직한다. 자기 아들도 ‘착하고 이타적인 사람’(be good and unselfish)이 되길 원했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가슴 아파한다. 한편 노턴은 외로움으로 힘들어하면서, 아버지의 헌신적 태도에 대해 소외감을 느낀다. 아버지가 자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에게 조롱 섞인 태도를 보이며 더욱 반항적이 된다. 셰퍼드는 자신의 일에만 몰두할 뿐, 아들의 외로움과 고민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럴 생각조차 없다. 어느 날, 셰퍼드는 소년원에서 루퍼스 존슨(Rufus Johnson)이라는 청소년을 만나게 된다. 신체적으로 장애[내반족(內反足, club foot)=발바닥이 안쪽으로 향한 위치에서 굳어 버린 상태]가 있는 루퍼스는 셰퍼드가 상담하는 아이 중 가장 똑똑하고도[지능지수가 140] 가장 불운한 청소년으로서 최근 소년원에서 풀려났다. 아버지는 그의 출생 전에 사망하고 어머니는 감옥에 있던 탓에 폭력적인 할아버지가 그의 양육권을 갖고 있었지만, 셰퍼드는 그를 도울 양으로 자기 집에 머물기를 희망한다. 분노와 반항심을 지닌 채 힘들게 사는 그를 도와주면 그에게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노턴에게도 긍정적인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노턴은 루퍼스의 존재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셰퍼드에게 받은 열쇠로 집에 들어온 루퍼스는 집에 있던 노턴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노턴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의 물건을 만진다. 얼마 후 집에 돌아온 셰퍼드는 응접실에서 백과사전을 읽고 있는 루퍼스를 발견하고 매우 기뻐한다. 루퍼스에게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셰퍼드는 노턴에게 도움이 필요하니 루퍼스에게 집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한다. 노턴이 반대했지만, 루퍼스는 동의한다. 셰퍼드가 떠난 후, 그는 노턴에게 셰퍼드가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데(“He thinks he’s Jesus Christ!”) 어떻게 그를 참고 사냐고 묻는다. 며칠 후, 셰퍼드는 루퍼스를 위해 다락방에 망원경을 설치해 주고, 루퍼스의 내반족[발바닥이 안쪽을 향한 위치에서 굳어 버린 상태]에 맞는 신발을 맞추어 주기도 한다. 한편 노턴은 처음에는 구석에서 투덜대며 망원경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루퍼스는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달뿐이라 지루하다며, 자기는 죽으면 지옥에 갈 거라고 말한다. 셰퍼드가 지옥이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고 말하자, 루퍼스는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 있다고 말하는 성경이 그 증거라면서 반박한다. 노턴은 엄마가 그곳에서 불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셰퍼드는 엄마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게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루퍼스는 노턴에게 예수님을 믿은 엄마가 구원받아 하늘에 계신다고 말하면서, 지금 죽으면 엄마가 있는 데로 가겠지만, 오래 살면 지옥에 갈 거라고 덧붙인다.

 

셰퍼드는 루퍼스와 노턴이 몰래 자주 이야기하는 것을 목격하고, 루퍼스의 행방이 묘연할 때가 자주 발생한다. 그때마다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루퍼스에게 주택 침입 및 기물 파손 혐의가 있다면서 셰퍼드에게 주의를 주고 간다. 그를 구금했다가 무혐의 처리해서 내보내 준 적도 있지만, 그의 범법 사실을 눈치챈 셰퍼드는 난감해 한다. 그의 비행을 바로잡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온갖 애를 다 쓴 자기가 그에게 자기 집에서 나가달라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가 스스로 나가기를 기대한다. 어느 날 아침, 셰퍼드는 루퍼스와 노턴이 성경을 아침 식탁에 가져와 함께 읽는 것을 본다. 루퍼스는 가게에서 성경을 훔쳤다고 말하고, 노턴은 지옥에 가지 않도록 회개하라고 간청하지만, 셰퍼드는 헛소리 그만하라고 말한다. 루퍼스가 너무 똑똑해서 성경을 믿지 못하면서 그런다고 셰퍼드가 말하자, 루퍼스는 성경 한 페이지를 찢어 입에 넣고 삼키며, 에스겔처럼 성경을 삼켰더니 달콤하다면서 사라진다. 저녁 식사 후 셰퍼드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노턴에게 루퍼스가 어디로 갔는지 묻는다. 노턴은 대답 대신 미친 듯이 손을 흔들며 망원경을 통해 어머니를 찾았다고 말한다. 셰퍼드는 이 말을 무시한 채, 노턴에게 15분 안에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말한다.

 

경찰이 루퍼스를 체포해서 그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루퍼스는 자신이 잡히고 싶었다고 주장한다. 루퍼스는 그곳에 있는 기자에게, 셰퍼드가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악마에 사로잡혀 있다”(the Devil has you in his power)라며 셰퍼드의 집에서 사느니 차라리 소년원에 가겠다고 말한다. 자기 오른손 왼손도 구분할 줄 모르는, ‘더러운 무신론자’(a dirty atheist)인 셰퍼드가 이 세상에 지옥이 없다고 말했다고 고발한다. 그 말을 들은 셰퍼드는 루퍼스에게 진실을 말하라면서, 자기 발이 주는 고통 때문에 그가 도덕적 혼란에 빠져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때 루퍼스는 몸을 던지며 소리친다. 자기가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는 것과 발은 아무 상관 없다! “절름발이가 먼저 오는 법이에요! 절름발이가 다 모일 거예요. 내가 구원받을 준비가 되면 예수님이 날 구원해 주실 거예요. 저 거짓말하는 더러운 무신론자가 아니라....”(The lame shall enter first! The halt’ll be gathered together. When I get ready to be saved, Jesus’ll save me, not that lying stinking atheist, not that…) 셰퍼드는 루퍼스를 태운 경찰차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내 아이보다 그 아이에게 더 많은 정성을 기울였어."(I did more for him than I did for my own child.)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려 한다. “자기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폭식가처럼 거기 선행을 욱여 넣기도 하고”(He had stuffed his own emptiness with good works like a glutton,), “자기에 대한 환상을 충족하기 위헤 자기 아이를 방치했다.”(He had ignored his own child to feed his vision of himself.)는 깨달음도 생겼다. 그러다가 망원경을 보던 노턴, 엄마가 저기서 손을 흔들었다며 자기에게 마구 손을 흔들던 노턴의 모습이 떠올라, 그에게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다시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말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간다. 그렇지만 노턴의 방에 도착했을 때 침대가 비어 있어 다락방에 올라가 보니, 노턴이 목을 매 자살한 것을 발견한다.

 

<파커의 등(Parker’s Back)>

파커와 그의 아내 세라 루스(Sarah Ruth)는 자기 집 현관에서 실랑이를 벌인다. 아내는 콩을 까면서, 남편이 왜 자기를 최대한 부려 먹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는 70세나 된 농장 주인 여자 밑에서 일하는지 불평해댄다. 파커는 자동차를 싫어하고, ‘사방에서 죄악을 냄새 맡고’(forever sniffing up sin), 담배와 술을 금하며, 화장도 하지 않는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보다 더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자기가 즐기는 것 대부분을 반대하는 못생긴 아내와 계속 함께 지내는 자신이었다. 결혼 전 파커는 14세 때 박람회에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문신으로 뒤덮인 한 남자의 모습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파커는 경이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존재가 평범함을 벗어나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치 눈먼 소년이 길을 걷다가 아주 살짝 방향이 틀어져서 자신도 모르는 새 종착자기 달라진 것 같았다.”(It was as if a blind boy had been turned so gently in a different direction that he did not know his destination had been changed.) 그는 곧 첫 문신[대포에 앉은 독수리]을 하고, 16세에 학교를 그만둔 후 직업학교에 다니다가 그곳도 그만두고 문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일했다. 그가 맥주를 마시고 싸움질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애통해 하던 어머니 베티 진(Betty Jean)이 어느 날 그를 끌고 부흥회로 향하자,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 자기 나이를 속이고 해군에 입대했다.

 

파커는 5년 간의 해군 복무 기간 동안, 전 세계 항구에서 호랑이와 표범[양쪽 어깨], 코브라[가슴], 매[허벅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위와 간], 심지어 외설적인 문신[복부]까지 새겼다. 그의 몸 앞면은 문신으로 덮였지만, 그의 등은 비어 있었다. 군 복무에 대한 만성적인 불만이 급성으로 변하여 그의 내부에서 날뛰는 통에 휴가 후에도 귀대하지도 않아, 9개월 동안 수감되었다가 불명예 제대 처분을 받았다. 제대 후 파커는 시골에 정착해 낡은 트럭으로 잡다한 일을 하면서 지냈다. 세라 루스를 만났을 때는 사과를 사서 시골 농부들에게 팔고 있었다. 트럭이 고장 났을 때, 세라 루스를 만났다. 그가 트럭을 고치다가 손을 다친 척하며 소리 높여 욕설을 반복하자, 갑자기 세라 루스가 다가와 가시 돋친 손으로 그의 뺨을 탁 때려 그를 쓰러뜨렸다. 마치 ‘매의 눈을 가진 거인 천사의 해묵은 무기에 맞았다’(a giant hawk-eyed angel wielding a hoary weapon)고 생각될 정도였다. 파커가 손이 부러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세라 루스가 그의 손을 검사하던 중에 그의 문신을 접했다. 파커가 안 보이는 것들도 봐야 한다고 제안하자, 사라 루스는 얼굴을 붉히며 엄격한 모습을 누그러뜨렸다. 그때 파커도 흥미를 느꼈다.

 

파커는 나중에 사과도 가져가고 복숭아 바구니도 들고 가기도 하며 세라 루스를 만나 교제한다. 멜론 두 개를 들고 갔을 때야 비로소 세라 루스가 파커의 이름을 묻는다. 파커가 그녀에게 귓속말로 자기 이름을 밝히자, 그녀는 경건한 목소리로 ‘오바디야 엘리후’(Obadiah Elihue)라고 말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파커도 그녀의 이름이 세라 루스 케이츠(Cates)인 것을 알게 된다. 한번은 파커가 그녀에게 트럭 뒷좌석에 함께 누워보자고 유혹하지만, 그녀는 결혼 전에는 안 된다면서 손을 뻗는 파커를 확 밀어버린다. 두 사람은 지방법원 판사실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세라 루스가 교회는 우상숭배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커는 결혼이 세라 루스를 전혀 바꾸지 못한 것을 알고 더없이 우울해진다. 파커는 견딜 수 없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문신을 새기고 싶었지만, 남은 곳이 등뿐이라는 점 때문에 좌절한다. 이제 그는 세라 루스의 마음을 사로잡는 동시에, ‘그녀를 복종시킬 제대로 된 문신 소재를 찾는 것’(get exactly the right one to bring Sarah Ruth to heel)이 긴급했다. 그런데 농장에서 트랙터를 타고 들판으로 가던 파커가 어떤 문신을 새길지 몰두해 있다가, 갑자기 태양이 자기 앞뒤로 왔다 갔다 하고 농장 주인 여자가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한 나무가 갑자기 자기에게 손을 뻗는 것을 느낀다. 결국 그 나무를 들이받아 자기는 내동댕이쳐지고, 트랙터는 뒤집힌 채 화재가 발생하여, 트랙터는 폭발하고 그 나무에는 불이 붙는다. 파커는 긴장이 극에 달해, 트럭으로 80킬로미터를 달려 도시로 들어간다.

 

그는 문신 시술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관련된 문신 책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면서, 운명의 도안을 찾으면 신호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문신 책을 넘기던 중 ‘엄격한 눈빛에 머리에는 후광을 두른 비잔틴 그리스도의 평면적 얼굴’(the haloed head of a flat stem Byzantine Christ with all-demanding eyes)이 파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파커는 책에 있는 그대로 자신의 등에 그 비잔틴 그리스도의 문신을 새겨달라고 요청한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문신사는 파커의 등에 문신을 새기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날 밤, 파커는 도시의 노숙자 쉼터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문신 시술소로 돌아와 문신을 완성한다. 왜 그 그림을 새기고 싶어 하느냐고 묻는 문신사에게, 파커는 구원받은 임산부 아내에게 잘 보이려고 그 문신을 한다고 설명한다. 문신이 완성된 후 파커는 처음에는 문신을 보지 않으려 하지만, 문신사는 결국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문신을 보도록 강요한다. 그 시술소를 나온 파커는 과거에 자주 방문했던 당구장으로 향한다. 그곳의 남자들이 파커의 등에 새겨진 새 문신을 확인하고는, 처음엔 침묵을 지키다가 파커가 종교가 생겨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다면서 조롱하기 시작한다. 파커는 싸움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술집에서 쫓겨나지만, 당구장 뒷골목에서 ‘사실과 거짓이 뒤얽힌 거미줄’(a spider web of facts and lies) 같은 자기 영혼을 돌아본다. 그리고 “자기가 등에 새긴 눈은 복종을 바쳐야 하는 눈”(The eyes that were now forever on his back were eyes to be obeyed.)이라는 점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도착한 파커는 문을 두드리며 세라 루스에게 자신을 들여보내 달라고 애원한다. 처음에 세라 루스는 거절하지만 파커가 자신의 본명인 오바디야 엘리후라고 부르자 문을 열어준다. 안으로 들어온 파커는 트랙터 사건 처리에 대해 언급하는 세라 루스에게 자신의 문신을 보여주며, 떠들지만 말고 그 그림을 보라고 말한다. 누군지 몰라 하는 그녀에게 그가 하나님이라고 소리치자, 그녀는 하나님은 볼 수 없는 영혼이기 때문에 ‘이건 우상숭배야!’(Idolatry!)라고 거듭 외친다. 자기는 거짓말과 허영’(lies and vanity)은 참을 수 있지만, 자기 집에서 우상숭배는 원하지 않는다면서, 빗자루로 파커의 어깨를 때리기 시작한다. 너무 놀란 파커는 저항하지도 못하고 빗자루를 맞았고, ‘문신한 그리스도의 상 위로 흉터가 부풀어 올랐다.’(large welts had formed on the face of the tattooed Christ.) 그는 현관으로 걸어가고, 세라 루스는 빗자루를 창밖으로 흔들어 거기 묻은 흔적을 털어 낸다. 세라 루스는 피칸 나무(the pecan tree)를 바라보고 그 눈은 더욱 차가워진다. 거기에 오바디야 엘리후가 피칸 나무에 기대어 아이처럼 울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