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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보편적 원리를 실천하라

도덕규범을 좇는 향기로운 삶과 연약한 인간성을 다룬 심리적 로맨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3)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7. 18.

도덕규범을 좇는 향기로운 삶과 연약한 인간성을 다룬 심리적 로맨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3)

-자기망상과 진실이 교차하는 심리적 로맨스-

호손이 이 소설의 머리말에서 고백하는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달빛이 “로맨스 작가”(a romance-writer)가 “자기의 환상적인 손님들”(his illusive guests)과 친해지는 데 가장 적합한 매체가 되어야 마땅한데, 자기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호손이 “주홍 글자”를 ‘로맨스’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맨스는 문학과 연관하여 주로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가리킵니다(“옥스퍼드 영어 사전”). 첫째는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설정이나 사건이 묘사되거나, 선정적(sensational)이거나 흥미진진한(exciting) 사건이나 모험이 중심 주제를 이루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문예 사조상으로 낭만주의(Romanticism) 계열에 속하지요. 이런 의미의 로맨스는 고풍스럽고 역사적이거나 판타지적인 요소를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였겠지요. 20세기 최고의 문학평론가로 회자되는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가 역사 소설(historical novels)은 대부분이 로맨스라는 원리를 제안하기도 했지요. 둘째는 감상적(sentimental)이거나 이상적인(idealized) 방식으로 낭만적인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이 장르는 역사적으로 부침을 거듭하다가, 현대 대중문화에서는 주로 우여곡절 끝에 해피 엔딩이 이루어지는 사랑 이야기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역사적인 상황을 덧붙여 설명해 보겠습니다. 로맨스에 영향을 끼친 낭만주의(Romanticism)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서양을 물들였던 이 문예 사조였습니다. 18세기 중반부터 유럽에서 맹위를 떨치던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에 반기를 들면서 형성되었지요. 신고전주의는 그리스와 로마 예술의 미적 가치인 조화(balance), 질서(order), 명료성(clarity)을 강조하면서, 그 당시 이성(reason)과 합리성(rationality)을 절대화하던 계몽주의를 포용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사조와 정반대 입장을 취한 것이 바로 낭만주의였지요. 그래서 낭만주의는 주관성(subjectivity), 상상력(imagination), 자연에 대한 감상(appreciation of nature)에 방점을 찍고, 과거를 이상화하고(idealization of the past),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것에 대해 매혹을 느끼며(fascination with the exotic and the mysterious), 자연과 초자연을 경외하는(reverence of nature and the supernatural) 입장을 취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낭만주의는 물리적 유물론(physical materialism)을 거부하면서, 인본주의에 기반을 둔 고전적인 가치들(the classical)보다는 신비롭고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것들을 옹호하는 중세적인 가치들(the medieval)을 선호하는 문예 사조였습니다. 여기에다 19세기 중반에 형성된 문예 사조 한 가지를 더 소개합니다. 바로 사실주의(Realism)입니다. 문학의 대상인 인생이나 자연을 이상화하거나 형식화하거나 낭만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실생활에 드러난 그대로 객관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입장을 가리킵니다. 낭만주의가 감정적이고 상징적이며 초월적인 것을 추구한 데 반해, 사실주의는 “객관적 현실”(objective reality)을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실체를 가진 일상적인 활동과 평범한 삶을 보여 주는 데 중점을 둡니다

 

이상의 정보를 참고해 보자면, “주홍 글자”는 어느 쪽의 로맨스에 속할까요? 두 번째 부류인 낭만적 사랑 이야기가 되려면, 감상적이거나 이상적인 방식으로 내용이 전개되면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플롯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결말을 해피 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딤스데일과 칠링워스는 죽고, 상당한 유산을 받은 펄과 헤스터는 그 마을을 떠나게 되었으며, 나중에 그곳으로 돌아온 헤스터가 자선 사업을 펼친 후 자신의 주홍 글자가 더 이상 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을 맞이한 것 말입니다. 고상한 마무리이지만, 주인공이 낭만적인 사랑의 결말을 누리는 해피 엔딩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해피 엔딩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헤스터와 딤스데일이 천형 받는 곳을 벗어나 영국에서 재결합하여 딸 펄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요? 이것이 이상적인 엔딩일 리가 없습니다. 근원적인 문제 해결을 포기한 채 도망쳐서 얻은 일시적인 안정에 불과하니까요. 칠링워스가 살아 있는 한, 영국으로 도주한다는 것이 불안과 양심의 가책을 잠재우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마도 헤스터와 딤스데일이 공적으로 회개하고, 헤스터가 칠링워스와 이혼한 후 딤스데일과 정식으로 재혼해서 펄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것 정도가 가능한 헤피 엔딩 시나리오가 아닐까 합니다. 당시 매사추세츠에서는 간음한 자들을 사형한다는 법률이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칠링워스가 암스테르담에서 보스톤으로 헤스터를 먼저 보낸 후 2년씩이나 아무런 연락 없이 홀로 지내도록 한 것은 얼마든지 성서적인 이혼 사유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세계관은 이런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간음한 자는 사형이라는 법률이 작동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칠링워스도 자기가 손가락만 끄덕하면 딤스데일을 처형대(the gallows)로 몰아낼 수 있다고 헤스터를 위협하지요. 헤스터가 사형을 피한 것은 그녀의 남편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는 추정 때문이었습니다. 딤스데일이 예외로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요는 이 소설에서는 두 번째 부류 로맨스의 전매특허인 낭만적 사랑이 영그는 해피 엔딩을 모색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이 소설은 목사와 유부녀의 간음이라는 선정적인 사건과 그 결과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불가해하며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자주 등장하는 첫째 부류의 로맨스에 속합니다. 펄이 마치 자기 부모의 비밀을 죄다 아는 것처럼 질문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세요. 그리고 주홍 글자가 딤스데일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든지, 그것이 밤하늘에 나타났다든지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지요. 여기서 이 소설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희귀한 처벌을 당하는 두 사람의 심리적 상태가 다각도로 묘사됩니다. 외부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감정도 있지만, “영혼을 유혹하는 자”가 야기한 생각도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형성된 확신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각 상황 속에서 표현된 심리 상태가 그저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것인지, 자기망상에 불과한 것인지, 혹은 진실을 내포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게 절실합니다.

 

예컨대, 헤스터가 선택의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을에 계속 머문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을 잠깐 살펴봅시다. 우선은 숙명(fatality)이 언급됩니다. 그녀가 그 땅에 박아 넣은 뿌리가 바로 자신의 죄와 오명이었기에, 그것들이 강철로 만든 사슬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차원에서 전개된 것이지,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애인과 재결합하는 것(union)에 대한 기대도 언급됩니다. 두 사람이 장차 서게 될 최후의 심판대(the bar of final judgment)가 “함께 끝없이 죄의 응보를 받는 미래를 약속할 결혼 제대(祭臺)가 될 것”(make that their marriage-altar, for a joint futurity of endless retribution)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대는 명백한 사단의 유혹으로서 자기망상의 끝장판이었지요. 최후의 심판은 우리가 각자 자신에게 해당하는 보응을 받는 장일 뿐 아니라, 그 이후에는 결혼생활이란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5:10, 마가복음 12:24-25). 그리고 그녀와 딤스데일이 주님 앞에 진정으로 죄를 고백한다면 그 죄는 어떤 것이라도 바로 용서받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1:9). 마침내 그녀가 그 마을에 거주하는 이유에 대해 내린 결론은 더 성스러운 순결을 획득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는 언급도 등장합니다. 즉 날마다 그녀가 감내하는 수치의 고통은 순교(martyrdom)이므로, 그녀의 영혼을 정화하여 자신이 상실한 순결과는 다른 더 성스러운 순결을 얻게 해 줄 것으로 여기지요. 하나님의 징계로서 받는 고난이 우리 영혼을 더욱 순결하게 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히브리서 12:11), 그것을 순교로 여기는 것은 자기망상입니다. 그녀가 수치를 당하게 된 것은 자신의 죄악 때문이었지, 자신의 신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처형대에 선 사람들: 수치스러운 죄와 영광스러운 구원-

이 소설에 세 번 등장하는 처형대(the scaffold) 장면은 작품의 구성뿐 아니라, 그 주제를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처형대는 범죄한 사람을 사형하는 곳이지만, 여기에서는 그 범인이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수치를 당하면서 속죄하는 곳입니다. 첫 장면(2장)에서는 헤스터가 주홍 글자를 가슴에 단 채 많은 주민 앞에서 수치를 당하고, 중간 장면(12장)에서는 딤스데일 목사가 "헛된 속죄의 흉내를 내며"(in this vain show of expiation) 서 있고, 마지막 장면(23장)에서는 그가 자발적으로 그곳으로 올라가 "스스로 수치를 받습니다!"(take my shame upon me!) 소설의 두 키워드인 수치(shame)속죄(expiation)가 이 처형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간음죄를 범한 헤스터와 딤스데일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고뇌하고 고통당합니다. 헤스터는 간음한 자를 상징하는 주홍 글자를 가슴에 단 채 많은 주민의 수치스러운 비난과 천대를 받는 한편, 딤스데일은 자백하지 않은 죄로 인해 극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데다가 헤스터가 당하는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로 인해 더욱 난감해 합니다. 그러던 중 결국 헤스터와 함께 처형대에 올라 수치스러운 자기 죄를 속죄합니다. 

 

이 두 사람의 경험이 우리와 어떻게 연관될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들이 아니더라도 죄의식은 인류가 공통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보편적인 도덕법을 어떤 식으로든 위반하며 살기 때문이지요. 다만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뿐입니다. “실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만 단지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걸 깨닫는다면 좋은 세상이 열리련만.” 왜 이런 사람들이 존재할까요?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에서 두 가지 원인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지난 세월 동안 윤리가 편향적으로 발전한 결과, 사람들이 친절(kindness) 혹은 자비(mercy)라는 한 가지 덕목은 소중하게 여긴 반면, 다른 악덕들은 무감각하게 대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기는 그 친절이란 덕목을 갖추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자기가 실행하는 다른 악덕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위해 버리고 만 것이지요. 둘째는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에서 비롯된 “억압과 억제 이론”(the doctrine of repressions and inhibitions)이 일반인들에게 끼친 영향 때문입니다. “수치심”(the sense of Shame)은 위험하고 해로운 것이므로, 그런 감정을 품고 있는 것들을 은폐하려고 하지 말고 터놓으라는 것이지요.

 

<죄의 본질>

이 소설을 번역한 김욱동 교수의 논평을 읽으면서 루이스가 제안한 이 두 가지 원인이 떠올랐습니다. 김 교수가 이 작품이 죄를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면서 언급한 두 가지 측면이 루이스의 두 가지 원인과 연관되었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는 이 소설이 죄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며,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일 뿐이라는 점을 드러낸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죄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말은 루이스의 첫째 원인과 결부되고, 죄가 주관적이라는 말은 루이스의 둘째 원인과 연결됩니다. 김 교수의 주장에 대해 두 가지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가 죄의 본질이라면서 말한 두 가지 측면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사람들이 죄에 대해 두드러지게 취하는 두 가지 경향입니다. 즉 자기 기분에 드는 덕목은 용인하고 실제 행위로 저지르는 악덕은 무시하는 한편, 부정한 행동을 하거나 거짓말하고 시기할 때 드는 수치감을 은폐하려는 태도가 인류의 오래 밴 습관이라는 말입니다. 둘째, 김 교수가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든 소설의 예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딤스데일은 자기들의 간음 행위를 죄로 인정하고 끔찍한 죄의식으로 고뇌하지만, 헤스터는 그 행위에 나름대로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아래와 같이 고백하는 예를 듭니다. 

 

“없고말고요. 단 한 번도 없었지요! 우리가 저지른 일에는 그 나름대로 신성함이 있었어요. 우리 자신이 그것을 느꼈잖아요! 우린 서로에게 그렇다고 얘기했지요! 당신은 그것을 잊으셨나요?”(Never, never! What we did had a consecration of its own. We felt it so! We said so to each other! Hast thou forgotten it?)

 

과연 이 헤스터의 고백에 근거해서 이 소설이 죄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내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고백의 문맥이 말하는 바는 다릅니다. 헤스터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칠링워스가 자기 남편이었다는 것을 딤스데일에게 고백하는 상황에서였습니다. 그런 상황을 납득하지 못해 감정이 격양된 딤스데일 목사가 간통에 연루된 자기들의 처지를 변호하는 한편, 칠링워스를 더 정죄하면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지요. 하나님이 자기들을 용서해 주시길 빈다.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인”(the worst sinner in the world)이 아니고, 자기보다 더 흉악한 죄인은 따로 있다. 그가 바로 “냉혹하게, 신성한 인간의 마음을 범하는”(violated, in cold blood, the sanctity of a human heart) 일, 즉 복수(revenge)를 감행하려는 칠링워스다. 우리는 그런 짓을 범하지는 않았다! 이 주장에 대한 헤스터의 답변이 바로 김 교수가 언급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견해가 아니라, 자기들의 범죄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들이 소중하게 느낀 감정을 강화하려는 심리적 발버둥질에 불과합니다. 그녀의 말에 물음표 한 번에다 느낌표가 세 번씩이나 등장하는 점에 주목해 보세요. 그렇다고 느끼고, 말하고, 계속 기억하지 않는 한, 맨정신으로는 견지하기 힘든 입장이라는 뜻입니다. 간통행위에 ‘그 나름대로 신성함이 있었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그 나름대로 신성함이 없는 범죄가 어디 있을까요? 더구나 ‘신성한 인간의 마음을 범하는 것’으로 따지자면, 간통죄에 맞먹을 만한 다른 게 또 있을까요? 헤스터는 이 언급을 통해 죄의 의미를 재규정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 세상에는 엄연히 ‘신성한 것’이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품고 있는 신성함을 범하는 것’이 죄악이라는 자연법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반증하고 있지요.

 

이 소설은 죄의 본질을 새롭게 규정하지 않습니다. 죄는 이 소설을 관통하는 엄연한 실재입니다. 자신이 범한 죄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헤매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다각도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 소설은 죄 자체를 상대적이고도 주관적인 관념에 불과한 것으로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서가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대로, 죄에 관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딤스데일이 죽기 전 헤스터에게 고백한 유언을 한번 묵상해 보세요. 그 속에 죄가 무엇인가에 대한 적실한 통찰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헤스터가 죽어가는 딤스데일에게, 이미 겪은 숱한 고통을 통해 함께 죗값을 치른 자기들이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못할 뿐 아니라 영생을 함께 누릴 수 없느냐고 묻자, 그가 이렇게 엄숙하게 답변하지요.

 

“헤스터, 조용히 해요, 조용히. 우리는 법을 어겼어요. 여기에서 끔찍하게 드러난 죄 말이에요. 당신은 이것만 생각해요. 나는 두려워요, 두려워. (I fear! I fear!) 우리가 신을 망각할 때 – 우리가 서로의 영혼에 대한 경외심을 위반했을 때 – 우리가 내세에서 순수하게 영원히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일 거예요. (It may be, that, when we forgot our God,—when we violated our reverence each for the other’s soul,—it was thenceforth vain to hope that we could meet hereafter, in an everlasting and pure reunion.) 신은 알고 계시고 또 자비로우시지요. 신은 무엇보다도 내 고통 속에서 자비를 보여 주셨어요. 내 가슴에 이 불타오르는 고통을 주시고, 저 어둡고 무서운 노인을 보내셔서 그 고통이 항상 타오르게 하시고,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셔서 사람들 앞에서 승리에 찬 치욕의 죽음을 맞도록 하시면서 말이에요. 이 고통들 중 어느 하나라도 없었다면 나는 영원히 타락했을 거예요. 주님의 이름 찬미받으소서! (Praised be his name!)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안녕!”

 

죄의 본질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어진 다른 사람의 영혼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원리를 범하는 게 죄라는 말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순수한 부활의 몸으로 영생을 누릴 소망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식을 느끼며 당신께 자백하게 하시고, 필요하다면 수치스럽지만 공적으로 고백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마지막 처형대로 오르기 위해 딤스데일이 헤스터의 도움을 구하며 말하는 것에 주목해 보세요.

 

지난 7년 전에, 나 자신의 죄와 비참한 고뇌 때문에 차마 하지 못한 일을 이 마지막 순간에 감행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그토록 두렵고 자비로우신 하나님(Him, so terrible and so merciful, who gives me grace, at this last moment, to do what—for my own heavy sin and miserable agony—I withheld myself from doing)의 이름으로, 자, 어서 이리 와서 당신의 힘으로 나를 부축해 주오!”

 

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겸허하게 응답하는 것이 바로 영원히 버림받을 자기 영혼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처절하게 이 길을 밟은 딤스데일에게 구원의 길은 열렸습니다. 처형대에서 죄를 고백하고 자기 앞가슴의 징표를 보일 때, 그는 심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얼굴에는 승리를 거둔 사람처럼 승리의 붉은빛을 띠고(with a flush of triumph in his face) 서 있었습니다. 그의 유언을 받들어 여생을 보낸 헤스터에게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죄와 구원에 관한 성서의 입장이자 딤스데일의 통찰이 담긴 이런 언명이 너무 자존심 상하고 수치스럽게 느껴진다는 분들에게 한 마디 덧붙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수치심 그 자체가 가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 때문에 얻게 되는 영적 통찰과 회개의 기회 때문에 가치 있다고 봅니다. 그럴 기회를 번번이 놓치는 것이 과연 이상적인 영적 상태일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파렴치함”(shamelessness)을 “영혼의 최저점”(as the nadir of the sou)으로 여기는 게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경향이 아닌가요?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지은 죄와 허물에 대해 수치심(shame)을 느끼는 게 대수일까요? 도리어 수치심을 도무지 느끼지 못한 채 그저 터놓기만 하면 된다는 “솔직함”(frankness)이야말로 싸구려 정직에 불과하지요(“고통의 문제”),

 

<죄의 결과>

다른 한편으로 김 교수는 이 작품이 죄의 결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라는 전통적 그리스도교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헤스터가 죄를 죽음에 이르는 길로 여긴 게 아니라 동료 인간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 길이 된다고 이해했다는 점을 예로 들었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 이전보다 더 동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었고, 사회에 보다 쓸모있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동네 사람들이 자기 마을에 들어온 낯선 사람들에게 헤스터를 소개하면서, 가난한 자에게는 친절을, 병자에게는 도움을, 괴로워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안겨 주는 이라고 치켜세워 주는 예도 덧붙입니다. 이런 사정은 딤스데일에게도 통한다고 봅니다. 그가 죄의식에 시달렸기 때문에 다른 목회자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의 천부적인 지적 능력이나 도덕적 감수성이나 메시지 전달력이 “날마다 겪는 가책과 고뇌로 이상하게 활발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라는 예를 듭니다.

 

김 교수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헤스터가 주홍 글자를 달고 참회하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죄의식을 품고 고뇌하는 이들의 심정을 읽고 위로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주홍 글자로 인해 헤스터보다 더 고뇌하며 살아야 했던 딤스데일도 죄에 더욱 민감한 처지가 되어 겸허하게 하나님과 관계 맺으며 영적인 이해의 깊이를 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측면이 어떻게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을 전적으로 뒤엎는다는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조금만 살펴보면 김 교수가 간과한 측면이 드러납니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가치관에 대한 그의 이해는 죄의 삯은 죽음이라는 데서 멈춰 있습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김 교수가 그 가치관이 비롯되었다고 언급한 성구(로마서 6:33)를 한번 주목해 보세요.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fre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그 구절 중 후반절은 소개되거나 논의되지도 않았습니다. 이 구절의 핵심부인 하반절을 제쳐두고, 전반절만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가치관이라고 운운한 것은 성급하고 무책임한 판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죄의 결말인 죽음을 지적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저 허락되는 영생을 열어 밝힙니다. 헤스터나 딤스데일이 결국 발견한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망각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경외하지 않은 죄를 범한 것과 그 사실을 진심으로 고백하고 용서받았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영혼을 유혹하는 자”(the tempter of souls)의 부추김으로 몽환적인 사변과 상상으로 몸부림칠 때 그들은 고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자기 죄를 드러내지 않은 딤스데일은 헤스터보다 더 격심한 고통 가운데 처합니다. 그 위선적인 삶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 기쁨과 자양분”(the spirit’s joy and nutriment)이 되도록 배려해 주신 주변의 모든 현실에서 그 진수(the pith and substance)를 다 빼앗기게 되고, 그림자(a shadow) 같은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본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Father in Heaven)를 찾는 이들이었습니다. 딤스데일이 헤스터에게 나눈 유언에 드러난 대로,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기 죄를 고백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헤스터는 죄의 열매이자 하나님이 베푸신 엄숙한 기적(the solemn miracle)의 선물인 펄을 천국으로 이끄는 과정을 통해 자신도 천국으로 인도되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구원을, 상호 협력을 통해[if she bring the child to heaven, the child also will bring its parent thither!] 보장해 주시겠다는  창조주의 신성한 서약(the Creator’s sacred pledge)이 성취된 결과입니다. 그리고 딤스데일의 유언아 끼친 영향으로, 헤스터는 자발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속죄를 실행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각자 자신이 범한 죄의 본질을 깨닫고, 그 죄를 참회하고 용서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 찬미받으소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