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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보편적 원리를 실천하라

도덕규범을 좇는 향기로운 삶과 연약한 인간성을 다룬 심리적 로맨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5)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7. 31.

도덕규범을 좇는 향기로운 삶과 연약한 인간성을 다룬 심리적 로맨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5)

-두 가지 의미가 상존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

호손의 “주홍 글자”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품이라고 문학평론가들 사이에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다양한 장면의 묘사들이 난해하거나 모호할(ambiguous) 때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는지와는 상관없이, 소설을 정독하고 그 다양한 요소들을 해석하는 데 열린 마음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볼썽사나운 애정 행각을 그린 작품, 도덕법의 정수를 탐구한 것, 인간의 내면세계를 정교하고도 시적으로 해부한 것, 수치와 고통을 영웅적으로 극복한 헤스터를 주인공으로 소개한 것, 혹은 헤스터는 조연에 불과하고 내적 고통을 감내하면서 자기 죄를 보속하는 딤스데일이 대미를 장식하는 것으로 해석한 평론가뿐만 아닙니다, 심지어 미국인의 분열된 내면세계를 보여 주는 작품, 혹은 미국인의 거짓된 믿음을 폭로하는 것으로 인식한 학자나, 균형 잡힌 문학적 형식을 갖춘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평론가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각들이 얼마나 적절한 것인지는, 얼마나 소설의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잘 반영하고 있는지로 판가름 납니다. 모쪼록 신선하고도 다양한 관점으로 이 작품을 재해석하는 논평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난해하고 모호한 측면과는 별개로, 인간 만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상존한다는 점을 이 소설에서 배웁니다. 특히 죄나 죄의식에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함을 깨닫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인간에 대해 그릇된 태도를 취하거나 위해를 가한 측면이 존재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죄악을 참회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거나 심화하고, 이웃에 대한 태도가 교정되면서 인격적인 성숙을 이룰 수가 있지요.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소설 속에서 소개되는 예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1) 펄의 역할. 헤스터와 딤스데일 사이에서 태어난 펄은 사단의 자식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각각 묘사되고 있습니다. 헤스터의 죄악을 경멸하면서 쑥덕공론하던 마을 사람들은 펄을 “악마의 자식”(a demon offspring)이라고 떠들어 댔습니다. 그 어미의 죄 때문에 탄생했으니, “어떤 추잡하고 악독한 목적”(some foul and wicked purpose)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경륜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주홍 글자로 낙인찍은 그 죄악의 결과로 헤스터에게 “사랑스러운 아이”(a lovely child)를 주셔서, 헤스터와 딤스데일이 “인류와 그 자손에게 영원히 연결되도록”(connect her parent forever with the race and descent of mortals) 하셨습니다. 헤스터도 이런 하나님의 자비를 믿지 못했지만, 펄은 그런 역할을 마지막까지 잘 완수했습니다. 마지막 처형대 장면에서 밝혀진 대로, 펄은 아빠의 속죄를 키스로 인증해 주었고, 엄마의 참회를 촉구하는 ‘고뇌의 사자’ 노릇도 마감했습니다. 펄이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한 덕에, 헤스터와 딤스데일은 지난 170년 동안, 비록 죄악을 범했지만 진정한 참회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누림으로 갱생한 모든 사람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만 존재합니다. 참회한 죄인철없는 죄인, 두 부류입니다.

 

(2) 주홍 글자의 역할. 헤스터가 가슴에 달고 다녀야 했던 주홍 글자도 이중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즉 간음죄를 범한 자를 상징하는 역할과 그 죄인을 성결하게 지켜주고 그 죄인이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로하고 섬기는 일을 돕는 역할을 각각 감당합니다. 당시의 사회가 헤스터가 지은 죄의 표상으로 달아준 주홍 글자 ‘A’는 ‘Adultery’(간음) 혹은 ‘Adulterer’(간음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단어들은 소설 속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나중에 사람들은 ‘A’의 의미를 ‘Able’(유능한)이나 ‘Angel’(천사)이라고 이해합니다. 많은 이가 그녀에게서 너무나 많은 선행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A’를 원래 의미로 해석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지요. 급기야 그들은 “우리의 헤스터”(our Hester) 혹은 “우리 마을의 헤스터”(the town’s own Hester)라고 불렀고, 그들의 눈에는 그 주홍 글자가 “수녀의 가슴에 달린 십자가”[the cross on a nun’s bosom, 십자가라는 단어의 유일한 용례]처럼 보였습니다. 헤스터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 재난에 처한 이들, 걱정거리로 침울해진 가족 및 환자들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한 곳에서, 주홍 글자는 천상의 빛을 발하며 그들을 위로해 주고 인도해 주었습니다.

 

헤스터는 주홍 글자를 옷가슴에 달고 다녔지만, 딤스데일은 그 글자를 몸과 마음속에 품고 다녔습니다. 그의 말대로, “가슴속에서 남몰래 불타고 있습니다!”(Mine burns in secret!) 그런데 단 한 번 저지른 그 수치스러운 범죄가 “아물지 않은 상처”(unhealed wound)로 남아 통증을 일으킨 덕에, 그는 항상 살아 있는 양심을 견지하면서 죄를 전혀 범하지 않은 경우보다 더 덕행(virtue)을 닦으며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죄는 욕정(passion)에 이끌려 지은 죄였을 뿐, 원칙(principle)이나 목적(purpose) 차원에서 범한 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왜곡하는 이단적인 죄를 범하거나, 하나님의 영광 대신 자기의 명성이나 인기를 추구하는 의도적인 죄를 범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비참한 죄인이었지만”(wretched and sinful as I am) 하나님의 섭리가 보낸 곳에서 사역하고, “길 잃은 영혼이었지만”(lost as my own soul is) 다른 영혼들을 위해 봉사하며, “불충실한 파수꾼이었지만”(though an unfaithful sentinel) 자기에게 부여된 초소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주홍 글자라는 “불타는 치욕의 낙인”(scorching stigma)은, 7년간이나 충성스럽게 이웃의 필요를 채워 준 여성 자선가와 자기 임지를 지키며 많은 영혼을 돌보아 준 목회자를 낳았습니다.

 

참회한 죄인, 헤스터와 딤스데일을 묵상하던 중 그리스도인 두 명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인생 말기에도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디모데전서 1:15)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과 “영혼의 질병”을 앓고 있는 죄인으로 자신을 인식한 아우구스티누스(354-430)입니다. 그들은 각각 살기(殺氣)를 띠고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고 감금함으로 주님을 박해한 악행에 대한 죄의식과 끊임없이 끌어 오르는 육신의 정욕으로 방탕한 삶을 영위한 과거에 대한 죄의식으로 고뇌했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역사를 통해 압니다. 그들의 죄의식과 참회가 하나님을 믿고 당신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기적적인 중생(重生)의 삶을 낳았다는 점 말입니다. 이런 측면이 바로 키르케고르가 주장한 인간 실존의 3단계 중 마지막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즉 죄의식과 참회라는 처절한 실존적 절망을 겪는 과정을 통해서만 “무한한 자기 체념”이 형성되고, 이 ‘무한한 자기 체념’이야말로 온전한 신앙의 세계로 이어지는 최후의 단계라는 것이지요(김용규, “신”). 결국 헤스터와 딤스데일이 체험한 주홍 글자의 이중성, 즉 수치스러운 죄의식과 참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영광스런 열매는, 인류 역사를 통해 연면히 드러난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이렇게 '무한한 자기 체념'으로 인도해 준 ‘주홍 글자’가 존재하지 않을까요?  

 

(3) 사랑과 증오의 관계. 소설의 결말부에 보면, 그림자 같은 인생을 영위한 칠링워스를 자비롭게 이해해 보려는 한 가지 논의가 등장합니다. 그 부분을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증오와 사랑(hatred and love)이 근본적으로 같은 것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두 감정 모두에게 깊은 친밀감과 마음의 지식(intimacy and heart-knowledge)이 필요하므로, 어떤 개인이 정서적이고도 영적인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의존하게 된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passionate lover)과 미워하는 사람(passionate hater) 모두 그 대상이 사라지면 허무함을 느낀다. 철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열정(passion)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이고, 하나는 천상의 광채(a celestial radiance)로, 다른 하나는 어스름하고 음산한 빛(a dusky and lurid glow)으로 인식되는 것만 다를 뿐이다. 영적인 영역에서, 피차 희생자(mutual victims)인 그 늙은 의사와 그 목사는 자신들이 품은 지상의 증오가 황금빛 사랑(golden love)으로 바뀐(transmuted) 것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어떻습니까? 사랑과 증오가 철학적으로는 같은 열정이고, 영적으로는 증오가 찬란한 사랑으로 승화된다는 이 주장이 납득되시는지요? 언어학적으로 보면, 사랑과 증오는 서로 반대말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보아도, 사랑과 증오는 서로 다른 감정입니다.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는, 우리에겐 양립 불가한 사랑과 두려움(fear)이라는 두 감정만 존재한다면서, 두려움에서 증오가 비롯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인생의 본질적인 측면들을 다루는 철학적 시각으로 보면, 홀로는 설 수 없고 타인에 깊이 의존하는 이 두 열정이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고 이 소설은 주장하지요. 그 시각보다는, 함께 제시된 영적인 안목이 제 마음에 더 와닿습니다. 사랑과 증오가 어떤 대상에 초점을 두는 것은 같지만, 그 증오의 대상도 결국엔 사랑의 대상으로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증오하는 것은 그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이 범한 죄나 악행이기 때문이지요. 그 죄 자체는 결코 묵인되거나 용인될 수 없으나, 그것은 용서되거나 처벌됨으로써 해소되기 마련입니다. 자연적인 반응으로 일정 기간 누군가를 증오할 수는 있지만, 그 증오는 ‘황금빛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 증거를, 칠링워스가 생애 마지막으로 이룬 찬란한 반전(反轉)에서 발견합니다. 그는 죽으면서, 그 마을과 영국에 있는 “매우 상당한 양의 재산”(a very considerable amount of property)을 “헤스터 프린의 어린 딸 펄”(little Pearl, the daughter of Hester Prynne)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사랑과 증오도 ‘같은 동전의 양면’(two sides of the same coin)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의 존재 이유-

이 소설을 정독하고 논평하면서 내일(8월 1일)이면 5주년을 맞는 이 블로그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먼저, 문학 작품을 통해 성찰하는 태도를 길러 인문학적 소양을 배양하려는 이들을 돕는 역할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화적, 경제적, 민족적, 인종적, 성적, 세대적, 연령적 다양성이 국내외적으로 분출하는 사회를 살아갑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참혹한 국가 간 전쟁과 인류의 장래에 암운을 드리우는 기후 변화까지 우리를 쉴 새 없이 위협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난감한 지경을 경험하는 것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만이 아닙니다. 역사의 각 시기마다 거의 비슷한 문제들이 인류를 압박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인류가 공통으로 견지한 것은 보편적인 도덕규범 혹은 황금률입니다. 이것이 근간을 이루는 인문학 고전 교육을 통해, 성찰하는 “민주적 세계시민”(democratic world citizen)을 양성하는 것이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 교양 교육, 혹은 전인교육입니다. 우리나라 온 교육 과정이 직업교육과 경력교육에 올인한 탓으로 빛바랜 그 인문학 교육 말입니다. 이 교육은 대학에서만 진행되는 게 아니라, 평생 동안 지속되어야 할 교육의 모체입니다. ‘세계시민’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보편적인 도를 바탕으로 낯선 타자들을 이해하고 섬기는 태도입니다. 이 과정을 돕는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상상력(imagination), 특히 이야기를 통해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사적 상상력”(the narrative imagination)입니다[마사 누스바움, “인간성 수업”(Cultivating Humanity)]. 지난 5년간 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 블로그를 통해 서양의 고전 소설을 함께 정독해 가면서, 독자 여러분과 제가 이 ‘서사적 상상력’이라는 인문학적 소양을 얼마나 의미 있게 배양했는지 궁금합니다.

 

둘째로, 칠링워스와 헤스터같이 오도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역할입니다. 성경 말씀을 잘 가르치는 목회자나 스승을 만나지 못했거나, 순전히 자기 사변과 경험에만 근거하여 신앙을 형성한 그리스도인들 말입니다. 이들은 성경 전체를 꿰뚫는 신학적 안목과 문맥을 따라 성경을 독해할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요한 신앙의 영역이나 신앙적 문제에 대해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오리무중에 빠진 느낌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해 갑니다. 게다가 신령한 영적 양식이 되는 성경 말씀을 지속적으로 섭취하고 삶에 적용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장하는 기쁨도 누리지 못합니다. 도리어 이런저런 불건전한 가르침에 미혹되기도 하고, 이단 사설에 빠져 심각한 영적 혼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의 글이 신앙 세계의 길잡이 노릇을 담당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셋째로, 인문학, 특히 문학 작품을 통해 영성이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계를 탐구하는 데 진지한 관심을 품고 있는 독자를 돕는 역할입니다. 이런 독자들을 계도할 만한 건전한 지침이나 문학적 장치가 인문학 서적이나 문학 작품 속에 존재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성과 양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나, 치열한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도 신비롭고 영원한 세계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이 작품 속에 드러나는 경우는 많습니다. 욕정과 탐욕에 물들어 살면서도 순수한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인간의 경향성이나, 따분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견디면서도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하는 인간의 태도도 작품 속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모순적인 모습이 인간 속에 잠재하고 일상을 통해 표출되는지, 어떻게 전 생애를 걸쳐 진선미의 가치를 좇아 살아 갈 수 있는지, 무엇이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영적 지침은 그 작품들 속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도리어 그 작품 속 정보와 지침이 독자를 오도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미 이 블로그에서 논평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제시하는 이원론적인 시각에 주목해 보세요. 그것을 개연성 있는 사유의 대상으로 일정 기간 참고할 수는 있지만, 우리 영혼을 계도하여 구원해 주는 단계로 이끌어 주는 영적 지침으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확연하게 비성서적인 시각이므로, 그리스도교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해를 끼치기 일쑤입니다. 게다가 작품 속 정보뿐 아니라, 그것을 소개하고 논평하는 번역가나 평론가들이 독자에게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 작품 내용을 잘 번역하거나 그 내용에 정통한 것과 그 내용을 신앙 세계와 적절하게 연관 짓는 일은 별개의 영역입니다. 후자의 영역에는 신학적인 식견이 필수적입니다. 이 작품을 논평하는 과정에서만도, 죄의 본질과 그 결말에 대한 성서적 시각을 오해한 채 주인공의 편벽된 생각을 상찬하는 평론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운명론이 칼뱅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언하는 학자들도 접할 수 있었지요. 심지어 이 작품의 중요한 키워드인 고행과 참회라는 두 단어의 미묘한 차이에 주목하지 않는 번역가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얕은 독자는, 그 작품을 안내하는 전문가인 평론가나 역자가 신학적인 지식을 갖춘 상태에서 그러한 신앙적인 언명을 하거나 번역한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독자는 성서를 불완전하거나 불합리하거나 부당한 계시로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신앙의 세계와 더욱 거리를 두겠지요. 이런 독자들에게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의 글이 인문학적 성찰과 신앙적 안목 간에 적절한 균형을 잡아 줄 것입니다.

 

끝으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 블로그는 제 인생3막의 소명입니다. 역사학자 이언 모티머(Ian Mortimer)가 집필한 책, “변화의 세기: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Centuries of Change, 2014)에 보면 인상적인 헌정사가 나옵니다.

 

내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 나는 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이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은 아니다. / 그래도 읽어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To my children / and all my descendants. / This is the book I feel I was born to write. / That doesn’t mean it is the book you were born to read – / but it might help.)

 

제가 책을 출간하기 위해 이 블로그의 글을 쓴 것은 아니지만, 그가 경험한 그 느낌에 동감을 표합니다. 지난 5년 전 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 글 한 편을 쓸 때부터, 저도 동일한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났구나.“라는 느낌 말입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이 느낌은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그런 글을 주기적으로 쓰다 보니, 그것들이 의미 있는 주제별로 모여 이제 10권이라는 책으로 열매 맺었습니다. 책 제목이나 내용을 미리 정하거나 염두에 둔 것도 아니었기에, 이 모든 글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새삼 인식할 따름입니다. 이 글이 얼마나 읽힐지, 이 책들이 얼마나 팔릴지는 제가 모르는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 맡긴 영역입니다. 다만 이 글 한 편 한 편이 꼭 필요한 독자, 특히 위에서 언급한 세 부류의 독자들에게 전달되기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지난 5년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의 여정에 기꺼이 동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