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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보편적 원리를 실천하라

세월호 참사 희생자가 본 보인 민주주의의 길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4. 16.

세월호 참사 희생자가 본 보인 민주주의의 길

-총선과 행정 권력 견제-

지난주에 총선이 있었습니다. 지난 2년간 ‘무지(無知), 무도(無道) 및 무리(無理)’라는 단어들로 대변되는 현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국민의 열망이 뜨거웠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하락세로 접어들었다는 “민주주의 리포트 2024”[스웨덴 예테보리대학의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 간행]의 발표가 있긴 했지만, 여전히 투표를 통해 현 정권의 중간 평가를 내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게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에는 인간의 타락이란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요즘처럼 실감 날 때가 없습니다. 인간이란 불완전하고 비뚤어진 존재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절대적이고 장구한 권한을 맡길 수 없고, 권한을 위임받은 인간은 주기적으로 점검되고 심판받아야 한다는 점 말입니다. 더구나 입법 활동을 전담하는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은 국민이 정권을 평가하는 일뿐 아니라 입법 활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한다는 의미를 띱니다. 자기를 대신하여 공동체의 유익과 안위를 도모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일꾼들을 뽑는 과정이지요. 모쪼록 이번 총선을 통해 국민을 대변하는 민복으로서 성실한 인격과 탁월한 전문성과 아름다운 품위를 갖춘 인물들만 뽑힐 수 있도록 비는 마음 간절했습니다.

 

국정농단을 일삼던 이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감옥 신세를 진 지가 불과 몇 년 전인데도, 현 대통령은 취임 이후에 여러 가지 불법과 비리에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삼권분립의 체제하에서 행정부 수반 역할을 감당하는 처지인데도, 사법부와 입법부의 결의를 무시하는 행태를 저지른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지난해에는 우리나라 대법원이 일본 피고 기업이 우리나라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배상하도록 명령한 최종 판결(2018년)을 무시한 채 일본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행태를 취함으로써 국민의 공분을 샀습니다. 현재까지 국회가 결의한 법안을 무려 9가지나 거부한 행태는 국민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선 그 압도적인 횟수에 놀랐기 때문입니다. 1988년 이후 현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행사된 전임 대통령들의 거부권 횟수가 총 16회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주목할 만한 점은 김영삼, 김대중,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들의 임기 내내 단 한 번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국회의 결정을 민의의 발현으로 여기고 받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임기 2년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9건을 행사했으니, 임기를 다 마치기 전까지 이전 대통령 7명이 행사한 모든 거부권 횟수를 초과할 듯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이 입을 다물지 못한 이유는 그 파렴치함에 경악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내가 연루된 것이 확실시되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대장동 50억 클럽 사건을 수사하는 특검법을 거부한 테 이어, 무고한 인명 159명이 희생당한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마저도 거부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니까요.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국민과 함께 하는 민생토론회’라는 명목으로 전국을 돌며 특정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개진한 것도 이전 대통령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불법적인 행태입니다. 선거에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공직자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처사이지요. 그 정책들 대부분이 관련 지역 여당 후보자들의 공약 내용을 지원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선관위에 고발될 만하지요.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그 또는 그의 수하가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와 관련하여 외압을 행사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자기와 연관된 누군가를 엄호하기 위해 이전 국방장관에게 전화로 압력을 넣었다는 엄중한 혐의입니다. 나중에 그 사건의 핵심 피의자가 되어 공수처가 출국 정지시킨 그 국방장관을 호주 대사로 임명하여 출국시키는 무리수를 두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에다 지난 2년간 그와 그의 부인이 국민을 낯뜨겁게 하고 당혹하게 한 사례들을 다 이야기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지경입니다. 5년밖에 되지 않는 임기를 가지고도 이렇게 온갖 제왕적 행태를 감행하는 것을 고려해 보자면, 종신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러시아, 중국, 북한의 독재자들이 자행하고 있는 불법과 불의의 양상은 어떠할지 가늠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권력 가진 자들을 보면서 타락한 인간의 실상에 새롭게 눈뜨게 됩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는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어 행정부의 무도하고 무능한 행태를 입법부의 권력으로 견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입법부와 사법부를 무시하면서 월권을 행사하고 대놓고 자기 가족과 측근을 엄호하며 선거에 개입하는 불법적 행태를 일삼은 행정부 수반을 어떻게 심판해야 할까요? 이번 총선을 통해 그에 대한 전 국민적 평결이 명백히 드러났으니, 이제는 그가 이 판단 결과에 응답할 차례입니다. 모쪼록 무엇보다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디모데전서 2:2)을 누릴 수 있도록, 현 대통령이 대오각성하여 지난날의 과오와 후안무치한 행태를 바로잡고 자신의 임기를 잘 마감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단상-

시민 사회(civil society)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과 인간의 타락(human fallenness)이라는 역설적인 본성을 둘 다 인정한다는 데 있습니다(존 스토트). 이런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인간의 존엄성과 타락(human dignity and depravity)을 둘 다 인정하는 것 사이의 균형으로 제시되면서, 거버넌스(governance)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 방식을 제공해 왔습니다. 이 말은 민주주의가 이론적 미덕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게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왕왕 발생하고 있듯이 미디어는 사람들이 편향적이고도 왜곡된 정보를 수용하도록 조종할 수 있고, 부패한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은 정상적인 정치 과정을 방해할 수 있으며, 다수결의 원리가 작동되면서 소수의 이익이 잠식되고 그 목소리가 묻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20세기의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붕괴가 민주화의 물결로 이어진 점을 고려해 보면, 민주주의가 지닌 세계적인 매력과 그 적응력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는, 한 개인이나 소수가 아닌 “거의 모든 사람”(more or less everybody)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토의(discussion)와 비판(criticism)과 타협(compromise)의 과정을 통해 의사결정에 도달하며, 특정 정파나 정당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의사결정의 정신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당신의 뜻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가 절대적인 진리와 선함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는 지양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라는 제도 속에서 거룩한 이상과 인간적 현실의 간극을 늘 인식하면서, 겸허하게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함양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바람직한 선택입니다[존 스토트, “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말은 상대방의 인격적 존엄성을 신뢰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타락한 인간적 측면을 염두에 두면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선양한다는 의미입니다. 함께 삶을 나누고 토의에 임하는 상대방이 양심과 보편적인 원리를 존중하여 말하고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이런 인간적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인간적 측면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로 10주년을 맞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기록들을 남기는 작업에 참여한 이선옥 작가에 의하면, 그 학생들은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너무나 “어른스럽고 전통적인” 규범에 근거하여 행동했다고 합니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서도 자기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에게 건네주기도 하고, 미처 나가지 못한 어린아이를 각자의 손으로 연결하여 옮겨 배 밖으로 먼저 내보내는 자비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견뎌 내며 그들이 서로 다독인 말은 이러했습니다. “아이 먼저, 여자 먼저, 친구들아 조금만 힘내자, 곧 우리를 구하러 올 거야.” 그러던 중 자기들이 생의 마지막에 도달했다는 것을 예감한 순간, 그들은 모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랑해, 미안해, 보고 싶어, 안녕.” (이선옥, "단단한 개인") 인간의 본성에는 고귀하고 존엄한 하나님의 형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워 “일체의 정치 권력이나 공공적 강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아나키즘(anarchism)도 지양해야 하지만, 인간을 비관적으로만 이해하여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부정하는 독재주의(authoritarianism)도 거부해야 합니다. 인간이 지닌 존엄한 면모와 타락의 면모를 함께 고려하는 민주주의 원리가 더 바람직한 선택이 되는 이유입니다.

 

세월호 학생들이 죽음에 임박한 상황 중에 구현한 ‘어른스럽고 전통적인’ 규범은 민주주의 원리를 뛰어넘어 보다 이상적인 사회나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길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원리와 정의감에 기반한 규범입니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잘 작동되는 사회라도 그 속에서 제정된 법률이나 규정은 어떤 형태로든 빈틈이나 허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들을 악용하여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자들을 막는 완전한 법령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수사하고 기소하는 권력을 쥔 자가 선별적으로 그 법률을 적용할 대상을 선택하거나 무시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나라 검찰이 보여준 선별적이고 편파적이며 강압적인 수사 행태가 바로 그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그리고 검찰총장 시절에도 무분별한 정치적인 언동으로 물의를 일으키더니, 그 임기를 다 마치기도 전에 정계에 뛰어들어 대통령이 된 후에도 자행자지하는 그 버릇을 고수하는 현 대통령을 보세요. 그는 자신의 실정을 중간 심판한 선거가 마감된 이 시점에도 지금까지 자기가 취한 언동과 정책이 합법적이고 효율적이었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법률 제정과 집행은 사회 공의와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에 해당합니다. 그것만으로는 공정하고 평화롭고 조화로운 사회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세월호 학생들처럼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The Golden Rule),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는 지상명령(The Greatest Commandment)을 존중하고 일상 속에서 실행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점차 파멸의 길로 향할 뿐입니다. 아마도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시민 불복종”(On the Duty of Civil Disobedience)에서 아래와 같이 설파한 것도 바로 이런 취지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사람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신민(臣民)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마땅히 지켜야 할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의무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항상 행하는 것이다.” (I think that we should be men first, and subjects afterward. It is not desirable to cultivate a respect for the law, so much as for the right. The only obligation which I have a right to assume, is to do at any time what I think right.)

 

보편적 정의를 존중하는 정신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늘 행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자 발휘해야 할 유일한 의무라는 지적입니다. 그 길이야말로 그저 통치자나 법률에 수동적으로 순종하기만 하는 백성(subjects)이 아니라 존엄성을 지닌 사람(men)이 되는 방도이자 존엄한 인간성을 진작시키는 방향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그 사람들에 의해 인간 사회가 진전되고 민주주의가 진척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진행된 민주화 여정을 돌이켜 보세요. 이러한 권리와 의무를 성실히 발휘한 선배들의 희생과 헌신 덕에 대통령의 무분별한 권한 행사까지도 심판할 수 있는 이만큼의 민주주의 제도를 향유하게 되었다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거제도에서 기대하는 풍성한 삶-

지난달 중순에 거제도를 다녀왔습니다. 5월부터 살 곳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먼저 인터넷에서 광고하던 곳들 몇 군데를 둘러 보았습니다. 보증금이나 생활 편의를 위한 시설 측면에서 유리한 대단위 아파트 단지들이었습니다. 실상 답사해 보니 예상외로 대부분이 고지대에 위치해 있고 슈퍼를 가려고 해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인중개사 사무실 문도 두드려 보지 않은 채 다른 지역을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내에서 꽤 떨어져 있지만 바닷가에 인접해 있는 아파트 단지 한 곳과, 시내와 그곳 중간쯤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 한 곳을 둘러 보게 되었습니다. 전자의 물건들은 최근에 건설된 ‘국민 평수’ 아파트였으나 보증금이나 달세가 저렴한 곳이 여럿 있었습니다. 현재 저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보증금에 조금만 더 보태면 달세 없이 지낼 수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 아파트들에 근저당이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고, 주위 편의 시설이 별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불편한 일상이 예견되어, 차선의 선택지로 남겨둔 채로 후자 물건을 보러 나섰습니다. 후자의 물건들은 연식이 20년 이상 되고 전자의 물건보다 다소 규모가 작은 아파트였으나, 보증금이나 주위 편의 시설 면에서 전자의 물건들보다 더 유리했습니다. 근처에 조선소가 있어 그 직원들이 애용하는 곳이라 그런지 인터넷에 공고가 나는 즉시 바로 입주자가 붙었습니다. 가까스로 한 곳이 눈에 띄어 공인중개사와 함께 둘러 보러 갔다가 집안 내부 사정이 너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하고 나오던 중에, 그 중개사가 어디론가 연락하더니 그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 한 곳으로 저희를 인도해 갔습니다. 방 3개에다 화장실 2개가 딸려 있는 26평형이었습니다. 집주인이 살고 있는 집이었으나 집안 내부를 한번 둘러 보고는 마음에 들어 계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역적 연고가 없는 섬이라는 특이 환경과 13층이라는 아파트 위치가 앞으로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알 길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하심으로 내딛는 발걸음이라 여러모로 기대가 됩니다. 우선 그동안 거제도 숙소를 위해 기도하면서 아뢰었던 여러 가지 고려 사항들이 거의 다 채워졌습니다. 월세 없는 보증금도 적정하고, 주인 부부도 자상하고, 아파트에 설정된 근저당도 없고, 싱크대와 바닥도 개보수해주겠다는 약속을 들었습니다. 아파트 앞에서 바로 연결되는 산책로도 아름답고 쾌적해 보였고, 근방에 온갖 편의 시설[슈퍼마켓, 재래시장, 다이소, 시외버스터미널 등]도 잘 갖추어 있고, 걸어서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신축 중이며, 최근에 신축한 교회도 아파트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다음으로 거제도가 섬이기도 하고 휴양지이기도 해서 물가가 비싸다는 풍문이 있었지만, 외식하는 것 외에 일반 장보기 물가는 다른 곳들과 대동소이한 것을 이번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절약해서 살면 될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인 그곳에는 해수욕장만 17군데가 된다고 할 만큼, 곳곳에 넓은 해변가나 숨어 있는 작은 해변이 즐비합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먹을 거 챙기고 돗자리 하나 들고 오붓하게 가족 나들이하면서 그런 해변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할 듯합니다. 게다가 산도 11곳이나 있고 호수도 있으니 나들이할 곳 천지지요. 거제도에서 저희가 누릴 행복을 대신 읊어준 최다혜 작가의 글 한 자락을 소개합니다.

 

“여기는 비록 작지만 꽃의 세계다. 소비할 물건보다 자연이 넉넉하게 마련된 곳이다. 덕분에 내가 사는 아름다운 바닷가 도시에서는 소비하지 않고도 충분히 삶을 꾸릴 시간이 넉넉하다. 우린 그 속에서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 경제적 건전함을 쌓아간다.”("인생에서 중요한 것만 남기는 힘")

 

저희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세목까지 자상하게 마련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이 일을 위해 함께 아뢰어 주신 분들께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모쪼록 새롭게 정착하는 지역에서 새로 만나는 이웃들과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장기 정착의 첫 단추를 잘 끼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연합하여 사랑으로 피차 섬길 수 있는 귀한 믿음의 공동체를 만나는 일도 긴급한 기도 제목입니다. 성서인문학 사역이 더욱 활성화되어 글로뿐 아니라 강연과 강의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도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내와 제 섬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장으로 인도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