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규범을 좇는 향기로운 삶과 연약한 인간성을 다룬 심리적 로맨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4)
-그림자같이 실체 없는 사람들: 용서를 구하기와 용서하기-
이 작품에서는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은 사람과 타인의 죄를 용서하지 않은 사람을 모두 “그림자”(shadow)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신의 죄를 감추고 있던 딤스데일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지요. “거짓의 빛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한, 그림자가 되어 버리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다.”(he himself, in so far as he shows himself in a false light, becomes a shadow, or, indeed, ceases to exist.) 그와 같이 “진실하지 않은 이”(the untrue man)에게는 온 우주도 거짓된 존재가 되어 손에 잡히지 않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다음으로 헤스터와 딤스데일을 용서하지 않은 채 7년을 보낸 칠링워스도 “이 모든 그림자 같은 사람들”(all these shadowy beings)의 대표격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자기가 범한 과오를 솔직하게 자백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다른 사람이 지은 허물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이 숨 쉬기처럼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용서를 구하기와 용서하기만큼 진정한 용기와 드넓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도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데는 수치심을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데는 자기가 당한 피해와 쓰라린 감정을 거듭 은혜롭게 내려놓아야 하는 고통이 동반되지요. 그러나 이 소설은 진정한 인생을 누리려면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천명합니다.
<용서 구하기>
먼저 용서를 구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성서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생각, 말, 행동으로 지은 어떠한 죄이든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뜻을 거역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범한 모든 도덕적인 기준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피해를 입힌 실제적인 대상에게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만일 그 대상이 입은 피해를 물질적으로 갚아야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용서를 구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입니다. 그렇지만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 어느 대상에게 고백하는 것은 합당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만 지은 죄이므로, 하나님께만 고백하면 됩니다. “은밀한 죄(secret sins)는 하나님께 은밀하게(secretly) 고백하고, 사적인 죄(private sins)는 상처받은 당사자에게 사적으로(privately) 고백하는 것”이 원칙입니다(존 스토트, “Confess Your Sins”). 즉 피해당한 그 대상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원리라는 말입니다.
헤스터와 딤스데일의 경우는 특이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성서적 원리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칠링워스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사적인 죄였기에 공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자백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칠링워스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 품지 않습니다. 헤스터는 어린 자기를 불행한 결혼생활로 이끈 그로 인해 자기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고, 딤스데일은 자기 신분을 숨긴 채 자기를 괴롭힌 그를 이 세상에 가장 나쁜 죄인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이런 인식은 그들을 동정할 근거를 제시해 주기는 하지만, 그들이 범한 간음죄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할 책임에서 자유롭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칠링워스의 행태가 그들을 그런 책임에서 방면해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자기 신부 헤스터를 어떻게 대했는지 주목해 보세요. 그녀를 미국으로 홀로 보낸 후, 2년 동안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가, 그녀가 간음죄로 인해 수치를 당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나타났습니다. 헤스터의 간음죄보다 그녀를 방기한 죄가 선행합니다. 다음으로 딤스데일에게 가한 처사를 보세요. 무려 7년이란 세월 동안 자기 신분을 감추면서, 딤스데일을 기만하고 그의 영혼을 파리하게 시들게 했습니다. 자기 존재에 대해 무지했던 딤스데일이 자기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를 주는 대신, 그의 영혼이 고통스럽게 파멸해 가도록 그의 삶을 농락하고 좌지우지했습니다. 즉 칠링워스는 헤스터와 딤스데일이 용서를 구할 대상이 될 자격을 상실하고 거부했을 뿐 아니라, 그 자격 대신 악마의 일을 도모하는 악령(fiend)이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헤스터와 딤스데일의 경우가 특이한 또 다른 이유는 자신들의 사적인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capital crime)였다는 점입니다. 역사상 간음죄를 범한 자를 사형에 처한 것은 거의 모든 전근대 문화에서 이루어지던 관례였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서야[우리나라는 2015년에] 그 처벌 법령이 폐지되었지요. 그만큼 그 범죄가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행위로, 인류의 거의 모든 문화가 인식한 것입니다. 17세기 당시 매사추세츠는 신권정치[神權政治, theocracy=자기 정치 권력을 하나님이 부여해 주었다고 주장하는 종교 당국이 운영하는 정치 체제]가 실행되는 곳은 아니었으나, 신율주의[神律主義, theonomy=구약의 실정법이 현대 사회에서 준수되어야 한다는 입장]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세계는 당시 매사추세츠보다 간음죄를 더 엄중하게 처벌했습니다. 즉 매사추세츠에서는 간음죄에 대해 범인들이 참회하면 사형에서 면제되었지만(“The 1641 Massachusetts Body of Liberties”), 이 소설의 세계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 범인들이 사형대에서 처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자기 남편이 이미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했던 헤스터의 경우가 그 예외 사례였지요. 그러므로 만일 딤스데일이 처형대에서 숨을 거두지 않았다면, 간음죄의 공범으로 사형이 언도되어 자기 죄과를 씻었겠지요.
구약 성경에서도 간음죄로 사형이 집행된 사례를 한 건도 발견할 수 없지만, 구약의 실정법보다 더 엄혹하게 그 죄를 처리하는 이 소설의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신권정치나 신율주의를 옹호하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입장은 비성서적이고 시대착오적입니다. 특정한 목적으로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민족에게 계시된 구약의 실정법을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려는 시도는 무모할 뿐 아니라 독신(瀆神)적입니다.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들도 당시 성서의 실정법을 일부만 도입했을 뿐, 대개는 영국의 관습법(English common law)을 따랐습니다. 신권정치 체제를 도입하는 게 아니라, 공공복지를 보장하는 시민 정부(civil government)를 구성하는 게 그들의 이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이 소설은 죄라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실체인지, 그것이 어떠한 파멸을 초래하게 하는지, 그리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일 수 있는지 깨우쳐 줍니다. 특히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인간의 생명과 가족공동체보다 돈과 섹스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는 현세대에게, 하나님을 망각하고 인간의 영혼을 존중하지 않고 가족을 허물어뜨리는 죄악이 빚을 참혹한 결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용서하기>
다음으로 용서하는 과정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성서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용서하는 과정을 밟을 수 있을까요? 누군가에 대해 마음속에 쓰라린 감정(bitterness)을 지속적으로 품고 있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판단을 받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7:1-2). 누군가를 용서하기 어렵다고 하는 이에게, 작가 캐런 리 솔프(Karen Lee-Thorp)가 제안하는 성서적인 용서하기, 다섯 단계를 소개합니다.
(1) 자기 슬픔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라. (Take your grief to God,) 용서할 때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우리 모든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 자신의 감정을 진지하게 나누어야 합니다. 이때 시편 기자와 같이 자신이 품은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2) 감정에서 사실로 전환하라. (Turn from feelings to facts.) 하나님이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고 존중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우리의 자존감(self-worth)이 다른 사람의 반응에 달려 있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정(feelings)보다는 진리(truth)에 집중하기 위해서, 관련된 성경 구절을 외우고 암송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3) 하나님께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라. (Ask God for the strength to forgive,) 마음의 상처를 내려놓고, 다시 신뢰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우리의 욕망이 좌절되고 자존심(pride)이 상처 입기는 했지만,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온전히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자존심을 한 단계 내려놓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4) 자신의 의지로 용서를 선택하라. (Choose to forgive as an act of your will.)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더라도, 용서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더구나 상처가 치유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그 기간 여러 번 반복해서 용서하기 혹은 은혜롭게 기억하기를 선택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치유 과정이 더 빨리 진행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해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랑으로 대하면 됩니다.
(5) 긴요하다면 그 문제를 친구와 상의하라. (Discuss the issue with a friend,)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 사람이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더구나 자신을 학대했거나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판명된 사람과는 멀리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단순히 쓰라린 감정과 복수에 대한 욕구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최고선을 추구하기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Forgiving simply means choosing to let go of bitterness and the desire for revenge and to seek the other’s highest good.) (“A Compact Guide to the Christian Life”)
이 마음의 쓴 뿌리와 복수심을 단호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칠링워스와 같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는 원래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올바르고 꾸준하게 사랑을 베풀던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은 별로 돌보지 않았지만, 남에게는 인정을 많이 베풀면서 살았지요. 이런 그가 악령(fiend)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자기 “원수를 찾아 조직적으로 복수하는 것”(the pursuit and systematic exercise of revenge)을 “자기 삶의 기본 원칙”(the very principle of his life)으로 삼고, “가장 끔찍한 복수라는 이 영원한 독”(this perpetual poison of the direst revenge)만을 마시며 살아간 탓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는 어느 누구라도 일정 기간 악마 노릇 하려고 마음먹기만 한다면, “악마로 변모할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놀라운 예”(a striking evidence of man’s faculty of transforming himself into a devil)였습니다. 그런데 악령으로 변모한 자기가 고통을 가하던 대상[즉 딤스데일]이 죄를 고백하고 사라지게 되자, 그는 “마치 뿌리 뽑힌 잡초가 햇볕을 받고 시드는 것처럼 확실히 오그라들고 말라서 인간의 시야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he positively withered up, shrivelled away, and almost vanished from mortal sight, like an uprooted weed that lies wilting in the sun.) 그림자 같은 삶을 살다 사라져 버렸지요.
그와는 반대로 쓰라린 마음과 복수심을 잘 다스리면, 장미같이 향기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영위한 본을 한 분 소개합니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후, 티베트 불교 수장이었던 달라이라마는 인도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전부터 그가 잘 알던 한 스님이 중국 경찰에 잡혀 18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티베트를 비판하라며 고문하던 경찰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던 그는 가까스로 석방되어 인도로 탈출했습니다. 그리하여 무려 20년 만에 달라이라마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경이로운 점은 그의 모습이 옛날 그대로였다는 점입니다. 그 참혹한 고초도 그를 바꾸지 못한 것이지요. 결국 달라이라마가 그에게 묻습니다. “스님, 십팔 년 동안 그토록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두려웠던 적은 없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나 자신이 중국인들을 미워할까 봐, 중국인들에 대한 자비심을 잃게 될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정찬주,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아마도 그 스님은 자기를 고문하던 중국인들도 자기와 동등한 존귀한 인간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그릇된 사상에 세뇌당한 채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 했기에 그런 행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이해하려 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려고 했을까요? 자기가 먼저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가해자인 그들에게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의 감옥을 열 수 있는 열쇠”(the key that can unlock the prison of our pain)를 주는 격이라는 점을 기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David G. Myers & Malcolm A. Jeeves, “Psychology through the Eyes of Faith”) 그렇습니다. 헤스터가 칠링워스에게 언급한 대로입니다. 가해자를 은혜롭게 용서하는 것은 깊은 상처를 받은 피해자만이 누릴 수 있는 “그 유일한 특권”(that only privilege)이자, “그 귀중한 혜택”(that priceless benefit)입니다.
-장미같이 향기로운 사람들: 도덕 규범 따르기와 어두운 필연 따르기-
헤스터가 잠시 거주한 감옥 밖에는 각종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감옥 문 한쪽에는 보석같이 아름다운 들장미 덤불(a wild rose-bush)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장미가 이 소설의 주제를 상징하는 매체가 된다고 지적합니다. 즉 그 이야기 속에서 접하게 될 수 있는 “향기로운 도덕의 꽃”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연약함과 슬픔을 다룬 이야기”의 비극적인 결말을 완하해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난 후 복기해 보면, 헤스터와 딤스데일과 펄은 장미같이 향기로운 사람들로 자리매김됩니다. 반면에 칠링워스는 비극적 결말로 치달은 연약한 인물로 마음속에 남습니다. 펄을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한때는 같은 처지였습니다. “함께 음산한 죄악의 미궁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고, 발길을 옮길 때마다 자기들이 길에 흩뿌려 놓은 죄악의 돌부리에 걷어채어 넘어지고 있었습니다.”(are here wandering together in this gloomy maze of evil, and stumbling, at every step, over the guilt wherewith we have strewn our path.) 그렇지만 그들은 각각 서로 다른 선택을 계속 이어간 결과, 극적으로 서로 다른 결말을 맞이합니다.
<도덕 규범을 따른 이들>
먼저 펄의 경우부터 살펴볼까요? 펄은 어릴 때부터 사생아 신분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어른들의 곁눈질도 의식했겠지만, 동료 아이들의 핀잔과 차별과 무시는 실제적인 존재의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펄은 마을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전투적으로 돌변하곤 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기죽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가할지도 모를 신체적 위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겠지요. 그리고 펄은 마치 엄마의 주홍 글자의 비밀을 아는 듯, 집요하게 그 글자에 대해 캐묻고 그 글자와 연관된 장난을 칩니다. 딤스데일에 대해서도 마치 그의 정체를 아는 듯, 단호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가 공적인 자리에서 자기와 엄마를 모른 체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하면서, 자기 이마에 뽀뽀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가 마지막 처형대에서 딤스데일이 죄를 고백했을 때야 비로소 펄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아빠의 뺨에 눈물을 남깁니다. 그 눈물은 펄이 아빠에게 서약한다는 표시였습니다. 즉 “인간적인 기쁨과 슬픔 속에 성장하여 세상과 영원히 다투지 않고 세상 속에서 여인이 되겠다는 다짐”(the pledge that she would grow up amid human joy and sorrow, nor forever do battle with the world, but be a woman in it)의 표시였습니다. 비록 딤스데일과 칠링워스가 죽고 난 후 엄마를 따라 유럽으로 떠나 버렸지만, 펄은 그곳에서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누렸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엄마와도 지속적인 유대를 이어갔습니다. 아빠에게 한 다짐을 잊지 않고 장미같이 향기로운 삶을 구가함으로써, 마침내 “하늘에서 축복받는 영혼”(a blessed soul in heaven)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딤스데일의 경우는 이미 앞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오랜 영적 고뇌와 신체적 고통을 통과한 끝에 온전히 속죄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복을 누렸습니다. 헤스터가 계획한 대로 영국 브리스톨로 도주해서 사는 것보다, 처형대에서 자기 죄를 참회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긴 덕이었습니다. 7년 이상이나 시간을 끌던 자백이었습니다. 애당초 그는 헤스터의 간음죄가 드러날 즈음에는, 자기 죄를 숨겼습니다. 도리어 헤스터에게 “함께 죄를 저지르고 고통받고 있는 그 사내”(thy fellow-sinner and fellow-sufferer)의 이름을 밝히라고 사람들 앞에서 다그칩니다. 자기 책임을 헤스터에게 전가한 것이지요. 그 이후로 그는 “회한의 충동”(the impulse of that Remorse)에 쫓겨 고백하려 했다가도, “회한의 누이동생이자 절친한 사이인 비겁”(whose own sister and closely linked companion was that Cowardice)이 자기를 잡아당기면 물러나는 우유부단한 행태를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처형대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의 괴로움과 헛된 회개의 고뇌”(the agony of heaven-defying guilt and vain repentance)를 말끔히 청산합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웃의 영혼을 존중하는 대신 자기 욕정을 해소할 대상으로 삼은 죄를 참회한 것이지요. 그 처형대 위에서 그는 지난 몇 년간 이런저런 비성서적인 상념과 과도한 감성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헤매고 있던 헤스터의 영혼을 계도하는 역할도 거뜬히 감당합니다.
헤스터가 미국을 떠난 후 다시 돌아와 자발적으로 주홍 글자를 가슴에 달고 자선활동을 재개한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이 헤스터가 처형대 위에서 딤스데일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 뒤 결정적으로 변화한 결과라고 봅니다. 이런 해석의 주요한 단서가 되는 것은, 마지막 처형대 장면에서 펄이 딤스데일에게 눈물 어린 키스를 할 때 작가가 덧붙인 주석입니다. “엄마에 대해서도, 고뇌의 사자 노릇을 감당했던 그녀의 역할도 이제 모두 끝났다.”(Towards her mother, too, Pearl’s errand as a messenger of anguish was all fulfilled.) 헤스터가 더 이상 격심한 심적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만큼, 그 수치와 속죄의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었다고 시사하는 대목이 아닐까요? 그 이전 헤스터가 취한 언행을 보면, 그녀가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회개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어느 평론가의 논평이 수긍됩니다. 딤스데일이 지적한 대로, 하나님이 그녀에게 “마음속의 악과 겉으로 드러난 슬픔을 딛고 승리하도록 공개적인 치욕을 당할 기회”(an open ignominy, that thereby thou mayest work out an open triumph over the evil within thee, and the sorrow without.)를 주셨지만, 그녀는 그 수치를 불평 없이 감내하며 자선을 베풀었을 뿐 진정한 참회로 자기 내면이 변화한 증거를 제대로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기억합시다. 참회의 열매가 선행인 것은 맞지만, 선행 자체가 참회를 증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숲속에서 만난 헤스터와 딤스데일이 나눈 대화 중 이 원리를 천명해 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기를 타락한 자로 여기며 비통에 차 있는 딤스데일에게, 헤스터가 “선행으로 온전히 입증된 참회”(the penitence thus sealed and witnessed by good works)가 헛수고에 불과하냐고 따집니다. 그가 그동안 뼈저리게 뉘우쳤고(repented), 이제 신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냐고 도전한 것이지요. 딤스데일이 뭐라고 답했을까요? 놀랍게도 그것은 “싸늘한 시체”(cold and dead)와 같이 실체(substance)가 없어서, 자기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응답합니다. 왜 그렇게 답변했을까요? 이어지는 두 문장이 그 이유를 밝힙니다. “고행이라면 지금까지 충분히 늘 해 왔소! 그런데 참회는 한번도 없었소!”(Of penance, I have had enough! Of penitence, there has been none!) 백 년 동안 고행해도, 진정한 참회는 한번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준엄한 영적 교훈입니다. 헤스터가 딤스데일에게 던진 질문 속에, 그녀의 신앙관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많은 선행을 베푼 자기가 이미 참회한 것이 분명하듯이, 그대도 그러하다는 시각 말입니다. 물론 그녀의 주장처럼 성서적인 참회(penitence) 혹은 회개(repentance)는 양심의 가책뿐 아니라 행동의 변화(a change in behavior)를 동반합니다. 선행을 베풀고 인내하는 측면이 행동상으로 헤스터에게 일어난 변화를 가리키는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참회나 회개는 태도와 동기의 변혁(transforming attitudes and motives)이 그 핵심입니다. 태도와 동기가 변혁되지 않은 채 그저 기대되는 행동만 따라하는 것은 율법주의(legalism)입니다(Karen Lee-Thorp). 그녀의 지난 삶을 한번 복기해 보세요. 강인한 자세로 불우한 이웃을 돕는 자선가나 금욕적인 스토아주의 신봉자(stoic)다운 모습은 충일했으나, 찬양과 기쁨과 평강이 넘실대는 그리스도인(Christian)다운 면모는 희박했습니다. “주홍 글자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고,”(The scarlet letter had not done its office.) “주홍 글자가 가르쳐 주는 교훈들이 헤스터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albeit they can profit nothing to myself.) 한마디로 율법주의를 실행하며 산 셈이지요.
그러다가 딤스데일이 참회하고 자기에게 권면한 후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목격한 다음, 그녀의 모습이 일변했습니다. 그 변화와 관련된 두 가지 증거가 눈에 띕니다. 첫째, 펄과 함께 유럽으로 건너간 그녀가 자기 오두막집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치욕을 되찾았습니다!”(taken up her long-forsaken shame!) 이전에는 강제로 주홍 글자가 자기 가슴에 달렸지만, 이제는 자발적으로 그 상징을 자기 가슴에 단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 중에 자기에게 조언을 청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상담해 주었습니다. 왜 헤스터는 펄이 가정을 꾸민 곳에서 살기보다, 자기가 수치를 겪던 뉴잉글랜드로 ‘자발적으로“(of her own free will) 돌아와 그 수치를 되찾았을까요? 소설 본문은 이렇게 밝힙니다. “이곳에서 그녀가 죄를 범했고, 이곳에서 슬픔을 당했으며, 이곳에서 아직 더 할 참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Here had been her sin; here, her sorrow; and here was yet to be her penitence.) 주홍 글자가 억지로 가슴에 달린 이전의 삶 속에서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는 주석이 아닐까요? 아니나 다를까, 이 후기(後期) 참회는 헤스터의 삶 속에 아름다운 열매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변화한 것을 드러내는 두 번째 증거입니다. 어떠한 “이기적인 목적”(selfish ends)과 연관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나 쾌락”(her own profit and enjoyment)과 거리가 먼 실천적사랑을, 암담한 처지에서 불행을 겪는 이웃에게 펼치며 살다 죽음을 맞이했으니까요. 이 향기로운 열매는 그녀의 참회가 참된 것임을 입증해 줍니다(마태복음 7:16-18).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는 새에 새로운 계시를 알리는 전령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즉 고귀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암울한 슬픔”(dusky grief) 대신 “환희라는 천상의 매체”(the ethereal medium of joy)를 통해 지혜로운 여성으로 변화하여, “신성한 사랑”(sacred love)이 진정으로 행복을 가져올 수 있음을 자신의 헌신된 삶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어두운 필연을 따른 이>
결국 위 세 사람 중 딤스데일과 헤스터는 진정한 참회를 거쳐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했습니다. 처형대에서 참회한 딤스데일은 이내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지만, 헤스터에게는 더 오랫동안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공경하며 섬기는 삶을 실천하고 누릴 기회가 부여되었습니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칠링워스는 이런 복 된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생의 원리에 관한 신앙적 입장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스터가 그만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용서할 자격이 있으니, 딤스데일을 용서할 특권을 활용하라는 권면을 하자, 그는 대뜸 이렇게 응답합니다.
“내게는 용서할 권리가 없소. (It is not granted me to pardon.) 당신이 말하는 그런 힘이 내게는 없단 말이오. 오랫동안 잊었던 지난날의 믿음(My old faith, long forgotten)이 나한테 되돌아와서 우리의 행실이며 고뇌를 모두 설명해 주는구려. 당신의 잘못된 첫걸음(thy first step awry) 때문에 당신은 죄악의 씨앗(the germ of evil)을 뿌렸소. 하지만 그 순간부터는 모두가 어두운 필연(a dark necessity)이었소. 내 신세를 망친 당신들은 어떤 전형적인 환상에 사로잡혔을 때를 제외하고서는 죄를 저질렀다곤 할 수 없소. 악령(fiend)의 손아귀에서 악령의 역할을 빼앗은 나도 결코 악령 같은 존재는 아니오. 그 모두가 우리의 운명(our fate)이오. 검은 꽃(the black flower)이 피고 싶어 하면 피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오! 자, 어서 그자한테 가서 당신 마음대로 해 보구려.”
그가 비록 ’지난날의 믿음‘을 운운했지만, 그의 주장은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여러모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 그릇된 믿음의 근저에는 운명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가 ’어두운 필연‘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헤스터가 그릇된 방향으로 첫걸음을 옮기자, 그 이후부터 암흑 같은 필연이 역사하여 온갖 불행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는 게 그의 논지입니다. 그래서 헤스터나 딤스데일도 그저 일상적인 환상에 사로잡혔을 뿐 죄를 저지른 게 아니고, 자기도 악령의 역할은 빼앗았으나 악령 같은 존재가 아니며, 그 모든 게 자기들의 운명이라고 항변합니다. 이런 운명론은 성서적인 시각과 정면 배치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아 지성과 감성과 자유의지를 발휘하며 사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이 그저 맹목적인 운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핑계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그 운명론이 칼뱅주의(Calvinism)의 교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 평론가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칼뱅주의는 교회나 교파나 교리 체계가 아니라, 특정한 견해와 강조점을 공유하는 광범위한 종교적 전통입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the glory and sovereignty of God)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하나님만이 당신의 교회를 이끄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올바른 가르침과 권징의 결과로 사회가 변화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칼뱅주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구원과 관련된 예정과 신성한 선택의 교리(the doctrines of predestination and divine election in salvation)와 관련이 있습니다[스티븐 웨지워스(Steven Wedgeworth), 온라인 자료]. 아마도 이 ’예정과 선택의 교리‘가, 칠링워스의 운명론과 칼뱅주의의 연관성을 언급한 평론가들이 염두에 둔 지점일 것입니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foreordained)는 원리로서, 특히 하나님께서 특정 영혼이 영원한 구원을 얻도록 선택하셨다(elected)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결국 위의 평론가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부분은 이런 것입니다. 이 교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효화한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인간의 책임을 면제한다. 즉 운명론과 다를 바 없다. 피상적인 성경 지식이 낳은 오판이지요.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각각의 실재를 명시적으로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인간은 외부의 제약이나 구속 없이 특정 목적을 자발적으로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는 말입니다. 두 실재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이 역설적인 양 측면 간에 존재하는 긴장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그 누구나,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에게 실천적사랑을 베풀며, 장래를 계획하고 목전의 문제들을 해결하며 삽니다. 우리가 내린 선택에 관해 책임을 져아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자유, 이 둘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뿐, 각각 엄연한 실재를 갖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성경은 이 두 실재의 진정한 상호 관계(the real interrelation)는 우리가 알아낼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철학에서는 이율배반(antinomy)이라고 합니다, 즉 서로 동등하게 필요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원칙들 간에 존재하는 모순을 일컫는 단어이지요. 그런 것들은 성경에서나 존재하지, 일상사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반박하고 싶다면,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세요. 이런 상호 관계를 보여 주는 가장 비근한 예가 자연계에도 존재하니까요. 빛의 이중성(duality), 즉 빛이 파동으로도 인식되고, 입자로도 인식되는 현상 말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이 두 성질이 결코 양립할 수 없으나, 빛으로 한 가지 실험을 하면 파동과 입자, 둘 중 한 가지로 결정되지요. 사실상 빛뿐 아니라, 원자의 구성 요소인 양성자, 중성자, 전자도 모두 이런 이중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런 이중성을 자연의 본질로 여깁니다. 끝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중성(duality) 혹은 상보성(complementarity)은 정반합(正反合)의 철학과도 다르다. 상보성은 정(正)과 반(反)이 공존한다고 말할 뿐이다. 둘이 융합하여 새로운 합(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실험을 하면 대립물 가운데 하나만 옳다.”(김상욱, "떨림과 울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두 실재에도 합(合)의 입장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만 둘 사이의 긴장을 유지할 뿐입니다.
이런 신학적 논의를 근거로 할 때, 칠링워스의 운명론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그 운명론의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인간의 자유를 부인하는 측면입니다. 천부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라는 실체를 부인합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기에 자기가 취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성경의 언명과 삶의 실상을 간단히 무시해 버립니다. 헤스터와 딤스데일은 자기들이 범한 간음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죄를 참회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칠링워스는 고통스럽겠지만 기꺼이 그들을 용서해야 할 책임과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따르는 당신의 자녀라면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을 불신하는 측면입니다.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가지신 하나님이 지혜로운 목적과 의도로 이 세상을 운행해 가실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누군가 첫걸음 한번 잘못 옮긴 것 때문에, 맹목적인 운명의 수레바퀴가 작동하기 시작하여 관계된 모두의 장래가 불행해지고 비극적인 결말[검은 꽃(the black flower)의 의미일 것]로만 점철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칠링워스의 인생관은 그야말로 암흑에 휩싸인 악마적 숙명론일 뿐입니다. 진리와 은혜가 풍성한 창조주 하나님이 지혜로운 목적을 품고 당신의 주권으로 온 세상과 우리 각자를 인도해 가시는 역사적 실재와 맹목적이고 암담한 운명론을 한통치다니요! (계속)
'도(道)-보편적 원리를 실천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리 크리스마스 (3) | 2024.11.09 |
---|---|
도덕규범을 좇는 향기로운 삶과 연약한 인간성을 다룬 심리적 로맨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5) (0) | 2024.07.31 |
도덕규범을 좇는 향기로운 삶과 연약한 인간성을 다룬 심리적 로맨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3) (0) | 2024.07.18 |
도덕규범을 좇는 향기로운 삶과 연약한 인간성을 다룬 심리적 로맨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2) (0) | 2024.07.11 |
도덕규범을 좇는 향기로운 삶과 연약한 인간성을 다룬 심리적 로맨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1) (4) | 2024.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