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규범을 좇는 향기로운 삶과 연약한 인간성을 다룬 심리적 로맨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1)
-경이로운 소설가론-
글 쓰는 작가가 다른 직업을 갖고 생계를 유지하면서 작품 활동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생계 활동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겠지만,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귀가한 다음 저녁 식사 후 시간과 주말을 활용해서 글쓰는 단순한 형태를 한번 상정해 보겠습니다. 그 시간을 활용해서 규칙적으로 글을 써간다면, 목표로 하는 분량을 채워 출간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두 가지 시나리오가 존재합니다. 첫 번째 시나리오입니다. 회사 생활이 생계를 책임져 주니, 여가가 나는 대로 부담 없이 글쓰기에 전력투구할 수 있습니다. 회사 업무 중에 경험하는 것이 글쓰기 소재로 잘 활용됩니다. 회사 업무가 글쓰기와 연관된 게 많아, 창작 활동의 마중물이 되기도 합니다. 회사에서 하는 일과는 완전히 다른 글쓰기가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날리고 새로운 활력을 공급해 주는 통로가 됩니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이렇습니다. 회사 업무량이 너무 과중해서 저녁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저녁 시간이나 주말을 부모 혹은 부부 역할을 감당하는 데 써야 합니다. 회사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해서, 글 쓰는 데 필요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회사 업무가 글 쓰는 작업과 너무 동떨어져서 글 쓰는 데 필요한 상상력을 앗아가 버립니다. 회사 업무가 너무 편하고 그것을 통해 누리는 혜택이 너무 달콤해서, 글쓰기에 대한 동기가 서서히 약화하다가 급기야 사라지기도 합니다. 전업 작가의 수가 극소수인 우리나라에서 고군분투하는 작가들이 이 두 가지 시나리오 중 어디에 더 많이 해당할까요? 섣불리 재단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작품 활동에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면서,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글쓰기에 매진하여 꾸준히 그 결과물을 내놓는 작가들을 존경합니다. 모쪼록 보다 많은 작가나 작가 지망생이 생계 걱정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글쓰기에 전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주홍 글자”의 머리말>
이번에는 두 번째 시나리오에 해당하는 유명 작가 한 사람 이야기를 잠시 나누겠습니다. D. H. 로런스(Lawrence)가 “미국인의 상상력이 빚어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소설”이라고 격찬한 “주홍 글자”(The Scarlet Letter, 1850)의 작가인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입니다. 그 작품은 흥미롭게도 “세관”(The Custom-House)이라는 도입부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전개될 이야기의 주된 틀을 제공하지요. 그 내용은 작가인 호손과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하는 이름 없는 화자가 세일럼(Salem) 세관의 “최고 경영자”(chief executive officer)로 취직하여 겪는 경험을 소개한 것입니다. 다 쓰러져가는 목조 창고들이 즐비한 부두에 위치한 세관 건물에서 일하는 그의 동료 직원들은 대부분 사적인 연줄을 통해 평생 고용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이가 많고 병약하며, 대체로 무능하고 부패한 인물들이었습니다. 화자는 더 이상 세일럼에 오는 배가 거의 없어 세관에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비 오는 어느 날 그는 아무도 없는 건물 2층에서 빛바랜 붉은 끈으로 묶인 서류 꾸러미를 발견합니다. 80여 년 전에 사망한 세관 조사원으로 일했던 조너선 퓨(Jonathan Pue)가 쓴 문서들이었습니다. 그 꾸러미 속에 눈에 띈 것은 ‘A’라는 글자[가로세로의 길이가 3.25인치(=8.35센티)] 모양의 주홍색 천 조각이었습니다. 화자가 우연히 그 주홍색 조각을 잠시 가슴에 대보지만, 불타는 듯한 열기를 느끼고는 내려놓습니다. 그런 다음 그 천 조각에 말려 있던 종이 두루마리를 읽게 됩니다.
매사추세츠의 초기 개척 시대와 17세기 말엽에 살았던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이란 여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일종의 자원봉사 간호사”(a kind of voluntary nurse)로 시골 지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여러 가지 선행을 베풀었던 여인이었습니다. 특히 마음과 관련된 문제에 관해 사람들에게 조언해 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천사가 받을 만한 존경을 받았지요. 화자는 글쓰기라는 직업을 취하려는 시도에 대한 불안감을 언급하면서, 자기가 존경하는 청교도 조상들이 그것을 경박하고 타락한 행태로 여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헤스터 프린이 경험한 이야기를 허구적 각색을 가미하여 집필하기로 결심합니다. 사실적으로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원작의 정신과 전체적인 윤곽에 충실할 것이라고 그는 믿습니다. 자기에게 영감을 주지 않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세관에서 일하는 동안 글을 쓸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던 차에, 그는 새 대통령이 선출되자 이전에 정치적으로 임명된 자기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상황이 전화위복이 되어 본격적으로 집필할 기회가 열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응접실의 희미한 불 앞에 앉아 그 소설을 쓰기 시작하지요. 이것이 바로 “주홍 글씨”의 본문이 됩니다.
<소설, “견월망지”(見月忘指)>
작가 호손이 “내가 지금 손님에게 활짝 열어 준 훌륭한 집의 출입구”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이 도입부는 제게 흥미로웠습니다. 첫째, 소설이란 장르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시사해주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화자의 입을 통해서 먼저 자기 소설이 조너선 퓨의 원고라는 사실에 근거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실에 얽매이지는 않고, 마치 자기가 그 사실을 전부 창작한 것(“entirely of my own invention”)처럼 자유분방하게 상상력을 활용하여 관련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전개해 갔다고 언급합니다. 다만 그는 자기가 창조하려고 애쓴 인물들이 자신의 미천한 상상력 때문에 마치 흐린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희미하게 드러나 있어서 애석하다고 겸허하게 말합니다.
이런 작가의 고백은 우선 소설이란 문학 장르가 상상적인 인물과 사실에 대한 창작물이라는 취지에 합당한 지적입니다. 다음으로 그의 말은 소설이 반드시 사실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점도 시사합니다. 조사관 퓨의 문서가 자기 소설을 고증해 준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호손은 그 문서를 날것 그대로 내놓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상상력으로 요리해서 멋진 음식으로 내놓았으니까요. 음식 속에서 날것의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듯이, 소설 속에서 사실의 외양을 떠올리기란 수월한 일이 아닙니다. 호손이 퓨가 기록한 사실에 자신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미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 소설의 목적이 그 사실이 가리키는, 감추어진 진실(truth)을 탐색해서 열어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예 설명되지 않거나 일방적으로만 설명되는 사실은 ‘이상한’(strange) 현실일 뿐입니다. “견월망지”(見月忘指)‘[=달을 보되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생각하지 말라]라는 사자성어가 교훈하는 것처럼, 그 현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손가락’이란 사실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엔 ‘달’이라는 진실에 주목해야 하지요.
예컨대,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159명이 사망했다.”라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엄청난 규모의 참사가 발발한 지 무려 1년 8개월이 지났지만, 그 대략적인 전모라도 해명되지 않고 있지요. 그 의미가 결여된 채 그저 ‘이상한’ 현실로만 자리 잡고 있을 뿐입니다. 그 현실이 가리키는 ‘달’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선 이미 예상된 그 엄청난 규모의 참사에 대비하지 않은 무책임하고 무능한 행정 권력이 눈에 띕니다. 직접적으로는 서울경찰청장, 용산서장, 용산구청장 같은 이들이 책임져야겠지만, 그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행정안전부 장관, 서울시장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행정 권력의 수반인 대통령과 그 수하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 진실을 감추려 들고 하나같이 책임을 회피하려 듭니다. 대통령의 거부권이 남발되는 상황 중에 어렵사리 “이태원참사특별법”이 마련되었으나, 직권 조사 권한과 압수수색 영장 청구 의뢰권도 없는 특별조사위원회가 그 사건 배후의 진실을 얼마나 파헤칠 수 있을까요? 희한하게도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삶의 현장에서는, 엄정한 수사만 이루어져도 그 진실이 확연하게 드러날 사건, 사고라는 사실들이 널려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눈 밝은 많은 작가가 앞으로 열어 밝힐, 그 사실들 배후의 진실이 기대됩니다. 기억합시다. 사실이란 것은 창의적인 상상과 정치한 논리를 통해 해석될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가 우리를 구원하고 성숙하게 합니다. ‘이상한’ 사실 자체만 되뇌고 암기하는 것으로는 우리의 삶이 진전되지 않습니다. 편협한 개인, 정체된 사회, 쇠락하는 국가가 고집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한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느낀다면, 신선한 상상력과 혁신적인 사상을 일구어내거나 우리 마음을 그것들에 접속해야 합니다. 문학 작품이 그 과정을 활짝 여는 마중물이나 촉매가 될 수 있습니다. 소설은 거짓부렁이의 산물이 아닙니다. 소설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fiction’이 진실을 의미하는 ‘truth’의 반대말이라고 여기는 것은 (인)문학이란 맥락 밖에서나 가능합니다. 무릇 소설은 인간과 역사와 우주의 진실을 상상과 논리로 계시하는 언어 예술입니다. 소설의 세계에 마음의 문을 엽시다!
<소설가, “다른 세계에 속한 시민”>
둘째로, 호손은 도입부에서 직장 생활을 감당하면서 작가 생활을 영위하는 고뇌를 고백합니다. 근무하는 중에 잠시 시간을 내어 작품 구상을 하며 상상력과 감수성을 북돋우려 해도 역부족이었습니다. 열띤 지성이나 뜨거운 정열이나 부드러운 감정을 실어 작중 인물들에게 호소해 보아도 그들은 도리어 그에게 정신 차리라며 냉랭하게 반응할 뿐이었으니까요. 그가 이전에 “가공의 인물들”(the tribe of unrealities)에게 행사한 그 미력한 힘마저 “하찮은 관리의 보수”(a pittance of the public gold)와 바꿔 버린 주제에, 자기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그 인물들은 되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단념하고 돈이나 벌라!”(Go, then, and earn your wages!)고 핀잔주었습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작품을 구상하는 중에도 그는 난관에 부딪힙니다. 낯익는 방 안을 비추는 달빛(moonlight)이야말로 로맨스 작가인 자기를 도와 “자기가 구상한 환상적인 손님들”(his illusive guests)과 친해지도록 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관에 근무하는 중에는 이 달빛뿐 아니라 햇빛이나 난롯불빛, 그 어느 것도 “촛불의 반짝거림”(the twinkle of a tallow-candle)보다 눈곱만큼도 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감수성과 재능이 죄다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호손의 글을 읽다 보면 직장 생활과 창작 활동은 상극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관 공무원으로 근무한 그의 사례를 모든 직장인의 경우로 확대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직장을 통해서 생계비를 지원받는다는 점에서는 사정이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공무원처럼 정년까지 그 신분과 급료가 보장되는 직장인들은 “원래 지녔던 본성의 강도에 비례해서 자립의 능력(the capability of self-support)을 상실합니다.” 예컨대 만일 그 직장인이 왕성한 기력을 타고 난 데 반해 근무 기간이 길지 않다면, 그는 잃은 기력을 쉽게 회복하여 자립의 길을 바로 확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도 꼬박꼬박 통장에 꽂히는 월급에만 장기간 의존하다 보면, 자신의 길을 새롭게 개척해서 자수성가할 능력은 점점 사라지게 되겠지요. 그래서 원래 기력이 약하거나 오랫동안 근무하는 직장인이라면, “강인한 힘, 용기와 성실, 진실성 및 자립심”(its sturdy force, its courage and constancy, its truth, its self-reliance)과 같은 자신의 좋은 속성들을 잘 간직할 수 있도록 “자신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should look well to himself) 호손이, “미합중국 정부의 돈은 (...) 마치 악마가 주는 보수와 같은 마력을 지닌다.”[Uncle Sam’s gold (...) has, in this respect, a quality of enchantment like that of the Devil’s wages.]라고 언급한 게 빈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작가 생활을 지속하려면 경제적 자립이 필수적입니다.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처럼 유산을 상속받거나 생물학자 찰스 다윈처럼 부모의 지원을 받지 않는 한, 작가는 직장 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소설가 앤서니 트롤럽처럼 우편국 감독관으로, 시인 김수영처럼 번역과 양계로, 수필가 찰스 램처럼 동인도회사 직원으로, 철학자 데이비드 흄처럼 가정교사나 비서로 경제적 독립을 이루어야 하지요. 그래야 작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자유로운 사유와 창의적인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형성해 갈 수 있습니다. 호손이 세관에서 근무하는 동안 “일상생활의 세속성”(the materiality of this daily life)이 자기를 강압적으로 억누르거나, “비누 거품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아름다움”(the impalpable beauty of my soap-bubble)이 실제 상황과 접촉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경험했지만, 그곳에서 번 돈이 결국엔 그가 명예퇴직한 후에 진행한 “주홍 글자” 집필 작업의 경제적 기반이 된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호손을 비롯한 작가들은 최소한의 생계비만 마련된다면 창작 활동에 모든 것을 투여합니다. 그들의 삶에 있어 경제적인 여건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난감하겠지만, 최소한도의 수입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고 창작 활동에 전심전력합니다. 무릇 글쓰기란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능력과 체계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소설 창작의 경우에는 특정 사물과 상황에 대해 오랫동안 다각도로 탐색하고 공부하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특정 순간에 떠오르는 영감과 아이디어를 포착해서 간직하고 확대해 가는 것도 절실합니다. 작가 앞에 펼쳐지는 삶의 책장(冊張)(“The page of life that was spread out before me”) 한 장 한 장은, 주목해서 그 깊은 의미를 탐구하지 않으면, 따분하고(dull) 평범해 보이는(commonplace) 채로 곧바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화살처럼 날아가는 그 한 장 한 장을 날 선 통찰력으로 포착하여 체계적으로 갈무리해 가야 합니다. 그렇게 쓰인 글자들이야말로 “그 책장 위에서 황금으로 변하게 되지요.”(find the letters turn to gold upon the page)
명예퇴직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돌입한 호손은 자신의 현실에 대해 의미 있는 말 한마디를 던집니다. “이제부터 이 마을은 이제 더 이상 내 삶 속의 현실이 아니다. 나는 이미 다른 어떤 세계에 속한 시민이다.”(Henceforth it ceases to be a reality of my life. I am a citizen of somewhere else.) 세관 생활을 뒤로한 후 글 쓰는 일에 몰두하고 보니, 그 생활이 마치 “한바탕 꿈”(a dream)처럼 놓여 있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늙은 직원들은 이제 “한낱 그림자”(shadows)에 지나지 않고, 세계적 명성을 떨치던 무역상들도 자기 추억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져서, 이제는 그 사람들의 모습과 이름조차 떠올릴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맙니다, 호손이 자기가 살던 마을을 더 이상 자기 삶의 현실로 여기지 않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작가 호손이 속해 있다는 그 ‘다른 어떤 세계’는 어디일까요? 아마도 “몬테크리스토 백작”(The Count of Monte Cristo)의 작자인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가 언급한 창작의 세계가 아닐까 합니다. “역사가의 인물을 죽이는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소설가의 특권이다. 역사가는 그저 유령을 소환할 뿐이지만 소설가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생생한 인물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프랑스 제2의 도시인 마르세유 앞 바다에 있는 이프 섬에는, 숱한 관광객들이 찾는 이프 성(감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을까요? 뒤마가 창작한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주인공인 에드몽 당테스가 백작이 되기 전에 14년 동안 도형수(徒刑囚)로 지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곳 지하에 있는 ‘에드몽 당테스의 방’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곳 1층에는 ‘미라보의 방’도 있습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프랑스대혁명 당시 중심적으로 활약했던 역사적 인물로서, 파리 센 강에 있는 ‘미라보 다리’의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실제로 그는 그 이프 성에서 1년간 감금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을 방문하는 관광객 중에, 그의 방에 관심을 두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도리어 당테스의 방 앞에 머물며, 그가 경험했던 억울한 처지에 감정이입하며 달콤한 상념에 빠지기 원하겠지요. 즉 ‘역사가의 인물’[미라보]을 ‘죽이는 인물’[에드몽 당테스]이 이미 살아 숨 쉬고 있는 셈입니다. ‘주홍 글자’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가 조너선 퓨가 한 일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 헤스터 프린이라는 여인을 소환한 것에 불과하지만, 소설가 호손이 한 일은 그녀를 생생하게 다시 살려 내어 역동적이고 이타적인 삶을 구가하는 매혹적인 인물로 재창조한 것이지요. 한 발 더 나아가, 퓨가 소환한 그 여인조차도 상상적인 인물이라는 데 이 소설의 또 다른 묘미가 있습니다.
그 창작의 세계는 또 하나의 “평행 세상”(parallel world 혹은 parallel universe)이거나 “대체 현실”(alternative reality)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the real world)와 공존하지만, 그것과는 매우 다른 독립된 별개의 세계(a self-contained separate world)라는 말입니다. 소설이란 장르가 생긴 이후로 소설가들은 각자 ‘대체 현실’을 창조하기도 했지만, 종교, 신화, 전설에 등장하는 ‘평행 세상’을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천국(Heaven), 올림포스[Olympu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위대한 신들의 처소], 발할라[Valhalla,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전투에서 영웅으로 죽은 전사들이 영원히 머무는 오딘의 위대한 전당] 같은 단어들이 가리키는 ‘대체 현실’이지요. 모든 소설가가 각각 창조하는 세계는 죄다 ‘평행 세상’이라고 부를 수 있으므로, 그러한 모든 잠재적 평행 우주의 합을 가리키는 “다중 우주”(multiverse)라는 단어도 가능해집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생을 통틀어 각자가 읽고 감상한 소설, 희곡이나 연극, 영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각각이 하나의 세계나 우주를 이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일장신대 차정식 교수가 주기도문에 두 번 나오는 '하늘'이라는 단어의 헬라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예수 인문학"). 첫 번째는 복수(heavens)이지만, 두 번째는 단수(heaven)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첫 번째 용례, 즉 "하늘(즉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등장하는 그 '하늘'이 "신화적 공간"이라고 주장합니다. 고대의 상상력에 의하면 하늘이란 다양한 피조물이 배치되어 활동하는 신비로운 겹겹의 공간이었다는 것이지요. 새들이 날아다니고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의 층, 그 위에 해와 달이 운행하는 하늘의 층, 그 위에 무수한 별들이 펼쳐진 하늘의 층도 있지만, 그것들보다 훨씬 더 높은 지점에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의 층들도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어떨까요? 고대인들처럼 물리적 하늘을 신비로운 영적 공간으로 여기는 대신, 다양한 상상력의 결과물인 소설과 영화 속에 내재된 세상들을 '평행 우주,' 즉 '신화적 공간'으로 인식합니다. 기억합시다. 이런 ‘다중 세계’가 과거와 현재에 걸쳐 연면하게 이어 왔다는 것은, 우리 인류 모두가 진리와 사랑이 살아 숨 쉬는 진정한 ‘평행 세상’을 갈망해 왔다는 증거입니다. 그 '평행 세상'은 성서가 확연히 그 실재를 계시하는 '하늘'이라는 공간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그 공간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주기도문의 두 번째 '하늘'이지요. 그러므로 소설가들이 사고하고 상상한 ‘평행 세상’을 한껏 누리면서, 지금도 역동적으로 운행되는 그 '하늘'과 끊임없이 접속하고 성서가 반복해서 천명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갈망을 계속 키워 갑시다!
<작가의 행복, 섭리에 대한 신뢰>
셋째로, 이 도입부에서 호손은 행복이란 “자신의 재능과 감수성을 두루 이용하면서 살아가는 것”(to live throughout the whole range of his faculties and sensibilities)임을 밝힙니다. 작가인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의식한 정의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그에게 펼쳐진 삶의 전망은 지루한 일이 이어지는 공직 생활을 감내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누리고, 만찬을 하루의 하이라이트로 즐기다가 늙은 개처럼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자의로 그만두지 않는 이상 자기처럼 조용하게 지내는 인물을 내쫓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결국 자기도 나이 들면 다른 노쇠한 검사관 같은 “또 다른 동물”(another animal)로 전락할 것으로 보았지요. 그런데 이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가 더 나은 삶을 마련해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가 미국 제12대 대통령이 되면서 호손은 세관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예기치 않은 이 명예퇴직은 지극히 불쾌한 일이었으나, 자축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할 만한 상황은 전개되지 않았기에, 그는 “모든 일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마음 편한 결론”(the comfortable conclusion that eeverything was for the best)을 내리고는, “잉크와 종이와 펜을 산 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책상을 열어젖혀 다시 문필가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 갑자기 자기 목이 떨어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으나, 결국 그 상황이 세세로 남을 걸작을 낳는 모판이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자기 작품이 품고 있는 가치를 정확하게 가늠하지 못했겠지만, “그렇게 심각한 우발 사건”(even so serious a contingency)을 “최대로 선용하는 데”(making the best of the accident) 성공한 셈입니다. 그의 처신은 우리가 불행한 일을 겪을 때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것을 생각하는 대신 그것에 올바로 반응한다면, “그것과 함께 동반되는 치료와 위안”(its remedy and consolation with it)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는 방증이 됩니다. 더구나 그의 경우는 이미 작품으로 만들 만한 주제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 지루한 공직 생활을 그만둘 생각까지도 품고 있던 차였으니, 얼마든지 명예퇴직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여 본격적인 작가의 삶을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야말로 그의 신세는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남한테 살해당한 행운을 만난 어떤 사나이의 운명”[that (=fortune) of a person who should entertain an idea of committing suicide, and, although beyond his hopes, meet with the good hap to be murdered]과 비슷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호손이 언급한 섭리란 단어의 의미는 ‘지혜롭고 의도적인 하나님의 주권’(wise and purposeful sovereignty)입니다. 주권이란 단어 속에 능력과 권리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 섭리는 온전한 능력과 전적인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이 최상의 지혜로 우리 인생을 의도적으로 인도해 가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섭리를 좇아 사는 삶이 행복을 누리는 길이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차원에서 행사되는 지혜이기에 시야가 좁은 우리에게는 그것이 일시적으로나마 불편하고 불리한 현실로 비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은 ‘지혜롭고 한결같이 사랑하는 능력’(wise and loving power, 시편 62:11-12)을 실행해 가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기만 하다면, 당신 앞에서 두렵고 떨 수는 있어도 전인격적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인도해 가시는 길을 신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반면에 그 능력이 지혜와 사랑의 정신으로 행사된다는 것을 맛보아 알게 된다면, 우리 인생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발생하는 그 모든 일에 감사하며(데살로니가전서 5;18), 기꺼이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그 유일한 길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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