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다?
기차역이나 지하철역 앞 혹은 다른 공공장소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이번엔 '천당'과 연관하여 그 구호 자체의 문제점을 논의해 보겠습니다. 우선 그 구호의 의미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아마도 이 구호는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 천당으로 가고 믿지 않으면 죽어 지옥으로 간다는 의미를 띤 것이겠지요. 예수님을 믿으면 천당으로 직행하고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직행한다는 의미가 아닌 이상에는요.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천당은 천국과 같은 의미를 띠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천당은 천국, 즉 “하늘 나라”라는 용어를 대체한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용어는 신약 중 마태복음에만 등장하는 것으로서 마태가 유대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마태복음의 성격상 하나님 대신 하늘로 대체한 경우입니다. 결국 하늘나라란 하나님의 나라인 셈이지요. 하나님이란 명칭을 사용하길 꺼리는 유대인을 위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천당이 천국이란 용어와 대체되어 사용되기도 했겠지만 이제는 유통기한이 다하지 않았을까요? 한글 성경에서도 사용하지도 않는, 의미가 너무나 협소하고 고루하게 들리는 그 용어를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계속 하나님 나라를 천당으로 부르는 것은 심각한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조석민 교수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나라'라는 의미로 사용된 구약의 ‘말쿠트’나 신약에서 사용된 ‘바실레이아’라는 단어를 영토를 가리키기보다는 주로 ‘통치’를 의미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말쿠트’의 경우, 인간 왕에게 사용될 때는 그가 다스리는 ‘영역’, ‘지역’, ‘영토’를 제한적으로 가리키기도 했지만(에스라 1:1, 7:23, 역대하 20:30, 에스더 3:6, 다니엘 9:1, 11:9),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당신의 왕적 권위 혹은 통치를 의미했습니다(시편 145:11-13, 103:19). ‘바실레이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장소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왕권, 통치와 같은 추상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마가복음 1:15을 필두로 신약에는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 나라’라는 표현이 무려 113회나 등장함).
비교적 확정된 경계를 가진 실체로서의 국가라는 개념이 지정학적, 또는 영토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현대적 국가의 개념이지만, 결국 국가를 이루는 요소들 가운데 국민과 주권도 함께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의미한다는 게 별로 이상할 일이 없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우리나라 교계에서도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런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문제는 성경 속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제시되어 있는 이 개념을 어떻게 통합해서 이해할 뿐 아니라 이 개념이 어떻게 현재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관되는가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먼저 성경 속에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용례를 몇 가지 살펴볼까 합니다. 유명한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다”라고 이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너희’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17:20)라고 질문하던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은 마치 골수 친일파의 마음속에 대한민국의 광복과 해방의 기쁨이 임했다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불성설이지요. 구절의 의미를 따질 때 반드시 문맥을 살펴야 할 이유를 강력하게 지지해주는 적절한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슨 뜻일까요? 크레익 키너가 언급한 대로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아마도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미지의 어떤 시점에 이루어질 것인지 혹은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이루어질 것인지에 관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부분을 이루는 “왕 되신 메시아”(messianic king)가 이미 그들 중에 임재해 계신다는 점을 암시한 것이겠지요. 하나님 나라의 절대 주권자 되신 당신의 임재를 하나님 나라의 임재로 보신 셈이지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라고 하신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결정적인 때가 무르익어 하나님의 왕권 혹은 당신의 주권적인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이자 당신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쥔 분이시라는 공적 천명이었습니다. 사역을 감당하시던 중에 언젠가,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라며 무모한 응대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당신께서는 그들의 비합리적이면서도 강퍅한 태도를 지적하시면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태복음 12:28)라고 선언하신 바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영계까지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당신의 왕권이 이미 역동적으로 행사되고 있음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 나라는 우주의 왕권을 쥐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가운데 지금도 힘 있게 진행 중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라면 어떻게 우리 마음을 통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런 의미를 띤 구절로 제게 감동적으로 다가온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17)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이 포함된 문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혹은 어느 날을 지킬 것인가와 같은 비본질적인 것과는 연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정의, 평화 및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어디 이러한 요소들뿐이겠습니까? 성령 충만한 삶, 즉 성령께서 통치하시는 삶이 맺는 이러한 열매들 혹은 열매(갈라디아서 5:22의 성령의 ‘열매’는 단수임)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마음의 상태와 삶의 자세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이 열매(들)로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뿐 아니라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어 결국 그들을 세워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로마서 14:18-19). 무릇 하나님 나라의 국민(빌립보서 3:20)이라면 일상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감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교회를 든든히 세울 뿐 아니라 이웃들의 깊은 필요들을 채우는 삶을 지속해갈 것입니다.
또 다른 예도 한 가지 더 들어보겠습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10-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욀 때마다 마음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제 여건이나 세상 환경이 아무리 괴롭고 열악해도 결국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고 당신의 뜻이 이 땅 가운데서도 이루어질 날이 있을 것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항상 가슴에 품고 갈망하고 있는 소망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다면 어디로 임할까요? ‘오다’(come)는 단어의 의미상 당연히 우리에게 혹은 이 땅으로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듯이 당신의 나라, 즉 당신의 주권적인 통치가 이 땅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신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혹은 ‘파루시아’(현존<presence> 혹은 도착<arrival>이라는 의미)와 직결됩니다.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히브리서 1:3). 그 하늘에 계신 당신께서 언젠가 이 땅에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백성들의 몸을 변화시켜 부활에 이르게 하신 후(빌립보서 3:20-21) 그들은 당신의 신부로 단장되어 주님을 모시고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1:1,2).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립보서 3:20-2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21:1,2)
다시 말하자면 하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부활한 몸을 입은 한 공동체로서 하늘에서 내려와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임하시는 예수님과 땅에서 기다리는 우리를 언급했다가 다시 하늘로부터 임하는 우리를 말하는 것이 혼동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각 구절의 문맥을 따라 이렇게 설명해볼 수 있겠습니다. 현재 땅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는 장차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임하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지만(빌립보서의 문맥),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되고 그 이후에 모든 세대의 모든 주님의 백성과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되는 것은 새 하늘의 영역이어서 결국 그 새 하늘에서 내려온 셈이 되고 새 땅에서 신랑 되신 예수님과 살게 되는 것(요한계시록의 문맥)이지요. 이것이 바로 톰 라이트가 밝힌 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주기도문에 대한 최종적 응답”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논의할 사항은 ‘하늘’에 대한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과연 어디일까요? 통상적으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면 ‘위쪽으로’라는 방향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도 이런 물리적인 방향을 적용시켜 이해할 수 있을까요? 현재 우리가 사는 곳에서의 ‘위쪽’은 사실상 그 지구 대척점에서 보면 ‘아래쪽’이지요. 혹시 예수님께서 ‘위쪽’으로 올라가셨다고 하여 저 멀리 떨어진 우주의 한 지점으로 진행해 가신 것으로 상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곳도 결국엔 어느 하늘 아래의 땅이겠지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통치하고 계시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물리적으로 보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기에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런 물리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면서 결국엔 납득이 되지 않는 승천의 심오한 의미에 대해선 비 물리적인 방법으로 신앙의 비약을 발휘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위로 올라가 승천하신 것은 물리적으로, 하늘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것은 비 물리적으로 해석하는 식이지요.
예수님의 승천은 성서 상의 중요한 교리 중 한 가지입니다. 성경의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납득해야 할 기독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승천과 연관하여 사용된 ‘위쪽’이나 ‘아래쪽’, 혹은 ‘올라가다’나 ‘내려가다’라는 표현은 비유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고 계신다는 표현을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과 같은 차원일 것입니다. 예컨대 이번 추석에 제가 “부산으로 내려간다”라고 했을 때 지금 거주하고 있는 대구가 부산보다 고도 상으로 높은 위치에 있다는 뜻이 아니지요. 제가 지금 멘토링하고 있는 중학교 1학년생이 모두 내년에 “2학년으로 올라간다”라고 할 때 아래층에 있는 1학년생들이 위층에 있는 2학년 교실로 올라간다는 의미가 아니지요.
톰 라이트가 석의 했듯이 성경에 등장하는 하늘과 땅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연속된 시공간 속에서 서로 연결된 두 지역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비 물리적인 세계와 물리적인 세계를 일컫는 표현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성경은 “우리가 공간(space)이라고 부르는 것의 두 가지 다른 종류, 우리가 물질(matter)이라고 부르는 것의 두 가지 다른 종류 그리고 우리가 시간(time)이라고 부르는 것의 두 가지 다른 종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즉 성경에 의하면 하늘이란 표현은 영적인 삶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땅이란 표현도 육적인 삶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공간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두 공간은 각각 서로 매우 다르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두 공간이 각각 뚜렷하게 구분되는 정체성과 역할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맞물려 있고(interlock) 교차합니다(intersect).”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혹은 나타나실 때 이 두 공간은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영원히 서로 결합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 일상의 공간이 이토록 긴밀하게 겹쳐 있고 교차되어 있다는 현실이 얼마나 신선한 경탄과 경외심을 자아내는지요!
몸의 부활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은 소위 영적인 면만을 강조하면서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를 되뇌며 죽음 이후에 누릴 영혼의 복만을 고대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서는 영지주의나 마니교의 이원론을 거부합니다. 물리적인 몸도 비 물리적인 영도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이었으나 현재는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죄 많은 이 땅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었으나 현재는 타락한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장차 언젠가 홀연히 온전히 새로운 실체로 재창조될 것입니다. 새로운 몸, 새로운 영 및 새로운 땅이 임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현재의 몸과 땅이 현격하게 변혁되겠지만 몸은 몸이고 땅은 땅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몸과 현재의 땅의 현실을 무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될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새로운 나라(하늘 나라)와 새로운 시대(내세)가 열린 이후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당신께서 가시적인 왕으로 임재하시는 그날까지 당신의 영광을 우리의 몸으로 이 땅 가운데 현시하며 선교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과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은 다른 차원이 아닙니다(마태복음 6:33).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자신과 교회와 사회 속에 구현되기를 추구하는 삶은 이 땅에서 당신의 정의가 실현되는 일을 위해서도 자기 몸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늘’과 ‘땅’이라는 두 공간은 판타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평행 세계” (parallel worlds)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예컨대 ‘나르니아 연대기’에서 주인공들이 현재의 세상에서 옷장을 통해 나르니아라는 세상으로 진입하듯이 땅과 하늘은 서로에게 각각 “병행 세계”일 것입니다. ‘해리 포터’에서 주인공들이 그들이 살던 세상에서 “9와 4분의 3번 승강장”(Platform 9 3/4-런던의 킹즈 크로스 역에 있는 승강장)을 통해 호그와트 마법 학교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게 되듯이 땅과 하늘은 서로에게 “병행 세계”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세계와 ‘하늘’의 세계는 시공간적으로는 다른 종류의 세계이겠지만 서로 맞물려 있고 교차되는 세상인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인문학적 이해가 절실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평행 세계’라는 인문학적 개념은 뉴에이지 사상가나 판타지 소설가들만이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신 아이디어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는 게 문제인 셈이지요. ‘평행 세계’는 어린아이들의 눈에도 확연하게 비치는 하늘과 땅의 조화와 통합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안목이자 성서 속의 하늘과 땅을 이해하는 데 적실한 도움을 제공하는 시각이기도 합니다. 거친 세파와 싸우다 그 안목과 시각을 어느샌가 잃어버린 성인(그리스도)들만 헤매고 있을 뿐입니다.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인문학적 상상력을 잃어버린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습니다. ‘신화’나 ‘소설’이란 문학 장르를 거짓말 잔치로 곡해하고 ‘평행 세계’를 마법적인 영역으로 왜곡한 기독교계는 이제 어린아이부터 시작해서 젊은이들까지 그 안으로 발 한 번 들여놓지 않는 사회적 게토요, 외딴섬이 되고 만 듯합니다. 인문학적 독법으로 ‘신화’, ‘소설’ 및 ‘평행 세계’와 같은 개념을 이해하기보다는 근본주의적인 시각으로 이런 유용한 개념들을 재단해버린 결과이지요. 하늘과 땅이 긴밀하게 겹쳐 있고 교차되는 영광스러운 현실이나 부활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영광스러운 선교적 사역을 감당하는 경이로운 특권을 이 땅의 사람들에게 현시하지 못했기에 이 땅의 젊은이들을 죄다 판타지 세계에 빼앗겼습니다. ‘해리 포터’의 세계를 계속 만들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포터 모어’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한 젊은이의 변을 들어보세요. “중학교 2학년 때 외고 입시를 준비하느라 너무 힘들었는데 해리 포터를 보겠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견뎠다. 해리 포터 세대들은 대부분 오색찬란하고 아름다운 마법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어려운 경쟁의 시기를 건너왔는데 여전히 각박하고 엉망인 청년기가 해리 포터 세계관에 다시 빠져줄 이유가 되고 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구호는 천국을 사후적 세계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단순히 장소적인 실재로만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곡해한 데 머무르지 않고 이 구호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 실재 혹은 웃음거리(laughingstock)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복음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디도서 2:10)인데 반해 이 구호는 복음을 전파한다는 미명 하에 회자되어 왔지만 복음의 품위와 명예를 실추시키는 대표적인 방식이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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