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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선교 보안: 신분 감추기가 거짓된 행동이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8. 14.

선교 보안: 신분 감추기가 거짓된 행동이다?

공산권이나 회교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자기 신분을 감추어야 합니다. 선교사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거나 그렇다 하더라도 특정 소수에게만 종교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신분으로 비자를 발급해주기 때문입니다. 자국민들 혹은 자국민 회교도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 둔 마당에 정식으로 선교사 비자를 발급해 줄 리가 없습니다. 장기간 그런 곳에서 사역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선교사 신분을 감추고 다른 신분으로 비자를 얻거나 활동해야 합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그런 지역에서 자기가 선교사임을 공언하는 예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말레이시아는 국교가 회교이기 때문에 회교 국가로 분류되지만 이미 기독교 인구가 9%나 되는 지역입니다. 회교도인 말레이인을 제외하고 중국인이나 인도인 및 다른 민족에 속한 현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몇 대도시에는 한인교회도 수두룩하기 때문에 그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선교사)들도 적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만 상대하는 사역에 드려진 경우라면 자기가 목사요 선교사라는 점을 밝혀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만일 말레이인 회교도뿐 아니라 다른 나라 회교도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경우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중국이나 다른 공산권에서 사역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기가 목사요 선교사라고 하면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불법을 자행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신분 보안이 중대한 문제가 되는 이유입니다.

 

이런 지역에서는 자기의 선교사 신분을 “감추어야” 합니다. 어차피 선교사 비자를 발급받을 수도 없어 다른 비자로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을 것이므로 그 비자에 해당하는 신분으로 자기를 소개하면 될 일입니다. 예컨대 여행자, 학생, 사업가 등과 같은 신분으로 자기를 드러내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트면 됩니다.

 

선교사 신분을 “감추는 것”을 “거짓말”로 여기는 선교사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감추는 것이기 때문에 심적인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거짓”되고 “부정직”한 일로 여긴다는 점은 좀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선 이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자신의 신분 전부를 감추는 게 아니라 그중 일부를 드러내지 않고 다른 신분을 부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분에 대한 일부 정보를 숨기면서 다른 정보를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어떤 분들이 염려하는 바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 영역에서 월터 카이저가 일러 준 ‘거짓말’의 정의가 저를 참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거짓말이란 우리로부터 진실을 알 권리를 가지고 있고, 그런 지식을 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환경 하에 있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the intentional deception of an individual who has the right to know the truth from us, and under circumstances in which he or she has a claim to such knowledge)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진실만을 말할 책임을 지니고 있지만, 그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물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죄다 말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있거나 당신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태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어떤 진실과 지식을 숨겨야 할 때도 얼마든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경우는 성경 속에서 적지 않게 발견될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먼저 성경상의 예를 몇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사흘 길을 가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진정한 의도를 애굽 왕에게 숨기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시였습니다(출3:18,10). 사무엘이 베들레헴을 방문한 진정한 의도를 사울 왕에게 숨기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의 지시였습니다(삼상16:1,2). 이 애굽 왕과 사울 왕은 둘 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당신의 뜻에 대해 강퍅했던 자들로서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여리고 성을 찾아온 이스라엘 정탐꾼 두 명을 숨겨둔 상태에서 그들을 체포하러 온 여리고성 군사들에게 진짜 행방을 숨긴 채 ‘거짓’(다른) 정보를 제공해 준 라합의 경우도 상황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역시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수2:1-7, 히11:31, 약2:25). 여리고 왕은 이 이스라엘 정탐꾼에 대한 정보를 다 알아야 할 권리가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와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여 멸망당할 자들’(히11:31)로 명시되어 있는 것은 주목거리입니다. 이러한 성경상의 사례들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곰곰이 헤아려 보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과 ‘정보를 숨기는 것’과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여 야기되는 불필요한 긴장과 스트레스 가운데 이 세상(선교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약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우리의 인생살이 속에서는 가능한 한 자신의 행동과 그 의도를 숨기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컨대, 사소하게는 운동하는 영역이나 거창하게는 전쟁과 같은 영역이 그러합니다. ‘거짓 동작’ 한 번 쓰지 않겠다며 뻣뻣하게 서서 주먹을 휘두르다가 ‘케이오우’ 당하는 권투선수를 보고 ‘정직한 선수’로 찬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거짓 전술’ 한 번 쓰지 않겠다며 자신들의 공격, 수비 계획을 소상하게 적들에게 알려 주다가 ‘낭패’ 당하는 장군을 보고 ‘정직한 군인’으로 찬양하는 사람도 물론 단 한 사람도 없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패배를 영광스러운 승리로 찬양해 주실까요?

 

신앙생활 속에서 어떤 영역에 대해 ‘자기 기준’을 지나치게 고집하다가 결국 유익보다는 손실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정보의 은폐’를 ‘거짓말’로만 여기는 시각도 이 경우에 포함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잣대로 둔다면 ‘극단적인 도덕론자들’의 입장과 다른 경우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를 염두에 두지 않은 그들의 ‘평면적 혹은 이차원적 사고’와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를 늘 헤아리는 ‘입체적 혹은 삼차원적 사고’는 어떤 영역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면에서 서로 차이가 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나 봅니다. 모쪼록 아래의 전도서 말씀처럼, 공산권과 회교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이 ‘부적절한 자기 기준’에 의해 삶과 사역의 길을 결정하는 어리석음 대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균형 잡힌 계시의 길’에 의해 삶과 사역을 이끌어가는 지혜를 누리길 기원합니다.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7:15-18)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는 썩어빠진 정부(政府)의 전형으로 알려지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정치 악당들이 대대로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중에 미국 뉴딜 시대에 ‘루이지애나 주’ 지사로 봉직한 바 있는 ‘휴이 롱’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런 정치 악당들 중의 전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뒤를 이어 부정부패를 널리 퍼뜨리는 데 기여한 바 있는 그 남동생, ‘얼 롱’(Earl Long)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보안지침 한 가지를 남겨두고 갔습니다.

 

“전화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글로 쓰지 말라.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화하지 말라. 속삭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말하지 말라.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속삭이지 말라. 끄덕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미소 짓지 말라. 윙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끄덕이지 말라.”(Don't write anything you can phone. Don't phone anything you can talk. Don't talk anything you can whisper. Don't whisper anything you can smile. Don't smile anything you can nod. Don't nod anything you can wink.)

 

언젠가 이 글을 접하면서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민감한 선교지에서 보안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유치한 수준인가를 깨닫고 얼굴이 화끈거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챙기게 될 돈 몇 푼, 파렴치한 방식으로 누리게 될 소소한 쾌락 거리와 명예 따위를 얻기 위해 이토록 철두철미하게 보안을 유지하며 자신의 삶을 삼가 온 이 ‘불한당’을 보십시오. 그에 비해, 정작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가운데 확장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드높은 비전을 품고 있는 선교사들이 유지하고 있는 보안 수준은 얼마나 유치하고 천진난만한 것인지요.

 

궁극적으로 보안 유지는 민감한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아무 거침없이 그 땅 백성들에게 전하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덧붙여 선교지에서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안전 조처일 뿐 아니라 다른 선교사들과 그들의 사역을 보호하는 장치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민감한 선교지에서 자기가 선교 보안을 잘 지키지 않을 때 다른 선교사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에 무신경한 선교사들을 그동안 많이 목격했습니다. 예컨대 자기는 회교도를 대상으로 사역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게 목사(선교사) 신분을 노출시키면서 어떤 지역에 살거나 학교나 단체에서 활동한 탓에 나중에 그 동일한 지역이나 학교나 단체에서 활동하는 다른 선교사가 그 덤터기를 쓰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들과 소통하는 우리나라 선교 단체나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인터넷 전문가들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엽서'(postcards)로 간주하는 이메일로 소통할 때 더욱 보안 의식이 요망됩니다. 

 

혹시라도 그 결정적인 사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혹은 그 사역을 진행해 가는 중에라도 너무나도 하찮은 일로 인하여 선교사들의 소중한 신분이 노출됨으로써 중도에 귀국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이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로 남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선교사들 및 그들과 동역하는 이들은 가능한 한도 내에서 보안에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도마뱀’처럼 자신을 지혜롭게 숨기고 살아간다면 비록 연약하고 허점이 많지만 ‘그 선교지의 가장 중추적이고도 핵심적인 장’(잠30:28에 언급된 ‘왕궁’) 속에서 그들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잠30:2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