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과 은사: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사와 무관하다?
신앙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특정한 일감으로 부르신다 혹은 ‘소명’(召命)을 주신다고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히 진지하게 자신을 주님께 헌신한 이들은 이런 소명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 자기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생으로 자기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어떠한 일감 혹은 소명이라도 달게 감당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이러한 때 신성한 부르심(a divine call or summons)이라는 소명의 일반적 의미의 영향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이나 환경을 초월해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소명을 부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우리에 대한 절대주권을 가지신 분이시므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적성이나 소원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목회자로, 선교사로, 의사로, 사업가로 부르신다고 믿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다루어 보기 위해 로마서 12:1-5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로마서 1-11장에서 제시된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12:1) 즉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절에서 5절 까지를 보면 어떻게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And do not be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so that you may prove what the will of God is, that which is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For through the grace given to me I say to everyone among you not to think more highly of himself than he ought to think; but to think so as to have sound judgment, as God has allotted to each a measure of faith. For just as we have many members in one body and all the members do not have the same function, so we, who are many, are one body in Christ, and individually members one of another.)
어떻게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까? 세 가지만 짚어 보겠습니다. 첫째, 내세의 소망을 붙잡고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라”고 하시지요? 어떻게 마음을 변화할 수 있을까요? 그 열쇠는 “이 세대”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이 세대(this world=this age)란 이 세상 혹은 금세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이자 시대입니다. 이 세대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그 반대말에 담겨 있습니다. 그 반대말이 뭘까요? 오는 세상 혹은 내세(the age to come)입니다. 얼핏 보면 내세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 시작될 것 같지만 성경은 이 내세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신 때가 바로 오는 세상 혹은 내세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본 블로그 중 "금세와 내세" 참조).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요한복음 3:36)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질적인 풍성한 생명만을 의미하지 않고 부활 후에 우리가 완전히 참여하게 될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가 이미 그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두 세상 혹은 두 시대가 중첩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사단이 악한 세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세상, 인간의 욕심과 죄악이 주류인 시대가 바로 이 세상 혹은 금세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역사하시는 세상, 성령에 의해 새롭게 변화된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가는 시대가 바로 오는 세상 혹은 내세입니다.
자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질문해 볼까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요? 사단적인 가치관과 인간의 욕심과 죄악에 물든 삶의 방식 대신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의 방식을 택함으로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즉 내세적인 가치관과 방식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장차 누릴 소망을 굳게 붙들고 추구하는 게 필요합니다. 예컨대 요한계시록 21, 22장에 묘사되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부활한 백성들의 공동체/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복낙원을 소망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상하게 들리고 어색하게 느껴지나요? 그렇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현재의 삶을 좌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돈에 목을 매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요즘 의대 많이 보내기로 유명한 자사고나 그 학교로 자녀를 보내기 위해 용을 쓰는 학부모가 그렇게도 많은 게 무엇 때문인가요?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요?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두 번째 길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내게 주어진 은사와 기능을 계발해야 합니다.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볼까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생각을 품지 말라”,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무엇에 대한 생각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믿음을 따라 겸허하게 자신의 됨됨이, 특히 자신의 은사와 적성과 소원을 잘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바탕 위에 교회를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회는 특정 지역 교회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세계적인 공동체를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한 공회”(holy catholic<universal> church)가 바로 이 우주적인 교회이지요. 이 구절이 나오는 사도신경 부분은, “우리는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게 올바른 번역입니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혹은 소명의 의미를 바로 정립하는 게 절실합니다. 소명을 신성한 부르심(a divine call or summons)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용어를 특히 목회자나 선교사들에게만 적용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 당시 루터나 칼뱅이 언급한 ‘소명’은 그런 특정 직분만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직업을 포함하여 각자의 삶에 있어 이루어지는 어떤 주요한 헌신이나 자신이 맡게 되는 어떤 주요한 직분이라면 이런 부르심 혹은 소명이라는 범주 속에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직업 뿐 아니라 가족 관계, 교회 활동 및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주요한 헌신의 대상들 모두가 바로 소명이었던 것입니다. 소명하면 목회자로서나 선교사로서의 직분과만 연관 짓는 것은 적어도 개혁적인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명의 의미를 이렇게 확장시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소명이 우리의 됨됨이나 적성과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부여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독특한 인격과 기질을 갖고 태어났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 139:13에 나오는 ‘장부’는 문자적으로 ‘신장(腎臟)’을 가리키는 말로 히브리인들이 인격을 가리킬 때 사용하던 가장 중요한 단어였습니다. 이 말은 곧 우리 각자가 어떤 일과 역할을 즐길 수 있는 자질을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두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특정한 소원을 두시고 그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심도 성경은 밝히 일러 주고 있습니다(빌립보서 2:13). 이 소원은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한 것이므로 당신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유익케 할 것입니다. 여기에다 성령께서 하시는 주요한 역할 중의 한 가지가 바로 우리에게 힘을 부어 주시는 것까지도 성경이 명시하고 있음을 고려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혜사’로 부르셨을 때(요한복음 14:16) 의도하신 의미가 바로 그 점일 것입니다. 이 보혜사란 용어는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에 의기소침해진 병사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담당한 군대 관리를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은 구약시대에 성령께서 어떤 개인에게 임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라고 부르신 것들을 행할 수 있는 열정과 능력이 부어졌던 수많은 사례들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세 번째 길은 무엇일까요? 내 은사와 기능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직업을 택하느냐도 중요하지만 특히 자신의 은사와 특성의 통합된 형태가 활용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자기가 가진 은사나 특성 한 가지씩만 고려해보자면 자기보다 뛰어난 이들 천지입니다. 예컨대 제가 영어를 잘한다고 언급하는 이들이 많아도 저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제가 영어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어도 더 수준 높은 대학에서 이 분야의 박사 학위를 받은 이들이 존재합니다. 제가 말레이어를 잘해도 저보다 말레이어 잘하는 사람은 부지기수입니다. 제가 말레이인 회교도를 섬기겠다고 해도 저보다 더 잘 준비되고 그 일에 열심 있는 이들 또한 많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영어 잘하고, 영어교육학 박사 학위 있고, 말레이어도 잘하면서 말레이인 회교도를 섬기겠다는 외국 그리스도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찾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말레이시아에 있는 한 국립대학에서 영어교육학 교수로 근무하면서 말레이 회교도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제 은사와 특성의 통합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아무리 피아노를 잘 쳐도 여러분보다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무리 그림 잘 그려도 여러분보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 많습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를 좋아해도 여러분보다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아무리 돕는 것 좋아해도 여러분보다 돕는 일에 도가 튼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런데 피아노 잘 치고, 그림 잘 그리고, 어린 아이 좋아하면서, 남 돕는 일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의 은사와 특성을 통합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고 보배로우며 최고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본문을 통해 우리가 새로 지음 받은 인생에서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 즉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첫째, 내세의 소망을 붙잡고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와 기능을 계발해야 합니다. 셋째, 자기 은사와 기능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기여해야 합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밝히 계시해 주고 있는 우리 인생의 요체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해 주신 독특한 적성과 은사를 바탕으로 하여 당신께서 심어 주신 소원을 따라 당신께서 부여해 주신 능력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데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원을 이루고 있는 자신만의 적성과 은사를 기꺼이 수용하고 마음 속에 심긴 소원들을 신중히 다루어가면서 자신이 지닌 모든 능력을 다 들여 선한 일들을 도모해 가는 데는 거듭된 동기부여와 함께 예리한 방향 점검이 필요한 법입니다. 바로 이 역할을 은혜로 담당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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