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목사와 교사: 사역은 목사/교사만 한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8. 19.

목사와 교사: 사역은 목사/교사만 한다?

지난 세월 동안 신앙 생활하면서 의미를 잘 파악하기 힘들었던 것 중에 '사역'(使役)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에 보면 그 의미가 네 가지나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사람을 부리어 일을 시킴. 또는 시킴을 받아 어떤 작업을 함"이란 의미가 그나마 가장 가까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는 영어 'ministry'의 번역어로 이 단어를 주로 채택했습니다. 올인올 통합사전에 보면 그 영어 단어도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종교 의식의) 집행; 봉사, 원조; 수단, 매개 (작용)"라는 것이 가장 근접한 뜻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에 나와 있는 사역에 대한 의미를 통합해 보자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신앙 예식을 집행하는 것이나 신앙인 혹은 일반인들의 필요를 돕는 봉사나 섬김"이란 의미로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그런데 이 용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ministry)가 혼동을 부추기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그 단어 앞에 정관사를 붙이는 경우였습니다(the ministry). 그렇게 함으로써 성직자나 목사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영향때문인지 "사역자"라는 명칭으로 목회자를 일컫게 되었습니다. 마치 목사직만이 유일한 사역이라는 인상을 주다가 결국엔 그 의미로 고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역자=목회자요, 목회 활동=사역이 되어 버린 셈이지요.  

 

과연 목사만 사역자일까요? 또한 사역은 목사만이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앞에서 정리해 본 사역의 사전적 의미를 따라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신앙 예식을 집행하는 것이나 신앙인 혹은 일반인들의 필요를 돕는 봉사나 섬김"을 죄다 독점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지의 여부를 떠나서 그만이 유일한 사역자(the ministry)이기에 그 모든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볼 때 한 단어의 의미가 곡해되고 오용되면서 끼친 폐해의 규모를 따져 볼 때 "the ministry"만한 사례를 다시 찾기 힘들 것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가 왜곡되는데 기여한 성경의 본문 한 곳을 살펴 보면서 과연 "누가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오늘 다룰 문제가 영어의 콤마(,)의 역할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먼저 영어 문법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영어 문제를 두 가지만 내겠습니다. 먼저 다음 두 문장의 의미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He had two sons who became doctors.

He had two sons, who became doctors.

 

두 문장의 의미는 다릅니다. 골치 아픈 얘기를 잠깐만 하자면 첫째 문장은 관계 대명사의 제한적 용법이, 둘째 문장은 계속적 용법이 사용된 경우입니다. 계속적 용법의 경우에는 관계 대명사가 수식하는 선행사 다음에 콤마가 붙음으로써 그 선행사에 대한 가외의 정보 (extra information)를 제공한다는 점이 제한적 용법과 다릅니다. 그래서 콤마 하나 때문에 두 문장의 의미는 상당한 차이가 납니다. 첫째 문장은 그에게 아들이 둘 보다 더 많다는 뜻이고 둘째 문장은 그에게 아들이 둘 뿐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첫째 문장의 의미는 그에게는 아들이 둘 보다 많은데 그들 중 의사가 된 이가 두 명이라는 뜻이 됩니다. 둘째 문장의 의미는 그에게는 아들이 두 명인데 둘 다 의사가 되었다는 말이 되지요. 다음 두 문장의 의미는 어떨까요?

 

I didn’t marry him because of his looks.

I didn’t marry him, because of his looks.

 

콤마 하나 때문에 그 의미의 차이는 극과 극입니다. 첫째 문장은 내가 그와 결혼했다는 말인데 둘째 문장은 내가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그래서 첫째 문장은 내가 그와 결혼하긴 했는데 그 이유가 그의 외모(예컨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같은 외모) 때문은 아니다(예컨대 비단결 같은 마음)라는 의미가 됩니다. 둘째 문장은 내가 그와 결혼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그의 외모 때문이었다는 의미가 되지요.

 

이러한 콤마의 유의미성에 주목하면서 에베소서 4:11-12을 개역개정 번역과 영어 번역으로 비교하며 묵상해 보겠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개역개정 한글 성경)

 

“And He gave some as apostles, and some as prophets, and some as evangelists, and some as pastors and teachers, for the equipping of the saints for the work of service, to the building up of the body of Christ;”(NASB-1971년에 번역된 영어 성경)

 

“And he gave some, apostles; and some, prophets; and some, evangelists; and some, pastors and teachers; For the perfecting of the saints, for the work of the ministry, for the edifying of the body of Christ:“(KJV-1611년에 번역된 영어 성경)

 

개역개정 번역본이나 NASB로 이 구절을 읽어 보면 주님께서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 및 교사를 세우신 목적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for the equipping of the saints for the work of service, to the building up of the body of Christ)입니다.

 

이 다섯 직위나 은사는 모두 가르치는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존 스토트가 자주 힘주어 강조한 대로 고린도전서 12:31(“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에서 언급된 그 “더욱 큰 은사”는 바로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가리킬 것입니다. 성도들을 잘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감당하도록 도움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역할이 바로 이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이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이 다섯 은사 혹은 직무에 대해 잠깐 나누겠습니다. 그것들 중에서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의 “터” 혹은 “기초”(foundation)로 존재하는 직위(에베소서 2:20, 3:5-6)이므로 지금 이 시대에 존재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미 기초가 놓인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져 가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그 기초가 다른 것으로 더해질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복음 전도자, 목사 및 교사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복음 전도자(evangelist)는 누구일까요? 그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 원어는 신약에서 단 세 번만 등장하는 데 이곳과 사도행전 21:8의 빌립의 경우와 디모데후서 4:5의 디모데의 경우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복음 전도의 은사를 부여해서 그 일을 탁월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부르신 이들이지요. 요즘 시대처럼 복음에 대해 무관심할 뿐 아니라 적대적인 시기에 복음 전도의 은사를 가진 이들이 얼마나 절실한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으로 목사는 누구일까요? 목사(pastor)라는 단어가 한글과 영어 성경에 몇 번이나 등장할까요? 정답은 단 한 번 바로 이곳뿐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라는 단어의 원어인 포이멘(poimen)이 신약에서 총 18회나 등장하는데 왜 목사라는 용어가 단 한 번만 나올까요? 그 이유는 다른 모든 용례에서는 목자(shepherd)로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라는 직위가 성서적인 근거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면 속단입니다. 웨인 그루뎀에 의하면 포이멘이라는 명사는 단 한 번 사용되었지만 "목자로 활동하다"(to act as a shepherd)라는 헬라어 동사(poimaino)가 장로들에게 적용된 경우가 여러 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설교 속에서 이 동사는 그 장로들의 역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shepherd the church of God)"(사도행전 20:28). 사도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권면하는 상황 속에서도 이 동사는 그들의 임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shepherd the flock of God)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베드로전서 5:2). 사실상 pastor란 영어 단어도 "양을 돌보는 자"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이전 시기에는 양을 돌보는 자라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 목자를 일컫던 표현이었기 때문에 목자 대신 목사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왜 이곳에서만 이 목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했는지는 의문으로 남습니다. 

 

다른 직위와는 달리 "목사와 교사"가 함께 다루어 지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some as pastors and teachers)라고 되어 있습니다. 웨인 그루뎀에 의하면 이 구절의 원어가 두 명사(목사, 교사) 앞에 정관사가 하나 밖에 없고 kai(=and)라는 단어에 의해 연결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두 명사가 어떤 형태로든 통합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목사들과 교사들"이라는 두 그룹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목사-교사들"(pastor-teachers)로 번역하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목사와 교사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모든 교사가 반드시 목사일 수는 없겠지만 모든 목사는 반드시 교사이어야 합니다. 목사는 양 된 성도들의 목자로서 그들을 돌보아야 할(tending) 책임이 있으므로 특히 가르침(teaching)으로 그들을 먹여야(feeding)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내용이지요(요한복음 21:15-17).

 

다시 세 번역본 비교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개역개정 번역본이나 NASB와는 달리 KJV는 본문 말씀을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다섯 직분을 세우신 목적이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For the perfecting of the saints, for the work of the ministry, for  the edifying of the body of Chris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차이가 보이시는지요?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와 "봉사의 일을 하며"의 차이입니다. 즉 NASB와는 달리 KJV에는 "For the perfecting of the saints"와 "for the work of the ministry" 사이에 콤마가 하나 더 첨가되었습니다. 그 결과 "성도를 온전케 함", "봉사의 일을 담당함" 및 "그리스도의 몸을 세움" 세 가지 영역 모두 그 다섯 직분을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만일 NASB처럼 그 콤마가 없었다면 "자기 백성을 봉사의 일을 하도록 온전케 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도록 하시기 위함이다"("to equip his people for works of service, so that the body of Christ may be built up"-NIV)라는 의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콤마로 인하여 KJV가 번역된 1611년 이후에 영어권 교회 내에서 야기된 혼란이 심각했기 때문에 나중에 신학자들이 그것을 "사악한 콤마"(the wicked comma) 혹은 "파국적인 콤마"(the calamitous comma)" 혹은 “치명적인 콤마”(the fatal comma)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제임스 패커, 존 스토트).

 

어떤 혼란이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 콤마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선 모든 성도들이 아니라 오직 특별한 은사로 부르심 받은 이들만이 “봉사의 일”(the work of service) 혹은 ‘사역의 일’(the work of ministry)을 담당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성서상으로 볼 때 교회 내에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뿐 아니라 교회 내의 봉사란 봉사(service), 사역이란 사역(ministry)은 죄다 복음 전도자, 목사 및 교사들의 몫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봉사요 사역입니까? 둘째로 그 결과 일반 성도들과 특정 은사(gift)와 지위(office)를 부여받은 이들이 구별되면서 후자가 '성직자'의 반열에 드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것이지요. 셋째로 그 반면에 성도들은 무력해지고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교회 지도자들의 인도를 받아 온전하게 되기만 하면 혹은 준비되기만 하면 자기들의 임무 끝이었습니다. 무엇을 위한 온전함인지 무엇을 위한 준비인지 궁금하긴 했겠지만 성서상으로 보자면 교회 내의 모든 봉사와 사역은 목사와 교사와 같은 지도자들이 다 하도록 되어 있으니 그들은 주일 예배에 잘 참석하고 헌금 잘 내면 성도로서 할 도리는 다 한 셈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공산이 큽니다.

 

그렇다면 그 콤마가 사라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복음 전도자, 목사 및 교사들에겐 두 가지 목적이 부여되는 셈입니다. 첫째는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to prepare God's people for works of service"-NIV) 혹은 사역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무장시키기("for the equipping of the saints for the work of ministry"-NKJV)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사역'(ministry)이란 단어의 헬라어가 바로 디아코니아(diakonia)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가 사용된 상황이 목사/교사의 일이 아니라 소위 평신도(laity), 즉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일을 묘사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입니다. “신약이 가리키는 사역(ministry)이란 성직 엘리트에게 부여되는 특혜가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권이 되는 소명을 예견하고 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여기에 있다”라는 존 스토트의 지적 그대로입니다. 바로 이 본문이야말로 ‘만인사역자주의“("every-member ministry")라는 성서의 비전이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는 기반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앞에서 던진 "누가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역은 모든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은 목사/교사 사역과 일반 성도 사역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사역인 것이지요. 사도행전 6:1-4 본문에서 아름답게 묘사된 그대로입니다. 초대 교회가 왕성한 영적 부흥을 체험하던 시절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매일 음식이 분배되는 대상에서 제외되어 그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진정하자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2절) 그 일을 맡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서 칭찬 받는 사람 일곱 명을 택하라고 하면서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4절)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상황에서 2절에 나오는 "접대"라는 표현이 영어로 "serve tables"인데 serve에 해당하는 헬라 원어가 "diakonein"입니다. 그리고 "말씀 사역"이라는 표현이 영어로 "the ministry of the word"인데 ministry에 해당하는 헬라 원어가 "diakonia"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나 음식을 분배하는 것이 다 "디아코니아"(사역)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석의가 복음 전도자, 목사 및 교사의 독특한 역할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영광스러운 기능은 결코 상실되거나 약화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무장시키거나 준비시켜 그들이 각자의 은사를 최대한도로 발휘하여 각종 사역과 봉사의 일에 드려지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임무를 띤 일꾼들입니다.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사역이 어디에 있을까요? 목사/교사와 일반 성도들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로서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을 통해 다른 이들을 세우고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자기도 서 가는 복을 누릴 형제, 자매들입니다. 모쪼록 종교 개혁이 새롭게 기치를 내 건 “만인제사장주의”(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원리)만큼이나 오늘 함께 상고한 본문에 명시된 “만인사역자주의"(the ministry of all believers-모든 성도들이 사람들의 필요를 섬기는 특권을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원리)도 드높이 선양되고 널리 적용되길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