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과 야망: 그리스도인의 삶에 설 자리가 없다?
성공이나 야망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든 단어들입니다. ‘목적하는 바를 이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성공, ‘크게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이라는 의미를 띤 야망이라는 용어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즉 성도로서 죄악 된 세상과 분리되어 살아야 한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너무 세속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는 듯합니다. 이 용어들이 우리 그리스도도인의 삶 속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조금도 무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들에 대한 성경의 용례는 우리에게 어떤 계시를 허락해주고 있을까요?
먼저 성공에 대해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을 보자면 이 단어가 구약에서만 아래와 같이 두 번만 등장하고 신약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욥기 5:12)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전도서 10:10)
영어 성경의 경우도 대동소이합니다. KJV에 의하면 신구약을 통틀어 success란 단어가 단 한 번만 등장할 뿐입니다. 수 1:8에서 입니다. NASB에서는 구약에서만 여호수아 1:8을 포함하여 총 7회 등장하지만(창세기 24:12; 여호수아 1:7-8; 느헤미아 2:20; 욥기 5:12; 전도서 10:10; 다니엘 6:28), 신약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영어 성경을 참고해 보지는 않았지만 대동소이하리라 봅니다. 문자적인 의미를 살리며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 성경에서 이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이 단어의 용례가 그만큼 희귀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올해 첫날을 맞이하면서 읽은 말씀 속에서 ‘success’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1:7-8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Only be strong and very courageous; be careful to do according to all the law which Moses My servant commanded you; do not turn from it to the right or to the left, so that you may have success wherever you go. This book of the law shall not depart from your mouth, but you shall meditate on it day and night, so that you may be careful to do according to all that is written in it; for then you will make your way prosperous, and then you will have success.-NASB)
이 말씀 중에 두 번 나온 'have success'를 개역 개정에서는 ‘형통하리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묵상하던 중에 이 히브리어 표현이 ‘지혜롭게 행하다’(act wisely)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는 점을 영어성경 번역자들이 일러 주고 있습니다(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NASB와 NKJV의 경우). 즉 여호수아가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온전히 순종하면 그의 가는 길이 번창하게 되고(‘make your way prosperous’) 결국엔(and then) 그가 무엇을 하든지 지혜롭게 행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세상적 개념의 성공과 성서적 개념의 성공이 그 길을 달리 하는 게 아닐까요?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라는 성공의 사전적 개념에 비추어 보건대 세상적 성공은 자기가 뜻한 대로 되기만 했다면 달성했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성서적 성공은 결국 ‘지혜롭게 행하기’로 평가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형통’이나 ‘성공’이란 표현 대신 사용된 ‘지혜로운 행보’라는 용어가 이 말씀을 접한 제 마음을 얼마나 넉넉하게 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지난날 제 삶이든 다른 이들의 삶이든 번창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업이 반드시 지혜로운 행보로 드러나지 않은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가는 삶은 번창하는 경과뿐 아니라 지혜로운 결과까지 누릴 수 있다는 점을 이 말씀은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세심하게 주님의 뜻을 헤아려 행하는 삶의 결말이 바로 ‘지혜로운 행보’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요셉의 삶을 읽으며 이 여호수아의 말씀이 구현되는 장면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온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집이나 감옥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세 한탄하는 장면이나 불평하는 모습 한번 보임 없이 보디발 장군과 간수장조차도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도록 지혜로운 행보를 이어갔습니다(창세기 39:3,23). 그리하여 마침내 창41장에서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7년 가뭄을 해결할 수 있는 비책을 나누자 바로가 그를 총리로 삼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그런데 제게 이것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바로가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 순간이었습니다(45절). 그 이름이 바로 “사브낫바네아”입니다. 영어 성경(NASB)에서 일러준 그 이름의 의미를 접하면서 요셉 인생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의미는 “God speaks; he lives"입니다. 처음엔 ”he"가 요셉이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맥상 요셉이기보다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더 이치에 맞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요셉의 삶은 하나님과 깊이 동행하면서 당신의 말씀을 청종하고 묵상하여 그것을 실행하고 전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보디발도 간수장도 그리고 바로조차도 그와 그의 삶의 면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그와 함께 동행하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삶일까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께서 살아계신다”는 진실을 이 세상에 두려울 것 없던 당시 최고 권력자의 입에서 고백되도록 하는 영광 말입니다.
모쪼록 저희 인생3막을 통해 요셉의 삶이 재현되길 간절히 빕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약속이 올해 제 삶 속에도 실현되기 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지속적으로 묵상해가면서 당신의 생각과 뜻이 제 생각과 뜻과 합치될 수 있도록 계속 조정해 감으로써 주님의 생각과 뜻을 발견하기 원하는 이들에게 그것들을 지혜롭게 전파하는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찾고 구하는 이들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기에 이 사역의 열매는 항상 보장되어 있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고자 합니다.
다음으로 야망이란 단어의 경우도 거의 동일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한 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영어 성경은 약간 다릅니다. KJV에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NASB에 의하면 신약에서 5회 나옵니다. 이 가운데 빌립보서 1:17과 야고보서 3:14,16에 나오는 헬라어는 ‘에리데리아’인데 이것은 ‘고용되어 일하다’(to work for hire)라는 헬라어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경쟁(rivalry) 혹은 야심(ambition)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다툼’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크게 무엇을 이루어보겠다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워낙 많아 서로 경쟁하게 되어 있어 결국엔 다툼으로 귀결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린도후서 5:9, 데살로니가전서 4:11에 등장하는 헬라어는 ‘필로티메오마이’(philotimeomai)로서 앞의 헬라어와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즉 ‘명예를 사랑하다/명예를 추구하다’(to love or seek after honor)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미에서 ‘열정적으로 추구하다’, ‘매우 강력하게 원하다’, 그리고 ‘야망을 품다’라는 의미로까지 확대되어 NASB에서는 ‘ambition'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 용어 색인(concordance)을 참조해 보면 이 헬라어가 사용된 곳이 한 군데 더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20입니다. 그러니까 이 희귀한 헬라어가 사용된 곳은 신약 성경 세 군데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Therefore we also have as our ambition, whether at home or absent, to be pleasing to Him.”(고린도후서 5:9-NASB)
“and to make it your ambition to lead a quiet life and attend to your own business and work with your hands, just as we commanded you,”(데살로니가전서 4:11-NASB)
“It has always been my ambition to preach the gospel where Christ was not known, so that I would not be building on someone else's foundation.”(로마서 15:20-NIV)
이 세 구절의 말씀을 주의 깊게 묵상해 보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가야 할 참된 야망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먼저 고린도후서 5:9-10을 상고해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Therefore we also have as our ambition, whether at home or absent, to be pleasing to Him. – NASB).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즉 우리가 평생 야망으로 삼아야 할 것 중 첫 번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문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구절 앞 문맥 중 1절에서 자기가 죽는 순간에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자기에게 있는 줄 안 사도 바울이 정죄함(condemnation)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주님의 공평정대한 평가(evaluation)와 칭찬(commendation)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합니다(고린도전서 4:5). 비록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 받았지만(로마서 8:1) 우리 믿음은 반드시 사랑과 순종으로 드러나야 합니다(갈라디아서 5:6; 로마서 1: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린도전서 4: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라디아서 5:6)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로마서 1:5)
폴 바넷이 언급한 대로, "우리는 선행에 의해 구원 받은 것은 아니지만 선행을 위해 구원 받은 것입니다."(We are saved not by good works but for good works.) 심판에 대한 '건전한' 두려움은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역의 참된 동기가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야망으로 삼는 영역에서 최고의 본이 되는 분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세 차례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뻐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성경에 근거하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순종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을까요? 정답은 마리아의 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즉 성육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0:5-7을 참조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Therefore, when He comes into the world, He says, "SACRIFICE AND OFFERING YOU HAVE NOT DESIRED, BUT A BODY YOU HAVE PREPARED FOR ME;)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몸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제시하는 일관된 계시입니다. 히브리서 10:5-7은 시편 40:6-7에서 비롯된 말씀이니 구약의 계시로서 이 사실을 천명하고 있고 신약 말씀인 로마서 12:1에서도 동일한 주제를 만방에 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산 제물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Therefore I urge you,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and holy sacrifice,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service of worship.)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영원토록 지내실 수 있는 분이셨지만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구원을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기로 예수님은 결단하시고 순종하셨습니다. 그 인간 되심은 결코 변개할 수 없는 영원한 변형이었습니다(요한복음 1:1,14). 브루스 밀른은 요한복음 1:14을 석의 하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the Word was made flesh)라는 부분 중 "되어“(was made)의 헬라어(egeneto)의 의미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그 자질이 변하여 새로운 상태로 진입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어떤 것이 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시제가 확정적이고도 완성된 행동을 암시하는 부정과거 시제라는 점도 언급하면서 성육신을 번복하는 일은 없다(there is no going back upon the incarnation)라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도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새롭게 입으셨고 영원토록 그 몸을 입고 사실 것입니다. 이런 선택을 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에베소서 3:18-19).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임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던 예수님은 두 번째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시점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세 번째로 십자가를 눈앞에 둔 시점에 변화산상에서 기도하실 때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3:16-17)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태복음 17:5)
즉 공생애 시작 전 30년간의 신실한 순종의 삶과 공생애 기간 3년간의 충성된 복종의 삶을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음성으로 상찬해 주신 게 아닌가 합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특히 기록된 계시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복 하는 생애였습니다. 당신께서 드리신 대제사장적 기도 중에 나오는 다음 구절 그대로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I glorified You on the earth, having accomplished the work which You have given Me to do.)(요한복음 17:4)
우리가 평생 야망으로 삼아야 할 첫 번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였습니다. 바로 이 기반 위에 다른 두 가지 야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도 바울에게 적용되는 야망이고 세 번째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야망입니다. 두 번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15:20-21 말씀의 세 가지 번역본을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It has always been my ambition to preach the gospel where Christ was not known, so that I would not be building on someone else's foundation.... – NIV)
(And thus I aspired to preach the gospel, not where Christ was already named, so that I would not build on another man's foundation.... – NASB)
사도 바울의 야망은 복음 전파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지만 좀 더 세부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곳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이나 “남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넘어서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려는 사도 바울의 강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0:15,16-새번역 참조).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우리 한글 번역이 KJV나 NASB 번역 의도를 따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사도 바울의 '부인하는 의사 표명 진술'(disclaimer)을 명백하게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전하지 않겠다, 다른 사람이 수고해서 이미 일을 이루어 놓은 지역에는 가지 않겠다는 다짐인 것이지요.
본 블로그의 다른 지면(“지상명령: 대위임령이 지상명령이다?”)에서 논의한 바 있지만 전 세계 인구 중 1/4을 차지하는 Frontier people groups(힌두교권과 회교권을 포함함)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의 수가 모든 선교사 중 1%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장기간을 선교사로 헌신한 일꾼들의 선교적 방향과 의도를 얼마든지 존중할 수 있지만 통계로 여실히 드러나는 이런 선교적 상황을 접할 때마다 참으로 납득하기도, 감내하기도 힘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라고 천명하며 자신의 삶을 드렸던 사도 바울과 같은 일꾼은 어디서 만나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라는 평생의 야망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두 가지 야망 중 한 가지는 사도 바울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 미전도 지역에 복음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야망은 사도 바울의 것("It has always been my ambition"-로마서 15:20)이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야망은 따로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1-12의 세 가지 번역본을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Make it your ambition to lead a quiet life, to mind your own business and to work with your hands, just as we told you, so that your daily life may win the respect of outsiders and so that you will not be dependent on anybody. – NIV)
(and to make it your ambition to lead a quiet life and attend to your own business and work with your hands, just as we commanded you, so that you will behave properly toward outsiders and not be in any need. – NASB)
“조용하게 살고,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는 것”을 야망으로 삼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문맥을 살펴보면, 성령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중에 복음이 전파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환난 중에도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면서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한다는 것을 듣고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요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4:1-12). 즉 거룩한 삶(1-8절), 형제 사랑하기(9-10절) 및 지금 다루고 있는 세 번째 야망인 자기 생업에 충실하기(11-12절)입니다. 왜 이것을 야망으로 삼아야 할까요? 위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 품위 있게 살아감으로 그들의 존경을 받게 되고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서입니다(NIV, NASB).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제시하는 야망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하기를 야망으로 삼으라는 말씀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 독자가 있다면 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복음 전파라는 말조차 등장하지 않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 서신서뿐 아니라 사도 바울이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는 성도들에게 직접적으로 복음 전파하라는 권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모든 이들에게 착한 일을 행하는 삶(갈라디아서 6:10),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삶(에베소서 5:8), 복음에 합당한 삶(빌립보서 1:27),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는 신실한 삶(골로새서 3:23), 외인에게 단정히 행하는 삶(데살로니가전서 4:12) 등이 주목되고 있고 디도서에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고 도리어 복음을 빛내는 삶을 살도록 권면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계(디도서 2:5,10)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복음을 나누지 말라는 의도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복음 전도가 직접적인 선포(Direct evangelism)가 아닌 반응적인 나눔(Responsive evangelism)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4:5-6). (본 블로그, “복음전도의 시기와 방법: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참조)
지금껏 살면서 “조용하게 살고,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는 것”을 야망으로 삼으라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저는 없었습니다. 혹자는 사도 바울이 이 권면을 한 의도가 다음 구절처럼 예수 재림이 임박했다는 점을 곡해해서 현실 도피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았다는 시대적, 사회적 여건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busybodies)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데살로니가후서 3:11-12). 그렇지만 그러한 상황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적용되겠지만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적용되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도 재림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죽은 자들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염려하는 성도들의 생각을 바로 잡는 권면이었습니다.
살전4장에서 마지막으로 권면한 세 가지 내용 중에서 첫 번째인 거룩한 삶은 아마도 데살로니가 교회 내에서 불거진 성적인 문제를 의식하고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무려 1-8절에 걸쳐). 그렇지만 이어지는 형제 사랑하기와 생업에 충실하기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요한복음 1:14)을 본받는 데살로니가 성도들(데살로니가전서 1:6)이라면 마땅히 견지해야 할 삶의 모습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더구나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 바울의 13개 서신서 중 가장 초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들을 제시하려는 사도 바울의 의도가 제대로 담긴 서신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일상의 삶을 통해 그 복음을 빛내는(혹은 단장하는) 삶을 영위해갈 것을 역설한 사도 바울의 일관된 목회 사역 방침에도 전적으로 부합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야망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입니다. 둘째는 미전도 지역에 복음 전파하기입니다. 세째는 생업에 충실하기입니다. 이것들 중 둘째는 복음 전파하는 일에 특별한 부르심이 있는 일꾼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첫째와 세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됩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각자에게 주어진 부르심대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삶의 야망으로 삼아야 합니다.
무릇 성공이나 야망이란 단어는 가치중립적인 것입니다. 성공의 의미가 자기 뜻을 이루는 것이고 야망이란 것이 크게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이라면 그 방향만이 문제가 되겠지요. 즉 자기 뜻과 자기의 큰 무엇이 어디를 지향하는가가 관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기 하다 보니 너무 세상적인 것으로 비쳤을 공산이 큽니다. 더구나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자기를 부인하라(누가복음 9:23), 자기 목숨을 잃어라(마태복음 16:25),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요한복음 12:25)와 같은 가르침이 자기의 은사와 장점을 무시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도록 추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자기의 됨됨이가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것이 분명한 이상 자신의 은사와 재능과 자질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의도일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를 중심에 놓는 교만과 하나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기 뜻만을 고집하는 태도가 바로 자기 부인의 대상일 것입니다. 잃어버리고 미워해야 할 대상인 목숨은 물리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zoe)가 아니라 영혼이나 자신을 의미하는 ‘프쉬케’(psyche)인 것이지요. 이기적인 욕망이나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 각자를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가장 고유하고 특별하게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물리적인 몸의 생명을 드리는 순교를 기대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 대신 자기의 뜻과 큰 포부를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행하는 데 두고 그 일을 위해 우리 몸을 당신께 산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로마서 12:1,2).
건전한 의미를 띤 성공과 야망은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고 그렇게 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꿈과 미래를 잃고 자포자기하며 사는 우리 젊은 세대에게 전할 소식은 현실은 어쩔 수 없다,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정치, 사회, 문화적인 협력을 통해 이러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들의 은사와 능력과 자질들을 발휘하여 의미 있고 보람된 인생을 영위해갈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소개해 드린 세 가지 야망을 떠올리면서 이번 기회에 우리 각자의 야망 선언문(Ambition Statement)을 한 번 작성해보는 게 어떨까요? 제 야망 선언문을 소개합니다. “내 야망은 범사에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영어교육, 인문학 및 성서적 시각을 통합하여 세계의 깊은 필요를 채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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