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신앙: 과학이 (창조) 신앙의 적이다?(2)
-진화론에 대한 오해-
진화(evolution)는 가치중립성을 띤 과학적 현상이자 원리입니다. 중력(gravity)이 어떤 과학자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고 관찰 가능한 사실이자 원리인 것과 같습니다. 예컨대 코로나 바이러스나 슈퍼박테리아가 출현하는 것이나 만성기의 암이 급성기로 변환되는 현상 이면에 숨겨진 과학적 원리가 ’진화‘입니다. 그 현상이나 사실에 ‘진화’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 과학자의 역할이었습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본 아이작 뉴턴이 그 현상에서 작동하는 과학적 원리에 ’중력‘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처럼 말이지요(김영웅, "과학자의 신앙공부"). 진화 혹은 진화론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다윈에 대한 오해. “종의 기원”(1859)을 발표하기까지 찰스 다윈의 연구 과정이 무신론적인 세계관에 의해 추동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그가 비글호를 타고 탐구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사제가 되기 위한 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임명되기까지 일정 기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든버러 대학 의대를 중퇴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1831년에 졸업] 영국 국교회의 사제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제직 서품을 받으려면 1-2년 동안 공석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대학의 박물학 수업에서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그 기간을 활용하여 지질학 기행을 떠날 것을 고려하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영국 해선 HMS 비글호의 공식 박물학자로 임명되어 무려 5년간 그 배와 함께 항해합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근처 마을을 돌아다니며 암석, 화석, 수생 동물, 식물, 육지 동물의 표본을 수집했습니다. 현존하는 종뿐 아니라 멸종된 종까지 다양하게 수집하면서 그 모든 생물의 표본과 그것들을 둘러싼 지질학적 특징을 세밀하게 관찰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지질학적 변화와 그러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생명체 사이의 관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지요. 그 탐험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종의 기원”이었습니다(아널드 R. 브로디, 데이비드 E. 브로디, “인류사를 바꾼 위대한 과학”).
다윈은 이 책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창조론 전체를 해체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의 기원 문제와 관련하여, 생물의 각 종이 즉각적이고 독립적인 특별 창조의 결과로 출현했다고 보는 전통적인 이론을 반박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자신이 참여한 탐사의 산물인 지질학적 화석 기록, 생물지리학의 관찰 결과 및 비교 해부학과 비교 발생학의 연구 결과가 모두 그 이론과는 다른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생물의 각 종은 사소하지만 유익한 변형들 간의 점진적인 자연선택의 결과로 출현했다고 보는 시각[진화론]에 의해 훨씬 더 잘 설명되었던 것이지요. 이 점을 고려한다면, 다윈이 “나는 이 책에서 제시한 견해들이 왜 누군가의 종교적 감정에 충격을 주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한 말을 납득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중력의 법칙이 종교에 가한 충격처럼 자신의 이론이 가한 충격 또한 일시적으로 지나가 버릴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지요(김정형, “창조론: 과학 시대 창조 신앙<The Doctrine of Creation>”).
’대진화‘에 대한 오해. 소진화[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유기체 구조가 변형되는 것]는 인정하지만, 대진화[종과 종을 뛰어넘는 변형]는 증거가 없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증거가 속속 발견되었습니다. 먼저 소개할 것은 ’네오필리나‘(Neopilina)입니다. 헤니 렘케 탐사팀이 코스타리카 해구의 수심 6천 미터에서 발견된 화석입니다(1952년).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네오필리나는 반은 연체동물이고 반은 지렁이 같은 체절동물이었던 신비스러운 단판류[껍데기가 하나라는 뜻] 화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연체동물은 체절이 있는 벌레의 후손이고 단판강의 생물들은 하나의 문이 다른 문으로 바뀌는 대진화를 증명하는 ‘전이형’이라는 것을 확인해 준 셈입니다. 다음으로 닐 슈빈과 테드 대슐러 일행은 어류와 양서류의 화석 시기를 유추하여 그것을 품고 있는 지질층이 북극 근처에 있음을 확인하고 캐나다 북극권에 있는 엘즈미어섬[아무도 연구하지 않음]을 탐사하던 중, 어류와 양서류 중간에 해당하는 ”틱타알릭“(Tikttaalik)이라는 생명체의 화석이 발견했습니다(2004년). 그야말로 어류와 양서류의 딱 중간을 가르는 화석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리고 지적할 만한 대진화의 증거는 20년간 대장균 45,000 세대를 관찰한 결과, 새로이 효소를 만들어 내는 종이 탄생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종 단위 진화가 확인된 것이지요. 비록 생물학자들 간의 의견 차이나 추가 증거로 인해 진화의 ‘계통도’가 수정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진화론’ 자체는 생물학의 기축 이론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진화가 생명체의 가장 확실한 존재 방식이라는 사실이 지속적으로 증명된 셈이지요(도널드 R. 프로세트, “진화의 산 증인, 화석 25” / 손성찬, “모두를 위한 기독교 교양”).
인간이 원숭이의 자손이라는 오해. “종의 기원” 속에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된 존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공통조상에서 거듭 분화된 결과물이라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결국 오랜 옛날에 원숭이와 인간이 갈라져 나온 공통적인 조상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과거로 소급해 나가다 보면, 모든 생명체는 같은 공통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생명과학적으로 적용해 보자면, 진화가 처음으로 시작된 생명체인 단세포로부터 모든 생명체가 비롯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일어난 이런 현상들은 관찰 혹은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에, 진화는 과학적으로 100퍼센트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주장이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이성을 이용한 합리적인 추론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다방면에 걸친 독립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삼아 합리적인 추론을 거친다면, 누구나 다윈의 이론이 가치중립성을 띤 입장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김영웅, “과학자의 신앙공부”).
-그리스도인의 선택 사항-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계시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편견 없는 관찰과 체계적인 실험을 통해 과학이 발견한 것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요?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느냐 혹은 장르와 문맥을 고려하여 해석하느냐라는 시각과 가치중립성을 띤 과학의 발견을 무시하느냐 혹은 인정하느냐라는 입장을 접목해 보면 아래와 같이 4가지 선택이 나옵니다. 그 중 세 번째 선택은 가능성으로 존재하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취할 법하지 않으므로 제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3가지의 선택만 존재합니다.
(1)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 + 정상과학 무시: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 창조과학)
(2)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 + 정상과학 (부분적) 인정: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
(3) 장르/문맥 통한 창세기 이해 + 정상과학 무시: ?
(4) 장르/문맥 통한 창세기 이해 + 정상과학 인정: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인정하는 이 3가지 입장은 모두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로 창조하셨다는 것과 물질의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해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점을 받아들입니다. 각 입장의 주장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 창조과학): 이 입장은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즉각적으로 그 창조 명령에 대응하는 피조물이 나타났다는 의미에서 즉각적 창조론(instantaneous creationism)이나, 모든 피조물이 6일(144시간) 만에 창조되었다고 해서 젊은 지구론(youg-earath creationism)으로도 불린다. 하나님이 생물학적으로 각 종류대로 모든 생물을 창조하셨다고 보기 때문에, 진화론을 비롯한 모든 과학 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2)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각 ‘날’<‘yom’>을 24시간이 아닌 ‘긴 시대’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오랜 지구론(old-earth creationism)으로도 불린다. 하나님이 생물의 각 종을 직접 창조하셨다고 보는 점에서는 과학적 창조론과 같다. 그러므로 생물의 진화는 부정하지만, 우주나 지구의 연대에 대해서는 천문학이나 지질학 같은 다른 과학 이론을 수용한다.
(3)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 빅뱅부터 시작된 우주와 지구의 연대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설계와 목적에 따라 생물의 각 종이 진화하는 과정을 진행해 갔다고 보기 때문에, 유신 진화론(theistic evolution)으로도 불린다. 생물학뿐 아니라 대부분의 과학적 이론을 수용한다. [복음주의 지도자인 벤자민 워필드,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N. T. 라이트, 팀 켈러, 알리스터 맥그래스, 프랜시스 콜린스가 지지하는 입장.] (송인규 목사)
지금까지 첫 번째와 두 번째 선택에 대한 설명은 접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세 번째 선택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덧붙이겠습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선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창조냐 진화냐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만 하는 것처럼 선전한 것이 얼마나 편파적인 태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제임스 패커의 주장에 주목해 보세요. “성경에서는 과정에 의한 창조와, 과정 없는 창조가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창조 진리와, 과학에서 기술하는 일련의 과정을 포함하는 사상 사이에는 원칙상 아무런 괴리가 없다. 둘 다 하나님의 주권 행위다.” 아마도 그가 언급한 ’과학에서 기술하는 일련의 과정을 포함하는 사상‘이란 게 바로 진화론을 가리키겠지요. 다음으로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출신 과학자인 김영웅 박사의 설명도 들어보세요. 그는 이 세 번째 입장이 진화라는 방법을 이용하여 하나님이 생물을 창조하셨다고 보는 입장이라면서, 만일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닝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진화라는 방법을 고안하셔서 생물의 창조 매커니즘으로 사용하지 않으셨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창조가 항상 초자연적이고 비과학적인 기적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사람들의 선입견일 뿐이라면서, 진화는 창조의 풍성함을 배가시킬 수 있는 신비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대적인 줄 알았던 과학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감으로써 신앙을 깊고 풍성하게 형성해 갈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과학이 이분법적인 관념에 허우적대는 기독교인에게 어느 날 계시된 초월적인 메시지와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언명이 아닐까 합니다. 그의 창조 신앙에 귀 기울여 보세요. “하나님은 진화라는 개념에게 내쫓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방법을 고안하시고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김영웅, “과학자의 신앙공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3가지 선택지가 있지만, 우리나라 교회는 21세기가 도래한 이 시점에도 왜 이다지도 줄기차게 창조과학만을 신봉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우종학 교수가 지적했듯이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지난 세월 동안 심각한 정보의 왜곡이 진행되었습니다. 오로지 과학이 틀렸다는 창조과학 지지자들의 이야기만 난무했을 뿐, 천문학자가 우주의 역사를 강의하거나 생물학자가 진화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을 청취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전무했으니까요. 편향되고 왜곡된 정보만 들어온 것이지요. 그래서이겠지요. 기독교인 중에는 과학을 불신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스마트폰이나 자가용이나 인터넷뱅킹과 같이 여러 과학 이론에 근거한 과학기술 문명은 자연스럽게 활용하고 누리면서도, 우주의 연대나 빅뱅이나 생명체의 진화와 관련된 과학 지식에 대해서만은 적대적으로 비판적인 이중적 태도를 보이지요. 자신의 과학문해력이 낮아 이해하지 못하는 정보가 생기면, 공부해야 할 거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드러나 있는 이 창조세계에 대해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로마서 1:20)
-과학과 신앙의 통합-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과학과 신앙을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할 때 도움이 될 만한 실제적인 지침 몇 가지를 제안하겠습니다(’ㄱ’으로 시작하는 5가지 단어).
(1) 경배. 김정형 장신대 교수는 창세기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에 기초한 창조설은 기독교 전통에서 정통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너무나 자의적이고 선별적으로 창세기 관련 본문을 해석할 때 생기게 될 불상사는 앞에서 언급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일갈에서도 잘 드러나 있지요. 그러면 정통으로 인정된 창조설은 무엇일까요?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등 세계 교회가 함께 더불어 고백하는 신앙고백에 담긴 창조론입니다. 사도신경은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자를 믿습니다.”라고 시작되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유일하신 하나님, 하늘과 땅과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자를 믿습니다.”로 시작되지요.
이 신앙고백들도 성서 전체의 맥락과 가르침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하지만, 초기 교회에서 신앙의 규범(regula fidei)으로 작동했던 이 신앙고백들은 성서 전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정통으로 수용된 신앙고백에 담긴 창조론에서 주목할 점은, 그 초점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에 있지 않고, 세계를 창조하신 유일하시고 존엄하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비해 성서문자주의자들과 창조과학자들이 전통적으로 내세우는 창조설은 전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그들의 창조론에서는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나 목적에 대해 의미 있는 정보를 거의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점진적 창조론과 진화적 창조론의 경우에도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입장을 주장하는 이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과거 역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지요. 다시 말해 그들의 창조론의 핵심을 이루는 주장은 기독교 전통에서 인정하고 세계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정통 창조론의 핵심 진리를 비껴가는 셈입니다(김정형, “창조론: 과학 시대 창조 신앙<The Doctrine of Creation>”). 과학과 신앙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창조론의 핵심은 오직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점을 항상 그 통합의 기치로 내걸어야 합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행복감에 젖어 창조주되신 아버지 하나님께 올리는 송영이 창조론의 핵심부인 창세기 본문의 주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겸손. 완벽한 성경 이해나 과학 이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자나 과학자는 각각 겸허해야 합니다. 우종학 교수의 지적처럼, “과학이 자연이라는 실재에 대한 영원한 근사(approximation)에 불과하듯, 신학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영원한 근사에 불과합니다.” 과학주의(scientism)나 진화주의(evolutionism)에 경도된 과학자들도 있겠지만, 과학자들은 기본적으로 겸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자기 전문 분야라도 객관적인 증거가 있는 경우에만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학자들이 다른 분야에 대해 과감한 주장을 펼치려 들까요? 그들의 경향상 그렇게 하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일반적인 과학자들이 리처드 도킨스와 같이 반유신론(antitheism)에 경도된 과학자를 경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과학이 알 수 없고 관여할 수도 없는 초자연적인 영역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면서 전투적인 자세로 임하기 때문이지요.
더 큰 문제는 기독교 쪽에 있습니다. 창조과학회 구성원들과 수많은 목회자가 성경 신학, 특히 창세기의 전문가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창세기 본문에 우주와 지구와 인간의 연대가 6천 년 혹은 1만 년이라고 명백히 드러나 있지도 않은데도, 그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칩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성경 말씀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러한 확신은 자기들이 전공하지 않은 과학, 특히 진화론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표출됩니다. 진화에 대한 증거도 불충분하고, 진화론은 소설에 불과하다고 강변합니다. 비전문가의 겸손이 눈에 띄지 않는 그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세분화된 현대 과학의 전문적 세계를 죄다 섭렵한 양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오만한 행태에 불과하지만, 객관적으로 관찰된 증거를 중심으로 물리적 세계에 대해 합의하고 결론 내린 과학적 정보까지 거짓된 것으로 오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과학자들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3) 경청.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나라 교회는 지난 수십 년간 창조과학의 주장에만 일방적으로 노출되어 심각한 정보의 불균형을 겪었습니다. 창조과학회가 진화론자라고 낙인찍은 과학자들의 견해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방법론적 자기 제한과 공동체적 논의와 합의 속에서 자연 세계에 대한 탐구 활동을 전개하는 과학자들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게 바람직할까요? 종교개혁가이자 개혁주의 신학자였던 장 칼뱅은 창세기 주석에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모세는 학문적인 훈련이나 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상식을 지닌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방식으로 설명했다. 반면 천문학자들은 인간 지성의 예리함이 파헤칠 수 있는 모든 것을 엄청난 노력을 들여 연구한다. 그러한 연구에 반감을 가져서는 안 되며, 과학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이라면 생각 없이 거부하는 일부 광신도들의 오만으로 비난받을 대상이 아니다.” 자칭 칼뱅의 후예라고 자랑스럽게 외치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기독교인이 경청해야 할 조언입니다. 칼뱅은 자신들이 모르는 과학 지식에 대해 눈과 귀를 닫고 거부하는 이들을 ‘광신도’라고 지명하고 있는데, 오늘날 이 과학의 세계를 무조건 거부하는 숱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진단할까요?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드러난 결과만으로 자연에 대한 지식을 구축해 가는 과학자들이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하나님의 계시에 귀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듯이, 그 초월적인 계시를 접한 그리스도교인들도 자연 세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의 양상에 대해 경청하는 게 긴요합니다.
우종학 교수가 지적한 것 같이, 그리스도교인은 하나님과 창조 세계를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하나님의 책(the book of God)인 성경뿐 아니라 자연이라는 책(the book of nature)에도 귀 기울여야 합니다. 시편 19편과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신성이 드러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마음을 ‘완전하게’ (perfect) 계시하는 것은 오직 성경뿐입니다(시편 19:7).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책이므로 이 두 책은 서로 모순될 수 없습니다. 자연을 해석하는 것이 과학이므로, 과학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자연을 계속 연구해 가면서 자연을 더욱 깊이 알게 되긴 하겠지만, 자연에 대해 완벽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저 “자연을 알아가는 영원한 근사”(approximation)에 불과하겠지요. 한편으로 신앙[혹은 신학]은 성경이라는 책을 읽어가면서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현재 자신의 성경 해석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성경과 자연은 모순되지 않지만, 자연을 읽어내는 과학과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 사이에는 모순이나 충돌이 존재할 수 있지요. 그렇지만 그 모순이나 충돌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원칙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근본주의자들의 제단에 바친, “주류 문화의 과학적 성과를 적절히 분석한 결과를 수용함으로써 성서 해석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4) 구별. 과학(science)과 과학주의(scientism) 혹은 진화(evolution)와 진화주의(evolutionism) 간의 구별이 긴요합니다. 과학이나 진화는 가치중립성을 띠고 있는 객관적 사실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신앙[혹은 신학]과 모순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자연 속에서 드러난 진리와 성서 속에서 계시된 진리가 상충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성경의 하나님은 동시에 게놈의 신이다. 당신은 예배당에서도 실험실에도 숭배될 수 있다. 당신의 창조는 장엄하고, 놀랍고, 복잡하고, 아름답다.”[The God of the Bible is also the God of the genome. He can be worshipped in the cathedral or in the laboratory. His creation is majestic, awesome, intricate, and beautiful. (“The Language of God”, 2007)] 미국국립보건원(NIH)의 책임자이자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프랜시스 콜린스가 쓴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과학주의나 진화주의는 과학의 범주와 경계를 넘어 그것이 표방하는 이론에 대해 철학적, 종교적 해석까지 가미한 오만한 행태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혹은 신학]의 세계와 갈등하는 관계에 놓이게 되지요. 그런 시도는 분별해서 물리쳐야 합니다.
예컨대 누가 과학이 무신론의 증거라고 주장한다면, 그가 과학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점을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과학은 그 본질상 초자연적인 대상에 대해 거론할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는 그 관심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과학은 결코 “...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다는 점도 거론해 주어야 합니다(하세가와 에이스케, “재밌어서 밤새 읽는 진화론 이야기”). 그것이 과학의 한계입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네스 호에 괴물 네스가 없다.’는 센세이셔널한 주장뿐 아니라, ‘신이 없다.’, ‘영혼이 없다.’와 같은 종교적인 주장은 증명 불가입니다. 이에 덧붙여 오히려 과학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탁월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당신의 지혜와 섭리를 극명하게 현시해 준다고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혹시 우리 손가락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아시는지요? 손가락의 원래 형태는 하나로 뭉뚱그려진 투박한 살덩어리였다가, 배아(Embryo) 시기의 어느 순간, 세포들이 간격을 이루며 죽어나갑니다. 결국 죽음이 엄습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부분이 손가락이 되지요. 즉 “손가락은 파괴가 휩쓸고 간 이후 폐허의 잔해인 셈입니다.”(김영웅, “과학자의 신앙공부”) 이처럼 창조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생각을 뛰어 넘습니디.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도 하시지만, 죽음과 파괴를 통해서도 생명을 낳으시는 것이지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요한복음 12:24). 이런 자연 세계의 창조 역사를 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5) 기여. 과학은 신학에게 기여할 것이 많습니다. 우선 신학에게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행동을 촉구해 줄 수 있습니다. 편견 없이 관찰하고 체계적으로 실험한 결과를 합리적으로 추론하여 결론을 도출해 내는 과학적 사고와 상호 검증하는 연구 절차는 신학도 얼마든지 본받아야 하고 자체 연구 활동에 적용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귀납적으로 관찰하고 해석해서 적용하는 과정에서 엄정한 합리적 추론과 논증이 활용되어야 하고 그 연구 내용을 역사적인 교리와 신학적 사상으로 검증하고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과학의 시작이 편견이나 고집 없이 관찰하는 것이듯이, 성경 연구의 시작도 선입관이나 욕심이 배제된 트인 마음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 과학이 변화에 중점을 두고 안정성을 되어감의 철학 속에서 설명해 가듯이, 신학도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들을 상수로 두고 변함없는 성경 말씀이 그 상황들을 어떻게 관찰하고 해석하는가를 성령의 조명과 정치한 추론으로 탐색해 가야 합니다. 신학의 안정성은 이렇게 성령께 귀 기울이고 말씀을 세심하고 분석해가면서 우리의 사고가 교정되거나 심화되고 확장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때 필수적인 자세가 바로 하나님과 세상을 향해 트인 마음과 개방적인 사고입니다. 과학하는 사람의 핵심적 태도입니다.
신학도 과학에게 기여할 것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신학은 과학에게 예배하고 경배할 대상을 제공해 줍니다. 전능하고 은혜롭고 진실하신 유일신 하나님이십니다. 과학이 결코 관찰하거나 실험하거나 추론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오직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주도적인 방식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통해 당신의 인격적 면모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로 이 세상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계시의 정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죄악으로 인해 당신과 분리된 인간들이 하나님과 다시 화해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는 그 화해의 제물로 십가가상에서 돌아카신 후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그 시대는 언젠가 완성될 것입니다. 신음하는 온 세상이 온전히 새롭게 변혁되어 완벽한 존재로 거듭 나는 날입니다. 성경의 창조론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우주적인 구원과 회복으로 끝이 납니다. 신학은 초자연적인 계시와 역사를 통해 드러난 이 하나님을 과학에게 제공합니다. 온 인류가 경배하고 예배할 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인간의 삶에 목표와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창조주되신 당신을 전인적으로 사랑하고 당신의 뜻을 좇아 이웃을 섬기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입니다. 이것 역시 과학이 제시해 주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성서적 시각은 “진화 역사의 맹목적성에 대한 진화론적 통찰과 양립하는 것이 가능합니다”(김정형 교수) 마지막으로 신학은 과학에게 보편적인 도덕이라는 선악의 기준을 정해 줍니다. 이 도덕이 그저 인간 사회가 진보하면서 만든 잠정적이고 상대적인 의미를 띤 산물로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은 이 도덕률이 시대와 장소와 문화를 초월해서 존재한 가치 기준의 공통분모라는 점입니다. 이 측면은 편견 없이 관찰해서 정리만 해 보면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이 엄연한 도덕률을 그저 상대적인 가치 판단으로 인식하는 입장은 자가당착적입니다. 그 입장도 상대적인 가치를 띤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과학과 신학이 각자의 경계를 지키며 서로에게 기여할 때, 함께 더불어 인류의 공동선을 구현하는 데 혁혁하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첫째로, 각 국의 정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서두에서 마크 놀이 밝힌 대로 좌파나 우파 정치 세력에게 손쉬운 먹잇감이 된 대상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정확한 정보를 탐색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보다는 편견과 선입관에 사로잡힌 채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에 현혹되어 최악의 정치 지도자를 뽑은 예를 지구촌 곳곳에서 목격해 왔습니다.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성화된 분별력이 결여된 탓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로, 과학기술 활용에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과학기술은 인류의 삶에 폭 넓은 유익을 안겨 준 만큼이나 다양한 영역에서 광범위한 폐해를 끼쳤습니다. 신학이 명백히 지적하는 인간의 죄성과 보편적인 도덕률을 무시한 채 그저 사회적 진보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치달은 결과가 수많은 인명 살상을 야기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아니었나요? 과학과 이성의 한계에 대한 자성을 거치면서 현 시대가 직면한, 인공지능 활용과 유전자 조작 및 소셜미디어의 진화와 같은 문제에 현명하게 대처해 가야 합니다. 셋째로, 평화 확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인 분쟁과 분규 대부분은 그 당사자들이 상대에 대해 품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 불붙고 이기심과 두려움이라는 기름이 부어진 형국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로 현 사태를 분별하고, 이 시점부터 상생할 수 있도록 황금률[The Golden Rule<“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과 은율[The Silver Rule<“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 랍비 힐렐/논어 위령공편>]을 실행해 가야 합니다. 넷째로, 환경 보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에 대한 온갖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를 걸러 내고 정확한 과학전 진단과 최선의 방책을 구현하는 데 있어, 땅을 다스리는 것(창세기 1:28)뿐 아니라 땅을 경작하고 돌보아야 할 이중적인 인류의 신학적 책임(창세기 2:15)을 상기하는 일은 이 거대한 운동의 방향타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제가 대학원 재학 시절 1년 동안 한 중학교와 한 고등학교에서, 그리고 유학을 떠나기 전 4년 반 동안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제가 20대 중후반이었고 제자들은 10대 후반이었으니, 지금쯤 그들은 50대 초중반이 되었습니다. 당시 언젠가 제자들에게 신앙적인 시각을 선사하기 위해 책을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애는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창조과학 관련 서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책도 나눌 정도였으니, 수업 시간에도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간혹 나누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제자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는 편지를 아래에 띄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30여 년 만에 안부 인사를 전합니다. 지금쯤 이미 가정을 일구고 사회의 각 계층에서 열심히 보람찬 삶을 영위하고 있을 여러분이 많이 그립습니다. 그동안 해외에서 20여 년 동안 살다가 귀국한 후에 여러분 중 몇 명과는 재회할 기회가 있었지만, 대부분과는 그럴 계제가 없었군요. 혹시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연락 주세요. 회포 풀 시간을 한번 가집시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것은, 제 사과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기억이 나지 않을지 모르나, 제가 잘못 가르친 내용이 최근에 한 가지 떠올랐습니다. 영어 시간에 여러분의 삶에 도움이 될 만한 교훈들을 나누는 중에, 과학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 특히 창조과학과 연관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제가 여러분 중 몇 명에게 나눈 신앙 서적 중에 이 창조과학 관련 서적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때 저는 여러분만큼이나 젊었고, 열정은 넘쳤으나 지성과 지혜가 부족하던 때였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운 내용도 반추해서 그 진위를 파악하고 난 후 객관적인 기존 지식과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그만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내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제 불찰이었지요.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여기 이 블로그에서 다룬 창조과학이라는 (기독교 근본주의) 유사과학입니다. 그때 제가 이 사항을 잘못 가르친 것에 대해 여러분에게 사과의 뜻을 전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양해와 용서를 구합니다. 개인적인 격변기가 될 수 있는 50대를 건강하고 건전한 심신을 유지하고 배양함으로 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복을 누리길 기원합니다. -황금박쥐 이승천 올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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