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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과학과 신앙: 과학이 (창조) 신앙의 적이다?(1)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10. 14.

과학과 신앙: 과학이 (창조) 신앙의 적이다?(1)

-지적 자살 행위-

우리나라 모든 목회자와 선교사에게 선사하고 싶은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미국 복음주의 역사가인 마크 A. 놀의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입니다. 미국에서 1994년에 출간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에서야 소개되었습니다. 무려 30년 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여전히 현재 우리나라 그리스도교 상황에 대한 적실한 진단이 등장하고 그 해결책을 지혜롭게 제안해 주는 자료입니다. 10쪽에 달하는 한국어판 서문 중 한 곳에서 저자는 아래와 같이 주장합니다.

 

“따라서 미국 복음주의 사고의 심각한 문제점은 그대로 남아 있다. 여전히 복음주의자들은 주의를 흩어놓는 종말론적인 공상에 과민반응하여 종말에 관한 책을 구입하는 데는 돈을 쏟아붓지만, 현재의 문제를 진지하게 분석하는 일에는 지원이 인색하다. 또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때로는 좌파의 그러나 훨씬 많은 경우 우파의) 정치화된 신앙(politicized faith)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왔다. 이런 식의 정치화된 신앙은 반대자들을 악마로 취급하면서 정치적 동맹자들의 극악한 잘못은 눈감아 주는 당파성으로 인해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적 원리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육신과 괴리된 영성이라는 이상에 사로잡혀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소설가와 시인이 활동할 공간을 마련해 주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복음주의자가 ‘창조 과학을 장려하는 것이 자연주의적 과학 철학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지적 자살에 가까운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지적인 삶에 관한 한 예전의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판박이입니다. 그가 언급한 문제점 네 가지 모두 우리나라에서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들 중 제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창조과학’에 대한 마지막 언명입니다. 마크 놀의 지적은 창조과학이 지적 자살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화주의(evolutionism)에 대항해서 창조과학(scientific creationism)을 지지하며 맞서는 행태가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과학주의(scientism)에 경도된 무신론자들의 극단적 주장을, 과학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사로잡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극단적 주장으로 대항하는 것이 지적 자살이라는 것입니다. 즉 과학을 무신론의 근거로 삼으려 하거나 문화 진화 및 사회 진화를 거론하면서 진화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진화주의자들의 주장에 복음주의자들이 이렇게 맞선 것이지요.

 

“여러분은 물리학과 천문학의 탐구로 우주의 역사가 138억 년, 지질학과 고고학의 연구로 지구의 역사가 45억 년이라고 말한다지요. 여러분에게는 망원경과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이라는 도구가 있지만, 우리에겐 성경의 족보라는 게 있어요. 그 족보에 의하면, 우주와 지구와 인간의 나이는 똑같이 약 6천 년이에요. 좀 더 길게 잡아도 1만 년이에요. 우리가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단 6일(24시간×6) 만에 이 모든 것들을 다 만드셨으니까요. 그것도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 3일과, 태양이 창조된 후 3일 동안 만드신 것이지요. 그리고 인간들이 범죄하자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노아의 시대에 전 세계적인 홍수를 일으키셨지요. 그 홍수의 결과 이 지구상의 모든 지층과 화석이 형성되었어요. 미국 그랜드 캐년이 그 좋은 증거지요. 비록 우리가 여러분과 같이 해당 과학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우리는 창세기가 참된 과학적 역사인 걸 믿어요. 관측된 적도 없는 종의 분화를 주장하는 진화는 소설이고, 빅뱅이론은 임시변통의 이야기일 뿐이며,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은 엉터리에요. 여러분은 완전히 틀렸어요.”

 

개인이 이런 확신을 갖는 것과 공동체가 그런 입장을 공적으로 장려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무려 40년 이상 동안 그런 주장을 허다한 개신교회가 공공연하게 밝혀오지 않았나요? 그런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성도는 집사직도 얻지 못하도록 한 대형교회가 있다는 것은 약과입니다. 영적으로 갈급한 성도들이 체계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에다 그런 주장을 접목해두고는, 그 주장만이 하나님의 창조 방식을 해석하는 최선의 주석인 것처럼 떠드는 전국적인 규모를 가진 성경공부 과정도 현재 흥행 중이니까요. 이런 행태는 일반 마케팅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고약한 판매 방식입니다. 인기 있는 물품을 ‘1+1’이나 ‘2+1’로 판매하는 것은 경험해 봤어도, 질 좋은 제품에다 원치 않는 물품을 끼어 파는 ‘1-1’식 강매를 접하신 적 있나요? 사정이 이러하지만, 그 성경공부 과정의 참석자들은 그것이 ‘-1’에 해당하는 제품이 포함된 것도 모르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이런 지적인 자살 행위를 다음 세대가 담당해 가도록 전가(傳家)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등학교 ‘통합과학’ 시간에 배우는 과학적 사실들은 신앙과 대치하는 것이므로 무시하거나 이 ‘창조과학’으로 맞서라고요.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순교적인 기독교인의 길이라고요. 너무 힘들면 대안학교로 보내주겠다고요. 대부분의 국제학교나 대안학교가 이 창조과학이 포함된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으니까요. 과연 이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 공적으로 전수해 주어야 할 건전한 신앙의 길이자 학문의 길이자 인생의 길일까요? 과학은 신앙의 적이고, 특히 진화론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적그리스도적 이론”(손성찬, 모두를 위한 기독교 교양)이며, 나아가 인본주의로 점철된 세상 학문에는 거짓이 난무한다고 치부하는 자세 말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물리학, 천문학, 지질학, 고고학뿐 아니라, 한반도에서 구석기 문화가 70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는 국사 교과서, 300만 년  전에 등장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50만 년에 나타난 호모 에렉투스, 20만 년 전에 존재하기 시작한 네안데르탈인을 언급하는 세계사 교과서도 다 거짓부렁이로 취급해야 하지요. 우리 젊은 세대를 이런 길로 가도록 떠밀어두고는, 왜 주일학교가 비어 있고 대학부나 청년회가 유명무실한지 모르겠다며 기성세대 기독교인들은  의아해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집 한 채 마련할 꿈조차 꿀 수도 없는, 이토록 좌절되는 부동산 투기판 사회를 만들어두고는, 왜 그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낳지 않는지 의아해하는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지요.

 

“제정신인 사람이 미친 사람을 돕기 위해 자기를 미치게 만든다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겁니다.”(The sane would do no good if they made themselves mad to help madmen.) C. S. 루이스의 일갈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미친 사람’과 싸우거나 대항하기 위해, ‘지적 자살’을 감행하거나 ‘미치는 길’을 선택하는 게 말이 될까요?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아래에 덧붙입니다.

 

-용어들의 정의-

과학과 신앙 문제를 제대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용어를 정의해 두는 게 필요합니다. 섀도복싱을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과학(science): 물리적 세계와 그 현상에 관한 것으로, 편견 없는 관찰(unbiased observations)과 체계적인 실험(systematic experimentation)을 수반하는 모든 지식 체계. 일반적으로 과학은 일반적인 진리(general truths) 또는 근본 법칙(fundamental laws)의 작동을 다루는 지식을 추구한다.

■신앙(faith): 인간을 최고의 하나님 또는 궁극적인 구원과 연관시키는 내적 태도, 확신 또는 신뢰.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종교 전통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직접 부여한 내적 확신 또는 사랑의 태도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에 대해 신성한 영감[혹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인간의 반응이며, 따라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진화(evolution 혹은 evolutionary theory): 지구상의 다양한 종류의 식물, 동물 및 기타 생물은 기존의 다른 유형에서 기원을 가지며, 구별 가능한 차이는 연속적인 세대의 변형에 기인한다고 가정하는 생물학 이론. 진화론은 현대 생물학 이론의 근본적인 핵심(the fundamental keystones) 중 하나이다. 1859년에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이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에서 체계화하였다.

■진화주의(evolutionism): 종종 진화론과 같은 의미를 띠기도 하지만, 진화론을 유기체 내에서 진행되는 점진적인 유전적 변화를 넘어 문화 진화(cultural evolution)사회 진화(social evolution)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하려는 진화론자들의 입장을 가리킨다.

■창조(creation):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처음으로 만듦.

■창조론(creationism): 우주와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가 하나님에 의해 무()에서(ex nihilo) 창조되었다는 믿음.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생각은 종교만큼이나 오래되었지만, 현대 창조론(modern creationism)은 주로 하나님이나 다른 신성한 힘에 의존하지 않고도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는 진화론(evoulutionary theory)에 대한 반응이다.

■창조과학[(scientific) creationism 혹은 creation-science 혹은 young-earth creationism(젊은지구창조론)]: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정확하고, 첫 사람 아담으로 시작되는 성경의 족보에서 추정한 것처럼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홍수 지질학(flood theology)을 바탕으로 지난 1만 년 이내에 우주와 생명체가 특별하게 창조되었다는 주장. [이상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과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참조]

 

이 용어에 의하면, 과학과 신앙은 서로 대적하는 위치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총신대와 백석대에서 수학한 손성찬 목사가 지적한 대로, 애당초 과학이란 편견 없는 관찰과 체계적인 실험을 중심으로 물리적 세계에 대한 보편적 법칙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 중심적 학문인 데 반해, 신앙[혹은 신학]은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계시를 통해 드러난 비물리적 세계의 면모를 해석하는 보편 법칙 중심적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신앙[혹은 신학]과는 달리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유무에 대해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과학의 방식으로는 알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진화는 물리적 세계에서 체계적으로 발견되는 자연 현상이고, 진화론은 이 진화를 바탕으로 수립한 과학 이론으로서 ‘어떻게[how] 이렇게 되었는가?’를 객관적인 용어로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창조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성경을 믿음으로 수용함으로써 주장됩니다. 창조의 핵심은 ‘누가[who] 만들었는가?’와 그 누가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인문학적인 표현으로 전달된 성경은 과학의 표현 방식과 아주 다르지요(손성찬, “모두를 위한 기독교 교양”).

 

그런데 ‘how’에 눈길을 주지 않는 성경에서 과학을 끄집어 내려 하고, ‘who’와는 무관한 과학이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해 거론하려는 시도는 각자의 영역을 벗어나는 오만한 행태입니다. 특히 창조과학이 창세기 본문을 문자적으로, 혹은 기록된 그대로 이해한 결과라는 주장은 아래에서 논의하는 대로 성경 해석의 기본을 무시한 처사이지요. “성경은 우리를 위해 쓰였지만, 우리에게 쓰인 것은 아니다.”(The Bible was written for us, but not written to us.) 구약학자이자 미국 휘튼 대학 교수인 존 월턴(John H. Walton)이 한 말입니다. 창세기는 각 시대에 속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쓰였지만, 우리 모두에게 쓰인 책이 아닙니다. 특별한 역사적 상황 속에 처해 있던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고대 히브리어로 쓰인 말씀입니다. 창세기를 비롯한 모든 성경 말씀이 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관련된 역사와 문화와 언어를 고려하지 않고는, 제대로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문자적으로 창세기를 이해한다는 말은 이러한 해석”의 필연성과 필수성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착오입니다. 문제는 창조과학의 성경 해석이 다른 해석들보다 더 적절한가입니다. 그리고 진화론(evolutionary theory)은 과학적인 영역이지만, 진화주의(evolutionism)는 세계관이나 철학적 신념에 가깝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신론적 과학주의(scientism)에 경도된 자들의 주장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진화주의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진화론은 과학의 영역이므로 과학자들의 의견을 청취해야 합니다. 그것을 과학적인 준거로 참고하면서 얼마든지 유신론적 세계관, 즉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주장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이지요

 

-창세기 본문 해석-

독해의 기본 원리는 그 책의 저자가 자기의 글을 어떻게 읽어주기를 바라는지 식별하는 것입니다. 그 책 각 부분의 장르를 구분하고 그것의 문맥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관심의 초점이 되는 창세기 1장은 어떤 장르일까요? 팀 켈러는 에드워드 영[Edward J. Young, 창세기 1장의 6일을 역사적 사실로 읽는 보수적인 히브리어 전문가]을 인용하여 창세기 1장이 “시적인 요소가 반쯤 섞인, 기쁨으로 고양된 언어”(exalted, semi-poetical language)로 쓰였다고 지적합니다. 한편으로 이 장은 일련의 사건을 묘사하는 산문적 서술로서 히브리 시의 핵심 특징인 평행법(parallelism)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산문에는 찬송가나 노래에서처럼 계속해서 반복되는 후렴구(refrains)가 있습니다[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7번), “하나님이 말씀하시니라”(10번), “있으라”(10번), “그대로 되니라”(7번)]. 또한 태양[“큰 빛”]과 달[“작은 빛”]에 대한 용어는 매우 특이하고 시적이며, “들짐승”은 일반적으로 시적 담론(poetic discourse)에만 국한된 동물 용어입니다. 그래서 C. 존 콜린스(C. John Collins)는 이런 장르를 “기쁨으로 고양된 산문 내러티브”(exalted prose narrative)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산문 내러티브로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진실을 주장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기쁨으로 고양된’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텍스트에 ‘문자주의적’ 해석학(‘literalistic‘ hermeneutic)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켈러는 창세기 1장의 저자가 그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견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거는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의 창조 행위 순서를 비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창세기 1장은 '자연의 질서'(natural order)를 전혀 따르지 않는 창조의 순서를 보여줍니다. 빛의 근원인 해, 달, 별(4일차)이 있기 전에 빛(1일차)이 먼저 존재하거나, 어떠한 대기(atmosphere)가 존재하기[태양이 만들어진 4일차] 전에 초목[3일차]이 창조되었다는 점에 주목해 보세요. 그러나 창세기 2:5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사람도 없었으므로(because)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창조 과정에서 우리가 '자연의 질서'라고 부르는 것을 따를 필요가 없으셨지만, 이 구절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단호하게 언급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가 내리기 전, 또는 땅을 경작할 사람이 있기 전에 초목이 있었다는 1장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창세기 1장에서 자연의 질서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창세기 2장에서는 자연의 질서가 표준이 됩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창세기 2장에서는 사건의 순서를 문자 그대로 읽을 수 있으나 창세기 1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창세기 1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읽을 수 있으나 창세기 2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후자는 전자보다 그 가능성이 더 낮지요. 그러나 어떤 경우든, 둘 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순한 설명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둘 다 문자주의적으로(literalistically) 읽어야 한다면, 그렇게 읽는 것이 양립할 수 없는데 왜 창세기 저자는 두 기록을 결합해 두었을까요? 이 시점에서 켈러는 출애굽기 14-15장[홍해 건너기]과 사사기 4-5장[시스라 치하 시리아를 이스라엘이 물리친 사건]을 언급하면서, 창세기의 두 기록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사건에는 각각 역사적 기록(historical account)과 그 사건의 의미를 선포하는 시적인 ’노래‘(poetical ’song‘)가 통합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도 이 두 장에서 얼마든지 그런 통합의 시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단 6일(24시간×6) 만에 만들었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진화론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신 실제 과정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구가 매우 오래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창세기 저자가 품고 있던 의도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본문을 충실하게 독해한 결과입니다. [팀 켈러,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 “BIOLOGOS” 참조]

 

장르 구분에 이어 문맥에 주목한다고 할 때 그 문맥은 근접 문맥뿐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문맥을 포함하게 됩니다. 그 문맥 속에는 신학과 세계관도 다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읽을 때에도 당대인들이 품고 있던 자연에 대한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읽어야 하지요. ​고대 근동 사람들은 우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지구는 평평하고, 바다에 둘러싸이고,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있고, 궁창[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이 있고, 비가 와야 하므로 그 궁창 위에 물 층[궁창 위의 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연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들여다보지 않고 성경만 들여다보면, 고대 히브리인들이 생각했던 우주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우종학 교수). 이런 사고를 품고 있던 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전달해 주신 것이지요. 그 계시의 초점은 유일하고 전능하신 창조주로서의 면모(who)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지엄하신 창조자, 그로 말미암아 온 우주가 창조되었고, 그래서 모든 만물이 복종해야 하는 유일하신 하나님만 존재할 뿐입니다.”(IVP 성경주석, 창세기) 천지 창조를 어떻게 이루셨는지(how)가 그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계시의 내용을 21세기의 과학적 관점으로 비판하면 잘못 읽는 것이지요. 이것을 근거로 과학 교과서를 형성하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창조과학의 탄생-

​사정이 이러한데도 그런 사태가 실제로 미국에서 벌어졌습니다. 마크 놀에 의하면, 19세기 말부터 새로운 자본(new money), 사회적 진화론[social Darwinism, 찰스 다윈이 자연의 식물과 동물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자연 선택의 법칙이 인간 집단과 인종에도 적용된다는 이론.], 자연주의적 과학(naturalistic science), 타협적인 개신교(accommodating Protestantism)와 같은 요소들이 결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파로 복음주의적 확신, 미국의 이상 및 상식적인 베이컨주의 과학(common-sense Baconian science)이 통합되어 있던 당대의 사회 풍조가 급속하게 사라졌습니다. 베이컨주의란 검증된 개별 사실로부터 보다 일반적인 법칙으로 엄격하게 유도하는 것이 모든 주제의 데이터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보는 과학적 입장입니다.

 

이 입장은 안정성(stability)을 가장 강조하면서 변화(change)를 존재(being)의 철학 속에서 설명하였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이런 귀납법이 새로운 지식을 많이 생산했지만, 그 지식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입장이 변화를 강조하면서 안정성 되어감(becoming)의 철학 속에서 설명하는 새로운 사조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헤라클레이토스의 전통]. 이미 종료되어 안정된 상태에 있던 옛 우주(The old finished and stable universe)가 계속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 있는 새로운 우주로 대체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던 것이지요.(찰스 험멜, The Galileo Connection, 1986). 비유하자면, 매일 같은 시간에 주는 모이에 길들여진 칠면조들이 어느 날 모이를 먹으러 왔는데 그다음 날이 추수감사절이었다는 슬픈 이야기에 주목해 보세요[버트런드 러셀의 예].  그 칠면조들에게는 안정성에 대한 탐닉만 있었지, 변화를 예상할 수 있는 안목은 없었던 것이지요. 이 새로운 사조는 베이컨주의적인 격리된 사실들(facts)뿐 아니라, 전체적인 그림에 대한 창조적인 안목들을 품고 있었습니다. 험멜은 이런 상황을 비유하여  의 과학(a science of the forest)이 나무 과학(the science of the trees)을 대신하기 시작했다.”고 묘사했습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보수 개신교 운동이 바로 근본주의(fundamentalism)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진리(the literal truth of the Bible), 예수님의 임박한 육체적 재림, 동정녀 탄생, 부활, 속죄를 기독교의 근본적인 요소(fundamental)로 강조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앞에서 창세기 본문을 해석할 때 문제로 부각되었듯이, 장르와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특정 본문을 해석하는 것을 근본적인 신앙의 요소로 여기는 신학적 입장입니다. 그것도 ‘성경의 모든 단어를 문자 그대로 진리로 해석하는 것’(the interpretation of every word of the Bible as literal truth)을 지향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서 흔히 활용되는 시(poetry), 은유(metaphor) 및 상징(symbol)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관련 본문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도출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게 됩니다. 이 반지성적인 세력이 점점 더 득세하자,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지를 견고하게 붙들지 못한 채, “주류 문화의 과학적 성과를 적절히 분석한 결과를 수용함으로써 성서 해석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this belief — that properly scrutinized results of the main culture’s scientific enterprises should assist biblical interpretation)을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제단에 바쳐 버렸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독해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은 창세기 본문의 의도를 무시한 채 자기들의 선입견과 세계관에 맞게 그 의미를 재단했습니다. 게다가 그것을 안식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 SDA] 출신의 조지 매크레디 프라이스[안식교 이론가이기도 하고 공식적인 훈련은 거의 받지 않고 현장 경험도 거의 전무했던 아마추어 지질학자]가 집필한 “The New Geology”(1923)와 접목시켰습니다. 이 책은 그가 엘렌 G. 화이트[안식교 창시자]의 환상에 뿌리를 둔 문서에 근거하여 지구 역사 연구의 틀을 마련하려는 의도로 쓴 책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앞부분을 ‘단순하게’ 혹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하나님이 6천 년에서 8천 년 전에 세상을 창조하셨고 대홍수를 통해 지구를 지금과 같은 지질학적 형태로 만드셨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지요(마크 A. 놀). 그 결과가 바로 1960년대에 형성되어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이라고 불리는 창조과학(creation-science)입니다.

 

물리적 세계를 객관적 안목으로 연구하는 과학과 그 과학적 증거를 부정함으로써 무신론적인 과학주의를 무력화시키겠다는 그들의 전략은 이렇게 반지성적이고 반동적이며 자가당착적입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적인 정통 교리를 엄중하게 받든다는 근본주의자들이, 엄정한 과학을 통해 드러난 자연계의 물리적 계시를 백안시한 채, 엄연하게 이단으로 지목받는 안식교의 성경해석 방식에 의지하여 창세기를 해석한 후 아무런 객관적 근거도 없는 유사과학을 창조하고 설파해 왔으니까요. 이런 상태에서 복음전도와 세계선교를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일입니까? 기독교에 대한 현대인의 걸림돌은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닙니다. 정치화되고 사유화된 기독교와 창조과학 같은 반지성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유사과학에 목매는 기독교입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 전개는 우리나라 정통 기독교가 최고의 신학적 권위로 인정하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무려 1,600여년 전에 이미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408년에 출간됨)라는 저서 속에서 경고한 바 있습니다. 마치 창조과학이라는 유사과학에 포획된 미국과 우리나라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일갈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지구와 하늘, 세상의 다른 요소에 대해, 별의 움직임과 궤도, 그 크기와 상대적인 위치에 대해, 예측 가능한 일식이나 월식에 대해, 해와 계절의 주기에 대해, 동물이나 나무, 돌 등의 종류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지식은 이성과 경험을 근거로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성서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이런 주제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을 이교도가 듣는다면 수치스럽고도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한 그리스도인이 드러낸 무지를 떠벌리며 이를 비웃고 경멸하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한 무지한 개인이 비웃음을 당해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 밖에 있는 이들로 하여금 거룩한 저자들이 그런 견해를 주장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것이다. 또 성서의 저자들이 무식한 사람으로 비판받고 거부당하여 결과적으로 우리가 구원하기 위해 애쓰는 그들에게도 큰 손실이 되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잘 아는 분야에 대해 오해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우리의 책에 대해 자신이 가진 어리석은 견해를 주장하는 것을 그 사람이 듣는다면, 어떻게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소망,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이 책의 가르침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책이 자신들의 경험과 이성의 빛을 통해 배운 사실에 대해 온통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찌 그들이 성서의 영적 진리를 믿을 수 있겠는가?”(마크 A. 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