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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기쁨: ‘항상 기뻐하라’가 불가능한 명령이라고?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4. 21.

기쁨: ‘항상 기뻐하라’가 불가능한 명령이라고?

신약성경을 읽어 보면 “항상 기뻐하라”(Rejoice always)라는 명령이 두 번 나옵니다. 빌립보서 4:4와 데살로니가전서 5:16입니다. 이 명령에 사용된 영어 단어 rejoice는 아주 만족해 하는(very pleased)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항상 기뻐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런 상태는 감정의 본질상 우리가 용을 쓴다고 해서 형성되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감정이란 것은 항상 똑같은 상태로 유지될 수도 없습니다. 항상 가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지요. 그러므로 이 명령은 그런 감정 상태를 항상 만들어내라는 의미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마도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는 영적 실존의 세계를 누리고 있다는 점에 늘 주목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주목하는 것은 의지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기에 순종할 수 있지요. 의지적인 노력을 들여 기쁨의 근원이 되는 그 영적 실체에 계속 주목하게 되면, 미소를 띤다든지 노래를 부른다든지 활기찬 행동을 하게 되어 기쁜 감정이 동반됩니다. 이런 내적 회로가 계속 반복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급기야 우리 인격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 중 한 가지인 ‘희락’입니다(갈라디아서 5:22-23). 희락은 폈다가 금방 사라지는 ‘성령의 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쁨: 성경상의 용례-

성경의 용례는 그 영적 실존의 세계를 열어 밝혀줍니다. 성경상의 기쁨은 대개의 경우에 주님의 존재 혹은 주님과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고 우리가 그것을 누리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아래 성구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바로 그 기쁨의 원인이자 대상이 되십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느헤미아 8:10)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Delight thyself also in the LORD: and he shall give thee the desires of thine heart, 시편 37:4)

■“하나님 나라는 (...)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for the kingdom of God is (...)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로마서 14:1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 빌립보서 4:4)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You also became imitators of us and of the Lord, having received the word in much tribulation with the joy of the Holy Spirit, 데살로니가전서 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시기에 우리가 당신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이 기쁨은 지속적인 것이 될 뿐 아니라 급기야 영원한 것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이 기쁨에 내재된 한 가지 주요한 특징은 어떠한 외부적인 환경에도 예속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위에 언급된 로마서 14:17, 빌립보서 4:4, 데살로니가전서 1:6의 문맥을 보면 각 구절은 공동체 안팎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4장에서는 먹고 마시는 문제로 인해 로마인들 간에 벌어진 논쟁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즉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로 불리는 그리스도인들 간에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문제와 종교적 절기를 지키는 문제로 인한 논쟁이 발생한 것이지요. 빌립보서 4장에서는 교회의 주요한 일꾼들 간에 발생한 분쟁 문제가 드러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는 성도들이 직면한 다양한 난관과 역경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시는 성령의 기쁨으로 성도들 간의 논쟁을 극복하고(로마의 상황), 이제 막 재림하실 주님을 기뻐함으로 지도자들 간의 분쟁을 해소하며(빌립보서 4:5절 참조), 성령의 기쁨으로 온갖 종류의 고난을 헤쳐 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 상황). 즉 우리 그리스도인이 품고 누리는 이 기쁨은 환경상의 조건의 지배 아래 매이지 않으므로, 주님을 주목하기와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기쁨으로 인해 온갖 종류의 난관과 역경이라는 환경을 초월하여 주님의 말씀을 받들어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왜 이 기쁨은 환경을 초월하는 것일까요? 근본적으로는 그 기쁨의 근원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겠지요. 즉 사시고 참되시며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 기쁨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 로마서 14:17이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로 규명된 ‘의와 평강과 희락’(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이 의롭고 평화롭고 즐거운 주관적인 상태를 가리키기보다는,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와 하나님과의 평강 및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기쁨을 의미한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존 스토트). 그것들이 전자의 상태라면 주위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것들이 후자의 상태라면 객관적이고도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 사건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들을 붙들고 누리는 한 우리의 것이 됩니다. 즉 이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용서받고 의롭게 되어(righteousness),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reconciliation=peace) 당신과 교제하면서 당신의 영광을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rejoicing=joy).

 

여기에 언급된 ‘의’(righteousness)란 단어는 ‘칭의’(justification)라는 단어와 동일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두 단어는 “언약의 요구 사항에 부합하는 행동”(behavior in conformity with the covenant requirements)을 의미하거나(N. T. 라이트), 언약 공동체(a covenant community)에서 누리는 올바른 지위나 법정에서 옳다고 선언받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질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언약 속에서 당신을 위해 정한 기준에 따라 행동하십니다.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뿐 아니라, 죄를 심판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죄를 심판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무력한 자들을 구원하고 죄를 다루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당신과의 언약을 계속해서 어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의를 전가해 주셨습니다(imputes).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올바른 지위를 누리려면 복음을 믿기만 하면 되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려면 예수님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됩니다(Karen Lee-Thorp, “A Compact Guide to the Christian Life”).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아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영어 단어 중 하나인 ‘atonement’가 열어 밝히는 영적 실상입니다. 영한사전은 이 단어를 보상 혹은 속죄라고 번역하지만, 영영사전은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 및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인류가 화해한 것(the reconciliation of humankind with God through the life, sufferings, and sacrificial death of Christ)이라고 풀이해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당신의 영광을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이뤄진 것입니다. 결코 무효화될 수 없고 무효화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에서 그 두 젊은이의 비극적인 죽음은 캐풀렛 가문과 몬터규 가문에게 평화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비록 ‘우울한 평화’(a glooming peace)이긴 했지만, 두 원수는 서로 기꺼이 화해의 손을 내밀었을 뿐 아니라 각각 로미오와 줄리엣의 동상을 베로나에 세워 그들의 진실하고 신실한 면모를 기리기로 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두 젊은이의 죽음이 이러한 평화를 일구어냈다면, 창세 전부터 예정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베소서 1:4, 베드로전서 1:20)은 어떠한 평화를 이루었을까요? 하나님과 인류뿐 아니라 하나님과 만물이 온전히 화목하게 되는 결말을 낳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18절] 그[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로새서 1:20) 특히 당신의 자녀와 백성이 된 우리에게는 화목 단계를 넘어선 영광스러운 장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로새서 1:21-22)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희생을 기반으로 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우주적인 화목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지요. 기꺼이 항상 기뻐할 만하지 않나요? 하나님과 화해할 뿐 아니라 당신의 영광을 누리는 기쁨보다 더 소중하고 보배로운 게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현세에서 누리는 이 복된 교제의 기쁨은 내세의 영원한 시점까지 이어집니다. 환경을 초월하는 이 복된 신앙의 여정은 사도 바울이 이미 로마서 앞부분에서 확연히 드러낸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having been justified by faith)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peace with God)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exult in hope of the glory of God)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로마서 5:1-3)

 

이 어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good news of great joy which will be for all the people, 누가복음 2:10)이 아니겠습니까?

 

-항상 기뻐하기: 실제적 제안 사항-

인생을 살다 보면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면서 고뇌하고 슬퍼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더 크낙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G. K. 체스터턴이 말한 대로입니다. 사람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때는, “기쁨(joy)이 자기 내면의 근본적인(fundamental) 것이 되고 슬픔은 피상적인(superficial) 것이 될 때입니다. 우울(melancholy)은 천진난만한 막간(innocent interlude), 즉 예민하고 도피적인 마음의 상태여야 하지만, 찬양(praise)이 영혼의 영원한 박동(permanent pulsation)이어야 합니다. 비관주의(pessimism)는 기껏해야 감정에 잠기는 반쪽짜리 휴일(emotional half-holiday)에 불과하지만, 기쁨(joy)은 만물이 살아가는 길이 되는 폭소가 터지는 노동(uproarious labor)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내면세계는 기쁨이 토대가 되어야 하고, 그 영혼의 박동은 기쁨 어린 찬양이어야 한다는 외침입니다. 슬픔이 주조를 이루는 신앙, 우울에 잠식된 그리스도교는 사라져야 합니다. 이제 주님으로 인해, 성령으로 기뻐하기의 기반이 마련된 이상,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제안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성구를 암송하라. 우리에게 기쁨을 허락해 주시는 성령께서는 성경 말씀을 활용하여 우리 영혼에 위로를 안겨다 주십니다. 앞에서 살펴본 로마서 14장 말씀에 이은 로마서 15장에 보면 아래의 두 구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로마서 15:4)

■“소망의 하나님모든 기쁨과 평강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Now may the God of hope fill you with all joy and peace in believing, so that you will abound in hope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로마서 15:13)

 

먼저 13절은 ‘기쁨과 평강’이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로마서 14:17)로서, ‘믿음’에 의해 우리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단계까지 자라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장차 나타날 결과는 넘치는 ‘소망’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 점에 주목하면서 3절을 보세요. 우리가 소망을 품게 되는 것이 성령의 능력을 통한 것이기도 하지만, 성경의 위로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바로 성령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성경은 성령의 도구로서 우리 심령 속에 위로와 소망이 넘치게 해 줍니다. 저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을 새롭게 발견하곤 합니다. 시편 119편 여러 곳에서 열어 밝히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아래 구절들을 참조해 보세요.

 

(시 119: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즐거워하였나이다

(24) “주의 증거들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35)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47)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스스로 즐거워하며

(54)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77)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나의 즐거움이니이다

(92) “주의 법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111)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74)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즐거워하나이다

 

특히 54절, 92절, 143절이 언급한 대로, 제 인생 여정에서 숱한 고비를 만났을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제 영혼의 노래가 되어주었습니다. 그 말씀이 제 기쁨과 위로가 되지 않았더라면, 저는 수많은 환난과 우환 중에 벌써 무너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김으로 영광의 소망에 주목합시다!

 

(2) 죄를 고백하라. 우리의 기쁨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누리는 새로운 관계에서 비롯되고 성령을 통해서 허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죄악들은 발견되고 인식될 때마다 하나님께 참회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야 비로소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십니다(Restore to me the joy of Your salvation) (시편 51:12). 우리 죄를 고백함으로 항상 주님의 빛과 교제 가운데 거합시다!(요한일서 1:7-9) 

 

(3) 미소를 지으라. 미국에서 사역하는 칼 베이터스라는 목사님이 교회를 오가는 길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을 매 주일마다 차로 모시곤 했습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는 그에게 고통스러운 진실을 한 가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면, 가히 핏불테리어(pit bull)도 겁먹을 정도로 찡그린 표정을 짓곤 했다는 것입니다. ‘적대적으로 휴식하는 얼굴’(Hostile Resting Face)로 알려진 그 찌푸린 얼굴 말입니다. 잠시 동안 그는 당황했지만, 이내 그 할머니가 자기에게 선의를 베푼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위대한 교회[교회로 가는 길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실을 말해줄 만큼 그를 사랑해준 솔직한 자매님을 포함한]를 섬기고 있다는 진실을 상기하면서, 교회에 갈 때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의도적으로라도 얼굴에 미소를 지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짜처럼 느껴지고, 연기한다는 생각에 끔찍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연기한 것(acting)은 맞지만, 가식적으로 행동한 것(being fake)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속일 의도를 품고 거짓으로 지어 낸 미소가 아니라, 미소를 짓고 싶지 않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에 실행한 순종의 미소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골로새서 3:12),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녀로서 얼굴에 미소의 옷을 입힌 것이지요.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서서히 미소 짓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 얼굴에 강제적으로 미소를 안긴 것으로 인해 더 위대한 현실(the greater reality)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 급기야, 그의 얼굴(face)은 그의 감정(emotions)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미소가 내면의 미소로 바뀐 것입니다.(The smile on the outside became a smile on the inside.) 자기 미소가 거짓된 가식이 아니라 더 깊은 진실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져도 더 자연스럽고 자동적으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이를 드러내면서 활짝 웃는 편(big grinner)은 아니지만, 이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억지로 찡그린 얼굴을 지을 때가 거의 없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미소를 짓는 것처럼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진 않지만, 그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 만큼 자기가 현실주의자(realist)라는 점도 덧붙입니다. 행동과 감정은 동행합니다. 미소는 기쁨의 마중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미소로 기쁨을 이끌어 냅시다!

 

(4) 찬송(노래)을 부르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에 윌리엄 사로얀의 “인간 희극”(The Human Comedy)이 있습니다(https://hubil-centre.tistory.com/64).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에 출간되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소설이지요. 가상의 세계인 미국 캘리포니아 이타카를 배경으로 14세 소년 호머 매콜리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에서 제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버지를 잃고 형이 전쟁에 복무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온 가족이 늘 음악과 노래를 즐기고 누리는 측면입니다. 그 음악의 장은 일찍이 아버지 매튜가 깔아주었습니다.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면서도 아내 케이티를 위해서는 하프를(5년간 할부금을 부어), 딸 베스를 위해서는 피아노를 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악기에 맞추어 온 가족이 노래 부르는 모습은 마커스가 전사한 후에도 빛을 발합니다. 그의 동료인 고아 토비가 그 가정을 자기 집으로 여기며 찾아 왔을 때, 케이티가 하프를 뜯고, 베스가 피아노를 치고, 메리(이웃)가 노래 부르는 것을 문밖에서 듣습니다. 그를 발견한 베스가 나와 인사하고 있을 때 형의 전사 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호머를 보게 되지요. 호머에게 토비를 소개한 베스는 토비가 전해 준 마커스의 반지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제는 토비를 환영하는 연주와 노래가 또 다시 시작됩니다. 그 노래가 끝난 후 케이티 부인이 나와 미소를 지으며 이제 자기 아들이 된 토비와 그 양옆에서 그를 붙들고 있는 두 아들, 호머와 율리시즈를 집안으로 맞이합니다.

 

기쁜 환경이 마련되었기에 노래한 것이 아니라, 슬프고 처절한 상황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래로 그것을 극복하는 그 가정 구성원들이 제게는 더없는 격려와 영감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음악과 노래가 땅에 사는 우리를 하늘로 비상하게 한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땅에서 직면하는 현실이 아무리 슬프고 처절하더라도 그 현실은 그림자일 뿐, 도리어 그 그림자의 실상은 찬란한 하늘이란 실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모든 음악과 노래가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저 지난날의 회한이나 이루지 못한 남녀간의 애정을 읊조리는 단계 그 이상으로 우리를 더 비상하게 해 주지 못하는 노래들이 넘쳐 납니다. 물론 그 노래들도 자기 몫이 있는 법이지요. 그렇지만 한번 들으면 단번에 우리 마음을 이끌어 하늘, 즉 우리 존재의 시원으로 인도해 주는 음악과 노래들이 있습니다. 숱한 찬송가들이 그러하고, 영감 어린 가곡과 동요와 팝송들도 그러합니다. 최근에는 2019년부터 소개된 매스터(Master) KG저루설레마”(Jerusalema)가 저를 하늘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 춤이 절로 나옵니다. 찬송(노래)과 춤으로 영광의 기쁨을 표현합시다!

 

(5) 함께 기뻐하라. 존 스토트는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이 포함된 데살로니가전서 5:16-22, 27을 강해하면서, 그 문맥이 공적인 예배의 상황이란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문맥의 모든 동사들이 죄다 복수형으로 되어 있고, 20절의 예언도 공적인 사역이며, 27절의 ‘이 편지’를 읽어 줄 대상이 ‘모든 형제’로 특정된 상황들을 그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은 다 함께 기쁨 충만한 예배(joyful worship)를 드리자는 초대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 예배가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하고 지루하다(unforgivably gloomy and boring)는 점을 덧붙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한 자세로 당신을 경배하는 것은 언제나 옳은 일이지만, 모든 예배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시고 베푸신 일에 대해 기쁨 충만하게 응답하는 축제가 되어야 하지요. 기쁨은 함께 나누면 배가됩니다. 피아노와 기타와 드럼과 온갖 악기로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