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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버트런드 러셀의 복음서 읽기(5)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4. 5.

버트런드 러셀의 복음서 읽기(5)

-오독은 문맥 읽기 실패의 결과-

 

-교회가 진보를 지연시킨 과정(How the Churches Have Retarded Progress)-

러셀은 교회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수하면서 그것을 무고하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가톨릭교회는 매독에 걸린 남자와 결혼한 순진한 소녀에게, “이것은 영속적인 성사(聖事)다. 그대는 평생 함께 해야 한다.”(“This is an indissoluble sacrament. You must stay together for life.”)라고 말한다는 것이지요. 교회는 여전히 세계의 고통을 감소시키는 모든 진전과 개선을 가로막는 대적으로서 인간의 행복과 전혀 상관없는 편협한 행동 규정들(a certain narrow set of rules of conduct)을 도덕이라고 일컬으면서 다음과 같이 강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행복이 도덕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도덕의 목적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다.”(“What has human happiness to do with morals? The object of morals is not to make people happy.”)

---->그리스도교가 권고하는 도덕이 인간의 행복과 전혀 관계없는 편협한 규정들이라는 게 사실일까요? 영어의 ‘morals’란 단어는 “옳고 그른 행동에 관한 원칙과 신념”(principles and beliefs concerning right and wrong behaviour)을 가리킵니다. 우리 국어사전에서도 ‘도덕’이란 “사회의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그들의 내면적 원리로 작용하면서 신과의 관계가 아닌 인간 상호 관계를 규정한다는 보충 설명도 붙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도덕은 이와 다를까요? 그리스도교의 지상명령은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40)입니다. 신과 관계되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이웃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하라.’가 되겠지요. 이미 논의한 대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이웃’은 원수도 포함됩니다. 원수도 포용하며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어떻게 ‘편협한 행동 규정’이 될 수가 있을까요? 게다가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행복과 전혀 상관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언급하는 이 사랑은 인간의 모든 미덕을 총망라한 실천적인 덕성입니다. 러셀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아래 성구를 한번 묵상해 보세요.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3:1-8, 새번역)

 

서양 고전 중에 인간 행위에 관한 도덕적인 가치를 연구하는 윤리학의 고전을 하나 꼽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단연 돋보입니다. 자기 아들인 니코마코스에게 헌정했다고 알려진 책입니다. 이 책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한 주요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고,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이었지요. 행복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지고의 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행복이란 단어는 ‘에우다이모니아’(eudaemonia)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이 쾌락과 구별되며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활동적인 삶(“a life of activity governed by reason”)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생이란 식물이 영양을 공급받아 성장하는 삶(“life of nutrition and growth”)이나 동물이 감각을 인식하는 삶(“a life of perception”)과는 다른 면모가 있다고 보았고, 그 면모가 바로 “이성적인 요소를 갖춘 활동적인 삶”(“an active life of the element that has reason”=“life of the rational element”)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인간의 본성 혹은 기능, 즉 인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삶의 방식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이에 덧붙여 그는 이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올바른 덕성’(the appropriate virtue)을 갖추고 실행하는 것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것도 평생토록 그 일에 매진할 것을 주문했지요. 이때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 아주 유명합니다. “왜냐하면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여름이 온 게 아니고, 하루가 지났다고 여름이 온 게 아니며, 하루 또는 짧은 시간으로 인해 사람이 축복을 받거나 행복하게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For one swallow does not make a summer, nor does one day; and so too one day, or a short time, does not make a man blessed and happy.”)

 

성경에서 제안하는 실천적인 사랑의 삶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올바른 덕성을 갖추고 실행하는 삶’과 다른 것일까요? 사실상 그 사랑의 대상에 원수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니, 후자의 덕행보다 한 차원 더 드높은 경지이지요. 그렇다면 후자가 ‘에우다이모니아’라는 행복을 견인하고 있으니,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사랑의 실천은 변함없는 행복의 보증수표가 되겠지요. 복음서가 천명하는 ‘복음’(‘good news’)은 일차적으로 ‘행복에 관한 희소식’(‘good news of happiness’)입니다(이사야 52:7). 행복에 대해 그리스도교가 취하는 입장이라면서 소개하는 러셀의 주장은 사실무근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그 희소식은 이러합니다. 온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신 것은 한마디로 경천애인(敬天愛人), 즉 하나님을 경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인생행로이자 행복의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을 마다하고 인간이 택한 것은 우상과 자기 욕심에 매인 노예살이였고, 그 결말은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이 칠흑 같은 행로에 빛이 비쳤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죄악의 대가를 십자가상에서 짊어지신 것이지요. 그 대가 지불이 유효했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로 드러났습니다.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천애인하는 새로운 삶이 열렸습니다. 지복의 길입니다.

 

그리고 러셀이 호기롭게 지적한 가톨릭 신자 부부의 사례는 그가 이 글 속에서 일관해서 취하는 무분별한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는 자극적으로 보이는 구절이나 예외적으로 돌발한 사례들에 꽂혀, 그 구절이 속한 문맥을 통해 그 의미를 이해하거나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 그 특정한 사례를 파악하려 들지 않습니다. “문맥 없는 텍스트는 그럴싸한 변명에 불과하다.”(“A text without a context is a pretext.”)라는 아포리즘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 규칙을 파악하지 않고는 변칙적인 것을 가려낼 수 없듯이, 어떤 주제에 대한 원리를 파악하지 않고는 그 주제에 속한 특정 사례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그에게는 낯선 듯합니다. 그 특정 사례를 자기 마음대로 요리할 양이면,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란 타이틀을 걸고 이런 연설을 하거나 에세이를 작성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런 주제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하지만, 나는 그것이 이런 이유로 합당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수용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식으로 논의가 전개되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도 그의 경우에는 전반부의 논의가 항상 빠져 있지요.

 

이 항목에서 다루는 결혼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사회적인 모든 진보를 지연시킨 대적이라는 중대한 논지를 전개하면서 제시한 사례는 달랑 한 가지, 가톨릭교회가 매독 걸린 남편과 결혼한 순진한 소녀에게 그와 이혼할 수 없다고 언급한 경우[그 사례 앞에 ‘supposing’이라는 단어가 붙어 실제 사례인지 가정적인 사례인지도 분명하지 않음]뿐입니다. 가톨릭교회가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이혼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논의는 아예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톨릭교회는 그 소녀가 매독에 걸린 아이를 낳지 않도록 어떤 종류의 조치도 취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면서, 극악무도하게 잔인한 처사'(fiendish cruelty)라고 일갈하지요. 러셀의 이런 주장이 과연 가톨릭교회나 성경이 결혼과 이혼에 대해 가르치는 바를 정당하고 합당하게 묘사한 것일까요?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제가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해서, 개신교의 입장만 대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존 스토트, “Issues Facing Christianity Today”를 인용함].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확언(three affirmations)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류를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고, 직접 결혼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분의 의도는 인간의 성(human sexuality)이 결혼을 통해 성취되고, 결혼은 배타적이고 사랑이 깃든 평생의 결합(an exclusive, loving and lifelong union)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목적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혼을 명령하거나 권장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신성한 규범에서 벗어난 슬프고 죄악된 행위로 남아 있습니다. 이혼과 재혼은 두 가지 이유로 허용됩니다(필수는 아님). 첫째, 배우자가 심각한 성적 부도덕(serious sexual immorality)을 저지른 경우 무고한 사람이 이혼할 수 있습니다. 둘째, 신자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계속 동거하기를 거부하는 경우 배우자의 방기(the desertion of his or her unbelieving partner)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허용은 부정적이거나 마지못해 하는 조건으로 주어집니다. 배우자의 불충실을 이유로 이혼한 경우에만 재혼이 간음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불신자가 떠나겠다고 고집하는 경우에만 신자는 ‘구속되지 않습니다.’(not bound)”

 

성경에서 기본적으로 이혼을 명령하거나 권장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직접 결혼이란 제도를 제정하고 특정 남성과 여성을 평생 지속될 배타적인 사랑의 결합 속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혼은 어디까지나 이 거룩한 규범에서 중대하게 일탈한 경우에만 허용되는 슬픈 예외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결혼의 목적 자체를 훼손하는 행위가 발생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배우자의 간음(adultery)과 방기(desertion)입니다. 그런데 러셀이 언급한 사례는 실제 발생한 경우로 보기가 힘듭니다. 매독에 걸린 남자에게 순진무구한 소녀가 결혼했다는 것도 의아하지만, 가톨릭교회가 이런 결혼 관계가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고 지시한 것도 믿기 힘듭니다. 이런 경우는 그 부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가톨릭교회라도 혼인 무효(annulment)의 조건으로 선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러셀의 말대로 결혼 지속에 대한 지시가 있었다고 해도, 얼마든지 다시 그 경우를 심사하는 과정을 거쳐 혼인 무효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 기상천외한 결혼 사례가 과연 그리스도교가 그 도덕적인 가르침으로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불합당하고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고 있다는 러셀의 주장을 얼마나 지탱해 줄 수 있을까요?

 

-종교의 기반을 두려워하라(Fear the Foundation of Religion)-

러셀은 종교란 주로 공포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부분적으로는 “미지의 것이 가하는 테러”(the terror of the unknown)이자, 모든 고통 속에서 우리 곁에서 지켜줄 큰 형이 있다는 느낌을 갖고 싶은 소망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공포에서 잔혹한 언동이 나오기 때문에, 잔혹함과 종교가 항상 동행한다는 게 놀랄 일이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가 과학의 도움을 입어 이런 사태들을 이해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과학이야말로 우리가 이런 비굴한 두려움(craven fear)을 극복하도록 도와줄 수 있기에, “가상의 지원”(imaginary supports)이나 “하늘에 있는 우군들”(allies in the sky)을 찾지 말고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 세상을 살기 적합한 곳으로 만들어 가자고 제안하지요.

---->종교가 공포에 기인한다는 말은 반쯤은 맞습니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고대인들이 자연을 신으로 여기거나 자연을 도구로 쓰는 신을 두려워해서 신을 섬겼을 공산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홍수와 가뭄 같은 자연재해가 두려웠을 테고, 고기잡이나 농업과 같은 생업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데 바다와 하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테니까요. 그리스도교를 믿을 때도 공포가 작동했을 것입니다. 역사가 바트 어만에 의하면, 고대 사람들은 신들을 숭배하는 의식에 불참하면 치명적 대가가 따르지만, 그 숭배에 참여하면 실질적인 이득이 있다고 일관적으로 믿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교도들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믿게 된 것도 같은 연유에서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즉 예수님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현시한 기적과 메시지를 접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이 다른 어떤 신보다 권능이 더 뛰어나다고 믿게 되어 그 신의 징벌을 피하고 그 신이 그들에게 베풀어 주실 혜택을 바랐다는 것이지요. 이미 드러났지만, 공포라는 요소는 신을 믿는 과정에서 고려할 한 가지 측면에 불과합니다.

 

고통과 고난으로 얼룩진 삶을 영위하던 이교도들이 자신들의 육신의 질병을 치유해주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베풀던 전도자들에게서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삶에 관한 메시지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당장에는 지옥에서 받을 고통이 천국에서 누릴 영광보다는 그들에게 훨씬 더 강력하게 다가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렇게 언급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며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 중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은 이는 극히 드물거나 아예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이 깨닫고 체험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은혜였고, 그가 펼쳐 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들에게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무비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우상을 섬기며 자기 욕심만 우선시한 인간의 죄악은 마땅히 징벌받아야 합니다. 공의와 도덕률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악을 의식하고 그것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하는 게 마땅합니다. 이에 덧붙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는 중에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등장했고 ‘해와 달과 별이 있으라!’ 하면 그것들이 나타났지만, 하나님이 그 세상을 바로 잡고 구원하는 과정 중에 그저 ‘용서가 있으라!’라고 명령만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공의와 도덕법을 범한 죄인들을 용서하는 데는 그 대가를 치르는 과정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代贖)의 희생’(substitutionary sacrifice)을 감당하도록 하심으로써 그 죄악의 대가를 온전히 치렀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인된 우리를 ‘재창조’하신 것입니다(팀 켈러).

 

인생 만사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특히 미래와 연관된 것들은 죄다 그러합니다. 예컨대 보험을 드는 이유에는 두려움이라는 측면이 반드시 존재하지요. 연금 보험이든 건강 보험이든 자동차 보험이든, 그것들은 미래에 닥칠지 몰라 두려운 불행한 사태를 대비하는 도구가 됩니다. 운동을 하는 이유에도, 운동하지 않으면 장차 여러 가지 병이 자기를 엄습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심지어 결혼을 하는 것에도 두려움이 작동되지요. 혼자 살면 장차 외로움에 찌들어 살 테고, 노후에 아무도 자기를 돌봐 줄 이가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렇지만 연금을 통해 노후 생활의 안정을 꾀하고 건강의 위기를 넘기는 여유로운 혜택은 달콤하기까지 합니다. 운동을 통해 우리 몸과 정신이 단련되어 훨씬 더 생기 있고 활기찬 삶을 누리는 긍정적인 혜택은 그 두려움을 초월합니다. 평생의 반려자와 함께 새로운 삶을 일구어가는 과정에는 그 어떠한 인간관계에서도 누릴 수 없는 깊은 만족과 심오한 기쁨이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경우에 당하게 될 사후의 징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작동된 것은 맞지만, 그 두려움이라는 요소는 하나님을 찾고 알고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삶의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동안 우리 기억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러셀은 그 두려움이 잔혹한 언동을 낳는다고 강변합니다. 게다가 이런 공포와 잔인한 사태들을 과학이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상상에서 비롯된 신앙의 도움을 의지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 세상을 가꾸어가자고 제안합니다. 먼저 종교의 기반인 두려움과 잔혹한 언동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한편으로 보면 분쟁의 역사였습니다. 그중에는 종교에서 비롯된 투쟁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인과 회교도들의 싸움,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도들과의 반목은 오랫동안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런 경우들은 죄다 인간들의 죄악과 욕심으로 인한 비극적 사태였습니다. 종교 혹은 신앙의 대상인 신 혹은 하나님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징벌이 두려워 신앙을 품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될지 공포감에 휩싸여 그와 분쟁하게 된 상태에서, 왜 하나님이 그 두 번째 공포감과 그로 인한 분쟁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요? 이것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보험 들고, 운동하고, 결혼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서로 반목하게 되었을 때, 보험과 운동과 결혼에 그 탓을 돌리는 무분별함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과학이 인류 역사에 끼친 혜택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대목입니다. 자연을 이용하여 문명의 이기들을 누리고, 숱한 질병에서 벗어나고, 이렇게 80억이나 되는 인구가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마련하는 데도 과학이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렇지만 과학이 오용된 사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세계대전을 통해 수천만 명의 사상자를 낳고 인류의 과도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연을 훼손하고 대기를 오염시켜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데도 과학이 한몫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렇게 상대적인 두 상황에서 과학은 중립적인 도구였을 뿐입니다. 다만 인간들이 그것을 선용하거나 오용했을 따름이지요. 사정이 이러한데도 러셀은 이 과학이 인류가 품은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므로 우리의 노력으로 이 세상을 살기 적합한 곳으로 만들자고 천진난만한 주장을 내놓습니다. 과학이 인류의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그의 말도 납득하기 힘들지만, 그 과학을 오용해 온 인류의 사악한 경향성과 무한한 욕심의 역사를 못 본 체하는 그의 행태는 그의 빈약한 논리마저 무효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토마스 만이 지적한 대로 인간은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는 제한적인 존재입니다. 게다가 비록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무기 화합물이 서로 결합하여 생물 화합물이 되고 이것이 생명체로 진화해 갔다는 추정까지는 제시되었으나, 이 무기 화합물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과학은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지점은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과학을 신의 자리에 올려 두고 숭상하는 것보다는, 좀 더 겸허한 자세를 취하면서 과학을 선용할 방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요? 즉 자신의 시원과 궁극적 귀착지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을 인정할 뿐 아니라, 과학에 한계가 있다는 것과 그것을 선용하거나 오용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책임임을 깨닫는 것이 기본자세라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각자가 직면하게 되는 ‘나는 무엇인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결정적인 돌파구가 되는 것이 바로 초자연적인 신적 계시와 보편적인 원리 혹은 도덕률입니다. 물질을 궁극적인 기원으로 삼는 입장은 이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신의 자리에 있으니, 그 물질적인 신에게서 어떤 의미 있는 답변을 들을 수 없는 게 당연하지요. 이 시점에서 러셀이 그토록 철저하게 오해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트인 마음으로 진지하게 고려해 보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할 일(What We Must Do)-

러셀이 결론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발을 딛고 서서 세상의 좋은 사실과 나쁜 사실들,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한 모습들을 정당하고 바르게 보기 원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라”(“Conquer the world by intelligence”)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고는, 난데없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개념은 고대 동방의 폭정에서 유래된 개념이다.”(“The whole conception of God is a conception derived from the ancient Oriental despotisms.”)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합니다.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걸맞지 않은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이 선한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과거를 후회하며 그리워하거나 오래전 무지한 자들이 한 말로 자유로운 지성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식(knowledge)과 친절(kindliness)과 용기(courage)라고 주장하며 끝을 맺습니다.

---->이제 러셀의 글 마지막 항목에 도달했습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유로운 지성을 활용하여 세상을 정복하라고 주문하지요. 이 말은 고대 동양의 폭군 같은 신을 두려워하여 노예로 살면서 자기를 비참한 죄인이라고 여기지 말고, 자유로운 지성으로 세상을 바로 보면서 최선을 경주하여 세상을 더 낫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동양의 폭군에 비유하다니 이제 그의 논의가 끝에 도달했다는 의미겠지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의 역할은 전제 통치를 펼치는 사납고 악한 임금에 불과하다는 게 러셀의 신(神) 인식입니다. 이것이 그의 말처럼 ‘두 발로 서서 세상을 공정하고 정직하게 바라본’(stand upon our own feet and look fair and square at the world) 결과일까요? 그의 신 인식의 근거에 대해선, 이전 항목들을 통해 제시된 그의 논지와 제가 제시한 논지를 비교해 보고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제 폭군인 신의 노예로 사는 삶의 대척점에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삶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러셀은 그동안 내내 ‘지성’ 혹은 ‘지력’을 가리킬 때 ‘intellect’라는 단어를 사용해 오다가 이 항목에서만 4차례에 걸쳐 ‘intelligence’라는 단어(‘IQ 테스트’의 ‘I’에 해당함)만 쓰고 있습니다. 그 세부적인 용례는 다소 차이가 나지만 여기에서는 서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며, 후자의 의미는 본능적인 행동과 반대되는 개념, 즉 생각하고 추론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금까지 전개된 러셀의 논지로 보건대,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라’는 말은 아마도 지식과 과학의 힘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가라는 의미겠지요. 그런데 과연 이것들로 세상의 문제들이 다 해결될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쓸 당시의 러셀이 이미 경험했던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런 생각이 얼마나 천진난만했는지를 온 천하에 드러내었습니다. “H. G. 웰스의 세계사 산책”에는 그 전쟁에 대해 이런 논평이 나오지요.

 

“전쟁이 일어나고 불과 몇 달 만에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the progress of modern technical science)이 전쟁의 본질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는지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자연과학(physical science)은 인류에게 힘(power), 곧 철을 다루는 힘, 거리를 뛰어넘는 힘, 질병을 극복하는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 힘을 올바로 사용하는지, 아니면 그릇되게 사용하는지는 도덕 및 정치에 관한 인류의 지성(the moral and political intelligence of the world)에 달려있다. 그런데 파괴와 저항 모두 할 수 있는, 전례 없이 강한 힘을 손에 쥐게 된 유럽 각국 정부는 여전히 구태를 벗지 못하고 증오와 의심에 가든 찬 정책(antiquated policies of hate and suspicion)들을 펴고 있었다. 전쟁은 전 세계의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관련된 문제들에 비해 훨씬 엄청난 손실을 안겨주었다.”(“H. G. 웰스의 세계사 산책”)

 

4년 반 만에 무려 약 2천만 명이 살육되는 대재앙을 낳은 것이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요? 단언하건대 인간에게 그토록 막강한 힘을 부여해 준 지식과 과학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오롯이 그 힘을 오용한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그 지식과 과학기술을 오용했을까요? 스스로 생각하고 추론할 수 있는 지성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고 의심하는 원초적 감정에 온전히 사로잡힌 채,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를 냉철하게 헤아리는 분별력뿐 아니라 옳은 길을 선택해서 실행하는 결단력이 없어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웰스가 지적한 ‘도덕 및 정치에 관한 인류의 지성(the moral and political intelligence of the world)’이란 표현이 함의하는 내용입니다. 지성적 활동에는 안내자나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온 세상이 인정하는 도덕률입니다. 국제적인 상황에서는 여기에다 정치적인 고려가 가미되겠지요. 러셀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지성은 그저 고삐 풀린 ‘자유로운 지성’(free intelligence)에만 머물러 있을 뿐, 보편적인 원리와 구체적인 삶의 현실이 가미된 ‘도덕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지성’(moral and political intelligence)에까지 진화되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말과는 달리 사안마다 편견과 아집으로 물든 색안경으로 바라보며 속단하기 일쑤고, 인류의 자산으로 전수된 과거의 언명들의 의미를 겸허하게 헤아리기보다는 죄다 무지의 소산으로 여기는 게 그의 지성의 두드러진 면모이지요.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근거 없는 본능적 증오와 의심이 그의 평생 하나님, 그리스도 및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의 지성적 활동에 재를 뿌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러셀의 근원적인 문제: 자기가 몰랐던 영역에 대한 무지-

러셀이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다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그의 머릿속에서 지어낸 허상이었습니다. 그의 근원적인 문제는 자기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에 대해 무지했다는 데 있습니다. 수학자, 철학자, 역사가로 알려진 그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 글로만 판단해 보건대 그는 그리스도교와 그 신학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그의 얄팍한 성경 지식과 투박하고 종작없는 논리를 미루어 보건대, 자기에게 수학과 철학과 역사에 대한 지식이 얼마간 있다는 이유로 성경이나 그리스도교 신학을 얕잡아 보고 그것들을 탁월하게 파악했다고 여긴 듯합니다. 그 같은 경우를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지적하고 있지요. 그가 정치가와 시인과 장인을 찾아가 면담해 본 결과, 그들 각각 많은 사람에게 지혜롭다고 여겨지고 자신들도 각각 자기를 지혜롭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그들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지요.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까요? 비록 그들이 정치, 시, 기술 면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모르는 것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알고 있고 주목할 만한 기술을 가졌다는 이유로 “가장 중요한 다른 일에서도 자기들이 가장 지혜롭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과오는 그들의 지혜마저 무색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무지합니다. 다만 무지한 분야가 각각 다를 뿐이지요. 소크라테스가 만난 그들뿐 아니라, 러셀도 이 엄연한 사실에 무지했습니다.

 

그에게 성경이나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해 조금의 상식이라도 있었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과거와 현재가 각각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요? 옛날에는 그 단어가 모든 신조를 믿는 자를 가리켰지만, 현대에는 그 ‘순수한 의미’(a full-blooded meaning)가 퇴색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지혜로운 자라고 믿는 자를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그 근거가 의심스럽고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의를 자신의 과녁으로 정해 두고는 비판의 화살을 쏘아댔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라는 게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조라는 점은 다른 종교인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까지는 언급하지 못하더라도, 그 예수님이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는 점을 모르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도 현대판 그리스도인에 대한 러셀의 정의에는 십자가도 부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신성(神性)조차도 양보 사항에 불과합니다. 그가 인용한 복음서가 예수님의 신성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두드러지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과연 올바른 독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왜곡된 독해를 바탕으로 전개된 그리스도교 비평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가 이런 그리스도교 핵심 교리들을 믿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이해하는 것과 믿는 것은 차원이 다르지요. 다만 분별력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읽으면 이해되는 복음서의 핵심을 주목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인들을 비판하기에 열을 올린 그의 무분별의 해악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의 논지 속에 ‘확증편향’이 물씬 묻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의 가치관이나 신념에 의하면 예수의 신성, 십자가 사건 및 부활 사건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애당초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스럽고, 설령 그가 실재했어도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루기 어려운 역사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다만 복음서를 있는 그대로 독해하면서 그 속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고 강변하지요. 그러면서도 그가 관심을 둔 것은 단지 자기가 보기에 ‘매우 지혜로운’(very wise) 말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복음서 여러 구절을 자평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시도에서도 일반적인 독해의 원리를 좇아 그 구절의 문맥을 고려해서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문제에만 매달립니다. 그는 마치 소고기 무한리필 전문점에 가서 소고기 실컷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상추, 깻잎, 호박잎 같은 쌈 채소와 김치, 양파, 버섯, 마늘 같은 밑반찬만 먹으면서 투정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는 복음서(Gospels)를 읽으면서도 복음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라는 영적 현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요. 도리어 그 핵심 주제들에 비하면 부차적이거나, 그것들에 의해서만 올바로 해석될 수 있는 문제들에만 매달렸지요. 숲은 보지 않고 특정 나무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인물의 유명세 때문에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를 등지게 되거나 아예 그리스도교를 바라보지도 않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 글을 담고 있는 책(이 글과 동명의 제목)을 자기 인생의 책으로 꼽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에 세상을 떠난 가수 신해철 씨가 그러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 책, 특히 이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으로 인해 자기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그가 자기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작고(46세)했지만 우리나라 많은 젊은이에게 영향을 미친 그였기에, 그를 통해 이 책을 접한 이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2005년 11월에 그가 “낭독의 발견”이란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자기 인생의 책으로 이 책을 꼽으면서 낭독한 부분이 바로 이 글의 끝부분이었지요.

 

이번으로 총 5회(‘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포함하면 6회)에 걸쳐 러셀의 글을 비평하면서 제가 염두에 둔 대상은 세 그룹입니다. 첫째, 신해철 씨 같이 이 책을 인생의 책으로 꼽는 이들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구도하는 이들입니다. 셋째, 그리스도교의 교리나 신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특히 이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무지한 러셀 같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를 직간접적으로 비판하거나 공격해대는 친구나 친지나 교사나 교수들의 피해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우가 그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틈이 나는 대로 기독교를 비과학적이고 무지몽매한 종교로 비난해대던 생물교사, 대학교 1학년 교양 과정을 밟던 시절에 시시때때로 기독교의 반지성적인 면모를 지적하며 공격해대던 문학개론/철학개론/심리학개론/문화인류학 교수들의 등쌀에 시달려야 했으니까요. 그들이 그토록 자신만만하고 용맹했던 건 그들의 배후에 유물론적 무신론자인 러셀 같은 저명인사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나 이런 상황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지분거림 덕에 저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 깊고 넓게 탐구할 수 있게 되었고, 트인 마음을 품은 이들에게 이 소중한 신앙의 세계를 나누겠다는 일념으로 지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이 “버트런드 러셀의 복음서 읽기” 에세이들이 이 세 그룹에 속한 이들에게 유효한 그리스도교 안내서 역할을 담당하길 기원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