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세계관이 삶의 변화를 낳지 못한다?
“힐라리온이 누이 알리스에게 안부를 전하오. 모친 베로우스와 아폴로나리온에게도 안부 전해 주오. 나는 아직 알렉산드리아에 있소. 그들이[부대가] 전부 출발하고 나는 알렉산드리아에 남아 있지만 염려하지 마오. 당신은 오직 아이만 생각하기를 간곡히 당부하오. 조만간 급료를 받으며 보내리다. 혹시 아이를 낳게 되면 사내아이일 경우 키우고, 여자아이면 내다 버리시오. 당신은 아프로디시아스 편으로 ‘나를 잊지 말아요’라고 전했소. 내가 어찌 당신을 잊겠소? 그러니 부디 염려하지 마오.” -카이사르 29(년), 파우니 23[BC 1년 6월 17일]. (존 딕슨,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에서 인용)
어제 “선교와 세계관”이란 제목으로 강의하는 시간에 먼저 나눈 내용입니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근무하던 로마 군인 힐라리온이 자기 아내에게 보낸 편지지요. 평범한 안부 편지였으나, 그 내용 중에는 21세기 인권 수준으로 볼 때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내가 만일 여아를 낳게 되면 내다 버리라는 당부 말입니다. 그렇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당시에 아이를 유기하는 것은 불법이거나 부도덕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가족계획의 일부였을 뿐입니다. 로마인들이 물려받은 그리스 철학이 이런 행태를 용인하거나 권장했으니까요. 플라톤과 함께 서양 철학의 두 기둥을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태어날 아이를 유기할지 기를지에 관해서는, 어떤 기형아도 길러서는 안 된다는 법이 필요하다.”
이 편지를 소개한 역사가 존 딕슨은 이런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당시 이 힐라리온의 친구라고 치고, 그가 신생아를 유기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점을 한번 납득시켜 보라고 말입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 30가지를 담고 있는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1948)을 그에게 들이민다면, 아마도 그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바라볼 것입니다. 그런 다음 당시 로마를 주름잡고 있던 세계관, 즉 그리스 철학을 인용해서 이렇게 되물을 수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자네는 자의식조차 거의 없는 신생아가 다른 인간들과 ‘평등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건 그저 자의적인 신조가 아닌가? 자네는 모든 ‘동물’이 평등하다고 말하겠나? 모든 ‘기술’이 같은 가치를 갖고 있는가? 모든 ‘도구’가 평등한 가치가 있는가?” 더 강하고 유능한 존재를 선호하던 당시의 세계관하에서 아이의 가치란 그가 지닌 ‘특정한 능력’이나 ‘가족 안에서의 유용성’에 달려 있었을 뿐입니다.
서양 역사는 이런 세계관을 가진 사회가 ’세계인권선언‘을 낳은 사회로 변혁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 선언문의 전문에 소개된, “인류 모든 구성원이 가지는 천부의 존엄성과 동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the inherent dignity and of the equal and inalienable rights of all members of the human family)라는 표현은 어떤 세계관이나 철학에 근거한 것일까요?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대로 지음받았다는 성서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서양 무신론 철학자 중에는 비록 이 성서적 언명을 믿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들조차도 그 표현 대신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로 제시할 만한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기점으로 성서적인 세계관이 무시되거나 폄훼되기 시작했지만, 지난 2천 년 서구 문화의 저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고귀함을 선양하는 전통을 연면히 보전해 왔습니다. 이처럼 세계관은 우리 인간 역사의 저류이자 우리 각자의 삶의 기반입니다.
-세계관의 효능에 관한 회의-
우리나라 기독교에 세계관(worldview)이 소개된 지도 벌써 40년이 넘습니다. 지난 세월을 복기하고 현재 기독교 상황을 관찰하면서, 이 세계관 교육 혹은 운동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기간 동안 성도 수가 늘었다가 어느 시점부터 줄기 시작한 것뿐 아니라, 중대형 교회들의 세속적인 행태와 기독교를 표방하는 인물들과 단체들의 도덕적 해이와 반지성적 태도가 맞물려 기독교가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린 현실을 두고 하는 말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평가를 접하면서 제게는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그 기간 동안 교회에서 세계관 교육이 제대로 진행되었을까?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현재 기독교 상황을 굳이 세계관 운동의 무력함 탓으로 돌리는 것은 판단 착오이겠지요.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세계관 운동이 재개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계관 운동 자료를 찾아보던 중 전성민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Vancouver Institute for Evangelical Worldview) 교수의 제안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전 교수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익숙한 일상의 한 부분인 성경 읽기가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의 세 가지 주제와 연관을 맺으며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창조를 염두에 두면서 거룩한 일과 속된 일이라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극복하고, 지성을 활용하여 성경 각 권의 장르와 문맥을 살피며 공부하고 묵상함으로써 현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타락이라는 주제를 고려해 보면서, 자기중심적인 성경 읽기 사례들을 포착하여 하나님과 이웃과 창조 세계와의 관계에서 뒤틀린 부분들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구속에 초점을 맞추면서, 세상의 질서와는 온전히 다른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타인을 돌아보고 낮은 곳에 처하면서 주님과 함께 고난받을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가를 모색하게 됩니다. 아마도 가장 자연스럽게 세계관 운동을 재개할 수 있는 시발점을 전 교수가 제시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결국 세계관 운동이라는 것의 기반은 성경일 테고 그 진행 경로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을 파악해서 순종해가는 과정이라면, 성경 내용을 올바로 관찰하고 적절하게 해석해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적용하는 것을 세심하게 다지는 게 무엇보다 긴요한 작업입니다. 어제 강의할 때 중점적으로 다룬 내용도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세계관이 별 효용이 없다고 말하는 대신, 기독교 신학이 응집된 그 세계관을 잘 이해한 후 그것에 입각하여 성경을 제대로 읽고 묵상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성경 읽기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책 읽기가 그저 사변적인 모색에서 그치기만 한다면 창백한 지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독서가 단순한 생각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인 묵상으로 연결되어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되면, 반드시 행동으로 드러나거나 새로운 변화를 일구어 냅니다. 여호수아 1:8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약속해 주신 것이 바로 이 측면입니다.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것 혹은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이 순종의 관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This book of the law shall not depart from your mouth, but you shall meditate on it day and night, so that you may be careful to do according to all that is written in it; for then you will make your way prosperous, and then you will have success.) 잘 순종할 수 있도록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고 영어 성경은 일러주고 있지요. 이 과정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도와주신다는 약속 또한 큰 힘이 됩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복음 17:17, Sanctify them in the truth; Your word is truth.)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신 내용 중에 등장하는 탄원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진리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가 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말씀에 붙잡혀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 위해 빌어 주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기도이므로 약속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세계관의 시발점-
세계관이란 원래 칼뱅의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세상이 비록 전적으로 타락했어도, 온 세상의 주님 혹은 통치자 되신 하나님의 주권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여 역사가 운행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을 통해서 “자애로운 아버지의 특성을 띤 주권”(fatherly sovereignty)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인간의 길은 참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받들어 19세기 후반에 네덜란드의 총리이자 목사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기독교를 “삶의 체계”라고 불렀고, 스코틀랜드 신학자인 제임스 오르(James Orr)가 기독교를 “세계관”이라고 일컬었지요. 하나님의 주권이 기반을 이루는 세계관을 날마다 실행하는 그리스도인은 오만한 승리주의와 도를 넘는 낙관론에 빠지지도 않고 독신적인 패배주의와 염세적인 운명론에서 허우적대지도 않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로마서 11:36,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the glory forever. Amen.)를 확신하기에, 날마다 성령과 교통함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신 소명을 신실하게 실행해 갑니다.
-성경 읽기 지침-
세계관 중심의 성경 읽기를 위한 지침으로 세 가지를 지적해 보았습니다.
(1) 성경의 이중 저작(double authorship). 겸허한 기도와 신실한 공부를 병행하자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입니다. 성경은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히브리서 1:1) 계시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베드로후서 1:21)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두 가지 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우선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읽어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경은 인간의 저작이므로 각 책의 장르와 문맥을 고려하며 공부하고 해석해 가야 합니다. 전자를 무시하는 게 자유주의자(liberalist)의 행태라면, 후자를 무시하는 것이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의 태도입니다(존 스토트).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집필하는 과정 중에 역사하신 것처럼, 그 이후의 독자들이 성경을 읽는 과정 중에도 간여하신다는 점을 믿는 것이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입니다. 성경이 형성되는 과정과 성경 독자의 해석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할이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입장이 바로 이신론(Deism)이지요(제임스 패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에 안드로메다은하로 날아가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현재 이 시간에도 역동적으로 현존해 계신 분이십니다.
(2) 계시의 일차 수신자와 이차 수혜자. 수신자의 시각으로 성경을 읽자는 것입니다. 존 월턴 휘튼 대학 교수가 지적한 대로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 쓰였지만, 우리에게 쓰인 것은 아니다.”(The Bible was written for us, but not written to us.) 먼저 해당 성경 내용을 받아든 당시의 독자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릴 영적 유익과 순종해야 할 내용을 모색하는 것은 그 다음 일입니다. 이 기본적인 지침이 무시되는 성경 읽기가 얼마나 만연한지 모릅니다. 예컨대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의 창조론을 대변하는 이들이 범한 오류가 바로 이 지침을 무시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지식이 미미하여 해와 달과 별을 숭배하던 시대에 살던 이들에게 천지를 만드신 유일하신 창조주가 엄존하신다는 현실을 시적 요소가 가미된 언어를 통해 계시된 글 속에서, 구체적인 창조의 순서와 과정뿐 아니라 우주와 지구의 역사까지도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다는 입장이니까요.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연목구어‘의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과학자들이 편견 없는 관찰과 체계적인 실험을 통해 자연을 연구하면서 겸허하게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켜가듯이, 성경 독자들도 장르와 문맥 이해를 통해 창세기의 일차 수신자들이 이해한 내용을 파악하면서 명백하게 계시되지 않은 내용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지침입니다.
(3) 계시와 신비. 계시되지 않은 내용은 하나님께 맡기자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가 신명기 29:29에서 지적한 내용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감추어진 일(The secret things)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the things revealed)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말씀 중에는 명시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것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정보도 존재합니다. 후자가 난해 구절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 구절들은 어떤 형태로든 합당하게 그 의미를 밝힐 수 있으니까요. 모세의 권면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계시해 주신 말씀에 대해서는 확신을 품어야 하지만, 신비로운 영역으로 감추어 두신 내용에 대해서는 불가지론(agnosticism)을 발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임하시는 날은 아무도[심지어 예수님조차도] 알 수 없다는 언명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지만(마태복음 24:36), 지난 기독교 역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인물이 이 감추어진 일을 밝히려고 독신적인 행위를 감행했는지요. 게다가 그들에게 현혹당하는 일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간략하게 나눈 이런 기본적인 지침들을 무시하는 이들은 창세기뿐 아니라, 성경의 다른 책들도 오독할 소지가 큽니다. 각 성경 본문의 장르와 문맥을 간과한 채 문자적으로,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은 나태하고 부실한 성경 읽기이자, 오독의 온상입니다. 사실상 그냥 성경을 통독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해석이 동반되기 마련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좋은 해석인가, 나쁜 해석인가만 문제일 뿐이다. 나쁜 해석에 대한 대안은 무해석이 아니라 적절한 해석이다.“(전성민 교수)
-세계관 적용한 성경 읽기(3가지 'ㅇ')-
이런 지침들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적 세계관의 3가지 주제인 창조, 타락, 구속을 적용하여 몇 가지 성경 본문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창조. 성경 읽기에 하나님의 창조라는 측면을 적용한다는 것은 특히 이원론(dualism)이라는 요소를 극복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가 종교에서 활용될 때에는 “세계(또는 현실)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두 가지 기본적이고(basic) 대립적이며(opposed) 환원 불가능한(irreducible) 원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교리”를 가리킵니다. 즉 “세상을 존재하게 만든 두 개의 상반된 최고 권력 또는 신(two supreme opposed powers or gods), 혹은 거룩한 존재 또는 악마적 존재 그룹(sets of divine or demonic beings)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요(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맞짱 뜨고 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타락한 천사에 불과한 사단을 하나님과 대등한 권력을 갖고 당신과 독립적으로 투쟁하는 대상으로 설정하는 이것보다 더 독신에 찬 사상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런 기본 사상에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영역과 사단이 관장하는 영역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 유래되었습니다. 영혼과 육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성스러운 일과 세속적인 일들 각각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이해하거나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0:38-42에 등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를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이 집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시중드는 모든 일로 경황이 없던 마르다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을 던집니다. “주님, 제 여동생이 저 혼자 모든 봉사를 하도록 내버려 둔 것을 개의치 않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여동생에게 언니를 도와주라고 말씀해 주세요.”(Lord, do You not care that my sister has left me to do all the serving alone? Then tell her to help me.) 이 말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응대하시지요. “마르다여, 마르다여, 그대가 그렇게 많은 일에 대해 염려하고 마음을 쓰고 있지만, 단 한 가지만 필요해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어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거예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을 듣는 행위가 식사 접대하는 행위보다 더 낫거나, 더 거룩한 일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라는 세계관의 주제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말씀 듣는 행위는 거룩한 일이나 식사 접대하는 일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원론적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일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지속해 가시는 일입니다. 다만 각각의 일에 임하는 자세와 시기 혹은 경우가 문제가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대신 식사 준비에 분주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일에 대해 염려하고 근심하는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식사 준비하면서 예수님을 접대하는 기쁨이 흘러나온 게 아니라, 자기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면서 온갖 것에 대한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태도가 급기야 자기가 초대한 예수님을 비난하고 마리아를 헐뜯는 데까지 번지지요. 예수님께 “(...)을 개의치 않으십니까?”라고 따지고, 마리아를 언니에게 모든 일을 맡긴 채 예수님과의 교제만 즐기는 얌체로 매도했으니까요. 이 도전을 접하신 예수님의 반응에서 마르다의 이름이 두 번 언급될 만큼 마르다의 태도는 경계를 넘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인명을 두 번 연달아 언급하신 경우가 몇 번이나 있을까요? 단 7회에 불과합니다. 구약에 4번[아브라함(창세기 22:11), 야곱(창세기 46:2), 모세(출애굽기 3:4), 사무엘(사무엘상 3:10)], 신약에 3번[마르다(누가복음 10:41), 시몬(누가복음 22:31), 사울(사도행전 9:4)] 나오지요. 거의 모두 성경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들의 생애에 있어 결정적이고도 긴박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경우들입니다. 마르다의 경우도 이렇게 아주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표방하면서 주님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일꾼에게 허락된 반면교사로 제게는 읽힙니다. 하나님 나라와 당신의 의를 먼저 구한다고 지내온 지난 세월 동안 그 사실 한 가지만으로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시간을 누린 경우보다, 제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사역을 두고 염려하고 근심하며 하나님께 한탄하고 다른 일꾼들의 무관심에 신경이 쓰인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타락. 성경 읽기에 인간의 타락이라는 측면을 적용한다는 것은 특히 이기심(self-centeredness)이라는 요소를 극복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도로 쓰인 구속의 역사를 읽으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드러내는지 모릅니다. 빌립보서 4:13을 통해 이런 측면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개척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유명한 선언입니다. 소위 긍정적 사고방식을 주창하는 이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성구이지요. 그들의 성경 해석이 그릇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이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여전히 적지 않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능력 주시는 하나님보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서,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춘다면 보다 능동적이고 능력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얼마든지 이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과연 그럴까요?
이 말씀의 수신자는 누구입니까? 빌립보 교회 성도들입니다. 이 구절에 등장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로마 감옥 안에 있던 사도 바울이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이 그 성도들에게 어떻게 읽혔을까요? 그 사실을 알려면 이 구절 전후를 살펴야 합니다.
(빌립보서 4:11-12 / 14-15)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affliction)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이 문맥을 통해서 성도들은 현재 수감된 사도 바울이 이전에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때나 빈곤한 때에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능력으로 온전히 자족하는 법을 터득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가 배고프고 빈곤할 때 자기들의 헌금이 그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는 점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그렇게 어려움에 처하는 지경에 도달할 때까지 분에 넘치는 헌금[’내 괴로움(affliction)에 함께 참여하였다‘에서 유추되는 상황]을 한 공동체가 자기들뿐이었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본문을 통해 어떤 적용을 하게 되었을까요? 자기들도 어떤 경제적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자족하겠다고 결단했을 테고,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공동체가 없어 빈곤하게 생활하는 말씀 사역자나 복음을 위해 고난당하는 일꾼들을 물색하여 헌금하기를 시도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을 자기중심적으로 독해한 후 자기 모든 야망과 욕망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겠다고 적용하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나지 않습니까?
구속(=창조의 회복). 성경 읽기에 구속과 창조의 회복이라는 측면을 적용한다는 것은 특히 운명론(fatalism)이라는 요소를 극복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지난 세월 동안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세계관 주제 중에 창조의 의미는 피상적으로 이해했고, 타락이란 측면에 너무 집착했으며, 구속이 품고 있는 함의도 너무 축소해서 이해했습니다. 합신대에서 가르친 송인규 교수가 1980년대 초에 내놓은 세계관 입문서 제목이 당시 이러한 우리나라 기독교의 면모를 적확하게 지적했지요.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 이원론적인 신앙 행태가 만연하고 타락한 이 세상에 더 이상 비전이 없다고 보는 운명론적 사고가 팽배하던 그 시대에, 기독교 세계관을 새롭게 조망하던 송 교수는 외쳤습니다. “하박국의 비전 -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2:14) - 이 우리 각자와 전 교회의 비전이 되도록 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된 우리를 구속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을 믿는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이전처럼 살 수 없습니다. 부활로 인류의 구속을 확증하신 당신께서 온 세상의 주님으로 등극하신 마당에, 그 백성된 우리가 세상에 만연한 악에 더 이상 대항할 수 없다며 맥을 놓고 주님 다시 오시기만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속 신앙에 대한 배반입니다. 그렇다고 승리주의에 사로잡혀 오만한 자세로 세상을 대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 20:21)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예수님의 본을 따르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그 앞 구절에 답이 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19-20)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성육신적인 삶과 십자가의 길로 보내셨듯이,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성육신적인 선교와 십자가의 길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길은 부활의 영광이 보장된 길이요, 부활의 주님과 함께 동역하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당신의 제자 공동체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늘뿐 아니라 ‘땅’의 권세까지도 죄다 보유하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로 나아가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난 여기 하늘에 있을 테니 너희들만 모든 땅으로 나아가라.’는 제안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자애로운 아버지의 특성을 띤 하나님의 주권”(fatherly sovereignty)을 기반으로 한 성경적 세계관은 반드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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