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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호기심이란 키워드로 인간의 본질을 섬세하게 관찰한 에드거 앨런 포(3)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9. 15.

공포와 호기심이란 키워드로 인간의 본질을 섬세하게 관찰한 에드거 앨런 포(3)

-호기심이 일구어내는 새로운 세상-

포는 공포소설로도 유명하지만,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로도 유명합니다. 이 소설 장르의 창시자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두 소설 장르는 서로 모순되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섬뜩해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소설은 주로 비합리적이고 감성적인 요소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 탐정소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요소에 근거하고 있으니까요(김욱동 교수). 극과 극이 서로 통한다는 말이 포의 경우에는 더욱 확연해집니다. 그렇다면 이 두 극단적 장르를 연결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호기심이라는 강한 지적 욕구입니다. 합리성을 따지는 추리소설에서 탐정들이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는 지적인 호기심을 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공포소설에도 등장인물들이 호기심을 품고 갖가지 두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그 공포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먼저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작품(two sea stories)의 줄거리를 잠시 살펴본 후 논의를 이어가겠습니다.

 

■“병 속에서 발견된 수기”: 가족과 조국으로부터 멀어진 이름 없는 화자가 바타비아[현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화물선에 승객으로 승선하여 항해를 시작한다. 항해를 시작한 지 며칠 후, 배는 모래 폭풍과 허리케인의 합성어인 시뭄(simoom)이란 폭풍우에 휩쓸려 배가 전복되고 화자와 스웨덴인 노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바다로 떠내려간다. 마법 같은 시뭄에 이끌려 남극을 향해 남쪽으로 향하던 화자의 배는 결국 4천 톤급이나 되는 거대한 검은 범선(galleon)과 충돌하고, 화자만 겨우 그 배에 올라탈 수 있게 된다. 배에 올라탄 화자는 배 곳곳에서 낡은 지도와 쓸모없는 항해 도구를 발견하는데, 그 배의 목재에는 작은 구멍이 수없이 많았고, 그 목재 자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든 부자연스럽게 부풀려진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는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노인 선원들이 배를 조종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수기(MS.=manuscript)를 작성하기 위해 선장실에서 필기 자료를 가져온다. 다 쓴 그 수기를 나중에 바다에 던지기로 결심한다. 이 배 역시 계속 남쪽으로 떠내려가고, 남극에 도착하자 선원들의 표정에서 냉담한 절망보다는 뭔가에 대한 간절한 열망(an expression more of the eagerness of hope than of the apathy of despair)이 묻어난다. 그렇지만 배는 얼음 틈새로 들어가다가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다”: 이 소설은 노르웨이 로포텐(Lofoten)의 산 정상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화자와 가이드는 노르웨이 해안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조수 간만의 차이로 거대한 소용돌이(whirlpool)가 형성되는 바다의 한 부분을 내려다본다. 헬게센(Helgesen) 정상에서 화자는 겁에 질려 주변의 풀을 움켜쥐고, 가이드는 두려움이 전혀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가장자리에 기대어 있다. 화자가 평정심을 되찾게 된 후, 가이드는 자기가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소용돌이치는 광기 속에서 보낸 6시간 동안의 경험을 들려준다. 가이드는 3년 전 두 형제와 함께 낚시 여행을 떠났다. 그 도중에 “하늘에서 내려온 폭풍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폭풍”(the most terrible hurricane that ever came out of the heavens)에 의해 자기들의 70톤급 어선이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한 형제는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고 말았다. 처음에 화자는 그 광경에서 끔찍한 공포만 보았다. 그러다가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주변의 물체를 관찰하는 중에 새로운 희망이 움트기 시작하여, 소용돌이에 대해 강한 호기심이 생기게 된다. 주변 물체들이 어떻게 빨려 들어가는지를 관찰한 그는 그것들이 크고(the larger the bodies were), 구형(the one spherical)일수록 빨리 빨려 들어가지만, 원통형(the one cylindrical)일수록 더 천천히 빨려 들어간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원통형 물통에 자기 몸을 묶고 난 후 물속으로 뛰어들어 어선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전하려고 했던 의도[원형 물통을 붙잡고 뛰어내리라는 것]를 깨닫지 못하고 고리만 붙잡고 있던 다른 형제는 한 시간쯤 후에 배와 함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가이드를 구조해 준 어부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얼굴 표정( the whole expression of my countenance)뿐 아니라 ‘새까맣던’(raven-black) 머리카락이 백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바다 이야기를 읽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즉 인간이 도무지 방어할 수 없는 강력한 소용돌이의 힘과 지구의 극한[“병 속에서 발견된 수기”에서는 남극,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다”에서는 북극]이 제시되는 가운데, 화자들이 목숨을 걸고 그 강력하고 신비로운 자연의 힘을 체험한다는 점입니다(올리버 티어를<Oliver Tearle> 교수).

 

호기심의 본질, 신비로운 것에 대한 갈망. 화자들이 사활을 건 체험은 자원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찌할 수 없는 공포의 상황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드려서라도 그 과정을 체험하고자 합니다. “병 속에서 발견된 수기”의 화자를 주목해 보세요. 그는 남쪽으로 강력하게 흘러가는 조류로 인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는 중에도 이런 태도를 견지합니다. “이 무서운 지역의 신비를 파헤치고 싶은 호기심은 절망보다 강해, 그 호기심을 채울 수만 있다면 나는 가장 끔찍한 죽음조차 기꺼이 감수하겠다.”(yet a curiosity to penetrate the mysteries of these awful regions, predominates even over my despair, and will reconcile me to the most hideous aspect of death.)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다”의 가이드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잠시 후 나는 소용돌이 자체에 대해 아주 강한 호기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곧 희생을 치르게 되겠지만, 그런 희생을 치르더라도 소용돌이의 밑바닥을 탐험하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꼈지요.”(After a little while I became possessed with the keenest curiosity about the whirl itself. I positively felt a wish to explore its depths, even at the sacrifice I was going to make;)

 

이 가이드가 이어 언급한 것처럼, “그런 극단적인 처지에 놓인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너무나 묘한 일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These, no doubt, were singular fancies to occupy a man's mind in such extremity—) 이처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처지에서도 자기를 위태롭게 하는 지역을 탐험하고자 하는 그 열망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바로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이 작품들 속의 화자와 가이드에게는 각각 남극과 북극이라는 심연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역사상 수많은 탐험가와 과학자와 예술가들에게도 각각의 신비로운 심연이 존재했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지적한 대로입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성은 경외감을 자아내는 신비다. 이 [신비를 체험하는] 감성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예술과 과학의 동력이다.”(The most beautiful emotion we can experience is the mystical. It is the power of all true art and science.) 도스토옙스키(1821-1881)도 같은 입장을 취했습니다.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밝힙니다. “형,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연구하는 데 꽤 진척을 보이고 있어. 인간은 신비 그 자체야. 우리는 그 신비를 풀어야 해. 그러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 하더라도 결코 시간을 허비했다고 할 수 없을 거야. 인간이고 싶기 때문에 나는 이 수수께끼에 골몰하고 있는 거야.”(석영중, “매핑 도스토옙스키”)

 

결국 자연계의 현상과 그 속에 존재하는 생물 및 인간의 신비로운 측면 때문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탐험가들은 탐험하고 과학자들은 연구하며 예술가들은 창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호기심 덕분에 얼마나 다양한 새로운 세상이 열렸는지 모릅니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거나, 페니실린이 발견되거나, 그리스 시대의 비극과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탄생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이미 발견하고 창작한 것들은 그야말로 ‘대양의 물 한 방울’(a drop in the ocean)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탐험가나 과학자나 예술가는 어리석고 교만한 자입니다. 직무 유기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기도 합니다. 인간을 ‘신비’로 인식한 도스토옙스키가 인생을 “영원한 추구”로 명명했듯이, 신비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합니다. “병 속에서 발견된 수기”에서 화자가 자기 배를 덮친 범선 위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 보조 돛의 가장자리를 타르로 칠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그 돛이 펴지면서 그 붓질한 것이 특정한 한 단어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발견’(DISCOVERY)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인생행로에서 우리 각자가 참여해야 할 고유한 영역을 계시해 준 단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 인생은 신비로운 것들에 호기심을 품은 채, 그것을 탐구하고 경험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어 밝히는 데 그 의의가 있다는 말입니다.

 

창의적인 삶을 영위한 사람으로 꼽히는 우리나라 인물 중에 작년(2022년)에 소천하신 고 이어령 교수가 있습니다. 미수(米壽)로 불리는 88세라는 세월 동안 다방면에서 치열하게 창조적인 기량을 펼친 그의 삶의 원동력은 바로 끝없는 호기심이었습니다. 호기심을 품지 않고 습관적으로 보낸 날은 산 날이 아니었다는 그의 회고를 들어 보세요. 

 

“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 가는 삶이었어. 누가 나더러 ‘유식하다, 박식하다’고 할 때마다 거부감이 들지. 나는 궁금한 게 많았을 뿐이거든.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겨도 나 스스로 납득이 안 되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오가는 것이 내 인생이고 그 사이에 하루하루의 삶이 있었지. 어제와 똑같은 삶은 용서할 수 없어. 그건 산 게 아니야. 관습적 삶을 반복하면 산 게 아니지.”(김민희, “이어령, 80년 생각”)

 

호기심으로 변혁된 공포. 우리가 겪는 공포감은 언제 급격하게 호기심으로 바뀔까요? 첫째로, 변화시킬 수 없는 두려운 상황을 잠잠히 수용할 때입니다.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다”의 화자가 고백합니다. “무서운 운명을 향해 점점 다가갈수록 이 호기심이 더욱 커지는 것 같았지요.”(It[=the unnatural curiosity] appeared to grow upon me as I drew nearer and nearer to my dreadful doom.) 처음 소용돌이에 다가갈 때보다 그것에게 막 삼켜지려는 순간에 그는 훨씬 더 침착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희망을 품지 말자고 체념했을 때, 자기 기를 꺾었던 공포가 상당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자 그 소용돌이의 전모를 관찰하고 탐험해 보자는 강력한 호기심이 발동하게 되었습니다. 절망의 역전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지난날의 경험을 돌이켜 보세요.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운명이라고 인식할 때, 얼마나 빨리 우리가 그것에 적응하고 그것에 대해 잊어버리는 단계까지 진전했는지요.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빨리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및 사회적 거리 두기에 적응했을 뿐 아니라, 그런 방역 수칙들이 마치 평범한 일상인 것처럼 여겼나를 한번 돌아 보세요.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평정한 마음으로 신속하게 수용하는 게 지혜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고자 하는 호기심과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가 형성됩니다.

 

둘째로, 과거와 현재에서 비롯된 소망을 붙잡을 때입니다. 운명을 수용할 때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하지만, ‘희망의 서광’이 우리를 흥분시킬(the dawn of a more exciting hope) 때 호기심이 더욱 차오릅니다. “이 희망은 과거의 기억에서 솟아나기도 했고, 눈앞의 상황을 관찰한 결과에서 생겨나기도 했습니다.”(This hope arose partly from memory, and partly from present observation.) 그리하여 호기심이 과거의 기억과 직면한 현 상황 분석을 견인하여, 화자는 물체의 크기와 형태(구 혹은 원통)에 따라 하강 속도가 달라진다는 점을 깨닫게 되지요. 즉 물체가 클수록, 형태가 구형일수록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지지만, 형태가 원통형일수록 천천히 빨려들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통형 물통에 자기 몸을 묶은 채 그 물통과 함께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살아난 것이 바로 이 깨달음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을 낳은 것은 과거와 현재에서 솟아난 소망을 붙든 호기심이었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현재 상황 분석을 통해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소망을 품고 뜻한 바를 실행에 옮기는 자세는 이미 논의한 대로 ‘공포를 위한 공포’를 극복하는 방식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일 중에 가장 확실한 준거 역할을 하는 것은 과거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로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거의 경험은 현재 상황을 분석하는 데도 효과적이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도 유용합니다. “병 속에서 발견된 수기”를 읽을 때 제 심금을 울린 부분이 한 군데 있었습니다. 

 

“배가 영원히 물에 삼켜지지 않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으로 보인다. 우리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영원의 가장자리를 계속 맴돌아야 할 운명인 게 분명하다. 배는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파도보다 수천 배나 거대한 파도에서도 화살같이 빠른 갈매기처럼 쉽게 미끄러져 나아갔다. 거대한 파도는 심해의 악마들처럼, 하지만 우리를 단순히 위협만 할 뿐 죽이는 것은 금지된 악마들처럼 고개를 쳐든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위기를 모면하는 것은 그런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자연적 원인 덕분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우리 배가 어떤 강한 해류, 또는 맹렬한 저류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and the colossal waters rear their heads above us like demons of the deep, but like demons confined to simple threats and forbidden to destroy. I am led to attribute these frequent escapes to the only natural cause which can account for such effect.—I must suppose the ship to be within the influence of some strong current, or impetuous under-tow.)

 

지난 세월 동안 저와 제 가정이 안전하고 보람있게 살 수 있었던 이유를 절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면 ‘심해의 악마들’과 같이 저희를 위협하던 두렵고 떨리는 상황이 전개된 적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거대한 파도’는 단순히 저희를 위협만 했을 뿐 결정적인 해악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다양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신비한 원인’(the only supernatural cause) 덕분이었습니다. 그 거대한 파도의 위력을 상쇄시키는 하나님의 ‘강한 해류, 또는 맹렬한 저류’가 도도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과거사를 주목하는 한, 현재나 미래의 공포가 일시적으로 우리를 엄습할 수는 있어도 장기간 우리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과거의 경험이 우리 마음속에 잠시 자리 잡은 공포감을 ‘더욱 흥분시키는 소망’(a more exciting hope)으로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해류와 저류를 경험한 이 영광스러운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야말로 저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는 지복 중 하나입니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호기심을 품고 신비로운 현재와 미래의 삶을 주도적으로 탐험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상황을 평정한 마음으로 수용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세심하게 관찰할 때 가능합니다.  이 과정에서 특히 과거사의 의미를 지혜롭게 헤아리는 분별력이 절실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로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고귀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과거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인도와 능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적 입장에 대해서는 언스트 체인(Sir Ernst Boris Chain, 1906-1979)이 언급한 언명에 한번 귀 기울여 보세요. 그는 페니실린(penicillin)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과 함께 1945년에 의학/생리학 분야 노벨상(The 1945 Nobel Prize in Medicine & Physiology)을 수상한 생화학자입니다.

 

“나는 믿는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진 위대한 신성한 선물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우주의 신비를 이해하지 않고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그 신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믿는 능력논리적 추론 능력만큼이나 인간 정신의 특징이자 본질적인 속성이기에, 과학적 접근방식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보완하고 인간 정신이 이 세상을 윤리적이고 의미 있는 전체로 통합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의 우월성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깨닫게 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즉 음악이나 시각 예술을 통해, 자기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어떤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통해, 또는 자연이 드러내는 기적적인 현상이나 합목적성을 바라봄으로써 깨닫게 된다.” (I consider the power to believe to be one of the great divine gifts to man through which he is allowed in some inexplicable manner to come near to the mysteries of the Universe without understanding them. The capability to believe is as characteristic and as essential a property of the human mind as is its power of logical reasoning, and far from being incompatible with the scientific approach, it complements it and helps the human mind to integrate the world into an ethical and meaningful whole. There are many ways in which people are made aware of their power to believe in the supremacy of Divine guidance and power: through music or visual art, some event or experience decisively influencing their life, looking through a microscope or telescope, or just by looking at the miraculous manifestations or purposefulness of Nature.) [로널드 W. 클라크, “The Life of Ernst Chain: Penicillin and Beyond”(1985), 143쪽]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백안시하면서 오로지 이성만을 존중하고, 그것이 과학적 방식과 상반된다고 여기며, 윤리와 의미라는 요소는 이 세상 속에서 불필요하다고 인식하는 이들이 숙고해야 할, 권위 있는 과학자의 고언입니다. 신앙은 이성만큼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이기에, 과학적 방식을 보완해 주고 윤리적이고 의미 있는 세계를 형성해 가는 데  주효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이란 상수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합니다. 그것은  이성을 통한 논리적 추론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창조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관계를 통해서만 그 신비로운 세계를 온전히 체험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의미를 이 글 속에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의 우월성을 믿을 수 있는 능력’으로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오직 진선미를 탐구하는 데 목적을 둔 호기심만 있다면, 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란 능력을 체험할 길이 우리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이 능력을 계발하고 향상해 감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갑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