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라는 구절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언급한 소중한 선언입니다(사도행전 20:35). 사복음서에는 똑같은 표현이 등장하진 않지만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특별히 계시한 것일 수도 있고, 주고 나누는 것을 상찬 하신 예수님의 뜻을 풀어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조를 정면으로 거스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고 번 돈도 재테크를 통해 더 많은 돈을 벌면 벌수록 칭송을 받는 사회 속에 살고 있으니까요. 받는 게 복이 있지 어떻게 주는 게 받는 것보다 더 복이 됩니까? 이 말씀을 믿는다고 고백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세상 사조를 실천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갈등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상)라는 구절을 좋아하는 성도들은 주는 것이 복된 이유가 나중에 더 많이 받기 때문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의 문맥을 묵상해 보면 그 의미는 그 하반절이 언급하고 있는 대로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즉 "심는 대로 거둔다"라는 보편적 원리와 유사한 뜻일 것입니다. 이 구절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선언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만일 뒷 구절의 이유가 주면 더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결국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말과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 사조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그런 선언을 하실 리가 없겠지요. 당신께서는 그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문제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복"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주님께서 의도하신 “복”이 어떠한 것인지 한 번 살펴보는 게 필요하겠습니다. 존 스토트에 의하면 마태복음 5장의 팔복(八福=the Beatitudes)은 균형 잡힌 기독교인의 성품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그것들이 별도로 분리된 여덟 개의 제자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제자 그룹의 여덟 가지 자질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제자는 마음이 가난한데 다른 제자는 긍휼히 여기며 다른 어떤 제자는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마음이 가난하고 긍휼히 여기며 의를 위해 핍박받는 동일한 제자 그룹을 의미합니다. “복이 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인 ‘makarios'가 "행복하다"라는 의미를 띠고 있긴 하지만 이 팔복 문맥에서 이 단어를 단순히 제자들의 주관적인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오해라고 지적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제자들이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즉 ‘행복하다’는 느낌)를 선언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제자들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그 이유로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즉 ‘복 된’ 존재)를 선언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팔복의 자질들이 주님의 제자 모두에게 적용되듯이 그 팔복의 구체적인 내용도 결국 그 제자들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봅니다. 그 여덟 가지 자질들이 주님의 제자,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의 책임을 가리킨다면 여덟 가지 복의 내용도 그들의 특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이 참되다고 믿는다면 그 복이 가리키는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복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심령이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림, 긍휼히 여김, 마음이 청결함, 화평하게 함 및 의를 위해 핍박 받음, 이 모든 것들이 진정한 복으로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이런 복의 개념이 현대 사조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도무지 불가합니다. 존 스토트가 자신의 산상수훈 강해집 이름을 “기독교 반체제 문화”(Christian Counter-Culture)라고 명명한 게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새롭게 여신 하나님의 나라는 전복(顚覆)된 가치관을 가진 세계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대신 자신의 영적 파산 상태를 인정하는 겸허한 마음을 복되다고 합니다. 자신의 긍정적인 측면을 극대화하고 세상의 진보를 절대화하는 정신 상태 대신 자신의 죄성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죄악으로 인한 세상의 고난을 보며 가슴 치는 심령을 복되다 합니다. 타인의 것을 강탈하는 자세 대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순복 하는 자세를 복되다 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태도 대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사모하고 당신을 기쁘시게 하는 성품을 함양하며 사회적인 의를 진전시키려는 열망을 복되다 합니다. 타인을 억압하는 삶의 방식 대신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삶의 자세를 복되다 합니다. 위선으로 얼룩진 삶을 호도하는 삶의 방향 대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투명한 삶의 방향을 복되다 합니다. 타인과 충돌하거나 그 충돌의 원인이 되는 삶의 자세 대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평화와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를 복되다 합니다. 타인을 적대시하고 핍박하는 행태 대신 핍박받는 것이나 고난 받는 것을 참된 제자도의 표지로 여기는 태도를 복되다 합니다.
이런 배경을 두고 다시 한번 사도행전 20:35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선언을 읽어 봅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받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것이 세상 사조라면 주는 것을 복으로 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라는 것이지요. 주는 것이 어떻게 복이 될 수 있을까요? 팔복 표현 방식을 활용해 보자면, “주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의 온전한 성품을 맛볼 수 있을 것임이요”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당신의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 클라이맥스가 성육신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도 하나님처럼 평생을 주시는 삶으로 일관하시다가 급기야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상에서 우리 위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의 끝 날에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누가복음 12:31, 32)
주님의 삶을 좇아 당신의 사랑으로 “기꺼이 주는” 사람은 그 주님의 온전한 성품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권면하는 헌금이나 헌물은 반드시 ”마음이 동한“ 자들과 “자원하는 심령"으로 준비한 자들만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린도후서 9:7)라는 원리는 주님께서 친히 몸소 본을 보여 주신 신약 시대만의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도 일관되어 흐르던 사상이었습니다. 예컨대 성막을 만드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일을 위해 ”마음에 원하는 자“가 당신께 드릴 것을 ”택하여“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출애굽기 35:5). 그리하여 백성들이 성막에 쓰일 물품들을 가져오기 시작하는데 결국엔 너무 많이 가져와서 모세가 더 이상 헌물 하지 말 것을 명령하는 단계까지 갈 정도였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35:21,22)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35:29)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36:3-6)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면 얼마나 주어야 할까요? 이 헌금하는 면에서 독보적인 본을 보여 준 한 인물의 지침을 한번 상고해 보겠습니다. 바로 C. S. 루이스입니다. 평생 30권 이상이나 되는 책을 집필해서(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됨) 현재까지 수백만 권이나 팔리는 인기를 누린 그는 생전에도 출판으로 인한 수입이 상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선물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견지함으로써 자신의 수입 중 2/3를 헌금했습니다. 자신의 소유와 헌금에 대해서 그는 적절한 헌금의 양이란 “여유 있게 줄 수 있는 정도보다 조금 더 주는 것”(the only safe rule is to give more than we can spare)이라는 원리를 붙들었습니다. 이 원리는 그의 베스트셀러인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주어야 하는지는 일괄적으로 정해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안전한 기준은 우리가 여유 있게 줄 수 있는 정도보다 조금 더 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수입 수준이 같은 사람들이 안락한 생활과 사치품과 오락 등에 지출하는 만큼 우리도 그런 일에 돈을 지출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주는 양이 너무 적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자선에 쓰는 비용 때문에 가계가 빠듯해지거나 제한받는 일이 전혀 없다면 너무 적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고 싶지만 자선에 돈을 쓰느라 못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자선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친척이나 친구나 이웃이나 회사 직원들의 특별한 사정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강압적으로 통보해 두신 것들(which God, as it were, forces upon your notice)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도우려면 여러분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거나 위험에 빠지는 일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I do not believe one can settle how much we ought to give. I am afraid the only safe rule is to give more than we can spare. In other words, if our expenditure on comforts, luxuries, amusements, etc. is up to the standard common among those with the same income as our own, we are probably giving away too little. If our charities do not at all pinch or hamper us, I should say they are too small. There ought to be things we should like to do and cannot do because our charitable expenditure excludes them. I am speaking now of "charities" in the common way. Particular cases of distress among your own relatives, friends, neighbours or employees, which God, as it were, forces upon your notice, may demand much more: even to the crippling and endangering of your own position.)
그의 경우는 여유 있게 줄 수 있는 정도보다 조금 더 주는 것이 자기 수입의 2/3(66%)였던 셈입니다. 30대 초부터 65세로 이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평생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책과 방송과 방문을 통해 그 복음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학교 업무로 인해 그토록 분주한 교수 생활 가운데서도 매주 화요일에 절친들과 함께 신앙과 학문의 세계를 토의하고, 매일 시간을 내어 전 세계 곳곳에서 답지한 편지들에 대해 일일이 답장해주는 세심한 섬김을 수행했습니다. 제1차세계대전 중에 전사한 친구와 한 약속 때문에 그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평생 모시기도 했습니다. 삶의 전 부면에서 그리스도의 면모를 구현하며 살았던 그의 삶을 다시 돌아보면서 그의 헌금의 태도와 연관하여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가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현시하면서 그토록 풍성한 삶을 누린 것이 바로 그가 “여유 있게 줄 수 있는 정도보다 조금 더 주는 헌금”을 지속적으로 수행한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루이스는 앞에서 논의한 대로, “주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의 온전한 성품을 맛볼 수 있을 것임이요”의 완벽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루이스의 구절을 접하면서 헌금의 양에 대한 그의 견해도 경이로웠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강압적으로 통보해 두신 (친척, 친구, 이웃 및 회사 직원들의) 특별한 사정들”(Particular cases of distress among your own relatives, friends, neighbours or employees, which God, as it were, forces upon your notice)에 대한 그의 소견도 도전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거나 위험에 빠지는 일을 감수해야 할” 정도의 헌신이 요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사도 바울의 본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의 문맥 속에 나오는 본입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3-35)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나눈 마지막 말씀인 이 문맥에서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헌금의 원리를 실천했는지를 나누고 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리더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팀원의 필요를 채웠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이런 사례를 우리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자연스럽게 목도할 수 있을까요? 리더가 손수 돈을 벌어 자기 팀원들의 필요를 감당하는 사례 말입니다. 어느 교회 안에서 이런 사례를 볼 수 있나요? 아마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우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손수 돈 버는 일을 하지 않지요. 교회에서 급료를 지급받는 상황에서도 담임 목사가 자신의 필요와 다른 목회자들의 필요를 살피면서 그 급료를 “대승적으로” 나누려는 경우는, 제가 과문한 탓인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담임 목사와 부목사와 강도사와 전도사 간에 급료 상의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는 게 우리나라 교회의 엄연한 실정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담임 목사가 과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설교를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도들이 과연 그 설교를 아멘으로 화답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해갈 수 있을까요? “본”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이런 상황은 선교 단체 내에서도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세미풀링 시스템’(선교사가 모금하고 선교본부가 재정을 집행하는 제도)이 운용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선교 헌금 계좌에 들어 있는 금액을 다른 선교사가 한시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다는 면에서 재정적으로 어려운 동료를 돕는 경우가 많이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이 부담스러워 이런 시스템을 운용하지 않는 선교 단체로 가는 경우도 보았으니 이 정도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재정 면에서 좀 여유 있는 선교사가 그렇지 못한 선교사에게 자기 재정을 나누기는 어렵더라도, “대승적으로” 새로운 재정 공급원을 소개해주거나 중개해주는 경우는, 제가 과문한 탓인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더욱 우러러보게 되는 이유입니다.
C. S. 루이스는 앞에서 언급한 헌금의 원리 다음 대목에서 헌금의 가장 큰 장애물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에게 자선의 가장 큰 장애물은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돈 욕심보다는 두려움-생활의 안정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이 유혹이 될 때가 자주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또 때로는 자부심이 자선의 방해꾼이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겉으로 후하게 보이는 일(팁을 주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는 돈을 많이 쓰면서도 정작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덜 쓰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For many of us the great obstacle to charity lies not in our luxurious living or desire for more money, but in our fear—fear of insecurity. This must often be recognised as a temptation. Sometimes our pride also hinders our charity; we are tempted to spend more than we ought on the showy forms of generosity (tipping, hospitality) and less than we ought on those who really need our help.)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헌금의 원리를 가장 방해하는 것은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은 헌금의 최대 적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불신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불신에 대한 해결책은 당신의 나라를 구하는 자들에게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장차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1, 32) 결국 헌금의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의 문제라는 게 드러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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