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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心)-마음을 따르라

환상적인 초록 불빛에 자신을 던진 로맨티시스트,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3)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7. 20.

환상적인 초록 불빛에 자신을 던진 로맨티시스트,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3)

-서부와 동부의 문제-

닉의 마지막 고백 속에 이 작품의 주제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결국 서부의 이야기였다는 것”(this has been a story of the West, after all)입니다. 초록 불빛을 좋다 간 개츠비와 그의 지지자였던 닉뿐 아니라, 더러운 먼지의 부유물에 속하는 톰과 데이지와 조던도 모두 아우르는 “서부인들”(Westerners)의 이야기였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모두 중서부 출신들로서, 동부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결함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동부의 세계는 서부 출신들을 아주 흥분시키기도 하고 서부 지역 도시들보다 훨씬 우월하긴 했지만, 그곳은 언제나 뒤틀린 구석(a quality of distortion)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닉은 이 동부의 세계, 특히 웨스트에그의 세계를 엘 그레코가 그린 밤 풍경과 같다고 여깁니다. 음산한 하늘과 광택 잃은 달이 이상하게 생긴 집 수백 채 위에 걸려 있는데, 예복을 입은 남자 네 명이 야회복을 입고 손에 싸늘한 빛을 띠는 보석을 낀 채 술에 취한 여자를 들것에 싣고 가는 장면이지요. 엄숙한 모습으로 그들이 어떤 집에 들어가지만, 잘못 찾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여자의 이름도 알지 못했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지요. 개츠비가 죽은 후 닉은 이런 환상적인 장면으로 인해 꿈에서나 깨어 있는 의식 속에서 계속 괴롭힘 당합니다. 이런 동부의 모습이 자기 시력으로는 어떻게 바로잡을 수 없을 만큼 뒤틀려 버린 채 자기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지요.

 

엘 그레코의 그림은 개츠비의 집이 대표하는 웨스트에그에서의 삶의 실상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개츠비의 집에는 여름이면 오후 시간부터 밤까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금요일부터 주일까지는 아침부터 자정이 넘도록 찾아오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여기에다 2주에 한 번씩 대형 파티가 열렸습니다. 놀라운 점은 방문객 대부분이 개츠비의 초대를 받지도 않고 그냥 와서 먹고 마시고 즐기다 돌아갔다는 점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함께 모인 손님들이 단숨에 흩어지기도 하고 다시 모이는 것은 예사고, 다른 사람을 소개받고도 금방 누군지 잊어버리기도 하고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은 채 신이 나서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잦았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요. 그야말로 “끊임없이 바뀌는 불빛 아래 변화무쌍한 얼굴들과 목소리와 색깔”(the sea-change of faces and voices and color under the constantly changing light)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즐기는 교제의 현장이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고급 자가용을 타고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한데 모이니, 채권이나 보험이나 자동차를 팔려는 젊은 영국인들이 옷을 짝 빼 입고 와서는 자기 고객들을 물색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이들은 단 한 명[개츠비의 서재에서 서가를 둘러보던, 올빼미 안경을 쓴 남자]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개츠비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처럼 서로가 누구인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그저 일시적인 환락에 취하는 데만 몰두했을 뿐이지요. 자기의 부와 인기를 과시하고,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며, 호화로운 시설이 제공하는 온갖 특혜를 누리는 일에만 분주했을 뿐, 누가 쓰러지거나 죽어도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뒤틀린 동부 세계의 실상입니다.

 

개츠비 집을 드나들던 이 사람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요? 닉이 4장에서 밝힌 상세한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개츠비가 살고 있던 롱아일랜드 섬의 웨스트에그뿐 아니라 이스트에그와 맨해튼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뉴욕이란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일상을 영위한 뉴욕이라는 곳은 어떤 곳일까요? 닉이 개츠비와 함께 뉴욕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하러 갈 때 퀸스보로 다리[롱아일랜드 섬과 맨해튼을 이어주는 다리]를 건너는 동안 등장하는 인상적인 묘사가 한 가지 있습니다. 뉴욕과 맨해튼 곳곳에 솟아 있는 빌딩에 대한 은유입니다.

 

“거대한 다리 위에서는 햇빛이 들보 사이로 움직이는 자동차들 위로 끊임없이 어른거렸고, 강 건너로는 하얀 각설탕 덩어리 같은 도시가 솟아 있었다. 바라건대 모두가 냄새나지 않는 깨끗한 돈으로 세워졌으면 하는 생각을 했던 도시였다. 퀸스보로 다리에서 바라보는 뉴욕은 언제나 처음 보는 도시 같았고, 여전히 이 세상의 모든 신비와 아름다움에 대한 터무니없는 첫 약속을 간직하고 있었다.”(Over the great bridge, with the sunlight through the girders making a constant flicker upon the moving cars, with the city rising up across the river in white heaps and sugar lumps all built with a wish out of non-olfactory money. The city seen from the Queensboro Bridge is always the city seen for the first time, in its first wild promise of all the mystery and the beauty in the world.)

 

즉 뉴욕이란 곳은 언제나 신선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도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비와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엄청난 첫 약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현장입니다. 곳곳에 각설탕 모양으로 건설된 화려한 건물들은 죄다 돈이 제공해 주는 달콤한 유혹을 상징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그 돈은 모두 구린 돈에 불과합니다. 그 퀸스보로 다리를 넘어가면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으며 심지어 “개츠비 같은 인물의 존재도 특별히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Even Gatsby could happen, without any particular wonder.)라고 닉이 고백하는 이유입니다. 사실상 뉴욕에서는 월드 시리즈를 조작한 울프심과 같은 인물들이 판을 치면서 온갖 불법적인 일들을 자행합니다. 개츠비가 그의 동업자이니 그도 숱한 악행에 연루되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밀주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은 자인하기도 했지요. 톰이 머틀과 외도하는 곳도 뉴욕의 한 아파트입니다. 개츠비와 톰이 데이지를 사이에 두고 설전을 벌이는 곳도 뉴욕의 플라자 호텔입니다.

 

돈과 쾌락을 탐하는 도시 뉴욕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한편으로 고독을 느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때때로 나는 마법에 걸린 듯한 대도시의 황혼 녘에 주체할 수 없는 고독감을 느꼈고,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가령 식당에서 외롭게 저녁을 먹을 시간을 기다리면서 쇼윈도 앞에서 서성대는 가난한 젊은 사무원들, 밤과 삶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들을 낭비하며 어스름 속을 헤매는 젊은 사무원들에게서 말이다.” (At the enchanted metropolitan twilight I felt a haunting loneliness sometimes, and felt it in others—poor young clerks who loitered in front of windows waiting until it was time for a solitary restaurant dinner—young clerks in the dusk, wasting the most poignant moments of night and life.)

 

즉 닉뿐 아니라 젊고 가난한 사무원들이 뉴욕에서의 일과를 마친 후에 ‘혼밥러’로 저녁 식사시간을 기다리면서, 쇼윈도 앞에서 하릴 없이 서성이기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닉은 황혼 녁 그 시간을 ‘밤과 삶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라고 지적합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저녁이 있는 삶을 만끽하는 시간”이겠지요. 그런데 이 시간이 외롭다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이전투구의 장 속에서 고군분투한 것도 모자라, 황혼 녘이 되어도 여전히 외로움을 느끼다 혼자 밥 먹어야 하는 현실을 체험하는 게 뉴요커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요약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동부는 언제나 뭔가가 뒤틀려 있는 곳이었습니다. 인간 공동체의 존재 목적이 실종된 채, 돈과 쾌락과 인기를 우상으로 삼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외로운 곳이었습니다. 닉이 동부 혹은 뉴욕을 자기의 고향인 서부와 대비하는 장면에서, 가인이 쫓겨난 곳인 ‘에덴의 동쪽’(east of Eden, 창세기 5:16) 혹은 ‘실낙원’이 떠오른 게 저 혼자만일까요? 이 세상의 모든 신비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엄청난 첫 약속을 저버린 곳, 구린내 나지 않는 돈으로 건설되기 소망한 매혹적인 빌딩들이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성지로 둔갑해 버린 곳이 바로 뉴욕이었던 것이지요. 늘 어딘가 일그러진 모습으로 존재하는 곳이어서, 닉이 아무리 다시 바로 보려고 해도 너무나 뒤틀려 버린 곳이라는 점을 재확인할 뿐이었습니다. 나중엔 그가 잠자는 동안에도 뉴욕은 악몽으로 다가와 자기를 괴롭혔습니다. 결국 귀향을 선택하게 되지요. 그가 대학 시절 크리스마스 시즌에 기차를 타고 동부에서 서부 고향으로 향할 때, 감격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그 서부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달았던 것”(unutterably aware of our identity with this country)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채권 사업을 하러 뉴욕으로 떠날 때는 “우주의 초라한 변두리”(the ragged edge of the universe) 같았던 자기의 고향이, 이제는 도리어 예전에 자기가 인식했던 대로 “세계의 활기찬 중심지”(the warm centre of the world)라는 것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

이 작품 속에 깊이 내재된 주제 한 가지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입니다. 우선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개츠비와 데이지와의 관계입니다. 경제력의 차이가 낳는 차별과 배제의 사례입니다. 데이지는 개츠비가 ‘우아한’(nice) 여자로 인식한 첫 번째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이전에도 온갖 수완을 발휘해 그녀와 같은 계층의 사람들과 만나기를 시도했지만, “그들과의 사이에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철조망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always with indiscernible barbed wire between.) 개츠비가 그녀를 만날 때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경제적인 부가 가둬 보호해 주는 젊음과 신비(the youth and mystery that wealth imprisons and preserves), 그 많은 옷이 풍기는 신선함(the freshness of many clothes, and of Daisy),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데이지가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은처럼 빛을 내뿜는다는 사실”(gleaming like silver, safe and proud above the hot struggles of the poor.)이었습니다. 그래서였겠지요. 그녀와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그녀와 같은 계층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그녀를 보살펴 줄 재력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믿도록 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닉을 만나서도 처음에는 자기가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부잣집 출신이라는 점을 부각하면서 신분 세탁을 하지요. 그렇지만 당시의 개츠비는 자기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가정의 재력도 없었거니와, 군인으로서 세계 어디에선가 별안간 목숨이 사라지게 될지 모르는 무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지요. 그가 평생 이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것은 그것이 자기를 데이지와 갈라놓았던 결정적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톰이 보여주는 차별과 배제의 사례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한 가지는 학벌 문제입니다. 톰은 자기가 예일 출신인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대학교 풋볼 선수로 이미 명성을 날렸기 때문에 그 후로는 모든 것이 내리막길처럼 보이는 인물이었습니다. 자기 학벌을 훈장으로 생각하는 그는 개츠비를 만나기 전에는 그가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는, “뉴멕시코 주에 있는 옥스퍼드겠지”라며 비웃는 속물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를 직접 만나서도, 그가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라는 소문에 흠집을 내려고 시도합니다. 그렇지만 개츠비는 담담하게 전쟁 후에 정부에서 일부 장교들에게 영국이나 프랑스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덕에 자기가 옥스퍼드에서 5개월 간 공부할 기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고 응대하지요.

 

다른 한 가지는 인종 문제입니다. 닉이 결혼한 데이지의 집을 처음 찾아갔을 때 톰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말을 조던에게 듣습니다. 이런 현실을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톰은 당시에 읽고 있던 책 한 권(“유색 인종 제국의 부상”[The Rise of the Colored Empires]) 때문에 열을 냅니다. 과학과 예술과 같은 세계 문명을 만든 것은 북유럽 백인종이라면서, 자기들이 경계하지 않으면 문명이 완전히 끝장나 버린다고 역설합니다. 닉은 자기가 바람피우고 있다는 사실보다 책 한 권 때문에 심란해하고 있는 톰이 역겹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처롭기도 했습니다. 예전보다 더 강렬하게 자기의 자족감을 표출하면서도 뭔가 결핍된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개츠비와 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톰은 결혼 제도에 대해 한마디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정생활과 가족 제도를 비웃고 있는데, 이러다가는 모든 걸 다 팽개쳐 버리고 백인하고 흑인이 결혼하려고 들 거야.” (Nowadays people begin by sneering at family life and family institutions, and next they’ll throw everything overboard and have intermarriage between black and white.) 자기가 마치 “문명의 마지막 보루에 홀로 서 있다”(standing alone on the last barrier of civilization)는 듯이 말했지요.

 

이 작품이 단순히 개츠비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작품 곳곳에 배어 있는 이런 차별과 배제의 문제가 미국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데 있습니다. 격심한 빈부 격차, 학벌 계급화 현상, 인종 차별 문제들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옛날 롱아일랜드 섬을 탐색하러 온 네덜란드 선원들의 눈에, 그 섬은 그야말로 “신세계의 싱그러운 초록색 가슴”(a fresh, green breast of the new world)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꿈 중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꿈”(the last and greatest of all human dreams)을 성취할 수 있는 곳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로 태어난 것 자체만으로 피차 존중해 주고 섬겨 주는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꿈이 있을까요? 미국은 이런 꿈을 이룰 수 있을 곳으로 기대된 마지막 대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그 꿈은 요원하기만 했습니다. 피츠제럴드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은 결코 떠오르지 않은 달에 대한 이야기”(America is the story of the moon that never rose.)라고 언급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을 보며 그는 실망했습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 자수성가한 전쟁 세대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중고 세련미”(2nd hand sophistication)가 넘쳐 눈부시긴 한데, “무모하고 얄팍하고 냉소적이고 성급하고 난폭하며 무지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너무 퇴폐하여 그 자녀들은 거의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저주받은 상태에 놓여있다.”(America is so decadent that its brilliant children are damned almost before they are born.)라고 솔직하게 털어 놓은 그의 속내는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유령들이 꿈을 들이마시며 방황하는 새로운 세계-

닉이 개츠비가 살해당하기 직전에 품었을 법한 상념을 소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머틀의 교통사고 이후에 오랜만에 물놀이를 하면서 전화를 기다리던 개츠비는 결국 그 전화에 대해 개의치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가 “자신이 간직해온 과거의 따뜻한 세계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he had lost the old warm world)라고 느끼면서, 동시에 새로운 세계가 등장했음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는 “현실감이 없으면서 물질적인 새로운 세계, 가엾은 유령들이 공기처럼 꿈을 들이마시며 되는대로 이리저리 떠도는 새로운 세계.”(A new world, material without being real, where poor ghosts, breathing dreams like air, drifted fortuitously about...)였습니다. 그 세계의 주체인 ‘유령들이 이리저리 떠돈다’라는 표현을 접하면서 떠오른 표현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닉이 개츠비 사건을 경험하고 난 후 한동안 인간의 슬픔과 환희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제시한 내용 중에 등장하지요. 그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삼은 것들, 즉 개츠비의 꿈에 뒤이어 더러운 먼지가 떠올린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it is what preyed on Gatsby, what foul dust floated in the wake of his dreams that temporarily closed out my interest in the abortive sorrows and short-winded elations of men.) 결국 신세계에서 떠도는 유령들과 개츠비의 꿈으로 인해 더러운 먼지 속에 그 정체가 드러난 존재들은 서로 깊은 상관이 있는 셈입니다. 유령 같은 존재인 그들은 누구일까요?

 

먼저 데이지를 지목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그녀는 “하얀 궁전 안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왕의 딸이자, 황금의 아가씨”(high in a white palace the king’s daughter, the golden girl)였습니다. 그녀는 개츠비가 전쟁터를 전전하다 정부의 착오로 귀국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여러 남자들과 교제를 만끽하던 중 주저하지 않고 톰을 선택합니다. 그녀에게 개츠비는 그저 막강한 재력으로 자기를 평생 편안하고 안락하게 모실 수 있는 후보들 중 한 사람에 불과했으니까요.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사랑의 언약을 한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과감하게 외도하는 남편을 방치하면서도, 개츠비가 등장한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그와 입술 키스를 감행하는 당돌함을 보세요. 남편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는 그녀의 어정쩡한 태도는, 자기가 져야 할 책임도 마다하는 행동으로 발현되지요. 개츠비에게 자신의 과오를 전가한 채 그냥 도주해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윌슨의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하지요. 유령 같이 떠도는 그녀의 유한마담 인생은 다음의 외침에서 그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오늘 오후에 뭘 하지요? (What’ll we do with ourselves this afternoon?) 그리고 내일은, 그리고 또 앞으로 삼십 년 뒤에는?(and the day after that, and the next thirty years?)”

 

다음은 톰 뷰캐넌입니다.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대학 시절인 스물한 살에 유명 풋볼 선수로서 인생의 정점을 찍은 후에 모든 게 흐지부지 내리막길을 걷는 듯한(everything afterward savors of anti-climax) 인물입니다. “무자비한 육체”(a cruel body)에다 “거만한 태도”(a supercilious manner)와 “아버지 같은 고자세로 경멸하는 기미”(a touch of paternal contempt)를 띤 목소리까지 가세하여 대학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싫어한 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이미 살펴본 대로, 학벌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고, 유색 인종에 대한 편견에 찬 의견을 과학적이라고 신봉하는 인종 차별주의자라는 게 조금도 어색하지 않지요. 이런 환경과 전력 때문에라도 그는 “다시는 맛볼 수 없는 풋볼 경기의 극적인 흥분을 조금은 애타게 좇으며 영원히 떠돌 인물이었습니다.” (Tom would drift on forever seeking, a little wistfully, for the dramatic turbulence of some irrecoverable football game.) 여기에도 ‘떠돈다’는 단어가 등장하지요. 데이지로 만족하지 않고 여러 여자들 사이를 떠돌던 중, 윌슨의 부인인 머틀과 관계를 맺다가 그녀가 데이지에게 죽는 사달이 나지요.

 

닉은 데이지와 톰을 한데 묶어 최종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톰과 데이지, 그들은 경솔한 인간이었다.”(They were careless people, Tom and Daisy) 물건들이나 심지어는 생명 있는 존재들을 박살내고서도 자기들의 돈이나 “엄청난 무관심”(vast carelessness) 속으로 둘이 함께 물러난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쓰레기를 완전히 치우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데이지는 자기가 운전하다 머틀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을 개츠비에게 덮어 씌운 엄청난 무관심을 발휘했습니다. 총을 쥐고 있는 윌슨에게 사고 차량 주인이 개츠비라는 것은 일러주었으면서도, 경찰이나 개츠비에게는 조금도 언질을 주지 않은 톰도 그녀에 못지않은 엄청난 무관심의 달인입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의 모본입니다. 닉이 톰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문득 마치 어린아이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야말로 그와 데이지는 어린 아이와 같은 어른 유령들이었던 것이지요.

 

어른 유령 명단에 조던 베이커가 빠질 수 없습니다. 그녀는 데이지의 오랜 친구로서 아마추어 골퍼입니다. 냉소적인 성향을 띠면서도 허세를 떠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는 인물입니다. “세상을 향해 쳐들고 있는 따분하고 거만한 얼굴”(The bored haughty face that she turned to the world)이 그녀의 전매특허이지요. 한 마디로, “그녀는 어떻게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직했습니다.”(She was incurably dishonest.) 자신이 불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는 자연스럽게 거짓을 지어내곤 했습니다. 예컨대, 자기가 빌려 온 자동차의 지붕을 열어 놓아 비를 맞게 한 후에 나중에 거짓말 해대기도 하고, 처음 참가한 중요 골프 대회에서 사람들의 눈을 속인 혐의가 드러나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요. 준결승 때 자기 골프공이 치기 어려운 곳에 떨어지자 슬쩍 치기 쉬운 곳으로 옮겨 놓은 혐의였지만, 스캔들로까지 비화되지 않은 채 묻혀 버립니다. 당시의 캐디와 유일한 목격자를 매수한 정황이 물씬 풍겼지요.

 

그렇지만 신세계의 유령에 걸맞은 그녀의 면모는 운전할 때 드러납니다. 닉을 태우고 노동자들 곁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그만 흙받기(fender)가 한 사람의 코트 단추를 건드리고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닉이 그녀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비켜갈 거다.”(They’ll keep out of my way.)라고 했다가, 급기야 “사고가 나려면 양쪽이 다 실수를 해야 한다.”(It takes two to make an accident.)라고 응대합니다. 닉이 기가 막혀 “만약 당신처럼 부주의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요?”(Suppose you met somebody just as careless as yourself.)라고 따지자,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야지요. 난 부주의한 사람을 미워하거든요.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 있지요.”(I hope I never will, I hate careless people. That’s why I like you.)라는 기상천외한 답변을 내어 놓습니다. 이 대화가 인상적이었는지 데이지는 나중에까지 닉의 답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즉 닉이 “부주의한 운전자는 또 다른 부주의한 운전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안전하다”(a bad driver was only safe until she met another bad driver.)라는 취지로 자기에게 말했다는 것이지요. 여기 또 경솔한(careless) 사람 한 명 더 추가합니다.

 

이상에서 과거의 따뜻한 세계를 대체한 신세계에서 떠도는 유령들의 면모를 데이지와 톰과 조던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개츠비가 품은 꿈이 아니었다면, 더러운 먼지 속에 잠복해 있던 그들의 정체가 드러날 기회가 없었겠지요. 그 정체를 분석해 보니 그들은 한결같이 돈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는 꿈을 꾸고 실행하는 일에는 용의주도한 데 반해, 타인의 사정을 돌아보거나 타인의 필요를 섬기는 일에는 극도의 무관심과 엄청난 부주의와 비범한 경솔함을 발휘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어른 유령들과 아이 유령들이 온갖 꿈을 들이마시며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신세계는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 있습니다.

 

-시대의 거울, 소설-

김욱동 교수에 의하면, 피츠제럴드는 자기 소설들의 주제가 남녀의 애정과 물질적 성공에만 지나치게 한정되어 있다는 비판에 자주 직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비판에 대해 자기를 변호한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맙소사! 그것이 나의 소재이고, 그것이 내가 다뤄야 하는 전부이다.”라고 밝혔으니까요. 즉 그는 소설가로서 자기가 다루어야 할 소재를 처음부터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덧붙여 소설가에게 가장 긴요한 자질은 ‘어떤’ 소재를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인생에서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소재인, 남녀의 애정과 물질적 성공을 택하여 가장 감동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소설 작품들로 구현했던 것입니다. 그 ‘어떻게’라는 차원을 하창수 작가는 ‘피츠제럴드 문학의 아니러니’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의 외연을 형성하는 것은 열정적인 연애 사건들과 화려한 상류 사회이지만, 소설의 전개 과정을 통해 부와 명예를 극단적으로 좇는 자들의 허상과 실체를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피츠제럴드가 참으로 추구했던 것이 상류 사회를 치장하는 부와 명예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벗겨진 상태에서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참된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피츠제럴드를 두고 ‘바보처럼 사랑을 추구했던(fool for love) 작가’라고 일컫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한편으로 100년 전 미국의 모습이나 현재의 미국의 상황이 마치 판박이처럼 똑같다는 사실에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경제적 불평등, 학벌 계급화, 인종 차별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 어느 한 가지 제대로 개선된 게 없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와 피츠제럴드에 의하면, “아메리칸드림”(American Dream)은 이미 백 년 전에 끝났습니다. 지금 지난 백 년을 복기해 보면, 미국 사회에 관한 한 이 작품과 작가의 평가와 예언은 그릇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사회가 이런 미국 사회를 선망하며 해방 이후 무려 80년간을 좇아온 것입니다. 돈과 쾌락과 사회적 위상을 우상으로 섬기고, 기득권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을 무참하게 제거하며, 사회적 공의와 보편적 가치를 백안시해 온 역사였습니다. 온 국민들이 자신들의 심신이 상하도록 돈을 추구하다 보니 어느덧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국민 어느 계층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헬조선’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 사회의 모습을 통해 우리나라의 현실을 성찰하게 해 준 피츠제럴드의 용감한 시대 비평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미국은 결코 떠오르지 않은 달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미국의 삶에는 오직 1막만이 있을 뿐 2막은 없다고 밝히는 데 작가적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처지를 돌이켜 보면서 독일의 소설가 귄터 그라스가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작가란 과거의 시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 사라져가는 시간에 거역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다. 발터 벤야민이 책은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위대한 개츠비는 수많은 페이지의 행간에서 멈추어 서서 깊이 묵상을 거듭했던 작품이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