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적인 초록 불빛에 자신을 던진 로맨티시스트,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2)
-초록 불빛을 쫓다 간 제이 개츠비-
<한 여인만 일편단심으로 사랑한 감성적 면모>
개츠비는 오직 한 여인만을 사랑하다 갔습니다. 장교 시절에 만난 데이지라는 부잣집 여성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녀와의 교제를 잠시 즐기다가 그냥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사랑을 얻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라의 부름을 받아 전쟁터에 나가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도 그는 그녀와의 재회만을 꿈꾸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빨리 귀국하려고 서둘렀지만, 무슨 행정 착오가 있었던지 정부는 그를 바로 귀국시키지 않고 옥스퍼드에 묶어 둡니다. 그 사이에 그를 기다리던 데이지는 여러 남자들을 섭렵하던 중에 톰 뷰캐넌이라는 부잣집 청년을 만납니다.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아우성치는 와중에, 멋진 풍채와 사회적 지위를 갖춘 톰이 자기 앞에 출현한 것이지요. 얼마간 갈등을 느꼈지만 안도감도 들어 옥스퍼드에 있는 개츠비에게 이런 사정을 알리고 결혼합니다. 이 사실조차도 개츠비를 단념시키지 못합니다. 그녀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로 자기 재력을 준비한 후, 그녀에게 다가갈 기회를 모색한 것입니다.
개츠비가 웨스트에그에 있는 그 대저택을 구입한 이유도 데이지 때문이었습니다. 맨해셋 만 건너편 이스트에그에 데이지가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닉이 목격한 대로 6월의 어느 날 밤에 개츠비가 자기 집에서 그토록 손을 뻗어 닿고자 했던 것은 하늘의 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꼬박 5년을 기다려 그 저택을 산 후에 그 집을 개방해서 밤이면 밤마다 불빛을 밝혀놓아 갖가지 뜨내기 부나비들을 끌어들인 이유도, 데이지가 한 번쯤은 우연하게 자기 파티에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그녀만을 사랑한 것처럼 그녀도 자기만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녀가 톰을 계속 사랑했다는 것을 그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톰과 개츠비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데이지는 톰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개츠비도 사랑했다고 고백합니다. 자기가 톰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덧붙이지요. 평생 그녀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개츠비는 이 사실을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데이지가 개츠비의 차를 몰다가 머틀을 치어 사망하게 한 후에 그가 취한 태도를 주목해 보세요. 자기가 그 차를 운전했다고 자백할 거라고 말하지요. 사람을 치고도 멈추지 않고 차를 몰고 가던 그녀, 남편에게도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아 개츠비가 그 사고를 낸 것으로 만들어 버린 그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날 전개된 논쟁 때문에 데이지가 혹시 톰에게 불미스러운 일을 당할까 봐 그 집 밖에서 그녀의 안전을 도모하느라 온밤을 새우면서 말이지요. 개츠비는 죽을 때까지도 그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다른 곳에 잠적해 있으라는 닉의 제안도 뿌리친 채, 그녀가 어떻게 할 작정인지 알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데이지가 남편과 함께 먼 여행을 떠나려고 준비하는 상황도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시 그도 자신이 “톰의 무자비한 악의 앞에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지면서 그 길고 은밀했던 광상곡 연주가 모두 끝났다”(“Jay Gatsby” had broken up like glass against Tom’s hard malice, and the long secret extravaganza was played out.)는 점을 깨닫고 있던 차였습니다.
한 여인만을 마음에 두고 평생 사랑한 개츠비의 면모는 칭송받을 만합니다. 요즘처럼 자유연애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그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현실을 수용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과거로 돌리려고 하는 개츠비의 시도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이런 면모는 원래 개츠비답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댄 코디 밑에 있을 때에도, “그는 습관적으로 술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for himself he formed the habit of letting liquor alone) 불법 도박사이자 밀주업자인 울프심조차도, “얼굴도 미남인 데다 나무랄 데 없는 신사야.”라고 개츠비에 대해 언급하거나, “그래, 개츠비는 여자들에 대해 퍽 조심스럽게 굴지. 친구 마누라는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해.”라고 덧붙일 정도였으니까요. 마치 스토아학파의 극기주의자(stoic)를 기억나게 해주는 면모이지요. 만일 개츠비가 스토아학파 인물 중 한 사람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조언에 주목했더라면, 그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비극은 잉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행동 하나하나로 삶을 빚어나가라. 그리고 그 행동들이 추구하려던 목적을 달성했을 때는 만족하라. 그런 삶을 사는 걸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정의와 절제 그리고 지혜를 추구한다면 그 어떤 걸림돌도 헤쳐 나갈 수 있다. 물론 어떤 일들은 외부의 방해로 실패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먼저 그 걸림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취할 수 있는 다른 행동이 있는지 판단한 후, 그 행동이 내 삶의 가치와 맞을 때는 즉시 실천하라."
즉 자기 절제하면서 정의롭고 지혜롭게 살아간다면 인생의 어떤 장애물도 극복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령 톰의 등장으로 데이지와의 결혼이 무산되는 장애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선 그 장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요. 다음으로 그 상황 속에서 자기가 변화시킬 수 있는 다른 행동이 있는지 모색하여, 그 행동을 즉시 실천해야 합니다. 데이지에게 다시 호소하여 톰을 포기하고 자기에게 오라고 하는 것은 개츠비가 견지해 온 인생의 가치와 맞지 않지요. 그러므로 그 행동은 삼가야 합니다. 그가 할 일은 자기 인생의 가치와 부합하는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8명의 자녀들(5남 3녀)을 잃고 아내마저도 35세에 요절하는 잔혹한 현실에 직면하면서도, 솔선수범의 리더십과 비범한 회복탄력성을 보여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고언(苦言)입니다.
<환상과 공상으로 점철된 심리적 면모>
개츠비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자기 계발에 힘썼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왔을 때, 닉에게 그가 어릴 때 갖고 있던 책 한 권을 보여줍니다. 그 책 뒤표지에는 1906년 9월 12일 계획표와 자기의 결심이 적혀 있었습니다. 오전 6시에 기상해서 운동하고 공부하다가 8시간 일을 하고 난 후, 스포츠와 웅변과 자세 습득 훈련을 하고 밤에는 발명에 필요한 공부를 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특정 장소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담배를 삼가고, 이틀에 한 번씩 목욕하고, 유익한 책이나 잡지를 매주 읽고, 매주 3달러씩 저축하며 부모님 말씀을 잘 들을 것을 결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반드시 출세할 아이로 믿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제임스 개츠(Gatz)로 태어난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상상의 세계에서는 자기 아버지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his imagination had never really accepted him as his parents at all.) 자기 앞날을 열어 줄 부자 댄 코디를 만났을 때 용의주도하게 자기 이름을 개츠비(Gatsby)로 바꾼 것으로 보아, 개츠비라는 인물은 “개츠가 만들어 낸 이상적인 모습에서 솟아 나왔습니다.”(sprang from his Platonic conception of himself) 즉 플라토닉적인 관념상으로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적을 패러디하여 자기 소명을 밝힙니다. 즉 마치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기 부모에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여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누가복음 2:49 난외주)라고 말씀하신 것 같이, 개츠비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아버지의 일’(His Father's business)에 간여하는 자라는 인식을 가졌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의 일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마가복음 10:45,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는 것이었으나, 그의 일은 “거대하고 세속적이며 겉만 번지르르한 어떤 멋진 존재를 섬기는 일”(the service of a vast, vulgar, and meretricious beauty)이었습니다. 열일곱 살에 이런 이미지를 형성하고는 생애 마지막까지 그것에 충실했습니다(to this conception he was faithful to the end).
이런 인생의 소명을 품고 그가 섬긴 첫 번째 대상은 댄 코디였습니다. 네바다의 은광과 몬태나 주의 동광 사업을 이끌던 백만장자이자, “미국 역사의 한 시기에 개척지의 창녀촌과 술집의 무자비한 폭력을 동부 해안에 이끌고 온 난봉꾼 개척자”였지요. 아마도 개츠비에게는 그가 바로 자기가 섬겨야 할 “거대하고 세속적이며 겉만 번지르르한 어떤 멋진 존재”였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매력을 상징하는 요트”(the yacht represented all the beauty and glamour in the world)가 개츠비의 눈길을 먼저 끌었을 테니까요. 댄에게 발탁된 후에 그의 수족처럼 지내다 그가 죽은 후에는 약속된 유산도 받지 못했지만, 개츠비는 이미 비범하게 적실한 교육을 받은 상태였기에 그저 희미한 윤곽을 띠던 존재에서 온전한 실체를 갖춘 남자로 성숙해 있었습니다. (He was left with his singularly appropriate education; the vague contour of Jay Gatsby had filled out to the substantiality of a man.) 개츠비가 다음으로 섬긴 대상이 바로 데이지였습니다. 일치감치 여자에 눈을 떠서 무지하거나 히스테리를 부리던 여자들을 경멸하던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품고 있던 자기 평생의 꿈과 비전과 자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사랑하게 된 여인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그의 입술이 닿자 그녀는 그를 위해 한 송이 꽃처럼 활짝 피어났고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는 성육신이 완성되었습니다.”(At his lips’ touch she blossomed for him like a flower and the incarnation was complete.)
전쟁이 그와 그녀와의 관계를 갈라놓았지만, 개츠비는 무일푼 전역 장교의 신분에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부를 쌓습니다. 그녀를 다시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가 느낀 사회 계층 간의 간격 혹은 벽을 극복하는 길이 부를 통해서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울프심을 만나 불법 도박, 채권 사업이나 밀주업과 같은 갖가지 불미스러운 일에 개입하면서 돈을 축적하기 시작하여, 결국 그녀가 사는 곳 건너편에 대저택을 마련하게 되지요. 개츠비는 자기가 그녀만을 사랑한 것처럼 그녀도 자기만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데이지가 톰과 결혼을 했지만 지금에라도 그녀가 그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하기만 하면, 자기와 함께 루이빌로 돌아가 그녀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완벽하게 5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닉이 과거는 결코 반복할 수 없는 법이라고 옆에서 일러주어도 그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입니다.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옛날과 똑같이 돌려놓을 생각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때 닉에게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가 되돌리고 싶은 것이 데이지를 사랑하는 데 들어간, 그 자신에 대한 어떤 관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he wanted to recover something, some idea of himself perhaps, that had gone into loving Daisy)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출발점"(a certain starting point)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동안 혼란스럽고 무질서해진 자신의 삶을 복기할 수 있다면, 자기가 회복하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츠비의 문제는 '자기에 대한 생각'의 문제이자, 한편으로 '자기가 품고 있는 생각'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활력을 가진 그의 환상”(the colossal vitality of his illusion) 때문이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매일 밤마다 잠들 때까지 환상에 환상을 더한 습관에 힘입어,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항상 환상적인 생각과 이상에 몰두해 오던 차였습니다. 사실상 데이지는 개츠비가 자기 가슴속에 품고 있는 꿈과 환상에 도무지 미치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뿐 아니라 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유령 같은 그의 가슴속에 쌓아 올린 꿈과 환상”(what a man will store up in his ghostly heart)에 부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츠비가 데이지와 함께 시간을 가지면서도, 그것이 지난 5년간 추구해 온 행복의 전부인가 하는 흐릿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a faint doubt had occurred to him as to the quality of his present happiness.”) 이유였습니다. 그러다가도 “물결처럼 파도치는 그녀의 음성이 열띤 흥분으로 그를 사로잡는”(voice held him most, with its fluctuating, feverish warmth) 순간, 그 목소리가 그에게는 “불멸의 노래”(a deathless song)가 되곤 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아무리 꿈꾸어도 부족하지 않을” 노래였기 때문입니다(because it couldn't be over-dreamed).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군분투하여 자수성가한 개츠비도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현 2020년대처럼 1920년대에도 우리나라나 미국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신분 상승한다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유력한 인물을 찾아내어 기회를 모색하는 것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비록 악명을 떨치던 댄 코디 같은 인물을 만나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아쉬운 대목이지만, 개츠비는 자기에게 맡겨진 과업을 잘 수행했을 뿐 아니라, 무식하거나 히스테리를 부리는 여성들도 멀리 하면서 습관적으로 술 마시는 것도 삼갔습니다.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절제를 실천하는 면모가 두드러졌습니다. 댄의 정부인 엘러 케이가 자기 몫인 유산까지도 가로채도, 그는 늠름하게 그 상황을 수용하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데이지와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고 그녀가 톰과 결혼을 하게 되자, 개츠비는 그녀에게 한 거짓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온갖 불법을 자행하여 부를 일굼으로써 대저택을 확보하여 과거의 시간을 되돌리려고 하지요.
이 문제의 시발점은 그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기보다는, 자신의 플라토닉적인 면모에 환상을 덧칠한 것이지요. 가난한 아버지를 무시하면서 자기를 하나님의 일을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아들로만 여긴 것은 몽상에 불과했습니다. 환상적인 자아상에 몰두하여 갖가지 몽상을 덧붙이다 보니, 그의 마음이 점점 유령처럼 변질되어 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댄 코디를 자기 인생을 드려 섬길 대상으로 모색한 것도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데이지를 자기 인생의 배우자로 선택한 것은 최대의 패착이었습니다. 댄은 개척지의 폭력을 동부 해안에 몰고 온 난봉꾼 개척자였습니다. 게다가 데이지는 돈과 쾌락과 일신의 안락만을 꾀할 뿐, 타인의 사정을 돌아보거나 타인의 필요를 섬겨주기는커녕,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일, 즉 살인까지도 책임지지 않고 타인에게 전가하는 무개념 유한마담의 전형이었습니다. “썩어 빠진 무리”(a rotten crowd) 중 대표주자이지요. 안타까운 개츠비의 모습을 접하면서,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가 외친 뼈아픈 자성의 목소리가 제 귀를 울립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난 나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거야.” (Till this moment I never knew myself.) 인생에서 직면하는 많은 문제의 근원은 자신에 대한 무지라는 점을 개츠비 스토리가 천명해주고 있습니다.
<희망에 대한 비범한 재능을 지닌 영성적 면모>
한 여인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한 것은 옳지만, 그녀에게 끝까지 집착한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집착은 개츠비의 그릇된 자아상에서 비롯된 환상과 몽상의 결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은 개츠비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면서 이렇게 언급하지요. “그들은 썩어빠진 인간들입니다. 당신은 그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나은 사람입니다.”(They’re a rotten crowd, You’re worth the whole damn bunch put together.) 더구나 이 개츠비 이야기를 총결산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래,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No—Gatsby turned out all right at the end.) 이 말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1장 서두에서 닉은 아버지에게서 배운 교훈 한 가지를 나눕니다. ‘타인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라. 타인이 자기 자신만큼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Whenever you feel like criticizing any one,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그 교훈을 따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다가와 자기 비밀들을 털어놓았습니다. 자기가 그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이런 태도를 취하니 정치적이라는 오해를 산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판단을 유보하면 무한한 희망이 생긴다”(Reserving judgments is a matter of infinite hope.)는 점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그러나 개츠비는 이런 판단 유보에서 예외였습니다. 그는 닉이 진심으로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인물(Gatsby, who represented everything for which I have an unaffected scorn.)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닉은 자기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합니다. “그래,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이 성공적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지속된 일련의 행동이라면, “개츠비에게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구석이 있었다”(there was something gorgeous about him)는 것입니다. 마치 먼 거리에서 발생한 지진을 감지하는 지진계처럼, 개츠비는 “인생이 약속해 주는 것들에 대해 고도로 민감한 감수성”(some heightened sensitivity to the promises of life)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맥 빠진 감수성”(flabby impressionability)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희망을 품는 비범한 재능”(an extraordinary gift for hope)이자 “낭만적으로 채비하는 자세”(a romantic readiness)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개츠비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서도 발견하지 못한 민감성이었다고 닉은 역설합니다. 비록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는 그 막막한 현실에 낙담하며 지내지 않고, 도리어 자기 인생이 장차 허락해 줄 경이로운 것들에 대한 기대감을 비범하게 품고 그 미래를 준비하는 데 이상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개츠비의 자세는 자기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고 말하는 것들이 이 세상 속에서 다 이뤄진다고 믿는, 주제넘고 경박하고 오만한 ‘적극적 사고방식’ 신봉자들과는 결을 달리 합니다. 도리어 진선미로 충일한 이 세상이 고유한 존재로 소중하게 태어난 자기에게 베풀어 줄 경이로운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 ‘낭만적으로 채비하는 자세'(a romantic readiness)였습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인문학계, 특히 문학계에서는 ‘Gatsbyesque’(개츠비적)란 단어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김욱동 교수에 의하면, 이 단어의 의미는 ‘낭만적 경이감에 대한 능력이나 일상적 경험을 초월적 가능성으로 바꾸는 탁월한 재능’을 가리킵니다. 바로 닉이 개츠비를 다시 평가하면서 그의 특장으로 지적한 은사이지요.
개츠비의 이러한 면모를 묵상하는 중에, W. 클레멘트 스톤이라는 자수성가 백만장자이자 자기 계발 전문가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가 자기를 “inverse paranoid”(피해망상을 역전<逆轉>하는 사람)로 부르곤 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나 세상이 자기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을 ‘paranoid’라고 하니, ‘inverse paranoid’란 타인이나 세상이 자기에게 덕을 베풀어 준다고 믿는 사람이 되겠지요. 주위에서 발생하는 어렵고 난감한 일들을 그저 부정적으로만 인식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주고 자기를 더욱 성숙시키는 계기들로 수용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누가 처음으로 한 말인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Everything is happening for you, not to you.”(모든 것들이 그대에게 그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위해 일어난다.)라는 문장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발생할 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내가 뭘 잘못했냐고 따지는 것보다는, 왜 나를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이 일이 내게 주는 교훈이 뭐냐고 질문하고 성찰하는 게 지혜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인생길이 아름다운 꽃들만 만발한 화원을 유유자적하게 걸어가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일러 줍니다. 가시덤불이 있고, 진창이나 늪이 숨겨 있으며, 막다른 절벽이 버티기도 하는 도정이라는 것이지요. 관건은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것이고, 결국 그 두 가지가 합력해서 궁극적으로 선한 열매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백합 동산을 통과할 때는 그 꽃들의 향연을 즐기면서 그 창조주의 아름다우심을 찬양하고, 가시덤불이 있어 돌아가야 할 때는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형성된 인생의 의미를 반추하면서 그 창조주의 섭리를 신뢰하는 게 절실합니다. 비록 진정성 있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인생을 영위한 것은 아니었어도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감을 품고 의연하게 자수성가의 길을 걸어가던 개츠비가, “그 옛날의 따뜻한 세계를 상실한 채, 단 하나의 꿈을 품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것에 대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he had lost the old warm world, paid a high price for living too long with a single dream.)는 점은 여간 아쉬운 대목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잃고 헤맸던 것이지요. “그래도, 결국 개츠비는 옳았습니다.”(No—Gatsby turned out all right at the end.) 우리가 인생의 도정을 마감하는 날까지 계속 좇아 가야 할 길을 열어 밝혀 주었으니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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