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와 문필가의 안빈낙도(1)
현대인의 최대 화두는 무엇일까요? 건강하고 안정된 삶입니다. 백세시대가 도래한 이상 장수하는 기간 내내 가능한 한 최고의 신체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편안하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이 건강과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도구로 돈을 꼽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넘쳐납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좋은 생활습관을 유지하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면서 사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기치 않게 생긴 질병을 다스리는 데 절실한 것은 돈입니다. 안정된 삶을 위해서도 젊었을 때부터 노후준비를 위해 연금을 마련하고 금융자산에 투자하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역에 관심을 두지 않아 생계비 마련부터가 쉽지 않은 노년층이 우리나라에는 많습니다. 열 사람 중 넷은 그런 처지에 있다고 하지요. 기본적인 생활만 보장이 되어도 목숨을 끊는 노인들의 수[인구 10만 명당 46.6명 / OECD 평균: 인구 10만 명당 17.2명]가 우리나라처럼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두 영역에서 우리나라는 현재 OECD 국가 중 선두를 차지하고 있지요.
노년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무시하거나 간과한 이들이 현재의 노년층 중에 많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은퇴하기 전까지 소액씩이라도 연금에 붓거나 금융자산에 투자했어야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현재 노년층이 직면했던 척박하고 치열했던 시절로 인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정말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돈도 쓰고 시간도 내는 법입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쪼들려도 자녀 교육을 위해 기꺼이 투자하고, 아무리 바빠도 애인을 만나는 일에 시간을 냅니다. 아무리 가산이 기울어도 가장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댔으며, 아무리 분주해도 온 가족이 명절에는 시간을 내어 음식을 만들고 가족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은퇴를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의 필수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거나 간과했을 공산이 큽니다. 이런 몰인식의 배경에는 편향된 학교 교육과 구태의연한 사회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김경모 교수가 지적한 대로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교과서 내에서 경제 영역이 축소된 나라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 공산주의를 그토록 혐오하고 자본주의를 그토록 찬양하면서 보낸 지난 세월 동안 자본주의의 내실화가 이토록 진전된 상황에서조차, 공교육을 통해 경제와 금융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아직도 예금과 적금에만 목맬 뿐, 자본이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도모하는 금융 자본 투자를 투기로 인식하는 이들이 우리나라에는 수두룩합니다.
자본주의가 이토록 발전한 현대도 이런 처지에 놓여 있으니 그것이 활성화되기 이전에 살던 이들은 어떠했을까요? 노동을 투여해서 뭔가를 재배하거나 잡거나 만들고, 그것을 내다 파는 행위에서 비롯된 이익을 누렸을 뿐입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열심히 투여한 노동량에 따라 그 결과를 얻는 구조였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거대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면서 자기 소작농들의 노동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수요와 공급의 원리와 자본의 가치에 눈을 떠서 매매하는 재화의 양과 가격 및 그것을 공급하는 시기를 잘 조절하여 거대한 부를 축적한 이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이런 부류에 속하지 않는 일반인들의 삶은 항상 경제적으로 쪼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 이야기해보려고 하는 문필가들의 삶도 그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출판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현대에도 문필 활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작가들의 수가 희귀한데, 출판업이 제한적으로만 활용되고 저작권이란 개념도 없던 이전 시대에는 그 사정이 더 열악했을 것입니다.
-허균(1569-1618)-
먼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선조와 광해군 시대에 활약했던 그는 천재적인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유형원보다 반세기를 앞서는 실학자요, 유불선을 아울렀을 뿐 아니라 천주교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었고 철저한 본능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김동욱 교수]. “조선이 외면한 아웃사이더였지만 누구보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였다고 강혜영 교수가 총평한 것처럼,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습니다. 20여 년 관직 생활 중 그는 세 번의 유배와 여섯 번의 파직을 당했으니까요. 임지로 갈 때 기생을 데리고 다니거나, 불교를 숭상하거나, 서얼들과 교류한 것이 빌미가 되어 많은 대신들과 양반들의 눈총을 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당시 다른 많은 관리처럼 자신과 가족들의 치부(致富)를 위해 부정을 저지르거나 뇌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범한 일탈이라는 것들도 사실상 불쌍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다가 처벌받은 것에 불과합니다(한영우, “허균 평전”). 그는 한평생 가난하게 살다 갔습니다. 그것도 마지막에 대역죄를 범한 신하로 몰려 제대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할 말이 있다.”라는 최후의 한마디도 무시당한 채 능지처참 되었습니다.
이렇게 험난하고 고단한 삶을 영위한 허균에게 더없는 위로를 주었던 것은 독서였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좌절하던 그가 책과 벗하여 살며 초록(抄錄)하던 모습이 아랫글 속에 담겨 있습니다.
“나는 처세에 졸렬하고 가계를 다스릴 줄 몰라 지금 반생 동안 기복이 여러 번 있었다. 다만 독서를 좋아하여 방을 깨끗이 쓸고 많은 책을 시렁에 채워 놓고 그 가운데 즐긴다. 몇 번 갇히고 몇 번 쫓겨 돌아다녀도 다 낙원이었다. 그렇지 않고 속자(俗子)와 더불어 있을 때에는 어수선해서 책을 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리 높은 집에, 맛있는 음식에, 좋은 방석을 깔고 있어도 큰칼을 목에 건 것 같고 몸은 불덩이 속에 있는 것 같다.”(신정일, ”천재 허균“)
공주 사람 아전 한 사람이 당시에 공주 목사였던 허균에 대해 증언한 것도 한번 들어 보세요.
“허균이 목사로 재직할 당시 관아 일이 끝나면 늘 섬돌에서 신발을 신고, 손을 뒷짐을 진 채 시를 읊었다. 그 소리와 가락이 맑으면서도 힘이 있어서 마치 옥이 울리는 소리와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본 사람들은 목사를 ‘하늘나라 사람’이라고 추앙했다.”[영의정 남구만의 손자 남극관의 문집에 실린 글) (신정일, ”천재 허균“)
여러 번 인생의 기복을 당할 때에도 독서는 그를 낙원으로 이끌어 주는 비책이었고, 관리 노릇을 하는 일상 속에서도 시를 읊조리며 묵상하는 일은 그를 하늘나라를 거닐게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조카와 사위를 부정으로 과거에 합격시켜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곤장을 맞고 감옥에 갇힌 그가 유배를 갈 때에도 친구 정시망에게 편지를 보내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을 보세요. ”남쪽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형은 술 한 말과 닭 한 마리를 가지고 길가로 나와서 시를 읊고 가지 않으시렵니까?“
그는 글도 많이 지었습니다. 조선 역사에서 ‘역적’으로서 비운의 죽임을 당한 뒤 그에 관한 글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은 세상을 개혁하고자 쓴 한글 소설 “홍길동전”과 개인 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입니다. “홍길동전”은 무명으로 발표되었으나, 유몽인이 자기 문집에서 허균의 작품이라고 기록에 남긴 것으로 인해 그의 저작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성소부부고”는 장독 덮개(覆瓿)로나 쓰일 허균[惺所는 그의 호]의 변변치 못한 글이라는 뜻으로 그의 겸양이 담긴 제목이지요. 1611년에 귀양지에서 자신의 저작을 간추려 편집한 것으로서, 시(詩), 부(賦), 문(文), 설(說)의 4부로 나누어진 64권 문집이지요. 그가 죽기 전 기적적으로 당시 소년이던 외손자 이필진에게 전달하여 줌으로써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일평생 독서와 문필 활동으로 삶을 일구어 낸 허균의 문학관은 한마디로 독창적 문학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남’의 모방에서 벗어나 ‘나 자신만의 문학’을 추구하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독창적이고 뛰어난 글은 부귀를 누리며 영화롭게 사는 데서 비롯되지 않고 험난한 세상 풍파를 견디고 극복하는 데서 피어난다고 주장했습니다. 귀향 간 이산해와 소동파뿐 아니라 좌천된 유지후와 낙향한 고경명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언급했으니까요. “아무리 부러움 없이 잘 살던 사람일지라도 귀양살이를 하면서 어렵고 험난한 체험을 하게 되면 비로소 삶의 진실을 근거로 해서 이뤄지는 기묘한 문학을 할 수 있다.”(허균, “성수시화”)
-제인 오스틴(1775-1817)-
“오만과 편견”의 작가인 제인 오스틴의 경우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그녀는 독신 여성 작가라는 점 때문에 사회적 도전에 직면해야 했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영국 햄프셔 지방의 시골 목사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정식 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지만, 독서를 중시하는 집안 분위기로 인해 문학작품을 탐독하면서 자랐습니다. 11세 때부터는 희곡이나 로맨스를 써서 가족들에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1801년에 은퇴한 이후부터 그녀는 아버지와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머니와 언니 커샌드라와 함께 고향인 스티븐턴(Steventon)을 떠나 대도시 바스(Bath)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1809년에 오빠 에드워드가 초턴(Chawton)에 작은 집[윗 사진 속 집]을 마련해 줄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고를 겪고 친척 집을 전전하며 그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처지는 환경 탓이기도 하고 자기 탓이기도 했습니다. 20세(1795년)에 톰 리푸로이(Tom Lefroy)와 청혼 직전까지 갔다가 그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었지만, 27세(1802년)에는 해리스 비그위더(Harris Bigg-Wither)의 청혼을 수락했다가 이튿날 사랑 없는 결혼 대신 노처녀의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초턴에 정착한 이후부터 안정을 찾은 그녀는 암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작고할 때까지 8년간 소설 6편을 출판하는 기염을 토하는 작가 생활을 영위합니다[“이성과 감성”(1811), “오만과 편견”(1813), “맨스필드 파크”(1814), 엠마(1816), “노생거 사원”(1817), “설득”(1817)].
문필가 제인 오스틴의 삶을 돌아보면서 배운 점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녀가 글을 쓴 목적입니다. 그녀는 일찌감치 금전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글을 잘 쓰는 보람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20세 때 언니 커샌드라에게 보낸 아래 편지에 그런 뜻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난번 내 편지를 언니가 칭찬해줘서 너무 기뻤어. 나는 금전적인 보수 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 오직 명성만을 위해 글을 쓰기 때문이야.”(I am very much flattered by your commendation of my last Letter, for I write only for Fame, and without any view to pecuniary Emolument.) 그녀가 사용한 ‘명성’(Fame)이란 단어는 허영에 찬 세상적 평판이라기보다는 편지 한 통도 진정성 있게 예술적으로 쓰겠다는 그녀의 자의식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녀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글을 썼지만 자기 작품을 대중 앞에 내놓기 전에 많은 시간을 공들여 여러 번 숙독을 해야 만족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가 표현한 그대로 “2인치의 상아”에 “섬세한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정교하게 자기 작품 하나하나를 다듬어 갔던 것이지요. 예컨대 1811년의 출판 데뷔작인 “이성과 감성”은 사실상 1795년에 “엘리너와 메리앤”(Elinor and Marianne)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두 번에 걸쳐 개작한 것이고, “오만과 편견”도 1796년에 “첫인상”(First Impressions)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완전히 개정해서 발표한 것이지요.
둘째, 그녀는 자기의 진면목을 지키며 자기가 쓰고 싶어 하는 것만을 썼습니다. “그들[제인 오스틴과 샬럿 브론테]만이 이걸 하라, 저걸 생각하라 떠드는 영원히 변치 않는 현학자들의 끊임없는 충고를 무시했습니다.”[They (Jane Austen & Emily Brontë) alone entirely ignored the perpetual admonitions of the eternal pedagogue — write this, think that.(버지니아 울프)] “노생거 사원”의 주인공 캐서린이 지적한 대로, 성직자들과 왕들의 다툼이나 전쟁과 전염병으로 가득한 데다 별 볼일 없는 남자들만 등장할 뿐 여자들은 등장하지도 않는 역사책을 쓰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당대의 생활상과 풍습과 사고방식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이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연애 소설’을 썼습니다. 평상시에 호기심과 탐색의 시선으로 주변 인물과 상황을 세심하게 관찰했던 그녀였기에 가능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사교계에서 발견되던 다양한 인물들의 태도와 세상의 방식을 따뜻한 통찰력과 상쾌한 유머를 가미하여 묘사하면서 객관적인 사회 현실과 가치의 단점들을 감수성 넘치는 필치로 지적하고 비판했습니다. 외적 조건을 중시하는 당시의 사회 규범과 계급 중심으로 모든 게 돌아가는 당시의 사회 질서의 문제점을 성찰하고 비판하면서, 그것들이 개인의 성품과 자질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회 질서로 거듭나야 한다는 점을 예리하고도 감동적인 언어로 넌지시 제시했습니다. 자신에게 내재된, “일상생활의 일들과 감정들과 인물들을 묘사하는 재능”(a talent for describing the involvements and feelings and characters of ordinary life)과 “묘사의 진실성과 감수성을 통해서 일상의 평범한 일과 인물들을 흥미롭게 만드는 빼어난 솜씨”(exquisite touch, which renders ordinary commonplace things and characters interesting, from the truth of the description and the sentiment.)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지요[월터 스콧의 지적]. 그녀의 오빠 헨리 오스틴이 지적한 대로 그녀는 전적으로 “자신의 심미안과 취향”에 따라 여성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세심한 관찰과 예리한 통찰력이 현재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셋째, 그녀는 환경적 여건과는 상관없이 꾸준히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초턴에 정착하기 전에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이후에도 그녀는 미혼 여성으로서 친척들의 도움을 받는 대신 집안 대소사에 동원되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맡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쓴 작품들은 이런 집안일을 맡아 행하는 가운데 이룩된 것들입니다. 자기만의 공간이 없어 거실 한쪽에 놓인 일인용 책상에 앉아 글을 쓰다가 누군가가 들어오면 얼른 다른 것으로 덮어 두었다고 하지요[그 책상이 아직도 그녀의 박물관에 남아 있음]. 1811년부터 출판된 책들을 통해 인세 수익이 생겨 생활 여건은 많이 향상되었겠지만, 고단한 이런 일상은 지속된 듯합니다. 참고로 “이성과 감성”의 판권 수입은 140파운드[13,944파운드=2,286만 원(2023년)], “오만과 편견”은 110파운드[9,410파운드=1,542만 원], “맨스필드 파크”는 310-350파운드[30,442-34,370파운드=4,991-5,635만 원] 정도 되었습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생활 여건과는 상관없이 “꾸밈없는 성격과 규칙적인 습관 그리고 고요하고 즐겁게 몰두하는 태도”[오빠 헨리 오스틴의 증언]로 그녀는 자기 소설들을 공들여 집필했습니다. 37세 때 그녀가 쓴 편지 한 구절을 보세요. “오늘은 전혀 편지를 쓸 기분이 아니야. 그래서 편지를 쓸 기분이 들 때까지 계속 써야만 해.”(I am not at all in a humor for writing; I must write on till I am.) 이런 자세가 문필가에게 얼마나 긴요한지 글 쓰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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