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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心)-마음을 따르라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유로지비,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미쉬낀 공작(3)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3. 11.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유로지비,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미쉬낀 공작(3)

 

-영혼에 씨 뿌리며 살기-

<유로지비 공작>

이 작품의 제목처럼 미쉬낀 공작이 ‘백치’로 묘사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예컨대 예빤친 장군의 집에서 공작이 가브릴라에게 나스따시야 사진을 잠시 빌려 달라고 할 때 가브릴라가 공작을 백치라고 부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뭐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냐는 비아냥거림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빤친 장군 가족들 중에 리자베따나 아글라야도 그를 백치로 부르기도 하고 그렇게 여긴 경우가 있었습니다. 특히 리자베따는 자기 친척이라는 그를 다루기 힘들고 세상도 모르며 사회적 지위도 없는 바보라고 부르면서, 그를 사위 삼겠다고 자기 막내딸 아글라야를 고이 길러 왔는지 한탄하기도 합니다. 예브게니도 공작을 백치라고 부릅니다. 공작이 나스따시야와 아글라야를 둘 다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바르바라는 모든 사람들이 공작을 백치로 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믿기 어려운 것은 공작 자신도 스스로가 백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공작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말하는 투나 그의 행동거지에 어린이 같은 순진한 면모가 확연하게 부각되어 사람들이 그런 인상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이 말을 할 때 그 말을 경청할 뿐 아니라 그들이 질문을 해올 때 진지하게 답변하려는 공작의 태도 면에서 유난히 순진성이 드러납니다. 심지어 상대가 유머나 조롱조로 말하더라도 그것들을 진지하게 믿어 버리는 순진함이 얼굴과 몸동작에서 엿보입니다. 이런 측면을 정신적으로 성장이 덜 되거나 지능이 아주 낮은 상태로 해석하게 된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와 좀 더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그를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더 이상 덜떨어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도리어 신뢰하고 존경하는 단계까지 진전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가브릴라도 시간에 지나감에 따라 공작이 만만한 구석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라고 인식합니다. 아글라야도 자기 연적인 나스따시야에게 지금껏 살아오면서 공작처럼 “고결하고, 순수하며, 끝없는 신뢰성을 지닌 분을 본 적이 없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공작을 속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속일 수가 있지만, 공작은 그 모든 사람을 용서해 준다는 걸 알게 된 후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예브게니도 공작을 친절한 인물로 여기면서 그의 우정과 조언을 구하러 옵니다. 잔머리 굴리는 데 일가견을 갖고 있는 레베제프도 공작을 계속 대하는 중에 그를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존재로 여기게 될 뿐 아니라, 그가 사람 속을 꿰뚫어 본다면서 그를 신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복서 껠레르도 나중에 공작에게 자기는 그를 위해 봉사할 뿐 아니라 목숨 바쳐 죽을 준비까지 되어 있다고 술회하기도 하지요.

 

공작의 이러한 이중적인 측면으로 인해 그를 ‘유로지비’(yurodivy)로 일컫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속에서 미치광이 행세를 하면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수도자나 기독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사람들은 유로지비가 백치이면서도 예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동방정교에서는 유로지비로, 영어권에서는 ‘바보 성자’(holy fool)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이 표현은 고린도전서 4:10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와 선교 팀을 가리켜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We are fools for Christ-NIV)라고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세간에서 이 작품의 미쉬낀 공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꼭 이 단어가 출현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단 한 차례만 언급됩니다. 로고진과 처음 기차에서 만나 대화하던 중 그가 공작에게 여자들을 좋아하냐고 묻자, 공작은 선천적인 병 때문에 여자를 전혀 모른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을 받아 로고진이 쓴 용어가 바로 이 유로지비입니다. “공작은 완전히 유로지비로 태어난 거군요. 하느님은 당신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요!” 나스따시야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로고진다운 해석이지만, 공작과 이 단어와의 진정한 연관성에 대해서는 조지프 프랭크가 잘 정리해 두었습니다.

 

“비록 신사답고 잘 교육받은 공작이 이렇게 괴상한 인물들과 외적으로 닮은 점은 없지만, 그는 전통적으로 그 인물들이 누린 영적 통찰력이라는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 은사는 어떠한 의식적인 자각이나 교리적인 헌신보다 낮은 수준에서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though the gentlemanly and well-educated prince bears no external resemblance to these eccentric figures, he does possess their traditional gift of spiritual insight, which operates instinctively, below any level of conscious awareness or doctrinal commitment.)

 

공작이 품고 있는 전통적인 영적 통찰력 중에 두드러진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시각입니다.

 

<미(美)가 세상을 구원할 거라고 믿는 공작>

아글라야는 이 말을 우스꽝스럽게 여기면서 자기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줍니다. 그리고 이뽈리뜨는 공작의 생일 파티에서 이전에 공작이 언급했다는 이 말을 장난기 어린 생각이라고 치부하면서, 그 말을 한 이유가 공작이 지금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공작이 언급한 아름다움을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해석했다는 말이지요. “어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까요?”라고 비아냥거리면서, 공작은 열렬한 기독교가 아닌가라고 도전합니다.

 

물론 공작이 그 말과 여성의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연결한 적은 없습니다. 도리어 그 표현은 공작이 신봉하는 기독교의 핵심 요소 중 한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공작에게 있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사상은, “자기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인간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신 안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 어떤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논리로도 종교적 감정의 본질은 접근할 수 없고, 그 어떤 과오나 범죄, 그 어떤 무신론도 그걸 붙잡을 수 없다고 그는 확신합니다. 거기에는 무신론이 결코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고, 사람들이 말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과는 영원히 다른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작은 이러한 영적 감수성이 러시아 인의 가슴속에서 가장 자주 발견될 뿐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자기가 러시아에서 발견한 가장 중요한 신념 중의 하나라고 공언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확신과 “아름다움이 세계를 구원한다”라는 사상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접하면서 그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끌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자연을 통해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아름다운 온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아름다운 만물 속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심으로써 그 영광을 통해 우리가 당신을 깨달아 알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로마서 1:20에서 지적한 대로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For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His invisible attributes, His eternal power and divine nature, have been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through what has been made, so that they are without excuse.) 그러므로 공작은 예빤친 장군 집 만찬 석상에서 참석자들 앞에서 이 점을 역설합니다.

 

“오, 만일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나의 슬픔과 불행이 무슨 문젯거리가 되겠습니까? 나는 나무 옆을 지나가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뭘 보고 다니는 거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아, 내가 모든 걸 표현해 낼 능력이 없음을 한탄할 따름입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물이 펼쳐지나요? 심지어 그런 것을 잊고 살아가던 사람조차 그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곤 하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를 바라보세요. 신이 선물한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세요. 풀잎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바라보세요. 당신을 쳐다보며 사랑하고 있는 눈을 바라보세요.....”

 

자연 만물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해 주신 아름다운 나무, 아름다운 사물, 아름다운 노을, 아름다운 풀잎, 아름다운 어린아이, 아름다운 사람들과 그들의 눈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면, 이 세상의 어떠한 슬픔과 불행이 문제가 될 수 있겠느냐는 신앙적 선언인 것이지요. 공작이라고 단번에 이런 경지에 들어 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위스에서 요양하는 첫 해 기간 중 한때는 그도 자연을 통해 드러난 아름다움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해 고뇌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밝은 세상, 끝없이 푸르기만 한 풍광을 바라보는 중에, 자신이 그 모든 것들과 무관한 한낱 “이방인”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하면서 그 세상을 향해 두 손을 뻗고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문합니다. “대체 이 향연이 무엇이란 말인가?” 어릴 때부터 항상 그에게 손짓으로 초대하던, “그러면서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던, 끝이 없는, 언제나 위대한 저 축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매일 아침 저와 똑같은 태양이 떠오르고, 매일 아침 폭포수 위로 무지개가 생기고, 매일 저녁이면 저 멀리 하늘 가장자리에 있는 만년설의 고봉은 자줏빛 불꽃으로 타오른다. ‘햇볕을 받으며 내 곁에서 윙윙거리는’ 작은 파리는 어느 것이나 ‘이 모든 향연과 합창의 동반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위치를 사랑하며 행복해한다.’ 작은 풀잎은 한 포기마다 자라나며 행복을 느낀다. 모든 것에는 자기의 길이 있고, 모든 것은 자기의 길을 알고 있다. 모두 다 노래를 부르며 물러섰다가 노래를 부르며 온다.”

 

온갖 자연 만물들이 자기들만의 행복과 기쁨을 아름다운 형체로 표현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동반자로 참여하고 있는 작은 파리만도 못한 무지하고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낙오자임을 자백합니다. 그 이후에 공작은 영적으로 성숙하기 시작하여 이 아름다운 자연의 향연과 합창의 동반자로 자리매김합니다. 아름다운 자연 세계가 하나님의 선물로서 당신의 능력과 신성을 드러낸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아들로 여기며 기뻐하시는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좇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진실과 사랑으로 대우하고 섬깁니다.

 

어떻게 이런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요? 그 성숙의 시발점은 어린이들의 아름다움과 조우한 것이었습니다. 스위스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이따금 학교 수업을 마치고 장난치고 깔깔대며 떠들썩하게 돌아오는 아이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영혼이 갑자기 그 아이들에게 빨려 들어가면서 “비상한 힘이 솟아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의 웃음과 눈물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행복감을 느껴서 웃음을 짓게 되었고, 그때마다 자기 속에 내재된 모든 우울함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로 3년 내내 사람들이 “우수에 젖어 슬퍼하는 까닭”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단계까지 나아갔습니다. 아름답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어린이들에게서 배워 어린이 같은 아름다운 심정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렇게 다양한 아름다움을 창조해 주신 하나님께서 자기 아버지 되심을 배웁니다. 이 진실이 가장 아름답게 계시된 장면이 바로 길에서 만난 한 아낙네가 자기 젖먹이 어린 아들이 웃는 모습을 보고 한없이 기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접하고는, 죄인이 진실을 털어놓고 신 앞에 기도를 드리는 것을 저 하늘에서 신이 내려다보시고 크게 기뻐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언급할 때, 공작은 그 말이야말로 기독교의 모든 본질이 표현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미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어린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말은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내용이었습니다(누가복음 15:7 참조).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공작처럼 낙오자로 느낀 인물이 한 사람 더 있습니다. 폐병에 걸려 18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이뽈리뜨입니다. 그는 자기 주위에서 계속되는 자연의 향연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잉여 인간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옆에서 윙윙거리며 나는 파리조차도 그 자연의 합창의 동반자로서 자기 위치를 깨닫고 사랑하며 행복해 하는 것을 목도하지만, 그것이 자기와 어떻게 관련이 되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과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내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지만, 내세와 내세의 법칙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술회합니다. 그러므로 불가사의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저 자기 식의 개념으로 신에게 뒤집어씌워 신을 지나치게 업신여기는 일반인들의 신앙 행태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신의 의지와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왜 자기가 책임져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누가 자기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래서 자연 만물이 향연을 벌이는 장 속에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삶을 영위하는 이와 같은 조소적 삶의 조건에서 존재하기를 거부하면서, 세상에 충일한 힘과 삶의 원천을 똑바로 바라보며 죽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자살 소동은 무위로 끝나지만, 그는 자연 세계와 현세 및 내세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공작과 다른 결론에 도달한 것은 바로 그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사역의 의미에 대해 숙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공작>

“연민이야말로 모든 인간 존재에게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법칙이다.” 미쉬낀 공작이 한 말입니다. 이 언명에 걸맞게 공작은 스위스에서 요양할 때부터 고통당하고 소외된 사람에 대한 연민을 실천적인 사랑으로 구현해 냅니다.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어머니에게까지 버림받은 마리를 돕고 배려해 준 게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프랑스 상인의 유혹에 빠져 함께 지내다 1주 후에 마을에 돌아온 마리는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온갖 천대와 모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녀를 마치 ‘파충류’나 ‘거미’를 대하듯 쳐다보는 것은 예사이고, 모두들 그녀를 향해 침을 뱉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처절한 상태에 있던 마리를 구해 낸 것이 바로 공작이었습니다. 먼저 자기에게 있던 유일한 귀중품이었던 다이아몬드 핀을 팔아 받은 돈을 그녀에게 내밀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 키스해 주면서 그녀가 죄를 진 게 아니니 사람들 앞에서 “죄지은 사람처럼 미천하게 굴지 말라”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마을 어린이들을 설득시켜 함께 그녀의 영혼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그녀를 만날 때마다 인사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기도 했지요.

 

비록 마리는 폐병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뜰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아이들의 사랑의 격려와 고백을 들으며 자신의 끔찍한 처지를 잊어버린 채 내내 행복감을 느끼면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마리가 세상을 뜬 후 “마리의 초라한 무덤은 아이들의 영원한 숭배지가 되었습니다.” 어린이의 순진무구한 심령에 고무되어 그 마음을 전수받은 공작은 그 어린이들의 마음을 얻어 그들의 동무가 될 수 있었으나, 온 마을 사람들은 그를 구박했습니다. 그들 중에도 특히 그 마을의 목사와 초등학교 교사가 이 구박에 앞장섰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치료하던 슈나이더 박사조차도 공작이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론이 해롭다면서 그를 “완전한 어린애”, “진짜 어린애”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런 정황은 그가 돌아온 러시아라는 속세에서 어린이의 심령을 가진 그가 직면해야 할 ‘십자가’를 예견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공작이 아름답지만 문제 많은 여인 나스따시야와 결혼하려고 시도한 것도 마리의 경우와 여전히 동일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물론 공작이 그녀의 미모에 반하여 그녀의 사진에 남몰래 키스한 적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 속에 숨겨 있는 암울함과 고뇌도 함께 읽었습니다. 일평생 외롭게 고뇌하며 산 그 여인에 대한 연민이 그녀에 대한 사랑보다 더 지극했습니다. 그녀와 결혼하려 한 것으로 인해 그는 세간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예빤친 장군의 가족과도 절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작이 그녀가 가브릴라나 로고진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 것도 그녀를 위한 배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이 결혼하려는 의도가 그녀에게 행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의 증오를 한 몸으로 받아야 했고, 심지어 로고진이 자기를 살해하려는 위협도 통과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공작이 겪어야 했던 것은 자기의 아내가 될 뻔한 여인의 죽음과 스위스 요양 병원으로의 귀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스따시야를 살해한 로고진을 마지막까지 위로하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던 여인의 목숨을 끊은 자를 돌보아 준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나스따시야를 죽인 후에 로고진이 보인 행태는 정신질환자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녀가 안치되어 있는 방에서 공작과 함께 있을 때 갑자기 날카롭게 고함을 치고 깔깔 웃기도 하고, 별안간 두서없는 내용의 말을 날카롭게 중얼거리기도 했습니다. 한없는 우수의 감정이 마음을 짓누르고 몸은 떨리기 시작했지만, 공작은 그런 행태를 보이는 로고진의 머리를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주기고 하고 뺨도 만져 주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자기 얼굴을 로고진의 얼굴에 갖다 대자, 공작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로고진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습니다. 급기야 로고진은 의식을 완전히 잃은 채 열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가 헛소리를 지껄이고 비명을 지를 때마다 공작은 여전히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와 뺨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정작 공작은 날이 새자 그 방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이전에 스위스로 갈 때와 같은 ‘백치’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랑의 현장 가운데서, 갖가지 모욕과 수모를 겪다가 급기야 정신적 손상까지 입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쉬낀 공작의 ‘그리스도다운 면모’입니다.

 

이런 정황을 미리 암시해 주는 그림이 작품 중에 소개됩니다. 한스 홀바인(1497~1543)의 “무덤 속의 그리스도”(1520-1522년)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복사본이 로고진의 집에 걸려 있었지요. 그 그림을 보면서 이뽈리뜨는 그 주검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후에 받은 격렬한 고난의 결과라는 점과, 그것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임을 상기합니다. 고통에 찢긴 그리스도의 시체를 보면서 이뽈리뜨에게는 두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첫째, 그를 신봉했던 모든 제자들과 당시 십자가 주변에 서 있었던 여인들이 그 그림 속의 시체를 보았다면, 그들이 과연 그리스도가 부활하리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 그토록 처참한 죽음과 그토록 막강한 자연의 법칙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조차도 처형 전에 이렇게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미리 볼 수 있었다면, 선뜻 십자가에 올라가 죽으려고 했을까? 얼굴은 일그러지고 피멍이 들어 퉁퉁 부어올라 있고 감기지 않은 두 눈은 하늘을 바라보며 허연 흰자위가 뿌연 빛을 띠는, 너무나 치욕스러운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겪은 십자가형은 조금도 가감이 없는 실제적인 참혹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적나라한 죽음의 현실이 있었기에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적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뽈리뜨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주목한 채, 그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로 눈을 돌려 부활의 시각으로 세상과 자기 삶의 의미를 재고하지 못한 것은 여간 아쉬운 대목이 아닙니다. 미쉬낀 공작이 직면한 삶의 현실도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고통과 다를 바 없는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희생을 치른 현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읽었고,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희생은 아름다운 열매로 부활했습니다.

 

<영혼에 씨 뿌리는 공작>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가 미놀린을 낳았듯이, “백치”에서 미쉬낀 공작은 어린 제자들을 낳습니다. 스위스에서 지낼 때 그는 의도치 않게 그곳 아이들을 제자 삼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어린이들은 그에게 감화를 받아 그 없이는 못 견뎌하면서 항상 그의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곳 초등학교 교사와 척지게 되지요. 아이들의 부모들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자기 병을 치료해 주던 슈나이더 박사도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해댈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실상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우려고 했습니다. 자기 영혼의 병도 아이들을 통해 치유 받았으니까요. 그렇지만 아이들은 그를 찾아와 그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공작은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많이 해서 그곳에서 지내는 3년 내내 그들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게 됩니다. 불쌍한 여인 마리와 아이들의 관계 변화는 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맺은 아름다운 열매 중 한 가지였을 것입니다. 그가 스위스를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자 아이들과 저녁마다 서로 뜨겁게 안으며 작별의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그가 타고 갈 기차가 도착하는 역으로 온 동네 아이들이 다 함께 몰려 가서 그를 배웅해 주었습니다. 가는 길에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그를 껴안고 키스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가 탄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만세!”라고 외치며 한참 동안 그 역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러시아에 와서 그가 낳은 제자는 가브릴라의 동생 니꼴라이입니다. 그는 돈만 밝히는 가브릴라와는 결이 다른 청소년(중학생)이었습니다. 공작이 처음으로 나스따시야 집으로 찾아갈 때 길안내를 해 준 아이가 바로 니꼴라이였습니다. 당시에는 화류계 여성들, 장군들, 고리대금업자들이 모이는 파티에 공작이 순진하게 끼어드는 게 아닌가 하여 그를 비웃고 경멸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런 곳에는 정직하거나 존경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시대엔 엽기적인 사람들밖에 없는 건가요?”라고 일갈합니다. 조국 러시아 주민들이 어떻게 이런 지경에 도달했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애타 합니다. 부모들부터가 자기들이 내세우던 옛 도덕을 부끄러워하면서 자식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침을 내려주고 있는 현실을 개탄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에도 양보를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영리한 인간들이라는 존재들은 죄다 고리대금업자들에 불과하다고 선언하기도 하지요.

 

이 말을 들은 공작은 그의 어머니와 누나인 바르바라와 같은 꿋꿋한 분들을 보라고 응수합니다. 그와 같은 환경 속에서 남을 돕고자 하는 분들은 도덕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지요. 니꼴라이는 이 질문에서 자기 형 가브릴라라면 ‘위선’이라고 부를 것을 공작이 ‘힘’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감동을 받습니다. 공작이 무척이나 마음이 들기 시작한 니꼴라이는 급기야 앞으로 자기가 돈을 벌면, 자기랑 집을 얻어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모든 일에서 공작과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다”라고 고백한 니꼴라이는 공작이 한 말과 그가 취한 행동을 서서히 본받아 갑니다. ‘아름다움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공작의 말을 깊이 묵상하기도 하고, 자기 앞에서 기독교 신자로 고백한 공작의 ‘기독교적 겸손’을 실행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예빤친 장군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공작이 발작하여 쓰러졌다는 소식은 니꼴라이에게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망연자실해 있던 그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지워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사실들을 경험했고 큰 교훈을 얻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자기 가족들과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과는 다른 길을 걷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자기가 어머니를 직접 모시겠다고 하면서, 언제라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면 자기가 항상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고 공작에게 요청합니다. 그는 그 말을 지켰습니다. 공작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를 구해준 것입니다. 로고진이 나스따시야를 살해하는 파국이 전개된 이후에 로고진과 함께 있다가 미쉬낀 공작이 정신적 손상을 입게 되었을 때, 니꼴라이는 자발적으로 공작의 손발이 되어 줍니다. 자기가 신뢰하는 예브게니에게 상황을 신속하게 알려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예브게니의 배려와 노력으로 공작이 다시 스위스로 가서 치료받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희생과 헌신은 경이로운 열매를 낳습니다. 누구도 그 열매의 내용을 간파할 수 없습니다. 이런 측면을 시사해 주는 이야기 한 자락이 니꼴라이의 친구인 이뽈리뜨에게서 나온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자선’을 모함하는 자는, 인간의 본성을 침해하고 인간 개인의 미덕을 무시하는 자”라고 말하면서, 그가 자기 친구에게 들려준 이야기였습니다. 모스끄바에 4등 문관의 직위를 가진 ‘장군’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평생 유형지와 감옥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시베리아로 떠날 유형수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그들을 ‘다정한 친구’라고 부르면서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물어보고는, 돈을 주거나 생필품을 보내 주거나 성서를 선사해 주기도 했습니다. 죄수에게 죄목이 무엇인지 물어 보는 대신, 그 죄수가 자기 죄에 대해 말을 꺼내면 들어주기만 했습니다. 모든 죄수들을 동등하게 취급하고 친형제처럼 대해 준 덕에, 죄수들은 나중에 그를 아버지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여자 유형수가 어린애를 안고 있는 경우에는 그 아이를 어루만져 주고, 그 아이를 웃기려고 손가락을 튀겨 보이기도 했지요. 그가 죽는 날까지 여러 해 동안 이런 식으로 죄수들을 섬겼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소문이 시베리아와 러시아 전역에 다 퍼지게 되었습니다. 흉악범들조차도 그 장군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들 중에 단지 자기 기분을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12명의 어른과 6명의 아이를 찔러 죽인 살인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조차도 수형 생활한지 20년 만에 어느 날인가 갑자기 한숨을 쉬며 “지금도 그 장군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까?”라고 질문했다는 것입니다.

 

이뽈리뜨는 그 장군 이야기를 하면서 “그 흉악범이 20년 동안 잊지 못했던 장군 할아버지가 그자의 영혼에 어떤 씨앗을 영원히 뿌려 놓았는지 자네는 알겠는가?”라고 친구에게 묻습니다. 한 개성과 다른 한 개성이 만나 교류하는 것이 교류하는 사람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물은 것이지요. 리뽈리뜨는 “거기에는 완전한 삶이 있고, 우리에게 숨겨진 무수한 가지들이 싹트고 있는 걸세.”라고 자답합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우리 각자가 ‘자선과 선행’을 통해 씨앗을 뿌리게 되면, 설령 우리가 그 씨앗 뿌린 일을 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그 씨앗은 형체를 얻어 쑥쑥 자라나게 되어 우리의 “모든 삶을 휘어잡아 삶 전체를 가득 채울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베풂을 받은 사람이 다른 제삼자에게 ‘베풂’을 전수해 줄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의 미래 운명을 해결하는 데 있어 우리 각자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식으로 우리가 평생 닦은 지식과 실행한 삶을 통해 엄청난 씨앗을 뿌려, “이 세상에 거대한 사상을 남겨 줄 수 있는 상태에 있다면” 어떤 열매가 맺힐까요?

 

-완벽하게 아름다운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도스토옙스키는 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다운' 인물로 인식했습니다. 석영중 교수는 도스토옙스키가 조카딸인 소피야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면서, 백치의 주된 사상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이상이지만, 그 이상은 우리 나라에서도 문명화된 유럽에서도 아직 요원하기만 하구나. 이 세상에는 오로지 단 한 분의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물이 존재하지. 그리스도가 바로 그 사람이야. 백치로 묘사되는 미쉬낀 공작을 통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궤적을 그리고 가신 그리스도를 재현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뿐 아니라 시베리아 유형지로 떠나는 자기에게, 표지 안쪽에 10루블짜리 지폐를 끼워 넣은 신약 성경을 선물해 준 폰비지나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런 자신의 믿음을 기술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구세주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는 없다고 믿습니다. 만일 진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저는 진리 대신 그리스도를 따르렵니다." 백치속에는 그리스도와 아름다움을 연결짓는 이러한 소견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진 않지만, 결국 “아름다움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작중의 아포리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작가의 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이신 이 그리스도의 삶과 그 삶의 의미를 한번 숙고해 보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