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를 열어 밝히는 은유의 힘
-목회자를 위한 인문학 세미나-
지난주에 경북 지방 한 곳에서 목회자를 위한 인문학 세미나를 인도했습니다. 서른 분 정도의 목회자 부부들이 참석하여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하면서 2시간 반을 함께 보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시간에는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잠시 소개한 후 바로 왜 목회자에게 인문학이 필요한가를 나누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갖고 성가 두 곡을 감상한 후에 곧바로 두 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목회자가 인문학을 활용할 것인가를 논의한 후에 실제적인 제안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이번 세미나는 앞으로의 사역에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해 주었습니다. 목회자 부부들에게 강의를 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은, 그분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면서 접한 밝고 정겨운 모습 때문에 순식간에 다 사라졌습니다. 덕이 차고 넘치는 곳이라는 지역 명칭답게 참석자들이 넉넉한 마음으로 강사를 대해 준 덕에 마치 오랜 친구들 앞에서 술술 이야기 나누듯 막힘없이 진행해 갈 수 있었습니다. 시간도 충분해서 나누어야 할 중요한 대목은 거의 다 나눌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주문해서 가지고 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 서른 권도 다 나눠지고, 혹시나 해서 ‘선물’로 가지고 간 “트인 마음으로 성경 읽기” 다섯 권도 제 뜻과는 다르게 다 ‘판매’가 되었습니다.
이번 강의의 큰 대지로 삼은, "신자/불신자들과의 의사소통 혹은 설득"의 문제는 참석한 모든 분들의 공감을 자아낸 듯했습니다. 그만큼 심각한 주제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나오는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및 로고스(Logos)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의사소통 혹은 설득의 문제를 논의해 간 것이 주효했는지는 두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깊이 있는 인간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주안점을 두었던 “예수님의 성육신과 비유 사용” 측면이 참석자들에게 잘 납득되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한재욱 목사가 제안하는 “신학과 인문학의 조화로운 저공비행”이라는 시각도 소중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과, ‘30년간의 깊이 있는 인간 이해의 시간’을 가지신 후에 당신의 입술을 통해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게 온갖 비유였다는 점에 주목하는 게 더욱 절실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메타포(은유)의 힘-
“만일 그림 하나가 단어 천 개의 가치가 있다면, 메타포(‘은유’) 한 가지는 그림 천 개의 가치가 있다”(“If a picture is worth a thousand words, then a metaphor is worth a thousand pictures.”) 언어인지학자인 조지 레이코프와 철학자인 마크 존슨이 “Metaphors We Live By”라는 책 속에서 갈파한 유명한 선언입니다. ‘그림 하나가 단어 천 개의 가치가 있다’는 표현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표현과 유사한 의미이겠지요. 예컨대 복잡다기한 아이디어들을 한 장의 그림으로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경우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그림 천 개만한 가치가 메타포 하나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메타포(‘은유’)는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수사법”(표준국어대사전)이자, “보다 명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두 가지 다른 사물, 아이디어, 사상, 생각 혹은 느낌들을 비교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나 구절”(a word or phrase used to compare two unlike objects, ideas, thoughts or feelings to provide a clearer description-Webster's New World College Dictionary)입니다. 이런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은유를 “어떤 것에다 다른 낯선 어떤 것에 속하는 이름을 올려놓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이나, 레이코프와 존슨이 “은유의 본질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즉 우선 은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웹스터 사전이 지적한 대로, 관계된 두 사물, 생각 혹은 느낌이 서로 ‘비교’할 만한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대로, 그 ‘다른 것’(보조관념)에는 ‘낯선 것’이 ‘대조’되기도 하는 상황이 얼마든지 전개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에 보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라는 구절들이 등장합니다. 사랑을 ‘흔들리며 피는 꽃’으로, 삶을 ‘젖으며 피는 꽃’으로 비유하고 있지요. 사랑을 ‘흔들리는 것’으로, 삶을 ‘젖는 것’으로 본 것은 각각 그 둘의 유사성에 주목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안에 시시때때로 사랑의 결실을 막거나 위협하는 일들이 발생하며, 삶을 영위하는 동안에 갖가지 고난과 슬픔이 다가온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사랑과 삶을 둘 다 ‘꽃’으로 본 것은 각각 그 둘의 비유사성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과 삶이 어떠한 양태를 띠고 어떠한 경로를 통과하든 사랑과 삶은 아름답고 화려하고 고귀하며 소중한 것이라는 인식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은유에 드러나 있는, 서로 비교되거나 대조되는 속성들로 인해 사물, 사상 혹은 느낌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이 더욱 명료해질 뿐 아니라 확장된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직유(simile-비슷한 성질이나 모양을 가진 두 사물을 ‘같이’, ‘처럼’, ‘듯이’와 같은 연결어로 결합하여 직접 비유하는 수사법)가 은유와 약간의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두 가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메타포를 이해했습니다. 명징하고 논리적인 사상으로 기독교의 세계를 탁월하게 밝히고 변호한 C. S. 루이스는 최상의 메타포(choice metaphors)를 구사한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그의 책 어느 것이라도 읽기 시작하면 곧 그만이 구사할 수 있는 탁월한 메타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의 개론서 격인 “The Discarded Image”에서도 주목할 만한 다양한 은유가 등장합니다. 그것들 중 두 가지만 아래에 소개합니다.
■“폼페이우스, 아르키타, 트로일루스, 이 세 사람의 유령 모두 자신들이 죽기 전에 그토록 중요해 보였던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하찮음을 보고 웃었다. 우리가 잠에서 깨고 나면 꿈속에서 그토록 커 보였던 문제들이 지극히 사소하고 말도 안 되는 것이었음을 깨닫고 웃게 되는 것과 같다.”(I think all three ghosts – Pompey’s, Arcita’s, and Troilus’ – laughed for the same reason, laughed at the littleness of all those things that had seemed so important before they died; as we laugh, on waking, at the trifles or absurdities that loomed so large in our dreams.)
재산, 지위, 명예와 같이 죽기 전에는 아주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죽고 난 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찮은 대상으로 보이게 된다는 말 자체는 극히 사실적이고도 의미 있는 언명이지만,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선사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메타포가 하나 첨가되면 원래의 의미가 더욱 생동감을 띠게 됩니다. 잠을 자는 동안 꿈 속에서 고뇌하던 문제들이 잠을 깨는 순간 얼마나 시시하고 우스꽝스러운 일들이었는지를 깨닫고 웃게 되는 상황과 비교하게 되는 것이지요. 두 상황에는 유사성이 존재합니다. 이전에는 소중하고 중대한 것으로 여기던 것들을 일순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 유사성에 주목하는 순간 그 둘 사이의 비유사성에도 눈뜨게 됩니다. 즉 죽음이 잠에서 깨어 나는 것이라는 깨달음 말입니다. 이 깨달음은 인생을 꿈으로 여기게 되면서 온갖 인생사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초월적인 영적 자유를 선사해 줍니다. 잠에서 깨어 나는 것을 두려워 할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참된 선이 행복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고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지만, 대부분은 잘못된 경로로 행복을 추구한다. 집이 있는 줄 알면서도 집으로 가는 길을 못 찾는 술 취한 사람과 같다. (...) 하지만 부(富)나 영광 같은 잘못된 경로들조차도 인간들이 진리를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 준다. 왜냐 하면 참된 선은 명예처럼 영광스럽고 부처럼 자족적이기 때문이다. 본성의 성향이 너무나 강력해서 우리는 고향으로 가려고 이만큼 발버둥질하는 것이다. 새장에 갇힌 새가 숲속으로 돌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같다.”(All men know that the true good is Happiness, and all men seek it, but, for the most part, by wrong routes – like a drunk man who knows he has a house but can’t find his way home. (...) Yet even the false routes, such as wealth or glory, show that men have some inkling of the truth; for the true good is glorious like fame and, like wealth, self-sufficient. So strong is the bent of nature that we thus struggle towards our native place, as the caged bird struggles to return to the woods.)
이 글 속에는 두 가지 메타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행복이라는 참된 선을 그릇된 경로를 통해 추구하는 인간과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술 취한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유사성이 존재합니다. 목표는 알지만 그릇된 수단 혹은 잘못된 경로를 선택해서 간다는 점이지요. 이 유사성에 주목하는 순간 비유사성에 눈뜨게 되지요. 즉 모든 사람이 ‘술 취한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사성에 주목하게 되면 인간관이 달라집니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죄다 무언가에 취해 사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술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릇된 경로나 잘못된 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인간과 숲 속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새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발견되는 유사성은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질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비유사성은 인간은 ‘새장에 갇힌 새’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드러난 인간관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인간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 새장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열어 밝히는 메타포 vs. 죽은 메타포-
이처럼 은유는 두 사물, 사상 및 느낌 간의 유사성과 비유사성이라는 두 개의 기둥에 의해, “일상 언어에서 드러나는 것과는 다른 현실의 장을 발견하고 열어 밝혀주는 데 기여”합니다(리쾨르-프랑스 철학자). 사용되는 용어는 일상적이고 평이한 것일 수 있으나 그 용어를 통해 빚어지는 것은 새로운 범주요 낯선 시각이라는 게 은유라는 세계가 품은 힘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무리에게 예수님께서 도전하신 은유들을 잠시 묵상해 보겠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한복음 6:48, 51, 53-55)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무리는 예수님이 바로 옛날부터 장차 임하기로 예언된 선지자임이 분명하다고 단언하고는 당신을 왕 삼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기적이 하나의 은유임을 깨닫는 대신, 앞으로도 똑같은 대상인 떡과 고기를 더 많이 제공받을 수 있는 상황의 맛보기로 여겼던 것이지요. 떡이라는 물질에서 더 진전되거나 확장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에 대한 성화된 상상력, 즉 은유 생성 능력이 결여된 결과였습니다. 그 물질주의자 혹은 물신주의자들 앞에 다시 선 주님께서는 이 기적의 의미를 은유의 날 것 그대로 천명하셨습니다. “나=생명의 떡=내 살=참된 양식”이라는 것이지요. 그 무리들이 당시에 먹은 떡이 바로 당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구속 사건을 가리킨다고 ‘열어 밝히신’ 것입니다. 떡에서 시작하여 십자가로 이어지는 이 새롭고 낯선 범주를 그 은유 문맹자 무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심지어는 제자들이라는 이들도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절)라고 대꾸하면서,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라는 상황이 전개된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요? 무늬만 제자들은 물러갔으나 참된 제자들은 주님의 은유를 이해함으로써 변함 없이 자기 자리들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8-69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씀을 접하며 제가 스스로 던진 질문이 있었습니다. “내 설교나 가르침은 물질주의자의 기대에 영합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제자들의 참된 양식이 되고 있는가?” 주님께서 보여 주신 설교나 가르침의 본을 묵상할 때 제게는 특히 두 가지가 눈에 띕니다. 첫째는 평생 기록된 말씀에 천착하신 것입니다. 기록된 구약 말씀에 근거하여 이 세상에 인간을 입고 오신 당신께서는(히브리서 10:5-7) 말씀에 근거하여 사역을 시작하시고(누가복음 4:18-19=이사야 61:1-2) 진행하시다가 말씀에 근거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마태복음 27:46=시 22:1) 부활하신 후 말씀을 가르치시다가(누가복음 24:44-45, 사도행전 1:3) 승천하셨습니다. 둘째는 가르치실 때 비유를 십분 활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훈 중에 비유를 빼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꼰대’ 같은 말씀의 향연이었겠지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태복음 7:28-29)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무리들의 총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위 있게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앵무새처럼 이미 한 말을 되풀이할 뿐 아니라 꼰대 같이 늘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들은 성경 말씀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무게를 잡고 권위 있게 이야기하려고 시도했어도 그 권위는 듣는 이들에게 상응하는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의 의미를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얼마든지 당신의 메시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갖가지 은유를 활용하여 시의적절하고도 능력 있게 전하실 수 있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정유정 작가가 지적한 것처럼 작가의 상상력의 수준은 “자기화된 지식”이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말씀이 설득력 있게 자기들의 심령에 다가온 현실을 그 무리들이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인식한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살아 숨 쉬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밝히는 예수님의 메타포를 접하면서 언젠가 안도현 시인이 언급한 글이 떠올랐습니다.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다.’ 덧없이 빨리 흐르는 세월을 한탄할 때 흔히 쓰던 말이다. 겉으로 보면 직유가 맞다. 형식적으로는 직유의 체계를 갖췄지만 나는 이런 직유를 ‘죽은 직유’라고 부른다. 이미 어디에선가 많이 들었거나 새로운 미적 충격이 없는 직유가 죽은 직유다. 이런 표현은 우리 삶을 앞으로 전진시키지 못한다. 동어반복의 삶만큼 지루한 것이 없는 것이다. (...) 한마디 말을 하고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새로운 직유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게 우리들의 생활을 종이 두께만큼이라도 풍요롭게 하지 않을까?”
이 글을 다시 읽으며 제 글과 설교를 메타포의 관점에서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작가들이 사용한 메타포나 이야기들을 다양하게 포함하고는 있어도, 제가 직접 찾고 관찰하여 만든 메타포가 부족하고 죽은 메타포를 사용한 경우도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달랐습니다. 그 가르침 속에는 자연 세계에 대한 관찰(예컨대 씨와 그 성장에 대한 다양한 비유들<마태복음 13:24-30, 마가복음 4:1-9, 26-29, 30-32>),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친숙한 전통과 사건들에 대한 관찰(예컨대 누룩 비유<마태복음 13:33>, 잃은 양과 동전 비유<누가복음 15:3-10>, 끈질긴 사람의 비유<누가복음 11:5-8>, 열 처녀의 비유<마태복음 25:1-13>), 최근의 사건들에 대한 관찰(누가복음 19:14-당시 사람들에게 인기 없던 헤롯 아들 아르켈라우스를 반대하여 50명의 대표단이 로마가 가서 항의한 사건) 및 간혹 한 번씩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관찰(부당한 재판관<누가복음 18:2-8>, 부정직한 청지기<누가복음 16:1-9>, 탕자<누가복음 15:11-32>) 등에서 비롯된 온갖 비유들이 차고 넘칩니다. 그것도 간략하게 직유나 은유를 사용하신 경우를 비롯하여 전형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경우나 특정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룬 단편들에 이르기까지 그 방식도 다양합니다.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분들에게 ‘30년간의 깊이 있는 인간 이해의 시간’을 가지신 예수님의 면모에 주목할 것을 권면한 게 빈 말이 아닌 이유입니다.
-도끼 같은 은유-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은유 능력을 개발할 수 있을까요? 우선은 날마다 생활하는 중에 주위를 잘 관찰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은유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인식하면서 그(것)들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그렇게 되면 은유로 활용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본이 바로 이러하지 않을까 합니다. 30세 이전의 예수님의 구체적인 행적은 거의 드러나 있지 않지만 12세 되는 해 유월절을 기하여 예루살렘에 방문하셨을 때 당신께서 보여주신 모습만 독보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께서 이해하신 바를 나누기도 하고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기도 하셨습니다(sitting in the midst of the teachers, both listening to them and asking them questions. And all who heard Him were amazed at His understanding and His answers)(누가복음 2:46-47).
제게는 이 구절들이 당신의 30년 생애를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허둥대거나 서둘지 않으시고 침착하게 앉아 관찰하고 배우셨습니다. 주위 깊게 듣고 관찰하는 일에 우선을 두시면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질문을 더해 가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이해하신 바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도 덧붙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면모는 제 삶과 대조를 보였습니다. 비록 제가 하루 중 앉아 있는 시간은 많을지라도 진지한 자세로 관찰하고 배우기 위해 내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요? 도리어 눈앞에 닥친 긴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갈팡질팡하며 다급하게 서두르거나 그저 별 생각 없이 앉아 시간만 때우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요? 차분히 듣기를 빨리하는 것보다 말하는 데 빠른 명수가 된 때도 얼마나 많았을지요? 조심스럽게 듣지 않았으니 질문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해한 것도 얕아 나눌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수도 없게 되었지요. 이제부터라도 예수님께서 일찍이 보여 주신 배움의 길, 즉 ‘앉기, 듣기, 묻기, 나누기, 답하기’에 형통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다음으로 시를 읽고 낭송하고 외우자는 김용규 선생의 제안을 실천에 옮기는 일입니다. 다양한 수사법들이 일대 향연을 벌이고 있는 시를 읽고 활용하는 것은 은유 능력을 개발하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이지요.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밥 먹는 이유와 같다. 그런데 영혼의 배고픔에는 무관심하다. 시는 영혼의 양식이다. 시는 생명의 원초를 이루는 모유와 같다.”라며 시의 본질적 생명력을 짚은 정호승 시인과는 달리 시의 실리적 효용성을 높이 산 견해입니다. 그러니까 시는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은유를 활용할 수 있는 기량을 닦는 최고의 도구가 되는 셈입니다. 시를 써야 한다면 부담이 될 수 있지만 규칙적으로 시간을 내어 마음에 와닿는 시를 읽고 낭송하며 자연스럽게 외우는 것은 얼마든지 시도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세 번째로 시 뿐 아니라 소설과 희곡을 시간을 내어 읽어 가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활용하신 수사 도구인 비유 중에는 단편 소설과 같은 형태를 갖춘 것도 적지 않습니다. 예컨대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장)나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장)나 열 므나의 비유(누가복음 19장) 같은 것은 눈 밝은 작가에 의해 한 편의 영화나 연극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비유 스토리 중 백미입니다. 그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판타지 소설(픽션)을 인생이라는 다차원적인 현실의 숨겨진 측면들이 조명받는 확장된 비유의 일종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톨킨의 시각은 다른 모든 소설과 희곡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과 희곡 읽기를 통해 자신의 내적 상처를 치유하고 자아를 확장시키는 경험을 지속하다 보면, 보다 밝고 폭넓은 시각으로 세상과 이웃을 인식하고 품게 되어 심금을 울리는 은유를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프란츠 카프카가 친구 폴락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 책이란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If the book we're reading doesn't wake us up with a blow to the head, what are we reading for? (...) A book must be the axe for the frozen sea within us.)
작가가 책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문학적 기여 뿐 아니라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영적 경지도 함께 일러 주고 있는 권면이 아닐까요? “도끼 같은 설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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