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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보편적 원리를 실천하라

보편적인 미덕의 화신,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2)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10. 1.

보편적인 미덕의 화신,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2)

-오디세우스의 인격적 면모-

<인내, 용기 및 지혜의 소유자>

그리스인의 전범이었던 오디세우스가 어떤 인격적 면모를 띠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자질은 인내와 용기였습니다. “참을성 많은 오뒷세우스”(예-4:241; 5:30; 16:258, 266)라는 표현이 부지기수로 등장합니다. 페넬로페의 입을 통해 그의 용기가 언급됩니다. “나는 사자의 용기를 가진 훌륭한 남편을 잃었어. 다나오스 백성들 가운데 온갖 미덕에서 탁월한 분으로 헬라스와 아르고스의 중심부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훌륭한 남편이었지.”(4:724-726) 먼저 그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여하여 혹독한 고난을 겪습니다. 자기의 제안에 따라, 헬레네에게 구혼한 남자들이 그녀가 누구를 남편으로 택하든 그녀의 남편 된 자의 권리를 지켜주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그리스 영웅들과 함께 자기도 헬레네를 둘러싼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왕지사 참여한 전쟁에서 그는 시시때때로 용기를 내어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아가멤논에게 원한을 품고 막사에 틀어박힌 아킬레우스를 다시 전투에 참가하도록 설득한 것도 그였고, 디오메데스와 함께 트로이아 진영을 정탐하러 간 것도 그였으며, 트로이아를 함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목마를 고안해낸 것도 그였습니다. 특히 정탐하러 갈 때에는 “자기 몸을 심하게 매질한 다음 하인처럼 어깨에 누더기를 걸치고 길이 넓은 적군의 도시로 들어”갈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었지요(4:245-246-헬레나가 증언한 내용). 그렇게 영락없는 거지로 변장한 채로 들어갔으니 아무도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 정탐 과정에서 그는 많은 적군을 사살하고 유용한 정보를 수집했을 뿐 아니라 팔라디온이라 불리는 아테나의 유명한 조상(彫像)도 가지고 돌아가지요.

 

줄거리를 통해 이미 일별할 수 있었지만, 트로이아 전쟁이 끝난 지 10년 동안 그가 귀향하는 과정과 귀향한 후에 겪은 고난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알키노오스에게 언급한 대로입니다. “나는 몸매에서나 체격에서나 넓은 하늘에 사시는 불사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필멸의 인간을 닮았기 때문이오. 그대들이 인간들 중에 가장 무거운 고난의 짐을 진 자들을 안다면 그들이 누구건 고통에서 나는 그들과 비슷할 것이오. 아니, 내가 신들의 뜻에 따라 겪은 노고의 자초지종을 다 말한다면 나는 아마 더 많은 재앙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오.”(7:209-214)

 

즉 고난에 관한 한 이 세상의 어느 사람보다도 더 무거운 짐을 졌다는 것입니다. 하데스에서 만난 헤라클레스(‘헤라를 통해 영광을 얻었다’는 뜻)의 환영이 오디세우스에게, “가련한 자여, 그대도 내가 햇빛 아래서 참고 견뎠던 것과 같은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구려.”(11:618-619)라고 말하면서 측은히 여길 정도였으니까요. 헤라클레스는 태어날 때부터 헤라가 보낸 뱀 두 마리의 위협에서 벗어나야 했고, 헤라가 내린 광기로 인해 자기 처자들을 죽인 죗값을 치르기 위해 에우뤼스테우스 밑에서 12년 동안 ‘12고역’을 치른 것을 비롯하여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던 인물이었지요.

 

다음으로 오디세우스는 긍정적으로 말하면 지혜, 부정적으로 말하면 계략에 능한 자였습니다. 하데스에서 알키노오스 혼백이 오뒷세우스에게 말한 대로입니다. “오뒷세우스여! 우리가 보아하니 그대는 거짓말쟁이나 사기꾼 같지는 않소이다. 사실 검은 대지는 아무도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거짓말을 엮어대는 그런 인간들을 씨앗만큼이나 많이 기르고 있지요. 그러나 그대는 하는 말도 우아하지만 그 속에는 지혜가 들어 있소이다.”(11:363-367) 즉 오디세우스가 온 세상에 널려 있는 거짓말쟁이나 사기꾼과는 다른 지혜를 품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사실상 그의 지혜는 트로이아 전쟁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지요. 전쟁의 여신이자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도 혀를 내두르는 인물이었으니까요.

 

“신이 그대와 만난다 해도 온갖 계략에서 그대를 이기자면 영리하고 교활해야 하겠구려. 가혹한 자여, 꾀 많은 자여, 계략에 물리지 않는 자여! 그대는 그대 자신의 나라에 와 있으면서도 그대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기만과 교언을 그만두려 하지 않는구나. 자, 영리함에서는 우리 둘 다 능하니까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 두자. 그대는 조언과 언변에서 모든 인간들 중에 월등히 뛰어나고, 나는 모든 신들 사이에서 계책과 영리함으로 명성을 얻고 있으니 말이다.”(13:291-299)

 

이 작품 속에서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유머러스한 장면 한 가지가 바로 퀴클롭스인 폴뤼페모스에게 오디세우스가 자기 이름을 알려주는 장면이지요. “퀴클롭스, 그대는 내 유명한 이름을 물었던가요? 그대에게 내 이름을 말할 테니 그대는 약속대로 내게 접대 선물을 주시오. 내 이름은 ‘아무도아니’요. 사람들은 나를 ‘아무도아니’라고 부르지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다른 전우들도 모두.”(9:364-367) 나중에 폴뤼페모스가 오디세우스 일행에 의해 눈을 잃는 변을 당한 후에 동굴 안에서 자기를 찾아온 동료 퀴클롭스들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오오, 친구들이여! 힘이 아니라 꾀로 날 죽이려는 자는 ‘아무도아니’요.” 그러자 그 동료들이 그에게 물 흐르듯 거침없이 대답하지요. “그대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이 아무도 아니고 그대가 혼자 있다면 아마 위대한 제우스가 보낸 그 병에서 그대는 결코 벗어날 수 없겠소. 그러니 그대는 아버지 포세이돈 왕께 기도하시오.”(410-412)

 

<경천애인하는 자>

이렇게 인내, 용기 및 지혜를 골고루 갖추고 ‘절륜한 힘과 지칠 줄 모르는 사지와 무쇠로 만들어진 몸’(12:279-280)을 갖춘 오디세우스가, 신들을 경외하고 인간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제게는 이 책 속의 그 무엇보다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아, 슬프도다! 나는 또 어떤 인간들의 나라에 온 걸까? 그들은 오만하고 야만적이고 의롭지 못한 자들일까, 아니면 손님들에게 친절하고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씨를 가진 자들일까?”(13:200-202) 가는 곳곳마다 오디세우스는 이런 표현을 쓰면서(예-6:121; 9:175-176), 그곳 주민들이 자기들을 환대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그가 폴뤼페모스에게 지적한 대로 자기가 믿는 신들도 나그네들과 기도하는 자들을 보호해 주는 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강력한 분이시여! 그대는 신들을 두려워하시오. 우리는 그대의 탄원자들이오. 제우스께서는 탄원자들과 나그네들의 보호자이시며 존중받아 마땅한 손님들과 동행하는 손님의 신이시오.”(9:269-271)

 

그렇지만 이 세상의 강력한 자들은 폴뤼페모스처럼 신(들)을 두려워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지요. “이봐, 나그네! 나더러 신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라고 말하다니 너는 어리석거나 멀리서 왔나 보군. 퀴클롭스들은 아이기스를 가진 제우스도 축복받은 신들도 아랑곳하지 않아. 우리가 훨씬 더 강력한데, 뭐. 내 마음이 명령하지 않는 한 내가 제우스의 미움을 피할 양으로 너와 네 전우를 아끼는 일은 결코 없다.”(9:273-278) 이렇게 말하면서 오디세우스의 동료 2명을 강아지처럼 움켜쥐더니 땅바닥에 내리쳐서 잡아먹었지요. 그렇지만 그는 달랐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신들이 계획한 대로 진행된다고 믿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하데스에서 그가 테이레시아스에게 한 말 그대로입니다. “운명의 실은 모두 신들께서 손수 지으신 것이오.”(11:139-140) 무서운 여신이 살고 있는 키르케 섬에 도착했을 때 그가 지치고 낙심한 동료들을 격려할 때도 이런 자기 확신을 표명합니다. “친구들이여! 아무리 괴롭더라도 운명의 날이 오기 전에 우리가 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가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러니 자, 그대들은 날랜 배 안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는 한 허기에 시달리지 않게 하는 일을 생각하시오.”(10:174-177) 신들이 번창하게 할 때는 재앙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도, 불행을 허락하시면 굳건한 마음으로 참고 견디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믿으면서, “지상에 사는 인간들의 생각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들과 신들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어떤 날을 보내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고백합니다(18:136-137). “사람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무엇을 주든 말없이 신들의 선물을 받아 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18:141-142). 이런 그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천신만고 끝에 이십 년 만에 고향땅에 돌아온 것”을 “전리품을 안겨주시는 아테나의 작품”으로 이해한 것은 결코 유별난 인식이 아니었습니다(16:205-207).

 

신들의 섭리를 믿는 오디세우스는 한편으로 신들에게 기도하는 데 진력하는 자입니다. 오디세우스는 2대 독자로서(16:117-121) “기도를 많이 하여 얻은 아이”였습니다(19:404). 그런 인물답게 당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예-3:338-344; 7:138, 164-165; 13:50-52; 18:417-419) 신들을 두려워하며 범사에 기도하며 살았습니다(예-5:444; 6:324-328; 7:329-333; 20:102-104).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상황이 있습니다. 카륍디스와 스퀼라를 벗어났을 때 배 안에 양식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모든 전우들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손에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 낚시하고 사냥했습니다. “굶주림이 그들의 창자를 갉아먹었으니까요.”(12:332-333) 이런 화급한 상황에서 그가 한 일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마침내 나는 혹시 어떤 신이 내게 귀향의 길을 가리켜주실까 해서 기도하려고 섬으로 올라갔소. 나는 섬을 돌아다니다가 전우들에게서 벗어나게 되자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손을 씻은 뒤 올륌포스에 사시는 모든 신들께 기도했소.”(12:333-337)

 

사실상 그의 기도는 일상에서의 독백이나 대화의 형태로 진행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아테나와는 수시로 대화했고(예-6:323-31) 화급한 일을 당할 때는 신음하며 신들에게 외치기도 했습니다. 헬리오스의 섬에서 자기가 자는 동안 그의 동료들이 그곳의 가축을 잡아먹게 되자 이렇게 기도하지요. “아버지 제우스와 영생하고 축복받은 다른 신들이여! 그대들은 틀림없이 나를 파멸시키시려고 달콤한 잠으로 나를 재우신 것입니다. 그동안 뒤에 남아 있던 내 전우들이 엄청난 일을 생각해냈으니까요.”(12:371-373) 특히 아테나는 그의 모든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해주고 보호해준 여신으로서, 갖가지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와 대화한 경우가 부지지수였지요(예-7:13-20; 13: 222-223; 13: 288-290; 13:312-313; 20:30-31). 그가 겪은 온갖 노고에서 그와 동행하면서 그를 지켜주었지만 그가 아테나를 알아보지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예-13:300-301). 그렇지만 그녀의 도움은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릴 정도로 확연히 드러난 특별한 호의였습니다. 자기를 찾아온 텔레마코스에게 네스토르가 한 말 그대로입니다. “제발 빛나는 눈의 아테나에게 전에 우리 아카이오이족이 고통받던 트로이아인들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오뒷세우스를 돌보아주셨듯이 그렇게 자네를 사랑해주셨으면 좋으련만! 정말이지 팔라스 아테나께서 눈에 띄게 그분을 도우신 것처럼 그렇게 눈에 띄게 신들께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네.”(3:218-223)

 

이런 그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도착한 후에 아테나를 만나 대화할 때 다음 고백을 한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대목입니다.

 

“아아, 여신이시여! 정말이지 그대가 모든 것을 조리 있게 일일이 설명해주시지 않았던들 나는 내 궁전에서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처럼 비참하게 죽고 말았겠지요. 자, 어떻게 하면 내가 그들을 벌줄 수 있는지 그대가 계략을 짜주십시오. 우리가 트로이아의 번쩍이는 머리띠를 풀었을 때처럼 그대가 몸소 내 곁에 서서 대담한 용기를 불어넣어주십시오. 그대가 그처럼 열성적으로 내 곁에 서주신다면 빛나는 눈의 여신이시여, 나는 그대와 그대의 호의적인 도움에 힘입어 삼백 명의 남자와도 싸우겠습니다. 존경스러운 여신이시여!”(13:383-391)

 

트로이아 전쟁 후 아가멤논은 귀향한 후 아내의 계략 때문에 비참한 죽음을 당했지만, 오디세우스는 그 엄청난 여정을 통과하고도 생존하여 고향에서 자기를 대적하는 수많은 구혼자들을 처단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늘 겸허하게 신의 뜻을 여쭙고 신의 은혜(지혜, 용기 및 ‘호의적인 도움’)를 구하는 외경(畏敬)의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는 요정들에게도 기도하는 이었습니다(13:335).

 

신들을 경외하는 오디세우스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그들을 존중할 줄 아는 모습은 여러 곳에서 드러났습니다. 키코네스족의 나라에서 전리품을 챙기고 빨리 도망치자고 오디세우스가 권고했지만, 멍청한 동료들이 이 말을 귓등으로 듣고 먹고 마시는 데 정신 파는 동안 다시 몰려온 키코네스족과 싸우다 6명의 동료들이 희생당하지요. 자기 말에 불순종한 그들을 원망하는 대신 그는 항해하기 전에, “들판에서 키코네스족의 손에 죽은 불운한 전우들을 저마다 세 번씩 부르기 전에는 양 끝이 흰 배들이 항해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9:64-66) 한 번은 라이스트퀴고네스족의 땅에서 오디세우스 일행이 공격을 당해 그 몸들이 작살로 꿰어져 그곳 주민들의 식사로 드려지는 참상을 겪게 된 결과, 오직 오디세우스의 배만 남아 키르케 여신의 아이아이에 섬에 도착하게 되지요. 모두 얼마나 상심되고 피곤했던지 꼬박 이틀 낮 이틀 밤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그저 누워 있기만 했습니다. 바로 이때 오디세우스는 먼저 일어나 전우들에게 점심을 먹일 채비를 하러 배가 있는 곳으로 가지요. 그때 어떤 신이 혼자 가고 있는 그를 불쌍히 여겨 큰 사슴 한 마리를 보내주어 잡아서 진수성찬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의 ‘인정 넘치는 리더십’(Compassionate leadership)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지요.

 

아버지를 만나러 갔을 때 그 집 하인 돌리오스에게 던지는 말속에도 사람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습니다. “노인장! 식사하게 앉으시오. 놀라실 것 없어요. 우리는 아까부터 음식에 손을 내밀기를 열망하며 홀에 머문 채 줄곧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24:394-396) 신들의 뜻을 좇아 무도한 구혼자들을 처단해서 승리했을 때도, 자기와 동역해 준 유모에게 이렇게 당부하지요. “할멈, 마음속으로만 기뻐하시오. 자제하고 환성은 올리지 마시오. 죽은 자들 앞에서 뽐내는 것은 불경한 짓이오.”(22:411-412) 이렇게 자상한 아들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죽게 되었다는 그의 어머니의 고백이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데스에서 만난 어머니가 그에게 한 말이 이러합니다. “잘 겨냥하는 활의 여신께서 부드러운 화살들을 갖고 찾아와 궁전에서 나를 죽이신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서글픈 쇠약으로 사지에서 생명력을 앗아가는 어떤 질병이 나를 엄습한 것도 아니란다. 오히려, 영광스러운 오뒷세우스여! 너와 네 조언들과 네 상냥함에 대한 그리움이 꿀처럼 달콤한 목숨을 내게서 빼앗아갔단다.”(11:198-203) 이런 아버지 오디세우스의 태도를 아들 텔레마코스가 쏙 빼닮았습니다. “그[텔레마코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아버지 오뒷세우스가 일어서며 자리를 내주었다. 텔레마코스는 오뒷세우스를 만류하며 말했다. ‘그대로 앉아 계시오, 나그네여! 우리는 농장 안 다른 곳에서 자리를 찾아보겠소. 자리를 마련해줄 사람이 여기 있으니 말이오.’”(16:42-45) 오디세우스와 같이 경천애인의 미덕을 온전히 구비한 자, 이것이 바로 궁극적으로 호메로스가 인정한 진정한 인간의 면모가 아니었을까요?

 

-반면교사들의 인격적 면모-

오디세우스가 구현한 경천애인의 자세는 그의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인들 대부분이 채택한 삶의 방식이자 인생의 방향이었습니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모두 다 이렇게 믿고 생활하는 측면에서는 똑같았습니다. 심지어는 파렴치한 구혼자들 중에서도 그렇게 믿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래의 실례들을 참고해 보세요.

 

(파이아케스족의 알키노오스의 딸인 나우시카아가 시녀들에게 한 말) "그런데도 여기 이 불운한 남자[오뒷세우스]가 떠돌아다니다가 이리로 왔으니 우리는 지금 이분을 돌보아주어야 해. 나그네와 걸인들은 모두 제우스께서 보내시니까, 작은 보시라도 소중한 법이지.“(6:206-208)

(연로한 돼지치기가 거지로 가장한 오뒷세우스에게 한 말) “나그네여! 그대보다 못한 사람이 온다 해도 나그네를 업신여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모든 나그네와 걸인은 제우스에게서 온다니까요. 우리 같은 사람들의 보시는 작지만 소중한 법이오. 더 이상의 보시는 하인들의 권한 밖이오. (...) 나그네여! 내가 그대를 내 오두막으로 데려와 환대하고 나서 다시 그대를 죽여 그대의 소중한 목숨을 빼앗는다면 그것이 과연 지금이나 훗날에 사람들 사이에서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소? 그러고도 내가 과연 크로노스의 아드님 제우스께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겠소?”(14:56-58, 402-406)

(안티노오스가 변장한 오뒷세우스를 하대하자 구혼자들에게서 나온 말) “안티노오스! 저 불운한 부랑자를 치다니 그건 잘못이오. 그대는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오. 만일 그가 하늘에 사시는 어떤 신이라면 말이오. 신들은 온갖 모습을 하고는 낯선 나라에서 온 나그네인 양 도시들을 떠돌아다니며 인간들의 교만과 바른 행실을 굽어보고 계시니 말이오.”(17:483-487)

 

즉 당대의 그리스인들은 나그네의 모습 속에서 신의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그 나그네를 따뜻하게 대접하고 환대하는 것이 바로 신을 섬기는 길이 된다고 보았지요. 그래서 나그네를 제대로 대접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기도할 자격도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라는 걸출한 한 영웅의 삶을 소개하면서 그의 성숙한 인격적 면모를 본받도록 의도하고 있지만, 그러한 삶의 자세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것임을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견해와 실행을 통해 열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메로스의 의도는 그 반면교사들을 제시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컨대 아카이오이족 장수 두 명 중 한 명인 아이아스(다른 한 사람은 오디세우스)를 보세요. 귀향하던 중 포세이돈이 아테나의 미움을 산 그를 구해서 귀라이 암초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오만불손하게도 “자기가 신들의 뜻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크나큰 심연에서 벗어났다고 큰소리”(4:504-505) 쳤지요. 그 방자한 소리를 들은 포세이돈은 즉시 자기 삼지창을 들어 귀라이 암초를 두 동강 내버려 그가 앉은 쪽이 가라앉도록 해서 그를 바닷속으로 낚아채버립니다. 교만의 끝장판은 무도하고 무례한 인간 군상의 대표 격인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지요. 아테나가 거지로 변장한 오디세우스에게 그 구혼자들 중 올바른 자와 무도한 자를 구분할 수 있도록 그들 사이에서 빵 조각을 모으라고 재촉한 적이 있지만, 그들 중 단 한 명도 곧 닥칠 재앙에서 구해내지 못할 운명이라는 점을 간파하지요(17:360-364). 그들에 대한 평가는 돼지치기인 에우마이오스가 한 마디로 잘 표현했습니다. “신들의 노여움을 생각지 않는 동정심 없는 구혼자들”(14:81-82)이라고. 우선 그들은 “가혹한 행위를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정의와 인간들의 도리에 맞는 행위를 존중”(14:83-84)하는 신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무도하고 방자하게도 페넬로페에게 정당한 방법으로 구혼하지도 않고, 귀향하지도 않으면서 오디세우스의 재물을 탕진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14:90-92). 거기에다 텔레마코스를 살해할 계략까지 꾸몄지요. 그래서 그들을 다 처단한 후에 오디세우스가 유모인 에우뤼클레이아에게 이렇게 지적하지요. “할멈, (...) 여기 이자들은 신들의 운명과 자신들의 못된 짓에 의해 제압된 것인즉, 자기들을 찾아오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든 착한 사람이든 지상의 인간들을 어느 누구도 존중하지 않았던 것이오. 자신들의 못된 짓 때문에 이자들은 비참한 운명을 맞은 것이오.”(22:411-416)

 

즉 그들은 신의 섭리와 자기들의 악행에 대한 벌로 처단된 것인데, 그 악행의 본질은 신들에 대한 오만함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멸시와 무자비함이었던 것입니다.

 

-신들의 주권과 인간들의 책임의 관계-

호메로스는 자신의 서사시의 주제가 “인간들과 신들의 행적”(1:338)이라고 페넬로페의 입을 빌어 일러 줍니다. 우선은 세상만사가 신들의 뜻 혹은 신들이 점지해 준 운명에 의해 진행된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이미 언급한 본문(6:187-91) 외에도 아래와 같은 지적이 작품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예컨대 헬레나가 남편 메넬라오스에게, “오늘은 이 사람에게 내일은 저 사람에게 행복과 불행을 주세요. 제우스 말이에요. 그분은 전능하시니까요.”(4:237-238)라고 언급합니다. 알키노오스가 파이아케스족의 지도자들에게, “물론 그[오뒷세우스]는 그곳에서 나중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았을 때 운명의 여신과 준엄한 여신들이 그를 위해 실을 자아놓으신 것은 무엇이든 더 겪겠지만 말이오.”(7:196-198)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심지어 호메로스의 서사시의 배경이 되는 트로이아 전쟁의 결과도 사실상 신들의 뜻에 의해 예정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마는 트로이아인들이 손수 성채로 끌어들인 것이다. 목마가 서 있는 동안 트로이아인들은 그 주위에 모여 앉아 열띤 논쟁을 벌였다. 세 가지 다른 계획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으니, 속이 빈 목조물을 무자비한 청동으로 박살 내거나, 아니면 벼랑 끝으로 끌고 가 바위에 내던져버리거나, 아니면 신들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크나큰 자랑거리로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결국 이 마지막 계획이 이뤄지도록 정해져 있었으니, 트로이아인들에게 죽음과 죽음의 운명을 안겨주려고 아르고스인들의 장수들이 그 안에 몸을 숨긴 거대한 목마를 받아들이자마자 도시는 파괴될 운명이었다.”(8:504-513)

 

목마에 대해 트로이인들이 첫 번째나 두 번째 선택을 했다면, 목마 안에 대기하고 있던 오디세우스와 그 동료들은 다 떼죽음 당했을 터이고 트로이인들은 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 번째 선택을 하도록 미리 운명 지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의 뜻이나 계획이 불공정한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호메로스는 오히려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이 일관된 도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일리아스’나 다른 서사시와는 다른 측면). 예컨대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가 변장한 오뒷세우스에게 한 말속에 그런 면모가 담겨 있습니다. “자 드시오, 나그네여! 이것은 새끼 돼지로 하인들이 내놓을 수 있는 음식이오. 살진 돼지는 마음속으로 신들의 노여움을 생각지 않는 동정심 없는 구혼자들이 먹어치우니까요. 그러나 축복받은 신들께서는 가혹한 행위를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정의와 인간들의 도리에 맞는 행위를 존중하지요.”(14:80-84) 신들이 정의와 도리를 존중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리에 맞게 살아가는 이들을 복주고 동정심 없이 가혹한 행위를 일삼는 이들에게 심판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옭은 길’이 존재한다는 점을 제우스가 명토 박아 말하기도 하지요. 구혼자들을 다 처치한 후에 그들의 가족들이 오디세우스에게 복수하겠노라고 몰려올 때 아테나가 제우스에게, “앞으로도 사악한 전쟁과 무시무시한 전투의 소음을 불러일으키자는 거예요, 아니면 양편을 화해시키자는 거예요?”라고 따지자, 제우스는 그녀에게 이렇게 답변하지요.

 

“내 딸아! 그 문제를 왜 내게 따지고 묻는 것이냐? 오뒷세우스가 돌아와서 그자들에게 복수한다는 계획은 네가 생각해내지 않았더냐? 네 뜻대로 하려무나. 하지만 나는 너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말하겠다. 고귀한 오뒷세우스가 구혼자들에게 복수한 뒤에는 양편이 굳은 맹약을 맺게 하고, 그가 언제까지나 왕이 되게 하라. 우리는 그들이 아들들과 형제들의 살육을 잊게 해 주자꾸나. 그리하여 그들이 이전처럼 서로 사랑하게 되어 그들에게 부와 평화가 충만하게 해 주어라!”(24:478-486)

 

결국 신들이 정의와 도리를 존중하고 옳은 길을 선호한다는 이런 언명들은, 인간들의 행동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측면을 드러내 줍니다. 비록 신들이 아테나 여신이 한 것처럼 구혼자들의 마음에 생각을 심기도 하고(21:1-4), 그들 사이에 웃음을 심고 생각을 혼동시키는 경우도 있지만(20:345-349), 인간들의 행동은 각자가 몸소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영국 작가 애덤 니콜슨이 지적한 측면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을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삶에서 가장 심오한 도전에 직면할 때 마땅히 취해야 할 선택들”(the choices people must make when faced with the deepest challenges of their lives)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러한 선택들이 “도덕적 선택의 백과사전”(an encyclopedia of moral choice) 역할을 감당하게 되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항구적인 전거(典據)(a stable reference)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들의 주권과 우리의 책임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둘 사이에는 신비로운 교호 관계가 존재하여 제한된 우리의 안목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지만, 그 두 가지 각각을 참된 현실로 여기며 우리의 몫을 다하는 게 지혜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자세는 오웰의 소설 ‘1984’에서 거론되는 ‘이중사고’(Doublethink)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중사고란 뻔히 실상을 다 알면서도 거짓말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말로 주장하면서 자기 생각을 억압하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 대신 이 두 가지를 ‘이율배반’(Antinomy-본 블로그 중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좋은 일에만 하나님의 섭리가 간여한다?” 참조)의 시각으로 이해하는 게 적실하지 않을까 합니다. 마치 물리학계의 고민거리였던 “파동-입자 이원성”(Wave-particle duality) 문제를 1920년대에 와서 독일의 양자 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크가 해결했듯이 말입니다.

 

호메로스는 이런 난제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삶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그 교호 작용을 실감 넘치게, 그렇지만 담당하게 읊을 뿐입니다. 예컨대 한편으로는 오디세우스 일행이 10년에 걸친 천신만고의 여정을 겪은 것은 퀴클롭스의 눈을 멀게 하여 그 아버지 포세이돈이 격노한 결과였지만(11:100-106), 다른 한편으로 오디세우스는 그것이 “전리품을 안겨주시는 아테나의 작품”(16:205-207)이라고 고백하지요. 사실상 삼촌인 포세이돈과 겨루기 원치 않았던 아테나가 허용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디세우스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13:339-343).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타케의 오디세우스 집안에서 그 많은 구혼자들이 한 날에 다 몰살당한 것은 파렴치한 행위를 일삼던 그들의 패악 때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파렴치한 행위가 시작된 것은 오디세우스 일행이 헬리오스의 가축들을 해코지했기 때문에 예정된 불상사이기도 했지요(11: 106-119). 이렇게 인간의 선택과 신들의 섭리가 신비로운 방식으로 엮여 진행되는 게 바로 우리 인생의 신비 중 신비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들이 자기 멋대로 인간들에게 복을 주고 화를 준다는 시각이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셈입니다. 복을 받은 자와 화를 당한 자들이 나름대로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을,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의 곳곳에서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어떤 결과를 맞이했을 때,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도 지적해 주고 있지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자기 절제하며 옳은 선택을 모색해 가면 살 길이 마련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비록 포세이돈의 원한을 산 상태였지만, 오디세우스가 “자신과 전우들의 마음을 억제하려고만 한다면”(11:105-106) 귀향할 수 있다는 예언도 다시 받게 되었으니까요.

 

취해야 할 올바른 선택 중에 신들께 탄원을 올리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자세도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는 점도 주목거리입니다. 앞에서 오디세우스가 기도하는 본을 보여준 대로, “제우스께서는 존경스러운 탄원자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7:162-165). 가장 극적인 탄원자 중에 퀴클롭스족 폴뤼페모스가 포함됩니다. 자기들이 제우스나 다른 축복받은 신들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에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며 오만불손을 떨던 그(9:269-278)는 오디세우스 일행에게 눈을 잃는 참사를 당하자 태도가 돌변하여 자기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탄원을 올리지요.

 

“내 말을 들으소서, 대지를 떠받치는 검푸른 머리의 포세이돈이시여! 내가 진실로 그대의 아들이고 그대가 내 아버지이심을 자랑스럽게 여기신다면 이타케의 집에서 사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도시의 파괴자 오뒷세우스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해 주소서. 그러나 그자가 가족들을 만나고 잘 지은 집과 제 고향땅에 닿을 운명이라면 전우들을 다 잃고 나중에 아주 비참하게 남의 배를 얻어 타고 돌아가게 하시고 집에 가서도 고통받게 해 주소서!”(9:528-535)

 

그가 이렇게 탄원하자 포세이돈이 그의 기도를 들었습니다(9:536-537). 자기가 교만을 떨다 눈멀게 된 상황에서 자기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내용을 보세요. 이 기도를 읽다가 더욱 놀란 것은 그렇게 위중한 순간에도 이 퀴클롭스가 신의 섭리에 대한 배려가 배어 있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바로 이러한 자세가 호메로스가 이상적으로 여긴 성숙한 삶의 한 면모요, 그가 모든 그리스인들이 본받길 원한 외경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오디세우스의 여정과 본향의 의미-

오디세우스 일행이 키르케가 사는 섬으로 갔을 때 벌어진 일입니다. 이전에 당했던 비극적인 안티페테스의 소행과 퀴클롭스의 폭력 사건들 때문에 이번에는 두 패로 나뉘어 조심스럽게 섬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먼저 앞서기로 정해진 에우륄로코스 일행이 키르케가 사는 궁전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베를 짜던 그녀가 곧장 나와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녀[키르케]는 그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등받이와 안락의자에 앉히고 그들을 위해 치즈와 보릿가루와 노란 꿀과 프람네 산 포도주를 함께 섞어 저으며 여기에 해로운 약도 탔으니, 그들이 고향땅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하려는 것이었소. 내 전우들이 그녀가 준 것을 다 받아 마시자마자 그녀는 즉시 그들을 지팡이로 툭툭 쳐서 돼지우리에 가두었소. 그리하여 그들은 돼지의 머리와 목소리와 털과 생김새를 갖게 되었으니 분별력만은 여전하여 전과 다름없었소. 그들은 이렇게 울면서 갇혔고 키르케는 그들에게 땅바닥에서 뒹굴기 좋아하는 돼지의 양식인 상수리와 도토리와 층층나무 열매를 먹으라고 던져주었소.”(10:232-243)

 

본향을 잊게 되면 돼지로 변합니다. “동물 농장”의 반대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신약 성경 중 누가복음의 탕자의 신세가 된 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탕자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배를 채울 ‘쥐엄 열매’도 충분했습니다(누가복음 15:16). 돼지 신세면 어떻습니까, 배가 부른데. 고향 집 생각이 더 이상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오디세이아가 “장기간의 여정을 겪는 영웅 유형”(the pattern of the hero taking a journey)이라는 ‘원형’(archetype=신화, 문예, 의식의 주제나 모티프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보편적 상징)을 간직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오디세이아'를 읊은 호메로스에게 이 귀향하는 여정과 귀향을 막는 요소들은 주요한 모티프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키르케의 사례뿐 아니라 다른 여러 장소에서도 그 동일한 주제가 되풀이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디세우스 일행의 두 번째 정박지인 로토파고이족의 나라에서도, “꿀처럼 달콤한” 신비로운 식물인 로토스를 먹은 뒤 귀향은커녕 귀향하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채 그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동료들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데스에서 벗어나 통과한 난 세이렌 자매의 섬도 마찬가지입니다. 풀밭에 앉아 낭랑한 목소리로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인간들은 누구건 다 유혹”하는 그 자매에게 호림 당하면, 귀향은커녕 뼈만 남게 되지요. “그들 주위에는 온통 썩어가는 남자들의 뼈가 무더기로 쌓여 있고 뼈를 둘러싼 살갗은 오그라들고 있어요.”(12:45-46)라고 묘사된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례들과 차원을 달리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1년만 머문 키르케의 섬과는 달리 무려 7년간이나 머문 섬의 경우입니다. 그곳은 모든 동료들이 죽임 당한 뒤 오디세우스가 홀로 난파되어 도착한 요정 칼륍소의 오귀기에 섬이었습니다. 그녀가 자기 섬으로 난파되어 온 오디세우스를 사랑하게 되어 돌봐주면서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않게 해 주겠다고 속삭이지요. 그렇지만 오디세우스는 그녀와 함께 7년 동안이나 살면서도 그녀의 제안에 흔들리지 않고, 도리어 “눈물과 신음과 슬픔으로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며(5:82-83) 귀향할 날만을 고대합니다. 그에게는 “노를 갖춘 배도 없고 바다의 넓은 등으로 그를 데려다 줄 전우들도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지요(5:16-17). 결국 아테나가 제우스에게 간청하여 그의 재가를 얻어 귀향에 성공하게 됩니다. 사실상 호메로스에게 ‘귀향하지 않는 오디세우스’란 ‘소리 없는 아우성’(voiceless outcry)이나 ‘잔인한 친절’(cruel kindness)이나 ‘한탄하는 낙관주의자’(mournful optimist)와 다름없는 모순어법(oxymoron)이겠지요.

 

여정과 귀향이라는 모티프와 함께 유의해야 할 점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오디세이아’는 총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 12권이 그의 다양한 여정으로 채워져 있고 나머지 12권은 귀향 이후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작품 중 무려 절반이나 되는 내용이 귀향 후에 오디세이아가 직면하는 도전과 응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지요. 이 작품을 단순히 천신만고의 여정 끝에 맞이하는 극적인 귀향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귀향 후 그가 한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측면과 연관하여 제가 주목한 부분은 구혼자들을 처단한 오디세우스의 행적이 사실상 제우스와 아테나의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예컨대 본향 이타케에 도착한 후 텔레마코스와 만났을 때, 오디세우스가 “나는 지금 너와 함께 적군을 도륙할 일에 관해 의논하라는 아테나의 지시를 받고 이리로 오는 길”(16:233-234)이라고 밝히면서 구혼자들의 수를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구혼자들을 적군이라고 인식하면서 그들을 처단하는 것이 아테나 여신의 지시라는 것입니다. 그 질문을 받고 텔레마코스는 구혼자 108명(공교롭게도 ‘백팔번뇌’<百八煩惱>와도 같은 숫자)에 시종 6명이 버티고 있다고 대답하면서, 아버지에게 어떤 협력자들이 자기 두 사람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겠는지 심사숙고해보도록 권면합니다. 그때 오디세우스가 한 답변이 주목거리입니다. “내가 너에게 이를 것인즉 너는 명심해 들어라. 아테나와 아버지 제우스라면 우리의 협력자로서 충분하겠는지, 아니면 내가 다른 협력자를 생각해내야 하겠는지 너도 심사숙고해보아라.” 이 말을 들은 텔레마코스는 바로 상황을 납득합니다. “방금 말씀하신 그 두 분이라면 정말 훌륭한 협력자들이에요. 그 두 분께서는 구름 위에 높다랗게 앉아 계시고 다른 인간들은 물론이고 불사신들도 다스리시니까요.”(16:259-265) 무려 3년간이나 오디세우스의 궁전에서 주인 행세를 하며 온갖 살림을 먹어치우며 페넬로페를 괴롭힌 그 파렴치한 구혼자들(13:376-378, 395)을 처단하는 일은, 아테나 여신이 오디세우스 곁에서 그를 경호하면서 진행하는 심판이었던 셈입니다(13:393-394). 그러므로 ‘이타케’는 단순히 오디세우스가 돌아가야 할 물리적인 본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적 통치와 공의(公義)가 살아 숨 쉬는 이상적인 곳입니다.

 

우리 모두에겐 본향에 대한 보편적 갈망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니라는 것은, 나이 들어 고향땅을 밟아 본 사람들은 다 압니다. 마치 첫사랑을 그리워하다가 다시 만났을 때 왠지 아쉬움이 남는 것처럼, 고향이 그리워 다시 찾아가 보았을 때 뭔지 모를 안타까움이 가슴속에 자리 잡는다는 것을요. 고향이 옛 추억을 되살려 주고 그리워하던 마음을 다소 위무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자기 그리움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즉 그곳이 우리가 그토록 그리던 본향이 아니라는 것을요, 이번 추석 고향 방문 시에도 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본향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신적 통치와 공의(公義)가 살아 숨 쉬는 이상적인 곳’이자, 우리 ‘존재의 본향’이 아닐까 합니다. 고향땅이나 부모님 너머에 존재하는 시원적(始原的)인 본향 말입니다. 만일 자기에겐 그런 본향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래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어떠한 것도 그 본향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 누릴 게 아무것도 없어도 그 본향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는 한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의 요소들이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그 요소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들이지요. 감사한 심정으로 흡족하게 즐길 대상들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삶이 우리에게 선사해 주는 선물들을 골고루 누리지 못하는 것만큼 불쌍한 인생은 또 없을 것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누릴 것 천지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각자에게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복 중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광활한 우주 속에 유일하게 생명이 존재하는 이 지구라는 땅 위에서 생명을 가진 존재로, 그것도 인간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일인지요. 현재까지 어떠한 첨단 과학도 우주 속에 생명체가 존재하는 다른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생명과 함께 누릴 수 있는 복 목록은 끝이 없습니다. 각자의 시각과 역량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인식할 수 있을 만큼 그 목록이 늘어날 테니까요. 신선한 공기, 쪽빛 하늘, 창공에 빛나는 별들, 새파란 바다, 고요히 흘러가는 강물, 늘 푸른 산들, 기기묘묘한 산세, 싱그러운 나무들, 철 따라 피는 예쁜 꽃들, 형형색색의 단풍잎들, 고즈넉한 눈길, 싱싱한 채소들, 달고 맛있는 과일들, 귀엽고 온순한 동물들, 신비로운 음색으로 지저귀는 새들, 맑고 시원한 생수, 귀여운 아기들, 동네 아이들의 흥겨운 목소리, 예의 바른 젊은이들, 품위 있는 노인들, 친절하고 자상한 말, 맛있는 음식들, 삶을 나누는 가족들, 형제만큼 친밀한 벗들,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음악, 삶의 이면의 진실을 보여주는 그림들, 감성을 풍요롭게 해주는 문학 작품들, 신통한 스마트폰, 편리한 교통수단 등.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곤궁한 삶을 영위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 것도 현실이지만,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복 목록이 아닐까 합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가 누릴 수 있는 복이 이토록 소중하고 황홀한 것이기에, 오디세우스가 하데스에서 만난 아킬레우스를 위로한다고 던진 말에 대해 그가 다음과 같이 응답했겠지요.

 

오디세우스: “하지만 그대로 말하면 아킬레우스여, 예전에도 그대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요. 그대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아르고스인들은 그대를 신처럼 추앙했고, 지금은 그대가 여기 사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통치자이기 때문이오. 그러니 아킬레우스여, 그대는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마시오.”(11:482-486)

아킬레우스: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말하지 마시오. 영광스러운 오뒷세우스!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다스리느니 나는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뱅이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11:488-491)

 

죽은 이후에 누릴 어떠한 영광스러운 지위보다도 생명 있는 존재로 이 현세에서 사는 삶이 더 복되다는 것이지요. 비록 그 자리가 품팔이하는 머슴의 위치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생명’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생명의 시원(始原)은 어떠한 것일까요? 생명의 의미와 고향이나 부모님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시원적(始原的)인 본향을 논의하는 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 혹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도덕 문제와 마찬가지로 종교 문제는 과학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예컨대 과학이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 현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연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말할 수가 없지요. 반복 가능한 관찰과 실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대상이니까요. 사정이 이러한데도 과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신을 믿지 못하겠다는 분들을 보면 말문이 막히지요. 그들 중에는 언필칭 세계적인 과학자라는 이들도 몇 명이 있어 과학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오도하는 상황이 왕왕 벌어지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종교의 문제는 비과학적인 영역이지만 반과학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 논의하고 있는 ‘생명’이나 ‘존재의 본향’이나 ‘신적 통치와 공의(公義)가 살아 숨 쉬는 이상적인 곳’은 비과학적인 것이므로 관심 없다는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아인슈타인의 조언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혹은 그 문제와 연관하여 피조물이란 존재의 생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아는 것은 종교적이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당신은 질문할 게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게 의미가 있긴 하냐고? 나는 대답한다. 자기 자신의 삶과 자기 동료 피조물의 생명을 무의미하다고 간주하는 사람은 불행할 뿐 아니라 도저히 인생에 적합한 존재가 아니다.”(What is the meaning of human life, or, for that matter, of the life of any creature? To know an answer to this question means to be religious. You ask: Does it make any sense, then, to pose this question? I answer: The man who regards his own life and that of his fellow creatures as meaningless is not merely unhappy but hardly fit for life.) (Albert Einstein, “Ideas and Opinions”)

 

생명의 복을 누리는 것만을 인생의 전부로 보는 게 낭패라는 점을 오디세우스의 귀향이라는 모티프가 역설하고 있습니다. 현세의 좋은 것들을 즐기는 데만 함몰된 인생은 기껏해야 돼지의 삶이자 뼈와 살이 썩어가는 삶이라는 것이 오디세우스의 교훈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로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속 그 갈망의 공간을, ‘생명의 시원’을 모색하는 여정을 통해 채워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는 게 아인슈타인의 권고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것들이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그 그리운 본향의 실체를 발견하고, 그 본향에 도달할 때까지 그 실체에 대한 갈망을 지속해 가는 게 우리 인생의 본분이 아닐까 합니다.

 

-보편적 미덕과 본향의 의미-

서두에서 드린 질문이 있습니다. 그리스가 보편적인 미덕의 전형으로 내세운 오디세우스가 과연 “인간의 능력이나 가치보다 더 우월한 어떠한 능력이나 도덕 가치도 부인”하는 인본주의자였을까 하는 질문이었지요. 이제 ‘오디세이아’를 정독한 결과 어떻게 결론지을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보다 더 우월한 능력을 부인하기는커녕 그는 자신의 인생이 신들이 계획한 대로 진행된다고 믿고 평생토록 신들을 경외하며 살았습니다. 신들에게 기도하는 일에 진력한 것이 그 증거 중 한 가지입니다. 늘 신의 뜻을 여쭙는 겸손과 신의 은혜를 구하는 외경(畏敬)의 자세 때문에 천신만고의 10년 여정을 마감하고 귀향했을 뿐 아니라, 백 명이 넘는 구혼자 대적들을 다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보다 더 우월한 도덕 가치를 부인하기는커녕 그는 신들을 경외하는 자세를 타인에게 친절하고 이웃을 존중하는 미덕으로 구현해 냈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여긴 게 아니라, “신의(神意)가 만사의 근본”이라고 믿으며 그 신의 뜻을 좇아 인간을 사랑하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인본주의자 오디세우스는 없습니다!

 

오디세우스가 구현한 ‘경천애인’의 삶의 방식은 그리스인들이 채택한 삶의 길이자 인생의 방향이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다 이렇게 믿고 생활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므로 당대의 그리스인들은 나그네 속에서 신의 모습을 엿보았고, 그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이 바로 신을 섬기는 길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반대로 나그네를 홀대하는 사람은 기도할 자격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나그네를 업신여기거나 소홀히 대접하는 것 자체가 신들에 대한 교만한 자세의 외적 표현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라는 걸출한 한 영웅의 성숙한 인격적 면모를 그리스인들이 본받도록 의도하고 있지만, 그러한 삶의 자세가 보편타당한 미덕이라는 점을 갖가지 등장인물들의 의견과 실행을 통해 열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과 신들의 행적”을 자기 서사시의 주제로 삼은 호메로스는 세상만사가 신들의 뜻 혹은 운명에 의해 진행된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그러면서도 신의 뜻이나 계획이 불공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신들의 모습은 일관된 도덕성을 지향한다고 읊었습니다. 이런 언명들 때문에 인간들의 책임이라는 측면이 도드라집니다. 신들의 주권과 우리의 책임 사이에는 신비로운 교호 관계가 존재합니다. 한정된 우리 안목으로는 그 전모를 다 파악할 수 없지요. 그러므로 그 두 가지 각각을 진실로 여기며 우리가 맡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호메로스가 이런 난제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갖가지 인생의 장 속에서 벌어지는 그 교호 작용을 현실 그대로 읊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들의 섭리와 인간의 선택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엮여 진행되는 게 바로 우리 인생의 신비임을 말없이 천명하고 있는 셈이지요. 사정이 그렇다면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들이 순전히 자의적으로 인간들에게 생사화복을 안겨 준다는 시각은 진실이 아닙니다.

 

‘오디세이아’ 속에서 귀향 여정과 귀향 방해 요소들은 주요한 모티프입니다. 그리고 책 전체 24권 중 무려 12권에 걸쳐 전개되는 귀향 이후의 사건들의 의미는 사실상 제우스와 아테나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이타케’는 그저 오디세우스가 귀향해야 할 물리적인 장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신적 통치와 공의(公義)가 살아 숨 쉬는 이상적인 곳’이기도 하지요. 이런 작품 속 상황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본향을 그리워하는 보편적 갈망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줍니다. 늘 아쉬움이 남는 고향 방문이 보여 주듯, 그 갈망은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물리적인 고향이나 부모님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시원적(始原的)인 본향에 대한 갈망입니다. ‘신적 통치와 공의(公義)가 살아 숨 쉬는 이상적인 곳’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합니다. 비록 현세에서 누리는 삶의 요소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것이기에 그것들을 흡족하게 누리는 게 우리의 분복이지만, 그것들에 함몰되지 않고 ‘생명의 시원’을 찾고 구하며 갈망하는 여정을 지속해 가는 게 인간의 도리입니다. 현세의 달콤한 것들을 즐기는 데만 몰입하는 인생들을 향해, 호메로스는 그러한 삶은 돼지의 삶에 불과하고 뼈와 살이 썩어가는 과정이라고 교훈해줍니다. 그리고 과학지상주의에 사로잡혀 본향에 대한 갈망을 상실한 현대인들에게, 아인슈타인은 ‘생명의 시원’을 모색하는 여정을 통해 현세의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그 갈망의 공간을 채워가야 한다고 권고해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