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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만 낭만주의의 잔혹한 결말,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8. 30.

무늬만 낭만주의의 잔혹한 결말,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올해 장마는 역대 최장 기간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지난 6월 24일부터 8월 14일까지 무려 54일간 지속되었으니까요. 기상청에 따르면 2018년부터 우리나라 전역의 날씨가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했다고 합니다. 장마의 일차적 원인은 애당초 북상해서 소멸되었어야 할 장마전선이 중국 동북부 지역에 눌러앉은 찬 공기에 막혀 우리나라 중부지역에 정체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생긴 원인은 해수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북극의 얼음이 빠른 속도로 녹고, 그 결과 대기 중 제트기류 흐름이 약해진 점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지구 온난화(Greenhouse effect)가 근원적인 원인이라는 얘기입니다. 장마와 관련된 변인들이 너무 많아 장마에 대한 패턴을 다루기가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번 장기간의 장마와 같은 기상 이변이 온실 효과의 결과로서 지구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랩니다.

 

똑같은 차원의 이야기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게도 적용됩니다. 그 바이러스의 일차적 원인(숙주)은 박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바이러스가 박쥐로부터 인간에게 전달된 경로는 현재까지 불분명합니다. 박쥐에서 다른 동물로 숙주를 바꾼 후에 그 동물이 인간에게 전염시켰을 가능성도 높기 때문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런 과정들이 죄다 인간이 동물의 생태 지역까지 침입하면서 자신들의 삶과 사업의 장을 무한정 확장하는 중에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는 그 일차적 원인과 근원적 원인이 다른 경우가 숱하게 존재합니다. 후자를 고려하지 않고 전자만 논의하는 것은 마치 병의 근본 원인을 도외시한 채 그 증상만을 다루는 의학적 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의학적 시도가 결코 환자의 치유를 보장할 수 없듯이, 근원적 원인을 도외시하는 어떠한 논의도 우리 삶을 진전시킬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인문학, 특히 문학은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 세계를 통해서 어떤 개인의 삶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해 그 근원적 원인을 천착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실을 존중하면서도 그 사실 배후에 존재하는 진실을 캐내는 작업인 것이지요. 이러한 문학적 기여를 프랑스 작가 귀스타프 플로베르(1821-1890)의 대표작인 “보바리 부인”을 통해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작품의 한글 번역문은 '웅진씽크빅'<이봉지 역>의 것을 인용함)

 

-“보바리 부인” 줄거리-

평범한 학력을 가진 의학생 샤를 보바리는 준의사 시험에 겨우 합격한 후 북 프랑스 루앙 근교 마을에서 정착한 다음 연상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병원을 개업합니다. 그 지역에 사는 부유한 농가 주인인 루오 영감을 치료해 주면서 만난 그의 딸 엠마에게 연정을 품은 그는 루오 영감을 잘 돌보아 줌으로써 그와 그녀의 환심을 사서, 결혼한 지 14개월 만에 아내와 사별한 후에 엠마와 결혼하게 됩니다. 집안에서 외동딸로 자란 엠마는 수녀원의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낭만주의 문학, 그것도 갖가지 감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소설에 푹 빠져 지내던 정열적인 여성입니다. 문학 속에 그려진 낭만적인 연애에 대한 환상을 품고 매혹적인 결혼 생활을 기대한 엠마는 샤를과의 결혼을 통해 펼쳐진 단조로운 일상과, 수영, 검술, 승마도 할 줄 모를 뿐 아니라 별다른 매력도 없고 둔감하기만 한 남편과의 관계에서 불만을 품게 됩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후작이 베푼 무도회에 참석하고 난 후 엠마는 자신의 일상생활에 더 깊은 염증과 권태를 느끼며 우울한 나날을 보낸 탓에 신경성 질환까지 얻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한 샤를은 그녀를 위해 공기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용빌이라는 곳으로 이사 가기로 결심합니다. 이사 올 때 임신 중이었던 엠마는 그곳에서 딸 베르트를 낳습니다. 이전에 초대받아 갔던 후작의 파티에서 그 부인이 어떤 젊은 여자를 그 이름으로 부르던 게 기억나서 그 이름을 택합니다. 그곳에서도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지루한 생활을 하던 중 그 지역 공증인의 서기 직책을 맡고 있는 레옹과 만나 연정을 느끼게 되지만, 서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상태에서 레옹은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떠나 버립니다. 이런 상황 중에 바람둥이 홀아비 농장주인 로돌프가 나타나 엠마를 교묘한 말로 설복하여 엠마는 그와 불륜의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밀회를 지속하여 관계가 진전되면서 더욱 대담해진 엠마는 로돌프에게 함께 달아나자고 조르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너무 열중하는 게 부담이 되기도 하고 두려움까지 느낀 로돌프는 그녀를 가차 없이 버립니다.

 

불발로 끝난 연애로 상심한 엠마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가 다시 일어날 즈음에 루앙의 한 극장에서 파리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레옹과 재회하게 됩니다. 이전에 품고 있던 애정이 다시 살아나면서 두 사람은 뜨거운 애정 행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 이 관계를 맺어 가는 중에 엠마는 데이트를 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쓰게 될 뿐 아니라 빚까지 지게 됩니다. 돈을 빌려 준 고리대금업자 뢰르의 간계로 샤를의 재산까지도 물래 처분해 버린 후에도, 뢰르의 간교한 수작으로 어음을 돌려 막다가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로돌프와 레옹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감지한 엠마는 비소를 먹고 목숨을 끊어 버립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샤를은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로돌프와 레옹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발견하고는 아내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들의 처지를 동경하면서 더욱 자포자기에 빠지게 되어 이내 숨을 거두고 맙니다. 엠마의 아버지 루오 영감도 중풍에 걸려 반신불구가 되며 외동딸 베르트를 맡은 외할머니도 그 해에 죽습니다. 베르트는 다른 한 친척 아주머니가 맡아 키우게 되지만 그녀가 가난한 탓에 베르트를 방직공장에 보내 생활비를 벌게 합니다. 한편 레옹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로돌프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샤를이 죽은 후 용빌에서 개업한 의사가 세 사람이나 되었으나 그 지역 약제사 오메의 공격으로 죄다 실패합니다. 그리고 의사 면허증도 없이 의료 행위를 암암리에 감행하면서 승승장구한 그는 약삭빠르게 처신하여 수많은 고객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당국도 그의 뒤를 봐주고 여론도 그의 편이었기에 결국엔 꿈에도 그리던 레지옹 도뇌르 훈장[프랑스 최고 훈장]을 받게 됩니다.

 

-사실적 관찰 차원-

소설 “보바리 부인”과 그 주인공 엠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지금까지 “보바리 부인”을 해석한 것으로서 대략 세 가지 시각이 존재합니다. 첫째로 사실적 관찰 차원에 근거한 것으로서 이 작품에서 제시된 엠마의 언행과 그 결말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녀를 이해해 보려는 시각입니다. 둘째는 사상적 진단 차원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엠마의 내면세계, 즉 그녀의 감성과 심리 상태와 그 전개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그녀를 독해하려는 시각입니다. 셋째로 영적 분별 차원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엠마의 영적 상태와 신앙을 염두에 두면서 그녀를 해석하려는 시각입니다. 우선 사실적 관찰 차원을 먼저 다루어 보겠습니다.

 

엠마를 그저 간통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플로베르가 ‘시골 여자의 간통 이야기’를 미화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1856년에 이 작품이 발표되자마자 진행된 재판에서 당시 왕정 검사대리가 기소한 내용이 바로, 유부녀가 거리낌 없이 남자를 유혹할 뿐 아니라 그런 여인의 종부성사를 장님의 천하고 상스러운 노랫소리가 화답하는 등 이 작품이 간음을 미화한다는 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꼼꼼히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주장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간통을 미화하기보다는 오히려 간통에 복잡하게 얽힌 관계와 불륜 당사자 간의 애증과 불신과 배신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묘사한 탓에 간통할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도 그 마음을 돌리게 만들 정도니까요.

 

예컨대 엠마가 레옹과 연애하면서 함께 섬으로 밀월여행을 떠났을 때 경험한 일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비단 커튼을 드리운 역마차를 타고” 먼 나라로 떠나야 했지만, 그 대신 “저녁이 되면 지붕이 달린 작은 배를 타고 섬에 가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그 섬에서 돌아오는 배 위에서 엠마는 낭만주의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인 라마르틴의 대표작 “호수”를 가사로 한 노래를 부르게 되지요. 이전에 라마르틴이 부르제 호수에서 열 살 연상의 유부녀 쥘리와 함께 즐긴 뱃놀이를 추억하며 만든 이 시를 노래하는 동안 엠마는 그가 누렸던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꿈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레옹이 배 밑바닥에서 새빨간 명주 리본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요전에 뱃놀이를 했던 사람들의 것”이었고 “케이크며 샴페인에다 코넷까지 가지고” 온 사람들 중에 “짧은 콧수염을 기른 키 큰 미남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아돌프, 혹은 도돌프였다고 뱃사공이 일러주지요. 아름답고 진실한 사랑을 꿈꾸고 있던 엠마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진실한 사랑을 맹세한 후 잔인하게 배신해놓고도 엠마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다른 여자들과 신나게 놀아난 로돌프의 실상을 접한 후 엠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엠마는 바로 그때 자기와 함께 배를 타고 밀월여행을 하던 레옹도 언젠가는 자기를 떠나갈 것을 엿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소설은 결코 간통을 미화하고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간통의 결과로 한 가정이 잔혹하게 파탄 나는 상황을 접하면서 어느 누가 이 작품이 간통을 미화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을까요? 간통으로 인해 한 가정이 파멸하여 부부가 죽음을 당할 뿐 아니라 외동딸이 홀로 남아 어린 나이에 공장에 취직하여 돈을 벌어야 하는 막다른 골목까지 몰리는 상황에서 이 소설은 막을 내립니다. 감상적이고도 몽상적인 세계에 살던 한 여인이 현실 생활을 도외시하고 가정과 일상사로부터 도피하여 불륜의 관계에 몰입하는 동안 그 가정이 잔혹하게 무너지지만 그 정부들은 건재한 상황을 접하면서 간통에 매력을 느끼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을 그런 불륜 관계를 도덕적으로 경고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소설을 읽어 가는 중에 ‘엠마가 왜 이럴까’, ‘그렇게 해선 안 되는데’, ‘최소한 이렇게 하는 게 바람직한데’라고 그녀에게 직접 일러주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던 게 저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래리 앨럼스가 지적했듯이 간통을 미화한다는 시각이나 이러한 시각도 풀로베르 소설의 핵심을 꿰뚫지 못합니다. 그가 “보바리 부인”에 대해서, “나는 영혼의 전형에 시선을 맞추고 있다.”라고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적은 엠마를 해석하는 데 있어 좋은 참고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플로베르는 어떤 전형적인 영혼을 창조하려고 시도했을까요? 엠마 보바리의 모델은 실제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루앙 근교에서 살았던 젊은 의사 들라마르(플로베르 아버지의 제자)의 아내였으나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에 권태를 느껴 성사될 수 없는 사랑에 목말라하다가 많은 빚을 진 뒤 27세의 나이로 음독자살한 델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지만 이 델핀을 형상화하던 플로베르는 뜻 밖에도, “나의 가엾은 보바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프랑스 곳곳의 작은 마을에서 괴로워하며 울고 있다.”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불륜 여성의 존재를 그린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전원에 살고 있던 많은 평범한 여성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근거가 되는 대목입니다. 김화영 교수가 소개한 모리스 바르데슈의 글 한 자락이 이 전형적인 모습에 대한 이해를 돕습니다.

 

“보잘것없는 삶을 자신의 꿈으로 대치시킬 때, 자신에게 주어진 저 실망 가득한 모험들이 꿈에 의해 다른 모습을 띠게 될 때, 그리하여 그런 모험들이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꼴로 보이게 될 때, 그녀가 현실에다가 거짓 옷을 입혀 로돌프나 레옹이라는 인물을 분장시킬 때 (…) 엠마는 단순히 낭만적인 여주인공만이 아니라 그의 시대를 초월하는 인물인 것이다. 물론 그 여자는 그의 시대 특유의 향수 냄새에 취해 있다. 그러나 엠마는 그런 것을 멸시하는 플로베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저 싸구려 향수에 홀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엠마는 (...) 그의 시대를 초월하는 인물’이라고 지적할 때의 ‘시대’란 낭만주의 시대를 일컫습니다. 이성과 합리성을 절대화하는 시대 상황을 거부하면서 시작된 낭만주의는 플로베르뿐 아니라 당대의 모든 이들이 영향을 받은 시대 사조였습니다. 이신론이나 자연과 인간에 대한 기계론적인 견해는 거부하지만 이성과 합리성에게 올바른 자리를 부여하고, 이기주의의 만연을 부정하는 대신 개성을 강조하며 산업 혁명으로 인한 사회 변화보다는 중세의 공동체나 초자연적인 요소에 대한 갈망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으려고 시도한 사상적 흐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낭만주의가 그 이상과는 달리 비현실적이거나 환상적인 것들을 동경하고 원망(願望)하는 불건전한 사회적 분위기를 낳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플로베르는 무책임한 몽상가나 이상주의자를 혐오하게 됩니다. 엠마가 수도원 기숙학교에서부터 영향받은 것은 무늬만 낭만주의였습니다. “마담 보바리. 그건 바로 나야.”(Madame Bovary, c'est moi.=Madame Bovary, it's me.)라고 플로베르가 읊었던 것은 이렇게 엠마와 같이 왜곡된 낭만주의에 물들어 있던 자신을 대표 격으로 가리키면서 당대에 경종을 울리려 했던 의도가 담긴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바리 부인”은 낭만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19세기 중엽에 형성된 문학 전통인 사실주의(Realism)의 백미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발자크, 스탕달, 엘리어트, 디킨스, 트웨인 등의 작가들이 포진하고 있는 문학 전통이지요. 그는 작품 속에서 자연의 특이한 성격을 재현하는 데 전념할 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랑송에 의하면 그는 심지어 자기 소설이 객관적이고 몰개성적이며 ‘무감동적’이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쌩뜨 뵈브가 지적한 대로, “이 소설가[플로베르]는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것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지 관찰하고 드러내고 모든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며 그의 어느 옆모습조차도 소설의 어느 귀퉁이에도 내보이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전적으로 초작가적입니다.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상당한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조르주 상드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는 대로입니다. “나는 소설가가 이 세상의 사물들에 관해서 자기 의견을 나타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나는 사물들을 내 앞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나에게 진실인 것같이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데 그칩니다. (...)”

 

플로베르의 이러한 사실주의를 드러내 주는 장면 묘사를 두 가지만 들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샤를이 루오 영감을 치료해주고 그의 집을 드나들던 시절 한 장면입니다. 어느 날 그 집 부엌에 들어갔다가 엠마가 혼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바느질을 하던 그녀는 시골 풍습대로 그에게 마실 것을 권하면서 샤를이 마실 잔에는 리큐어[알코올에 설탕, 식물, 향료 등을 섞어 만든 혼합주]를 가득 따르고 자기 잔에는 따르는 시늉만 하고는 함께 즐겁게 마십니다. 바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그녀는 다시 의자에 앉아 바느질감을 집어 들었다. 흰 면양말을 깁는 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샤를도 잠자코 있었다. 문 밑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와 타일 위에 먼지가 날렸다. 샤를은 그 먼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맥박 뛰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마당에서 알을 낳은 암탉이 꼬꼬댁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엠마는 때때로 두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런 다음, 난로의 장작 받침쇠 손잡이에 대고 손을 식혔다.”

 

엠마도 샤를도 잠자코 있지만 이 묘사 속에 서서히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수줍게 사랑하는 두 사람의 내면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나요? 문 밑으로 새어 들어 온 바람이 타일 위의 먼지를 날리는 순간을 포착할 정도로 샤를은 꼼짝하지 않고 있지요. 머릿속에 뛰는 맥박 소리를 엠마가 눈치라도 챌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엠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암탉이 멀리서 알 낳는 신호 소리를 듣고 알아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지요. 술을 제대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뺨에는 열이 올라 손바닥으로 열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손바닥마저 뜨거워 식혀야 할 정도였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 장면 후에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그 두 사람이 엠마의 방으로 올라가 자연스럽게 서로의 지난 삶에 대해 나누는 때입니다.

 

“그녀는 겨울철만이라도 도시에 나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날이 길어서 여름철의 시골 생활이 더 지루하긴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목소리는 내용에 따라 낭랑하고 높다가, 갑자기 우울해지며 띄엄띄엄 말꼬리를 흐리기도 하고, 급기야 혼잣말 같은 속삭임으로 변하기도 했다. 또, 순진한 눈을 크게 치뜨며 쾌활하게 말하다가 어느새 눈을 반쯤 감고 눈동자에는 권태를 가득 담은 채,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여기에는 엠마의 목소리와 눈의 다양한 변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낭랑하고 높은 목소리에서 말꼬리가 흐려지는 과정을 통해 혼잣말 같은 속삭임으로 변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감상적이면서도 불안정한 그녀의 내면세계가 느껴지지 않는지요? 눈도 마찬가지이지요. 크게 치뜬 순진한 눈초리에서 반쯤 감은 눈에다 권태를 가득 담은 눈동자로 급변하는 표정은, 이상적이고도 환상적인 요소로 인해 쉽게 격앙되었다가 이내 그것에 싫증내고 권태감에 빠져들어 다른 자극 거리를 찾는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운명처럼 형성된 그녀의 몽환적 성격과 권태감에 쉽게 젖어드는 기질이 이 묘사 속에 엿보인 것이지요.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사실적 관찰 차원에서 보더라도 이 소설은 단순하게 간통에 대한 미화나 간통에 대한 경고를 그린 것이 아니라, 왜곡된 낭만주의에 경도된 한 인물의 인생을 “시의 정확성으로”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한 개인과 한 사회가 자기 성찰을 꾀하도록 격려하는 작품으로 제게는 다가옵니다. 래리 앨럼스가 지적한 대로, “이 작품의 힘은 물리적인 것에 대한 플로베르의 충실한 관찰에서 나옵니다. 그는 이것을 통해 정신적인 것을 신비롭게 비춰 줍니다.”

 

-사상적 진단 단계-

이제는 엠마의 내면세계, 즉 그녀의 감성과 심리 상태와 그 전개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그녀를 독해해 보겠습니다. 사실상 이 작품은 엠마의 기질과 성격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데 그녀의 이런 측면들은 수녀원 기숙학교에서 경험한 것에 의해 규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15세의 엠마가 그곳에서 경험한 것이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당시 그 수녀원에는 왕년의 귀족의 후예로서 침모를 살러 오는 한 노처녀가 앞치마에 소설책을 숨겨 와서 학생들에게 빌려주곤 했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한결같이 사랑, 사랑하는 남녀, 쓸쓸한 외딴집에서 죽어가는 박해받는 귀부인, 역참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 페이지마다 질주하다 지쳐 쓰러지는 말들, 어두운 숲, 마음의 혼란, 맹세, 흐느낌, 눈물과 키스, 달빛 아래 떠 있는 조각배, 숲 속에서 우는 밤꾀꼬리, 사자처럼 용맹하고 어린양처럼 유순하고 더할 나위 없이 덕성스럽고 항상 잘 차려입은, 눈물을 철철 흘리는 신사들”이었습니다. 엠마가 그런 “도서 대여점의 헌책 먼지로 손을 더럽힌” 후에, “허리가 길게 내려오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 성주들처럼 오래된 저택에 살고 싶어 한 것”이나 “뾰족한 지붕의 클로버 무늬 장식 아래 매일같이 서서 돌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괸 채 저 먼 들판으로부터 흰 깃털 장식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검은 말을 탄 기사를 기다리고 싶어 한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까? 이런 환경상의 경험이 바로 “보바리즘”(Bovarism) 탄생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쥘 드 고티에에 의하면, “보바리즘”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능력”으로서 환상이 자아내는 병입니다. 현실적인 자아의 모습을 직시하기보다는 환상이 낳은 색안경을 낀 채 현실을 바라봄으로써 현실의 실상을 변형시켜 버리는 시도인 셈이지요. 바로 이런 측면이 “보바리 부인”을 “숙명의 소설, 실패와 환멸의 소설로 만드는 요인이 되는 부분”이라고 김화영 교수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환상에 근거한 시선으로 인해 타자가 변형될 뿐 아니라 자기까지도 변형됩니다. 자기 눈앞에 펼쳐 진 현실에 대해 끝없는 불만이 터지는 것은 예상된 시나리오 중 한 가지입니다. 그리하여 볼품없는 남편과 권태로운 시골 생활과 그런 권태의 환경 속에 매몰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매도합니다. 동시에 그녀는 ‘여기’의 현실이 아닌 ‘저기’, 즉 무도회가 열리는 성관(城館), 화려하고 아름다운 귀부인들과 배우들과 문인들이 거니는 파리, 온갖 새로운 경험과 자극을 제공해 줄 몽상의 세계에서 사는 행복한 자기 자신을 꿈꿉니다. 작품 속에서 언급된 대로, 엠마는 “그녀에게 있어 행복이란 어떤 특정 지역에서만 자라는 식물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지역이 아니면 잘 자랄 수 없었다.”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몽상의 세계를 현실의 세계로 만들려는 시도가 늘 실패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엠마는 자기를 파멸시키는 단계에 이르도록 끝까지 몰아붙입니다. 플로베르가 이 작품이 그의 “심리 과학의 집성이 될 것이며 오직 그런 면에서 독창적인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보바리즘 측면을 염두에 둔 게 아닌가 합니다.

 

한편으로 이봉지 교수는 이 작품을 “낭만주의에 대한 잔혹한 패러디”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모든 중요한 사건, 즉 사랑, 결혼, 불륜, 죽음이란 영역에서 엠마의 기대가 잔인하게 배반당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더구나 엠마가 죽는 장면에서 낭만주의의 주요한 특성 한 가지, 즉 종교성과 낭만적 죽음이란 환상마저 파괴함으로써, 플로베르가 낭만주의에 대한 해부를 완성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어떠한 종교적 위로도 제공하지 않은 죽음 장면에서, 연주창에 걸린 장님의 흉악한 이미지를 하나님의 경건한 이미지와 대체함으로써 낭만주의에 대한 패러디를 극단으로 몰아갔다고 봅니다. 끝으로 숨을 거두기 직전에 엠마가 “소름 끼치도록 끔찍하고 절망적인 웃음”을 터뜨린 이유를, 자신의 삶 전체가 낭만주의에 대한 잔혹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은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그렇게 독해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우선 이 교수가 가리키는 낭만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게 문학비평의 순서라고 봅니다. 낭만주의가 과연 엠마가 실행한 대로 사랑, 결혼, 불륜, 죽음의 영역에서 현실과 몽상의 세계를 구별하지 못한 채 그저 반이성적이고 감상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조에 불과할까요? 이 교수가 그런 식으로 낭만주의를 이해했다고 믿기는 어렵지만, 그 교수의 글 속에는 다른 식으로 이해했다는 단서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낭만주의는 서구 사회를 뒤덮은 계몽주의가 인간의 이성을 우선시하면서 과학과 기계가 지배하는 사회를 지향할 뿐 인간의 감성과 상상력 및 영성을 배제하고 있을 때 반동적으로 형성된 사조였습니다. 물론 이 낭만주의도 이성주의가 밟은 전철을 따라 극단적으로 흐른 측면이 있었으나, 인간과 사회를 이해함에 있어 감성과 상상력 및 영성의 역할과 기능을 무시하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일 리가 없습니다. 특정 낭만주의 문학 작품과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가 엠마라는 한 인물에게 미친 영향력과 그 결과를 두고 전반적인 낭만주의 문학 작품과 신학을 폄훼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엠마는 무늬만 낭만주의에 물든 당대인들의 전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소개된 소위 낭만주의 책자에 지나친 영향을 받아 자기 욕망이 이끄는 대로 그 욕망 충족에만 목매었을 뿐, 낭만주의가 추구했던 이성과 감성의 균형, 건전한 상상력의 고양 및 초자연적인 세계를 갈망하는 영성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결말은 개인과 가정 차원에서의 완전한 파탄이었습니다. 이런 결말은 장차 그런 사회 차원에서의 퇴락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엠마의 경우와 정반대에 있는 독자나 신앙인들도 얼마든지 존재했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됩니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성을 올바로 자리매김하고 감성과 상상력을 존중하면서 초자연적인 영적 세계에 대한 갈망을 현실 생활 속에 아름답게 구현한 인물들 말입니다. 낭만주의의 긍정적인 영향은 당대의 인문학과 예술과 종교를 통해 드러난 그 풍요로운 열매로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컨대 낭만주의 운동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시작되었다고 보면(로널드 웰즈), 이 시대를 대표하는 빅토르 위고, 월터 스코트(보바리 부인에서 인용되는 작가), 윌리엄 워즈워스, 랄프 왈도 에머슨,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같은 문학인이나, 헥토르 베를리오즈, 루드비히 폰 베토벤, 프레데릭 쇼팽, 니콜로 파가니니와 같은 음악인들의 혁혁한 작품들과 그 영향력은 당대뿐 아니라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차갑고’, ‘형식적인’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에 반동적으로 형성된 19세기의 종교적 부흥 운동, 즉 존 헨리 뉴먼의 글들과 영국 가톨릭의 부흥이나 감리교의 부흥 운동이 낳은 영광스러운 열매는 당대 사회를 혁신했을 뿐 아니라 현대 사회를 예비해 주지 않았나요? 제가 자주 인용하는 C. S. 루이스도 사실상 이런 낭만주의 시대에 크게 빚진 작가입니다. 시대적으로는 약간 차이가 나긴 하지만 낭만주의 계통의 작가인 에드워드 스펜서, 존 번연, 존 밀턴, 노발리스, 조지 맥도날드, 윌리엄 모리스의 토양 속에서 초자연적인 실재를 갈망하는 루이스가 태어났으니까요.

 

이런 논의와는 별도로 엠마야말로 모든 소수인들의 대표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예컨대 정여울 작가는, 우선 엠마를 “역사상 온 세상의 욕을 가장 많이 먹은 작품 속의 주인공일 것”이라고 진단하면서, 편견 없이 이 소설을 읽으면 보바리즘은 엠마와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보바리즘에 대한 정확한 의미 규정도 하지 않은 채로, 그 용어가 엠마에 대한 ‘혐오’를 표현한다고까지 강변합니다. 누구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오해만 받던 사람을 온 세상이 공감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문학의 힘이라면서, 플로베르가 바로 그 일을 했다고 합니다. 즉 몰이해의 피해자인 엠마를 구원하여 “그렇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 이해받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 거듭났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그리고 “마담 보바리. 그건 바로 나야.”라고 플로베르가 언급한 것도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던 엠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설파합니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정 작가는 플로베르의 이 외침을 패러디해서, “내가 바로 퀴어(queer)다. ‘내가 바로 마담 보바리다’라는 그의 외침은 내 마음속에서 이렇게 변형된다. 내가 바로 가장 비참한 마이너리티다. 내가 바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참혹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단독자다.”로 독해하는 단계까지 진전합니다. 정 작가는 퀴어란 용어가 단지 성소수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며 “이 세상에서 차별받고 오해받으며 소외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요.

 

엠마가 “역사상 온 세상의 욕을 가장 많이 먹은 작품 속의 주인공일 것”이라는 점이나, 몰이해하는 대상을 세상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 문학의 힘이라는 정 작가의 주장에는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엠마가 보바리즘과 거의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나 “마담 보바리. 그건 바로 나야.”라는 플로베르의 고백을 소수자들에게까지 확대시키는 변형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우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능력”으로서 환상에 근거한 색안경으로 현실을 변형시켜 버린 채 현실 도피적인 삶을 사는 보바리즘이 엠마의 삶과 별개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과연 무엇일까요? 작품 속에 묘사된 내용에 충실하자면, 엠마의 삶 속에서 환상과 현실이 중첩되거나 혼동되는 현상과 권태감과 현실 도피가 다반사로 드러나는 현장의 사례는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인데요. 예컨대 ‘권태감’이란 단어는 엠마의 삶을 여는 열쇠 중 하나인데 이 단어와 연관된 상황을 몇 가지 소개해 보겠습니다.

 

■“‘맙소사, 내가 왜 결혼을 했을까?’ 모든 게 운에 달렸으니 다른 남자를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녀는 일어나지 않은 그 사건, 달라졌을 생활, 미지의 남편에 대해 상상했다. 어떤 남자라도 이 사내와는 달랐을 것이다. 미남에다 재치와 품위와 매력을 겸비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녀원 친구들은 모두 그런 남자와 결혼했을 것이다. 그녀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도회지에 살면서 거리의 소음과 극장의 웅성거림과 무도회의 광채를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가슴이 터질 듯 관능이 만개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어떤가? 그녀의 삶은 북향의 다락방처럼 추웠고, 가슴속에는 소리 없는 권태가 구석마다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권태로운 시골, 우매한 소시민, 평범한 생활 등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은 어쩌다 잘못해서 그녀가 걸려든 특수한 예외일 뿐 그 너머에는 가없는 축복과 정념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욕망에 사로잡힌 그녀물질적 사치가 주는 쾌감마음속의 희열을 혼동했고, 우아한 습관섬세한 감정을 구별하지 못했다. 인도의 식물이 그렇듯 사랑 또한 특별한 토양과 기후가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그때부터 레옹에 대한 추억은 그녀의 권태로운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그것은 러시아의 초원에서 나그네들이 눈 위에 버려두고 간 모닥불보다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첫 번째 인용문에 잘 드러나 있는 대로 엠마가 일상에서 느낀 권태감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녀의 내면세계와 직결됩니다. 충직한 남편 샤를이 곁에 있지만, ‘일어나지 않은 그 사건, 달라졌을 생활, 미지의 남편에 대해 상상’에 끝없이 몰두합니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처럼 자신의 일상을 ‘권태로운 시골, 우매한 소시민, 평범한 생활’로 치부할 뿐, 끊임없이 일상 너머에 있는 ‘가없는 축복과 정념의 세계’를 향해 치닫기만 합니다. 건전한 분별력을 상실한 채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세 번째 인용문에서는 현실 도피하여 쟁취할 뻔한 불륜 관계(레옹이 파리로 떠난 후의 상황)의 추억을 권태로운 생활의 중심으로 삼아 거세게 불태우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런 현상이 보바리즘이 아니라면 그것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다음으로 엠마가 소수자나 퀴어 집단을 대표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시각은 납득하기 힘든 논리적 비약이라고 봅니다. 퀴어라는 용어에 대해 정 작가가 규정하는 의미는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지만, 당대의 보편적인 사람의 전형으로 플로베르가 제시한 엠마를, 성소수자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 차별받고 오해받으며 소외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대표 격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핵심을 놓친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정 작가가 언급하는 소수자들은 주로 선천적이고도 생득적인 요인에 의해 그렇게 규정된 존재들이지만, 엠마는 오히려 주로 환경적인 요인에 영향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엠마의 내면세계에 대한 사상적인 진단을 시도하자면 우선 엠마는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고 일상에 대해 권태감을 느끼며 자기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현실을 도피하는 보바리즘에 물든 전형적인 존재입니다. 설령 엠마를 낭만주의에 대한 파괴적 패러디의 주인공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늬만 낭만주의에 대한 공격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난 역사를 통해 인문학과 예술계가 낭만주의에 진 빚이 크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한발 더 나아가 엠마가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퀴어들을 대표하는 존재로 읽는 파격적인 독해 방식이 제시되긴 했지만, 소설 내용에 근거한 해석으로서는 지지하기 어려운 비약적인 독법이라고 봅니다.

 

-영적 분별 단계-

셋째로 엠마의 영적 상태와 신앙을 염두에 두면서 영적 차원에서 그녀를 이해해 보겠습니다. 먼저 보바리즘이란 용어를 한번 더 상고해 보겠습니다. 그 용어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면서 급기야 현재 의학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세겐의 의학 사전”(Segen's Medical Dictionary)에 의하면, 보바리즘은 아래와 같이 정의됩니다.

 

“보바리즘=상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이면서도 성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자아상으로서, 아주 일반적으로 나이가 든 독신 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자아상 속에서 그들의 판타지적인 세상이 실제 세상과 중첩되면서 그들의 마음속에서 혼동을 일으킨다. 이 용어는 또한 결혼한 여인이 자신의 결혼 생활의 권태감과 의무에서 도피하도록 만드는 심리적 충동을 일컫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Bovarism=An imagined or unrealistic self-image with sexual overtones, which most commonly affects older single women, in which their fantasised world overlaps and becomes confused in their minds with the real world. The term has also been used to refer to the drive by a married woman to escape the boredom and obligations of her married life.)

 

이 정의 중에 ‘결혼한 여인이 자신의 결혼 생활의 권태감과 의무에서 도피하도록 만드는 심리적 충동’이란 표현은 엠마의 결혼 생활을 꿰뚫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왜 엠마는 항상 안정된 일상생활에 권태감을 느끼면서 그 일상으로부터 도피하려고만 할까라는 점에 의문을 품은 게 저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일상의 권태감에서 도피하여 경험한 불륜의 관계가 그녀에게 행복을 선사해 준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예컨대 극적으로 다시 만난 레옹과 갈망하던 연인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정열에 몰두하고 돈도 펑펑 써대는 화려한 삶을 누렸어도 그녀는 불만족스럽기만 합니다. 아래의 내용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여하튼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고, 과거에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왜 인생은 이렇게 불만족스러운 것일까? 무엇인가에 기대면 곧바로 썩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만일 어딘가에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면, 열정과 세련을 동시에 갖춘 가치 있는 인간이 있다면, 하늘을 향해 청동 리라로 애절한 결혼 축가를 연주하는 그런 천사 같은 외모에 시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녀라고 그런 사람을 발견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아! 어림없는 일이야! 게다가 애써 찾을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게 거짓일 뿐! 미소 뒤에는 항상 권태의 하품이 감춰져 있고, 기쁨 뒤에는 저주가, 쾌락 뒤에는 혐오가 숨어 있으며 최상의 키스라 할지라도 더욱 큰 관능에 대한 채울 수 없는 갈증만 입술 위에 남겨놓을 뿐이다.”

 

자기 남편에게 싫증과 혐오감을 느껴 로돌프를 거쳐 현재 레옹이라는 애인을 찾아 애정을 나누고 있지만, 또 다른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 ‘열정과 세련을 동시에 갖춘 가치 있는 인간’, ‘천사 같은 외모에 시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갈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엠마의 내면세계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의 정체는 바로 탐욕인 셈이지요. 작품 곳곳에서 발견되는 대로, 자기 눈에 띄는 좋아 보이는 것을 죄다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 그녀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탐욕의 비극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는 점입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더 생기지요. 그리하여 “엠마는 결혼 생활의 모든 진부함이 간통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두 사람[엠마와 레옹]은 서로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소유의 기쁨을 백배로 늘려주는 놀라움과 경이를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그가 그녀에게 지겨움을 느끼듯, 그녀 또한 그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엠마는 결혼 생활의 모든 진부함이 간통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만둘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녀는 그런 저속한 행복에서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습관 때문에, 혹은 타락했기 때문에 여전히 그것에 집착했다. 그리고 갈수록 더 악착같이 매달리고, 너무 큰 행복을 기대하는 바람에 어떤 행복도 누리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 기대가 어긋난 것을 레옹의 탓으로 돌리고 마치 그가 배신이라도 한 것처럼 그를 원망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헤어질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파국이 오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될 테니까.”

 

이 인용문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부분은, 엠마가 불륜 관계가 허락하는 행복을 저속하다고 지적하면서 그런 행복을 좇는 데서 굴욕감을 느낀다는 점과 그러면서도 계속 그 행복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녀가 여기에서 왜 굴욕감을 느끼게 될까요? 그런 저속한 행복에 억눌리어 업신여김을 받는 노예 신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녀는 왜 굴욕감을 느끼면서까지 그 ‘저속한 행복’에 목매고 있을까요? 바로 여기서 ‘습관’ 혹은 ‘타락’이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일상을 진부하게 여기는 거듭된 행동이 불륜 관계 속에서도 권태감을 계속 느끼는 습관으로 고착되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플로베르가 타락을 부도덕한 것과 동일시한 것(“그녀는 <...> 타락하거나 부도덕한 것을 옹호하는 등 기묘한 의견을 내놓아 남편을 깜짝 놀라게 했다.”라는 문장 참조)으로 보아 엠마가 이제는 부도덕한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엠마는 일상을 하찮게 여기는 언행을 반복하면서 권태감을 부추기는 동안 점차로 부도덕한 존재로 변모하여 저속한 행복을 끝없이 탐하는 노예로 전락한 신세가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바닷물만 마셔 온 그녀의 갈증을 해소해 줄 생수는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앞에서 이봉지 교수가 낭만주의의 주요 특성 중 하나로 꼽은 초자연적인 종교성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성경에서는 탐욕을 죄의 산물로 봅니다. 그 죄란 실정법적인 의미의 범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신 혹은 하나님에게서 돌이킨 것을 의미하고, 그 결과 하나님 자리를 온갖 탐욕이 차지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우상숭배(“greed, which amounts to idolatry”-골로새서 3:5)라고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은 모두 탐욕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탐욕의 실상이 죄의 결과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 구원의 길은 자명합니다. 죄가 하나님에게서 떠나온 것을 의미하니, 그 반대로 하나님께로 돌이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마태복음 22:37)는 권면으로 밝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 길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꿰뚫는 인간 해방의 길입니다. 구약시대에 압제의 땅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인간 해방을 위해 제시해주신 십계명이, 제1계명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출애굽기 20:4)로 요약되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이 엠마의 영적 문제는 탐욕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이 작품은 시사해 줍니다. 이 탐욕에서 더 자극적이고 몽상적인 대상을 좇는 현실 도피적인 기행이 연출됩니다. 자기가 온 세상의 주인인 것 같아도 실상은 그 탐욕의 노예의 삶에 불과합니다. 초자연적인 종교성과 연관 짓자면 그녀는 신 혹은 하나님을 벗어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탐욕의 종으로 전락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봉지 교수가 지적한 대로 플로베르가 그녀의 임종 시에 어떠한 종교적 위로도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까? 그녀는 하나님을 믿는 시늉은 했으나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수녀원 기숙학교에 있는 동안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며칠 동안 몹시 울면서 자기가 죽은 후 어머니와 함께 묻어달라는 둥 여러 가지 감상적인 주문을 해댔지만, 죽음이나 내세와 연관된 진정한 신앙적 경험을 누리면서 신앙의 성숙을 꾀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 힘없고 파리한 삶의 이상에 단번에 도달한 데 그녀는 내심 만족했다. 그래서 그녀는 몽상에 빠져들어 라마르틴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호수 위의 하프 소리를 듣고, 죽어가는 백조의 노래, 낙엽 지는 소리, 순수한 처녀들이 승천하는 소리,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이런 것에 싫증을 느꼈지만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처음에는 타성 때문에, 나중에는 허영심 때문에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진정되었음을 깨달았다. 미간에서 주름이 사라졌듯 마음속 슬픔도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즉 죽음과 연관하여 이런저런 주문을 함으로써 자기가 볼 때 그럴듯하게 보이는 ‘힘없고 파리한 삶의 이상’에 도달한 데 대해 만족해하면서 진정한 신앙 체험과는 무관한 ‘몽상에 빠져들어’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것들에만 심취하는 모습만 반복했을 따름입니다.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했지만, 성경 말씀이나 설교자를 통해 들리는 신의 음성에 귀 기울인 게 아니라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인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자연을 통해서도 신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경우는 호수 위의 하프 소리, 죽어가는 백조의 소리, 순수한 처녀들이 승천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과 같은 감상적이고도 몽상적인 수준의 일시적 감흥에 불과합니다. 그녀가 품고 있던 허탄하고 실체 없는 영성의 단면을 보여 주는 실례이지요. 이런 활동을 하는 중에도 그녀는 싫증을 냅니다. 그녀의 습관적 권태감의 역사는 이토록 깁니다. 그저 타성으로 밀어붙이고 허영심으로 버텼을 뿐입니다. 이런 그녀가 기숙사에서 나간다고 했을 때 수녀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가사 때문에 음악을 사랑했고, 정념을 자극하기 때문에 문학을 사랑한 그녀”가 “신앙의 신비 앞에서 반항”한 것은 당연했을 뿐만 아니라, “열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실제적인 그녀의 정신에 있어 교회에 대한 사랑은 교회를 장식한 꽃에 대한 사랑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부재하고 불경건한 삶으로 일관한 엠마가 죽기 직전에 “소름 끼치도록 끔찍하고 절망적인 웃음”을 터뜨렸다고 해서, 어떻게 그런 행위가 ‘자신의 삶 전체가 낭만주의에 대한 잔혹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을 일러 주는 단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낭만주의의 ‘낭’ 자도 몰랐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엠마가 비극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 원인을 영적 차원에서 고찰해 보면, 그 일차적인 원인은 결혼 생활에 대한 권태감과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의무를 도외시하는 고질적인 습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그것들 배후에 똬리 틀고 있는 탐욕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신 혹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영적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영혼을 지어 주신 하나님의 존재의 자리에 온갖 탐욕이 차지하게 된 형국이지요. 밀폐된 진공 상태에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반드시 공기가 비집고 그 틈새로 들어오듯이, 하나님을 몰아낸 영혼에는 반드시 우상적인 존재가 비집고 들어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 속 카나리아의 경고-

잠수함의 승무원이었던,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잠수함 속에서 토끼의 임무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구식 잠수함에 태운 생명 지킴이였던 토끼가 호흡 곤란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산소와 수압 같은 외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토끼에게 탈이 생긴 것은 잠수함 내 공간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경고가 발령된 셈이었지요. 이런 경우는 카나리아가 탄광의 생명 지킴이 역할을 감당한 것과도 유사한 상황입니다. 카나리아가 노래를 멈추면 갱도 안에 유독가스가 가득 찼다는 증거가 되었으니까요.

 

우리 영혼 속에도 토끼나 카나리아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존재할까요? (영적) 생명에 위급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해 주는 생명 지킴이 말입니다. “보바리 부인”을 읽으며 깨닫게 된 것 중 한 가지가 바로 “권태감”이라는 영적 경고 신호입니다. 어느 의미에서 보자면 권태감은 우리 영혼의 용종입니다. 그 존재가 인지될 때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암으로 발전합니다. 모든 권태감이 문제라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뭔가 변화할 필요를 밝혀 주는 지표가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자신의 은사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직장이나 일감으로 인한 권태감이라면 새로운 변화의 동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도덕적, 영적 의무에 대해 권태감을 느끼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 작품 속 엠마처럼 아내로서, 엄마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과 일감에 대해 권태감을 느낀다면 그것을 인생과 영혼을 향해 비추어 주는 적신호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역할과 일감들에 대해 신선한 시각 혹은 건전한 시각을 품을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기도하고 독서나 상담 혹은 적절한 행동을 가해야 합니다.

 

제가 권태감을 느끼는 오늘이 누군가가 목 놓아 기다린 내일일 수도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기 원합니다. 이 오늘은, 찰스 데드릭(Charles Dederich)이 언급했듯이, "내 여생의 첫날"(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이요, 성경에서 거듭 예언했듯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영광스러운 날일 수도 있습니다.